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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진보를 위한 국제정치학적 전략짜기
[책동네] 로버트 콕스 <다수 문명…>에 대한 짧은 서평과 홍기빈 단상
 
황진태   기사입력  2006/02/26 [01:17]
현실주의가 만연한 국제정치경제학 깨뜨리기

도서출판 <책세상>에서 국제정치학자 로버트 콕스의 <다수 문명에 대한 사유 외>를 번역 출판했다. 국내·외의 구분을 넘어서 국제정치학계가 '현실주의'에 중독된 현 시점에서 홍기빈은 그간 닐 우드와 숀 비클러, 조나단 닛잔 등 학자들의 저서를 국내에 번역 소개하면서 국제정치경제학 아니 '지구'정치경제학으로서의 지구적 규모의 감수성과 시각을 주장해왔다.

이번 콕스의 저작을 번역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들어가는 말'에서 홍기빈은 "어째서 약소국으로서 초강대국들의 세력 균형에 휘말려 분단 체제라는 고통을 안게 된 한반도 남단 사람들이 그 이해 당사국의 하나인 미국의 이해가 철저하게 반영된 미국식 국제정치학 이론을 통해 세계를 보아야하는 것인가"라고 성토하며 "세계 질서를 바라봄에 있어서, '국익'을 내세운 국가의 시각이 아닌 평화와 진보를 희구하는 보통 사람의 시각으로 보는 국제정치학은 없을까" 물음표를 던지고 있다. 한반도에서 이 물음표에 대한 절반의 해답으로 그는 콕스를 선택했다. 

▲ 로버트 콕스 지음, 홍기빈 옮김 <다수 문명에 대한 사유 외>     © 책세상, 2006
우리가 '굳이' 콕스를 읽어야 하는 이유


번역서에서 소개하는 첫 논문은 <비판적 정치경제학>이다. '탈냉전기에도 권력구조가 변하지 않고 있다'는 급진주의 학자로 노엄 촘스키와 함께 분류되는 콕스가 촘스키 보다 국제정치학계에서 보다 확고한 입지를 다지게 된 논문이 바로 <비판적 정치경제학>이다. 논문의 시작은.

   "이론은 항상 누군가를 위하여 또 어떤 목적을 위하여 존재한다."

이 논문의 핵심적인 명제다. 원래 그대로 있어왔던 대로 실재한다는 강대국들의 지배적 패권강화를 용이하게 해준 현실주의자들에 대한 일침이 담겨있다. 이 명제를 시작으로 콕스는 현실주의를 합리화 해주는 '문제해결이론'의 입장과 이를 변혁시킬 가능성을 담지한 '비판이론'의 입장, 이 양자 사이의 교호 속에서 국제정치학을 보는 눈을 제시하고 있다.

그람시에 관하여

콕스의 저서 곳곳에서 막스 베버, 칼 폴라니, 비코 등의 다양한 학자들의 영향을 받았음을 확인 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람시가 남긴 텍스트를 미라로 만들어버리는 것보다는 그의 사유 방식을 발전시킨"부분을 들춰보자.

시민사회, 한국의 시민사회

"국가 = 정치사회+시민사회"라는 그람시의 도식은 어디까지나 당시의 이탈리아 정치지형에서 설명되어지는 것이지만 그람시나 콕스나 각 국의 다층 적인 접근자세를 주장했던 바 한국의 시민사회를 짚어보는 데 이들의 텍스트는 유효하다.

"시민 사회라는 최근의 발전 방향에 국가와 대자본의 이익이 끼여들어, 시민 사회를 사회적, 정치적 현존 지배 질서의 유지와 안정화라는 목표 달성을 위한 앞잡이로 만드는 방향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기도 하다. 지배 체제의 헤게모니 세력들이 대중 운동의 여러 요소들에 침투하여 그것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국가 지원금 때문에 비정부 조직들(NGOs)은 기존 질서에 순응하고 지배 질서의 정당성을 높여주는 쪽으로 자신들의 목표방향을 수정한다."(58쪽)  

최근 한국 시민사회에서도 대자본에 대하여 의식적인 "순응"은 아닐지언정 장하준 교수가 외국자본에 대한 우호적 태도와 주주자본주의에 긍정 일편인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의 경제 개혁론 자들에 대하여 비판했던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대자본에 대한 "순응"에 대하여 시민사회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대목이 들어있다. 

기동전·진지전 그리고 유기적 지식인

나는 예전에 홍기빈이 386세대가 그람시의 기동전·진지전 개념을 자기들 입맛에 맞게 남용했다며 비판했던 주장을 기억한다. 콕스도 당연히 기동전·진지전을 언급하고 있다.

"진지전이란 스스로 각성한 사회집단들을 장기적으로 조직하여 사회 내의 해방을 지향하는 합의된 블록으로 구축해나가는 일이다. 이러한 진지전을 통해서 다양한 사회 세력들을 조직하여 사회의 지배 권력에 도전할 만큼 강한 연대를 구축하지 못한다면 국가의 정치적 권위에 효과적으로 도전해 그것을 갈아치우는 일은 불가능하다. 진지전과 대조되는 개념은 기동전으로 이는 이러한 사회적 조직화의 근거가 마련되기도 전에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싸움이다."(68∼69쪽)

홍기빈은 87년 6월 민주화 항쟁이 그람시의 '수동혁명'으로 전락하고, 386세대가 '진지전'이란 핑계를 삼은 것에 대하여 비판적이었지만 콕스가 지적하듯이 "기동전에서 성공한다고 해도 그 승리는 아주 위태로운 것"이다. 386세대의 그 행태적인 면을 비판할 수는 있지만 심정을 공감 못하는 바도 아니다. 그 점이 본인도 답답했을 것이다. 

콕스의 이러한 시민사회 전략에 있어서 '핵심고리'는 유기적 지식인이다. 유기적 지식인 "이들의 임무는 국지, 지역, 세계의 수준에서 동시에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 다양한 집단들에 결부된 유기적 지식인들은 각자가 속한 집단의 즉자적인 조합주의적 본능과 그 본능에서 생겨나는 다른 피억압 집단들에 대한 적개심을 넘어서서, 바람직하고 가능한 대안적인 미래에 대한 상을 공유하고 공동 행동 전략을 찾아낸다는 어려운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89쪽)

현재 미국을 기점으로 한 일극패권주의에 맞서는 움직임의 촉발 시기에 대해서 콕스는 "과거의 경험에서 보면 세계대전 직후와 같은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그러한 제도들을 새로운 방향으로 밀어붙이는 집단적인 행동이 폭발적으로 생겨나곤 했었다. 현재라는 시점은 다시  한번 그러한 운동이 생겨날 만한 시점"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유기적 지식인들을 '엮어내는 게' 중요하다. 저자 인터뷰에서 콕스는 "지금까지의 국제정치에서 보통 사람들은 두드러진 역할을 해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국제정치가 모든 보통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 누구에게나 명백하게 드러난 이상 국제적 차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에 대해 보통 사람들도 좀 더 큰 관심을 갖게 될 것이 분명"하다고 밝혔는데 필자가 생각하기엔 유기적 지식인의 범주가 '보통 사람들'과 상당부분 포개어진다고 본다. 여기서 내가 파국을 피할 희망을 보는 것은 너무 앞선 걸까.     

홍기빈에 대한 단상

콕스에 대한 서평은 여기서 줄이겠다. 정작 이 글에서 <다수 문명에 대한 사유>를 건들지 않았던 이유는 독자들이 보통 '문명'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의례적으로 새뮤엘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을 생각하기 쉬운데 콕스의 <다수 문명…>은 헌팅턴류의 문명론에 대하여 비판적인 논문으로 독자들이 직접 읽기를 추천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 서평은 '절반의 서평'이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지금부터다.

번역은 남의 불을 가져다 자기 고기를 굽는 것

내가 홍기빈의 번역 책을 처음 접한 것은 마이클 리보위츠의 <자본론을 넘어서>였다. 이 책의 ‘역자후기’에서 홍기빈은 “중국의 노신 선생은 번역을 ”남의 불을 가져다 자기고기를 굽는 것“이라고 하신 바 있다. … 선생은 그래도 구워 놓을 고기라도 갖춘 분이니 괜찮지만 필자는 생살을 뜯어놓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고 ‘겸손하게’ 밝혔다. 이 책이 나온 지 7년이 지났다. 그간에 문고판으로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라는 저서를 내놓았지만 리보위츠부터 시작하여 칼 폴라니, 숀 비클러와 조나단 닛잔, 닐 우드, 그리고 최근에 로버트 콕스의 저서까지 번역을 하면서 여전히 생살을 뜯어서 고기를 굽고 있다.

국제정치학을 공부하는 이들은 알겠지만 홍기빈이 번역한 책들의 저자들은 서평의 서두에서 말했듯이 국제정치경제학 아니 지구정치경제학으로서의 지구적 규모의 감수성과 시각을 대변하는 학자들이다. 홍기빈은 콕스의 번역본을 내놓으면서 "'국익'을 내세운 국가의 시각이 아닌 평화와 진보를 희구하는 보통 사람의 시각으로 보는 국제정치학은 없을까"라고 물음표를 던졌는데 필자는 이 물음표를 다시 홍기빈에게 던지고 싶다. 이제 "보통 사람의 시각으로 보는 국제정치학 저서를 내놓을 시점이 되지 않았느냐고"

번역은 반역이다?

다시 1999년 당시, <자본론을 넘어서>의 '역자후기'에서 홍기빈은 한 80년대 좌파 논객으로 이름 날렸던 자가 펴낸 철학서를 비판한 것을 볼 때나 맑스주의에 대해서 "맑스주의를 이해하려면 사실상 엄청난 양의 학문적 수련과 준비가 필요하다. … 맑스주의를 연구하는 데에는 백과사전 적인 지식이 요구된다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며 지식인들의 학문을 대하는 귀차니즘, 불성실을 질책한지가 10년 가까이 되어간다. 이만하면 "생살을 뜯어놓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란 말도 겸손이라고 말하기가 민망하다. 원래 사용되는 문장의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이러한 겸손에 대해서 나는 '번역은 반역이다'고 말하고 싶다. 

보통 사람의 시각으로 보는 국제정치학을 기대하며

그간 월간 <말>지나 여타 진보매체에서 짧은 글쓰기를 해왔었고, 번역작업도 바쁘게 했었지만 대안 있는 진보를 목표로 한 진보진영의 싱크탱크로 출범하는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이하 새사연)의 경제팀장을 맡으면서 더 바빠졌겠지만 그람시 말마따나 '유기적 지식인'으로서의 활동에 기대가 크다. 앞으로 '새사연'이란 새로운 둥지에서 지금까지 축적된 홍기빈의 사유가 빛을 발하길 바란다.

사족을 하나 달자면 홍기빈의 이메일 아이디는 'mongyang' 즉, 민족지도자 여운형 선생의 호에서 땄다. 2년 전 홍기빈이 한 정치토론사이트에서 연재했던 조봉암 선생, 김대중 전대통령 등의 뜨거운 인물과 관련하여 현대사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몇 년 전부터 보수진영에서는 박정희 되살리기를 하고 있고 최근에는 현대사 전반에 대한 '재인식'까지 하고 있다. 진보진영에서도 누구를 되살린다고 잘못은 없다. 오히려 리더쉽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진 현 시점에서 새로운 아니 잊혀진 민족지도자를 불러내서 리더쉽의 다양한 모델을 강구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사실 내 눈에는 여운형 선생도 중도에서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했었지 진보주의자로는 안 보이지만 말이다. 홍기빈에 대한 필자의 욕심도 작용했겠지만 여운형 선생과 관련한 책의 진전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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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2/26 [01:1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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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수 2006/03/05 [10:53] 수정 | 삭제
  • 또 그머리보다 그림자가 더 크네요..실속이 없다는 이야기지요..
    모든 것은 독자가 판단할 문제인데..
  • 그냥 2006/02/28 [07:48] 수정 | 삭제
  • 홍기빈에 대해서 잘몰랐는데
    찬양이 아니라 소장학자에 대해서 잘 알려준 글 같은데요ㅠㅜ

  • 에공 2006/02/28 [06:22] 수정 | 삭제
  • 이게 책 서평인지
    홍기빈 찬양인지
    풓후후후
    읽다가 좍 스크롤 내렸슴다
    리플 단 사람도 아눔도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