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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부(幕府), 콜로세움 그리고 마당극
유력 대선후보 3인의 정치행태에 대한 문화적 접근ba.inf
 
임흥재   기사입력  2002/10/29 [08:08]
일부로 무관심할려고 하여도 대선이 가까워오면서 우리들의 관심은 정치판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여기저기로 당적을 옮기는 이른바 철새정치인들이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그에 따른 기현상으로 노무현 후보의 캠프에는 상상할 수 없는 돈벼락이 쏟아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다. 이상기온으로 뚝떨어진 한냉전선이 걸쳐있는 주말에는 이익치 전현대증권 사장의 정몽준후보의 현대주가조작설 연루의혹이 제기되면서 정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의혹만 키워놓고 서둘러 결론을 내버린 이회창후보의 아들 정연씨의 병역비리의혹에 대한 국민들의 의구심은 불신사회에 대한 믿음을 증명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단 한가지의 의혹도 풀지 못한채 과연 수사라는 것을 하기는 한 것인지 하는 의심만을 증폭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정후보의 주가조작연루설은 그 실체와 상관없이 마찬가지로 정치적 수사(修辭)로 그치고 말 것이다. 이런 풍문이 결과적으로 누구에게 이로운 것인지, 어떤 의도로 이제와서 다시 불거져 나온 것인지를 떠나, 어떤 종류의 풍문이든 자신들에게 이로운 쪽으로만 해석하고 그 실체를 인정할려는 정치판의 이중잣대를 보면서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막부의 제왕

유력대선후보 3인의 행보를 들여다보면서 나는 재미난 정치적 특징들을 발견한다. 나의 이런 관찰이 반드시 올바른 것이라 감히 말할 수는 없어도 그들의 정치행태를 파악하는데에는 어느 정도의 기여를 한다고 믿는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수위를 달리고 있는 이회창후보의 정치적 행보를 들여다보면 나는 아주 오래전 읽었던 일본 전국시대를 다루었던 ‘대망(大望)’이란 소설이 생각이 난다. 세로쓰기에 깨알같은 글씨로 이단 편집이 되어 있고 권당 쪽수가 300쪽을 훨씬 넘었던 전20권의 방대한 대하소설을 어떻게 완독하였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내가 기특하기까지 하다.

모래시계의 김종학이 모방송국에 주말드라마로 연출하고 있는 화제작과 동명의 소설인 ‘대망’은 16세기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하였던 오다 노부나가, 토요토미 히데요시,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일대기와 당시 일본을 지배하였던 제후들의 시대를 종식시키고 통일일본을 이룩하였던 시절의 파노라마다. 그 대망의 기나긴 내용을 이 지면에 옮겨올 수도 없는 노릇임에도 내가 대망을 언급하는 이유는 그들의 역사에서 등장하게 되는 ‘막부’가 오늘 우리 정치의 현장에 존재하고 있는 듯한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막부란 소위 무신정권의 권력의 핵심을 상징한다. 카마쿠라 막부를 효시로한 막부정치의 절정은 아마도 통일일본의 초석을 다진 도쿠카와 이에야스의 에도막부일 것이다. 에도막부는 사실상의 지배자였고 일본영토의 사분지 일을 직할통치하던 막강한 권부의 상징이었다. 도쿠카와는 그 막부의 막후에서 일본을 지배하였으며 그 힘은 전국에 미치는 것이었다. 그는 숨은 그림자의 절대군주였다. 일본의 왕은 형식적인 상징에 불과하였고 모든 권력은 에도막부, 오늘날의 토꾜(동경)에서 나왔다.

이회창 후보 혹은 한나라당의 정치행태를 관찰해보면 이후보의 정치는 바로 그런 막부의 정치와 흡사한 점을 수없이 발견하게 되고 이후보가 노리는 것이 그 막부의 실력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한다. 한나라당이 민주당 흉내를 내어 후보경선이란 형식적 절차를 밟았지만 그것이 완전한 상향식 민주주의의 성격을 띠었다고 믿는 국민은 없다. 또한 그가 한나라당의 대선후보라는 직함 하나만을 가지고 있지만 한나라당이 온전한 의미에서 당정분리의 이원적 지배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여전히 한나라당의 실질적 지배자이며 제왕적 권위와 힘을 행사하고 있다.

2000년 총선의 공천과정을 통해 반대파들을 몰아내고 장악한 당의 지배력은 확고하다. 내우외환과 후보 개인의 수많은 흠결과 의혹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은 다 이런 이유에서 연유한다. 그는 막후의 실력자다. 그가 막부의 지배자라는 의심을 확고한 믿음으로 바꾸어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한나라당이 취하는 대선전략의 행태를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이후보와 관련된 갖은 의혹에 대한 후보 본인의 해명이나 대응은 거의 전무하다. 그에 대한 모든 짐들은 전면에 나선 충성심 강한 무사(사무라이)들의 몫이다. 남대변인을 필두로 이재오 김문수 때로는 무사의 수장격인 서대표까지 나서서 전방위 경호를 담당한다.

이정연 개인의 문제인 병역비리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즉 법적 당사자도 아닌 그들이 나서서 해명하고 법조인 출신들이 주동이 되어 시위금지구역인 검찰청사까지 점령하고 집회를 연다. 엄연히 헌법에 의해 보장된 공무원 신분에 대한 것까지 그들 멋대로 인사조치를 요구한다. 남북의 화해와 통일이라는 우리 민족의 절대적 염원을 정치적으로 훼손하는 냉전의 선동에는 김용갑을 비롯한 무신정권의 졸개들이 나서서 칼춤을 춘다. 그 무신(武臣)들이 국민들을 상대로 엄포와 협박을 일삼는 사이, 이후보는 만면에 가득한 미소를 띠고 대선후보가 아니면 일평생 갈 일이 없었을 사회복지시설을 찾아 짜장면 봉사를 한다.

{IMAGE1_LEFT}그가 친일의 의심을 받고 있는 일본검찰출신의 아버지를 둔 것은 이회창후보의 잘못이 아니다. 어느 누가 제 맘대로 아비를 택하여 태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일본 무신정권, 나아가서는 군국주의 일본의 그 시발이 되었던 막부의 정치를 흉내내고 모방하며 국민을 눈속임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한나라당의 인적구성을 살펴보면 우리 현대사의 불행한 무신정권에서 오도된 충성심을 앞장서 보여왔던 무신들로 가득차 있다. 그 인적 토대에 대한 비난과는 별개로 이후보는 자신에 대한 의혹과 불신, 그리고 리더십에 대한 국민의 염려를 스스로 나서서 해명하고 검증 받아야 한다.

부담스런 의혹들은 무신들에게 담당시키고 자신은 이미지 메이킹에 몰두하며 국민을 현혹시키는 대선행보는 그만두어야 한다. 합동토론에 응하고 그 스스로 당당히 자신의 정견과 신념을 국민에게 고지해야할 의무가 그에게는 있다. 상대후보에 대한 비교우위를 자신의 자질과 철학으로 국민들에게 검증 받아야 한다. 지금처럼 어두운 막후에 숨어 당을 지배하고 미심쩍은 부분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어물쩍 넘기는 막부식 정치를 멈추어야 한다. 친일의 의심을 받고 있는 출신내력에다 막부식 정치를 흠모하고 있는 듯한 정치적 행보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십이 아니다.

국민들이 이후보와 한나라당에 바라는 것은 여의도 막부 혹은 막가파식 충성심의 무신들에게 둘러싸인 청와대막부가 아니라 반세기를 지나며 아직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국민을 진정으로 위하고 대변하는 도덕적 우위의 민주정부다. 오늘의 이회창을 있게 해준 지난 정권과 현정권의 비리와 부정부패는 바로 청산하지 못한 막부정치의 산물임을 이후보는 명심하기 바란다.

콜로세움(colosseum)의 도박사

정몽준후보는 스스로 정치의 개혁 국민의 통합을 외치며 대선주자로 합류한 지금에도 여전히 정치를 관중의 오락거리로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게 한다. 여전히 축구협회장을 고수하고 있고 며칠 후 11월 2일인가(정확히는 모르겠다)에는 브라질 축구대표팀과의 경기가 벌어진다고 한다. 축구를 좋아하고 열광적으로 응원하기도 하는 내 입장에서 브라질 대표팀의 내한경기가 싫거나 비난할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이번의 축구경기가 과연 우리 축구수준의 향상이나 축구팬에 대한 서비스 차원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하는 점에 비추어 생각하면 긍정적이지 못하다.

브라질 축구대표팀의 내한경기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나이키 투어의 일환으로 여러차례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경기를 가지곤 하였다. 그러나 이번의 경기는 나이키가 스폰서로서 모든 비용을 부담하였던 전례의 경기와는 다른 것으로 나는 알고있다. 즉 우리가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초청하여 가지는 경기라는 말이다. tv 중계권료와 축구에 열광하는 관중들의 입장수입으로 그 비용을 충당할 수는 있겠지만 상비군도 운영하지 못하고 있는 현상황에서 축구경기를 하기에는(그것도 남미의 선수들이 와서) 추운 계절인 겨울철에 축구경기를 가진다는 것이 우리 축구수준의 향상에 얼마만큼의 기여를 할 것인지 생각하면 회의적이다.

특히나 이벤트성의 그 경기를 위해 국외에서 싸커 코리아의 자부심에 걸맞게 좋은 활약을 펼치고 있는 선수들까지 불러 들여 경기를 갖는다는 발상 자체가 대선을 위한 홍보용 행사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지금의 우리 선수들은 특별히 국가대항전을 치르며 실력을 점검해야할 대회참가를 앞두고 있지 않다. 아시안 게임을 끝으로 공식적인 대표팀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국가대표팀의 감독도 없다) 브라질 대표팀의 내한경기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나는 궁금하다. 혹 그 경기를 주관하면서 6월의 함성과 열광이 자신의 표로 연결지어질 것이란 불순한 의도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 기회에 정후보는 정신차리기 바란다.

우리가 요구하는 자도자는 단순한 오락적 요소에 편승하려는 인기영합형의 대중스타가 아니다. 이 나라의 장래를 책임질 확고한 정치적 신념과 비젼을 가진 리더십을 국민들은 원한다. 애매모호 동문서답에 축구장의 카메라 앵글에 자신을 비추려는 자에게 민족의 운명과 나라의 장래를 맡길 수는 없는 것이다. 정후보의 축구장 집착형 정치행태를 보면서 나는 로마에 있다는(내가 실제 보지 못했음으로) 콜로세움이 생각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생사를 관중의 오락거리제공과 유희의 만족을 위해 바쳐야했던 검투사의 비애를 떠올린다.

콜로세움은 로마제국의 원형투기장이다. 러셀 크로우가 주연하고 리들리 스콧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글래디에이터(gladiator)'는 그 해의 아카데미상을 휩쓸 정도로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글래디에이터, 이태리어로 글라디아토르라 불리는 검투사 혹은 검노들은 콜로세움을 가득 메운 관중들 속에서 자신의 생사를 걸고 상대 글래디에이터 또는 맹수들과 싸워야만 했다. 이 야만적인 경기가 성행한 가장 주된 이유는 권력자가 시민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또한 시민들의 저항과 흥분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목적에 있었다.

간단히 말해 권력자의 우민화 정책의 하나가 바로 검투경기였고 시민들은 그 안에서 자신들의 흥분을 대리만족하였으며 지배자에 대한 증오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였던 것이다. 그 안에서 내기를 하고 도박을 하였던 사람들은 당시의 지배계급이었다. 귀족이 다수를 점하고 평민들이 참여하였다 하여도 그들은 일반 서민들과는 다른 지배계급에 편입된 시민계급이었다. 권력자는 그들을 검투경기에 참여시킴으로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방편으로 이용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실내스포츠 경기를 관람하기에도 추운 이 계절에 비싼 외화를 낭비하며 축구경기를 고집하는 협회의 발상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소요되는 그 비용을 열악한 환경에서 내일의 꿈을 위해 뛰고 있는 많은 유소년 혹은 중고등부의 축구팀에 투자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한국축구의 장래를 위하여 훨씬 값진 일이 될 것이다.  아무튼 정후보의 정치행보를 보고 있노라면 소수의 유한계급이 모인 콜로세움에서 자신에 대한 저항을 검투사의 살육전으로 대리만족시키는 무정한 로마의 위정자를 보는 것만 같다.

콜로세움이 축구장이라는 스타디움으로 옮겨진 것뿐이고 관중이 축구 빼고는 달리 열광할 것이 없는 불쌍한 우리 국민들로 바뀐 것이다. 콜로세움에서 로마의 위정자는 관중들에게 말했던 것이다. 보아라! 여러분들이 내기를 걸고 짜릿한 이 흥분과 전율을 느낄 수 있게 한 것은 나의 시대에 얻어진 물질적 풍요이며 내가 이룩한 수많은 식민지 지배의 위업이 아니겠는가 하고 말이다. 정후보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보아라! 한국의 월드컵 개최와 축구4강의 위업이 나의 것이듯 경제의 4강 나아가서는 한국의 장래는 나와 같은 재벌들의 피나는 노력에서 얻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축구경기를 보기 위해 모여든 관중들이 대중 스포츠라는 오락적 요소를 넘어 그들이 국가에 열광하고 집단에 개인을 매몰시키고 있는 이 한심한 상황은 바로 그대 같은 얼치기 지도자들의 거짓에 속아 산 우리의 불행한 역사 때문임을 정후보는 명심하여야 한다. 축구경기에서의 패배와 잘못된 선수의 선발, 기용은 시행착오일 수 있고 타산지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 잘못된 지도자를 다시 또 한 번 선택한다는 것은 용서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미래는 오직 생이냐 멸이냐의 절체절명의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행하게 될 우리의 선택은 축구장에 입장하면서 고르는 로얄석이냐 일반석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IMAGE2_RIGHT}마당극의 꼭두쇠

김민석이 정몽준 캠프에 합류하자 마저 노무현 캠프에는 말 그대로 돈벼락이 쏟아지더니 지난 25일에는 노란넥타이(직장인 동호회)를 주축으로 하루 모금액이 무려 3억 6천을 넘었다고 한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고 안되고를 떠나 그는 참 행복한 정치인, 아니 아무나 누릴 수 없는 것을 누리고 있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를 위해 생업까지 포기한채 전국을 돌며 포장마차 투어를 하고 있는 ‘희망의 포장마차’가 며칠 전 민주당사 앞에 있었다. 그 동영상을 보면서 내가 눈시울이 붉어진 것은 정치인 노무현과는 상관없이, 인간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우리를 저렇게도 변화시키는구나 하는 감동 때문이었다.

mbc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상도’라는 드라마에는 남사당패 혹은 민중놀이 집단이 등장한다. 김용건이 그 집단의 우두머리인 ‘모갑이(꼭두쇠)’로 나오고 주인공 임상옥에 대한 절절한 사랑에 아파하던 몰락한 양반의 여식(김유미분-극중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이 그 패거리들과 함께 시전(장터)에서 공연을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재주를 보여주고 관중들이 던져주는 적선으로 생계를 해결한다. 그들의 모델이 조선 후기에 자연발생적으로 등장했던 남사당패이든 아니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노무현 캠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엿보면서 나는 세시풍속의 마당놀이 또는 현대에 와서 새롭게 해석되고 실현된 마당극을 떠올린다.

조선후기의 남사당패가 보여주는 많은 부정적인 모습(예를 들면 매춘 등)과는 별개로 그들의 출신성분은 천대받는 하층민중들이었다. 소위 광대라는 예인그룹에도 끼지 못했다고 하니 그 구성원의 신분을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내가 그들에 주목하는 것은 그런 그들이 당시의 지배계급을 중심으로 행해지고 또는 그들의 후원으로 행해진 예술행위 혹은 문화와는 다른 기층민중의 정서를 대변하는 독특한 영역을 구축하였다는 것이다.

근대 이전의 전통연희를 계승한 한국적 연극양식이 마당극이다. 우리 근대극이 서양의 근대극의 이식으로 이루어졌다는 반성으로 1970년대 탈춤부흥운동과 함께 시작된 마당극은 표현형식의 한계 등을 극복하고 민중연극으로서의 이념, 즉 연극을 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에 가깝게 다가가기 위하여 공동체적 일체감을 중요시 한다. 공연의 대부분이 행사적 성격을 띠고 관중은 함께 모여서 동질성을 느끼고 참여의식을 느끼는 것이다.

이런 마당극의 특징으로는 동질성, 적극적인 참여의식, 공동체 의식 등이 있을 것이나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마당극의 특징적 요소는 무대의 평면성이다. 다시 말해 마당극의 무대는 일반 연극의 무대와는 달리 관중과 연기자가 다같은 평면의 공간에서 만난다는 것이다. 배우와 관객이 평면에서 만남으로써 그들은 서로에게 동질성을 느끼고 손쉽게 참여할 수 있으며 하나라는 공동체적인 감정을 공유한다. 관객은 배우의 동작과 연기에 영향 받기도 하지만 건너편에 있는 자신과 똑같은 다른 관객의 표정과 관람태도에 따라서도 영향을 받는다.

노무현의 정치는 바로 이런 마당극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는 마당극의 정치다. 그렇다고 일부 방송사에서 막대한 자본을 들여 기획하고 공연하는 마당놀이는 아니다. 작은 집단일망정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배우와 하나가 되는 마당극의 정치가 노무현식 정치다. 정몽준의 정치와 노무현의 정치가 극명하게 대비되는 부분이 이 부분이다. 정몽준의 관객은 커다란 스타디움의 저 위에서 있을 뿐이고 소리지를 뿐 진정으로 하나가 되지 못하고 별것도 아닌 스코어에 따라 그 참여의 정도가 결정된다. 그리고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참여자가 아니다. 그들은 구경꾼일뿐이며 그라운드의 주인공들과 함께 어울리지 못한다.

그러나 마당극의 관객들은 더 이상 구경꾼이 아니다. 그들은 배우와 함께 어울리며 울고 웃는다. 사자 가면의 어깨춤에 절로 어깨가 덩실이고 배우와 관객을 갈라 놓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평면의 공간에서 스스로 배우가 되어 관객이 된 배우에게, 점잖게 앉아 있는 다른 관객에게 함께 어울려 신명나는 한바탕 공연을 펼쳐보자고 자연스럽게 요구한다. 이 함께 어울린 공연판에서 구경꾼의 위치에 머무를 관객은 아무도 없다. 그들은 체면과 인습 혹은 기성의 겉치레에 눌려 억압해두었던 자신의 끼를 거침없이 풀어 놓는다. 이제 세상은 너도 나도 따로 없는, 자신들이 온전히 주인이 된 신명나고 살 맛나는 세상이다.

노무현의 정치는 이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우리에게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노무현이라는 꼭두쇠(모갑이)는 국민들 모두를 신명나는 정치판으로 끌어들인다. 어제의 그 지긋지긋한 불신과 혐오의 난장인 그 곳에 우리들 모두가 스스로 허울을 벗고 달려들어 춤추고 싶도록 충동질한다. 노무현이라는 배우를 구경하러 왔다가 노무현 주변에서 더 미치도록 춤을 추고 있는 다른 구경꾼 배우들에게 반하여 스스로 춤판에 뛰어들게 만드는 참 훌륭한 꼭두쇠가 노무현이다.

오늘도 그 꼭두쇠는 보잘것 없는 우리들을 위하여 그 또한 보잘것 없는 재주를 가지고 역사와 민족을 농단했던 수구혈통들의 기생춤판에 맞서, 우리들 누구나가 찾아가는 어느 장터에서 춤을 출 것이다. 우리들의 애환과 삶의 표징들이 명징하게 드러나는 그 진실한 춤사위로 우리를 불러 모을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그를 둘러싸고 모여 앉아 그 춤이 멈추지 않도록 박자를 맞출일이다. 아니 그 춤판으로 끼어들어가 우리들이 주인되는 그 세상을 위하여 노래하며 온 몸으로 춤출 일이다./논설위원   

* 이 기사는 하니 리포터노하우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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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10/29 [08:0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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