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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종말은 시작된 것일까?
숨겨진 테러, 잔인하고 몰상식한 체첸 학살
 
지오리포트   기사입력  2002/10/27 [00:35]
10월 23일 밤 9시 쯤(한국시간 24일 새벽 2시 5분) 모스크바 남쪽 멜니코바 거리 7번지에 있는 한 극장에 체첸 병사들이 기관총을 공중에 난사하며 난입했다. 이들은 인질 700여 명을 인질로 잡고 ‘체첸 군사작전의 즉각적인 중단’과 ‘체첸에서의 러시아군 철수’를 요구하였다.

러시아 특수부대원들은 26일 아침 6시20분(한국시간 오전 11시20분)께 인질범들이 인질 2명을 살해하자 가스를 분사하며 극장안으로 진입, 전격적으로 진압작전에 돌입했다. 약 40분 정도 소요된 진압작전에서 약 50명으로 추정되었던 인질범 중에서 주범 모프사르 바라예프를 비롯한 32명이 사살되는 등 적잖은 인명피해가 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러시아의 진보적인 학자로서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보리스 카갈리츠키가 2002년 10월 26일 <모스크바 타임즈>에 발표한 칼럼을 소개한다. 카갈리츠키는 이 글에서 이번 사건의 원인이 러시아군이 체첸에서 벌인 “잔인하고 몰상식한 학살”이었음을 지적하면서, 모든 문제를 무력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는 푸틴의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편집자 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통치는 1999년에 일어난 모스크바 아파트 폭격 및 러시아에 질서를 확립하겠다는 그의 약속과 함께 시작되었다. 수많은 러시아 시민들은 푸틴에게서 신뢰할 만한 국가와 튼튼한 권력에 대한 그들의 꿈이 체현되는 것을 보았다. 질서와 안보는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또한 인권과 언론자유가 당분간 유보되거나 완전히 잊혀진다고 해도, 획득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오늘 푸틴은 자신의 통치 기간 중에서 가장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모스크바의 ‘북동풍(Nord Ost)' 극장(현재, 체첸인들이 점거하고 있는 곳은 문화궁전이다. 이곳에서 ’북동풍‘이 공연되고 있었다, 역주)을 점거하고 있는 총잡이들이 크레믈린 정권의 심장부에 일격을 가했다.

푸틴은 안전을 약속했다. 그러나 그가 권력을 잡은 지 3년, 완전 무장한 체첸 군인들은 모스크바의 이곳저곳을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지프차를 타고 돌아다닐 수 있었으며, 수백 명의 인질을 붙잡고 있다. 하지만 푸틴의 법집행자들과 군인들은 아무런 힘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3년 동안 체첸에서 벌어진 ‘반테러 작전’은 완전히 실패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닐 것이다. 왜냐면 체첸에서는 어떠한 반테러 작전도 시도된 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쟁이 아니었으며 단지 잔인하고 몰상식한 학살(pogrom)이었을 뿐이다.

크레믈린에서는 오랫동안 체첸 전쟁은 승리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이해되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이 망각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가 없기 때문에 문제를 처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핑계를 대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그것이 진상이라고 납득시키려고 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그 대가를 되돌려준다.

크레믈린은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고, 매스미디어로 하여금 체첸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침묵하도록 함으로써 정보 전투(information battle)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정보 전투에서는 승리했을지 몰라도 전쟁(war)에서는 패배했다. 선전의 무한한 힘에 대한 믿음을 결국 정치적 무능력을 낳았다.

체첸의 비극적 현실로 말미암아 러시아의 정치 생활은 가장 야수적인 형식으로 바뀌었다. 전쟁은 모든 정보의 장벽과 방해물을 뚫고 마침내 모스크바에 이르게 되었다.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전쟁이지 테러가 아니다. 사람들은 마음껏 체첸 병사들을 비난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지금 극장을 점거한 체첸 사람들보다도 러시아 군대가 체첸에서 저질렀던 훨씬 더 나쁜 짓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뻔뻔스러운 위선이 될 것이다.

{IMAGE2_LEFT}도대체 얼마나 많은 체첸 사람들이 지난 3년 동안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것일까? 얼마나 많은 도시와 마을이 파괴되었던 것일까? 얼마나 많은 체첸 사람들이 더 이상 생활을 견딜 수 없게 되어 자기 집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일까?

지난 3년 동안 체첸 사람들을 납치하고 죽였던 것은 다름아닌 러시아 군대였다. 체첸의 평화로운 마을을 고의적으로 약탈하고 파괴했던 것도 러시아 군대였다. 아무 죄 없는 사람들에게 테러를 가하여 위협했던 것도 러시아 군대였다. 그래서 지금 일어난 일들에 대해 가장 큰 책임 있는 사람들은 다름아닌 그들인 것이다.

▲체첸에서의 '학살'사진 출처: members.lycos.co.uk/islamonrise/    



만약 테러리스트들을 찾아내려고 한다면 크레믈린에서 조사를 시작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겁에 질린 정치가들은 테러리스트와는 협상할 수 없을 거라는 주문(呪文)을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다. 그러나 두 번에 걸친 체첸 전쟁의 경험은 오히려 그 반대의 길을 가리켜주고 있다.

먼저 모스크바는 체첸의 온건파 정치인을, 협정을 맺었던 사람들까지 모두 테러리스트로 선언했다. 그리고 과격한 부대가 실제적으로 전면에 나서고 체첸 측이 테러 방법을 호소하기 시작할 때에서야 모스크바의 수뇌부는 굴복하여 협상을 시작했다. 그것은 부디오노프스크(Budyonnovsk) 사건 때도 그랬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눈 앞에서 반복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정치적인 해결책을 거부하고 오로지 무력으로만 해결하려고 함으로써 러시아 당국은 실패하게 되었다. 체첸의 지도자들은 정치적으로는 그리 강력하지 않지만 체첸의 전사들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울 각오를 하고 있다. 러시아의 장군들과는 달리 그들은 기꺼이 죽으려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결코 무력으로는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 2002년 10월 25일, 체첸 병사들이 수백 명의 사람을 인질로 잡고 점거하고 있는 극장 앞에서. 인질로 잡힌 이들의 친구와 친적들이 “인질의 생명을 보장하라, 군대는 철수하라”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서 있다. 또한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이 날 약 80명 가량의 반전운동가들이 극장 앞에 모여 “체첸 전쟁을 중단하라, 체첸 전쟁 반대(Stop the war in Chechnya. No to the war in Chechnya)”을 외쳤다고 한다.
  

체첸의 군사 행동이 러시아 훈련 방식의 특징을 보여주기 때문에 러시아의 강력함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극장의 탈취는 러시아 보안 당국과 법 집행자들과 군대의 무능력을 증명해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체첸의 특수군을 아브카지아(Abkhazia) 전쟁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다름아닌 러시아의 전문가들이었다. 체첸인들은 전쟁 수행 능력을 빠른 시간 내에 배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체첸의 전사들이 아주 준비를 잘 했다 하더라도 유력한 개인들의 지원 없었다면 모스크바 한복판에서 그런 대규모 작전을 감행할 수 있었느냐는 의문이 생긴다.

이것은 ‘카프카스에서 뽑힌(of Caucasian extraction)’ 사람들에 의해 모스크바에서 경험을 쌓은 경찰로 말미암아 생기는 변치 않는 문제를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에게나 떠오르는 무언가 실질적인 의문이다.

모스크바에서 일어난 이번 테러 행위로 말미암아 태양이 푸틴의 통치에 내려쬐기 시작하고 있다. 음모 이론가들에게 이번 사건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분석하도록 내버려두자. 그러나 그 결과는 1999년의 그것보다 더 극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보리스 카갈리츠키/번역 안찬수)

보리스 카갈리츠키(Boris Kagarlitsky): 1958년 구소련 태생. 1980년 초반 비공식적 좌파그룹에 가담했으며 브레즈네프체제(1964~82) 시절 소련당국에 의해 투옥된 바 있다. 1990~93년 모스크바 소비에트 대표를 지냈고, 1995년 러시아노동당의 주요 대표로 활동했으며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비교정치연구소 수석 연구위원을 지냈다. 2000년부터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사회학연구소에서 고전맑시즘과 현대맑시즘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저서 가운데 <변화와 변증법>, <소련 단일체제의 와해>, <생각하는 갈대> 등이 국내에 번역.출간되었다.

원문은 http://www.themoscowtimes.com/stories/2002/10/26/008.html  

* 본문은 본지와 기사제휴 협약을 맺은 "지구촌을 여는 인터넷 신문 지오리포트 http://georeport.net/ "에서 제공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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