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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은 미 CIA 아닌 이스라엘 모사드가 돼야”
[발굴] 이종찬 초대 국정원장, 국정원 개편방향에 관한 글 인터넷 화제
 
편집부   기사입력  2005/08/09 [18:07]
최근 이른바 ‘X파일’이라는 안기부 불법도감청 파문이 국민의 정부 시절에도 4년간이나 지속됐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진 가운데, 지난 98년 국가안전기획부(국정원의 전신)에 취임, 안기부를 국가정보원으로 개명하고 과거의 정치개입이나 인권침해 시비를 없애고 조직을 개편하는 등 많은 개혁적 조치 등을 추진한 이종찬 전 원장(이하 이 원장으로 당시 직책으로 약칭함)의 국정원 개편에 관한 구상을 담은 글이 인터넷에서 발굴돼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 글은 내용상 안기부에서 국정원으로 개명과 개편이 이뤄진 98년 4월을 전후, 내부 인원에 대한 원장 훈령으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 98년 5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정원 방문시 책임자인 이종찬 전 원장     © 국정원 홈페이지

이 원장은 초대 국정원 원장에 취임한 이래 가장 중점을 둔 사항이 국가정보기관이 어떻게 해야 국민들로부터 사랑과 신뢰를 받는 기관으로 발전시키느냐 하는 문제였음을 밝히면서 “이스라엘의 모사드”라는 글을 통해 그 방향을 제시했다.
 
이 원장은 10.26사건이 난 이후 당시 중앙정보부내에서는 거센 자기비판, 자가반성의 소리가 일기 시작했고 변화의 내용 중 가장 힘있게 전달된 것은 “중앙정보부는 민족과 운명을 같이하는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처럼 되어야지 더 이상 집권자의 도구로 전락하는 폭압기구의 대명사, 이란의 ‘사바크’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로 압축되었다”고 소개하면서 국정원이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인 ‘모사드’처럼 변화해 나가야 함을 역설했다.
 
이 원장은 이스라엘 같은 작은 나라, 사면이 적으로 둘러 쌓인 이 나라가 생존을 유지하는데 가장 필요로 하는 국가정보를 적시에 수집, 분석하여 배포함으로써 이스라엘의 건국을 이룩했고, 여러 차례의 전쟁을 승리하도록 한 바로 그 힘의 원천이 ‘모사드’와 같은 우수한 정보기관에 있었음을 강조하면서 미CIA, 소련의 KGB, 영국의 MI-6, 독일의 BND, 프랑스의 DSGE 등등 세계적으로 각국마다 유수한 정보기관이 있지만, 그중에서 모사드가 단연 제일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이후 이 원장은 모사드의 유래, 기능, 이스라엘 정보체계 등을 무려 A4 용지 16장에 걸쳐 상세히 소개하면서, 결론적으로 민족의 이익에 투철하고, 국민의 지지를 받아야 하며, 정보기관을 전문화해야 함을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국정원은 지배자의 권력유지에 도구가 된 이란의 ‘사빅’이나 수많은 사람들이 정보를 공유하는 미국의 CIA 아닌 이스라엘의 모사드처럼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다음은 초대 이종찬 국정원장의 국정원 개편에 관한 글 전문이다.
 

이스라엘의 모사드  
 
국가정보원장으로 있으면서 가장 큰 과제였던 사항은 어떻게 하면 우리의 국가정보기관을 국민들로부터 사랑과 신뢰를 받는 기관으로 발전시키느냐 하는 문제였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이 국민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귀감으로 삼고자 직접 방문하여 의견도 나누었고, 문헌을 통하여 연구도 했다.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는 왜 국민의 사랑을 받는가
 
1.우리는 SAVAK이 되지말고 MPSSAD가 되어야 한다.
 
10.26사건이 난 이후 당시 중앙정보부내에서는 거센 자기비판, 자가반성의 소리가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중구난방식 주장 가운데에서도 가장 힘있게 전달되는 내용이란 바로 중앙정보부는 민족과 운명을 같이하는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처럼 되어야지 더 이상 집권자의 도구로 전락하는 폭압기구의 대명사, 이란의 「사바크」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로 압축되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바로 그의 휘하에 있는 정보기관의 장이 쏜 총에 맞아 서거했다는 엄청난 사실이 부원 전체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물론 김재규 전 정보부장의 행위에 대한 시비는 당시 분위기로 보아 표면적으로 제기하지 못했으나, 왜 이와 같은 비극적인 결과가 초래되었는가? 하는 비판은 자연스럽게 제기되었다. 그리고 그 결론은 정보부가 너무 현실 정치에 깊이 개입되었기 때문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지적했었다.
 
모사드는 세계 정보기관 가운데 단연 제일이라는데 이의가 없다. 미CIA, 소련의 KGB, 영국의 MI-6, 독일의 BND, 프랑스의 DSGE 등등이 있지만 적어도 정보기관의 수준이라는 측면에서는 모사드에 필적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 같은 작은 나라, 사면이 적으로 둘러 쌓인 이 나라가 생존을 유지하는데 가장 필요로 하는 국가정보를 적시에 수집, 분석하여 배포함으로써 이스라엘의 건국을 이룩했고, 여러 차례의 전쟁을 승리하도록 한 바로 그 힘의 원천이 우수한 정보기관에 있었음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았다.
 
10.26사건이란 우리 정보기관의 역사에 가장 치욕적인 경험을 하고도 이를 교훈으로 삼지 않는다면 과연 정보기관이 이 나라에 존재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모든 부원들이 정보부를 개편해야 한다는데 무언의 동의를 했었다.
 
이제 국가안전기획부(약칭 안기부)법이 국회에서 개정되었고 국회 내 정보위원회가 구성이 되어 안기부가 국민의 대표기관의 감독하에 들어오게 되었지만 아직도 자리가 잡히지 않고 보안을 지키는 문제만 논쟁의 초점이 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유능하고 효율적인 정보기관이다. 통일을 앞두고 정확한 북한의 실정을 알려주는 북한정보, 냉전체제가 붕괴된 이후 새로 등장하는 신세계질서 속에서 우리 나라의 좌표를 분명히 제시하고, 국가경쟁력을 강화하는데 필요한 각 분야의 국제정보, 이러한 정보를 적기에 수집하여 우리 정책입안자들과 국민들에게 제공해 달라는 것이다. 제발 남의 나라의 정보만을 의존하여 판단하는 어리석음에서 깨어나라는 이야기이다.
 
할 일은 똑바로 하고 안 할 일은 단연코 손을 끊는 그런 슬기를 제발 발휘하여 양질의 정보를 생산하라는 요구인 것이다. 그래서 「모사드」를 모델로 우리안기부를 포함한 정보기관이 자기 모습을 정립해 보라는 뜻에서 이 글을 쓴다.

2. 모사드의 영웅 「엘리 코헨」의 이야기
 
텔 아비브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곳에 케이파 하바드(Kefar Habad)라는 작은 농촌 마을이 있다. 때는 1977년 7월 29일, 이 작은 마을이 생긴 후 처음으로 많은 귀빈들의 차가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이 날은 바로 이스라엘의 소년들이 자라서 어엿한 성년이 되었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한 성년식이 있는 날이다.
 
그러나 이 날의 성년식만은 예년과 달랐다. 전쟁으로 졸지에 아버지를 잃은 어린이들이 자라서 성년이 된 날이기에 더욱 엄숙하고 비감스러웠다. 여든새명의 어린이, 대부분 자기 아버지의 얼굴조차 기억 못하는 그 어린이들이 전통적인 예법에 따라 성년이 되었음을 다짐하는 토라(Torah)를 읽었다.
 
성인예식이 한참 무르익을 때 몸이 가냘픈 한 소년이 단상에 올랐다. 그의 어머니는 이 소년을 샤이(Shai)라 불렀다. 히브리어로는 「선물」이라는 뜻도 있다. 1964년 10월, 소년의 아버지는 태어난지 2주밖에 안 되는 이 소년을 엄마의 품에서 마지막으로 보고 “이 아기를 선물로 두고 떠나오”라고 말한 뒤 훌쩍 떠나 영영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이 소년의 아버지는 바로 모사드(MOSSAD)의 스파이 영웅, 엘리 코헨(Eli Cohen)이다. 샤이 소년은 수집은 듯이 단상에 올라 자신이 쓴 연설문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정말 다른 어린이들처럼 우리 아버지도 평범한 아버지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나는 줄곳 우리 아버지도 다른 아버지처럼 언제나 우리하고 같이 살았으면 했어요. 나는 우리 아버지가 나라를 위하여 얼마나 훌륭하게 일하다가 돌아가셨는지 그 이야기들을 모두 읽었어요. 나는 아버지에 관한 책, 사진, 글들을 모두 모아봤습니다. 그러나 막상 나는 어머니께는 아버지에 관하여 한번도 묻지를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엄마가 너무 슬퍼할까 봐 주저했던 것입니다..... 이제 나는 저 세상에 계신 아버지께 약속드립니다. 아버지 기대에 어긋나지 않겠습니다. 또 나도 최선을 다해 내 조국 이스라엘을 위하여 헌신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국민들이 영웅으로 칭송하는 나의 아버지의 충실한 아들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께 드리는 나의 맹세입니다.”
 
소년의 연설이 끝났을 때에는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씻고 있었다. 평생을 나라를 위하여 강경하게 싸워온, 무뚝뚝하고, 괴팍하고 강직한 메나헴 베긴(Menachem Begin)수상까지도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소년에게 다가와 두 볼에 강하게 입을 맞추었다. 샤이 소년은 이스라엘 군 참모총장 모타 굴(Motta Gur)장군, 국방부 장관 에젤 와이즈만(Ezer Weizman)등 귀빈과도 당당하게 악수를 했다. 베긴수상은 자신의 회고록 ꡔ반항ꡕ(The Revolt)을 소년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러면 이 소년의 아버지 엘리 코헨은 과연 누구인가. 1924년, 이집트에서 태어나 32살까지 살아온 유태인 청년이다. 아버지는 알렉산드리아에 자리를 잡고 넥타이상점을 내어 겨우 코헨 8남매를 키웠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코헨은 팔레스타인에서 조국건설운동단체인 「유태 시오니스트 청년단」에 가담했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하자 아랍 각국에 있는 유태인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들 유태인들은 제각기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를 꾀했지만 당시 영국은 이들의 이스라엘 유입을 막았다. 할 수 없이 많은 유태인들은 관광여권으로 유럽을 돌아 이스라엘로 밀입국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코헨도 지하운동단체에 속하면서 이민사업을 도왔다. 그리고 그의 가족도 바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이스라엘로 이주를 했다.
 
그러나 코헨만은 이집트에 남아 「하가나」라는 비밀 지하조직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스라엘에서 파견되는 정보요원들의 지시에 따라 이집트정부에 대항하는 파괴공작을 벌렸다.
 
1957년 코헨은 이스라엘로 돌아와서 본격적으로 정보요원으로 선발이 되었다. 선발되는 순간부터 코헨은 엄격한 훈련을 받았다. 적의 미행감시를 어떻게 하면 감지하고, 그 감시에서 이탈할 수 있는 방법부터 시작하여 비밀장소에서 서로 주고받는 회합 통신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광범하고 세심한 분야를 모두 수료했다.
 
그처럼 엄격한 훈련 가운데서도 그를 가장 격분케 한 것은 그의 교관인「늙은 너구리」( 그는 항상 담당교관을 그렇게 불렀다)가 걸핏하면 코헨에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빨리 결심하고 정보부를 떠나주게”하는 나물함이었다. 어떤 때는 그를 의심하는 듯 “왜 당신은 정보요원이 되려는 것이요, 돈 때문이요?, 아니면 부인과 별거하고 싶어서요? ”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교관을 발로 걷어차고 싶었으나 “아 ! 이것도 훈련이겠지”하고 분을 참았다.
 
그뿐 아니라 코헨은 신체검사는 물론이고 3일간에 걸친 심리검사도 받았다. 물론 결과는 「우」판정을 받았다. 이런 엄격한 검사와 훈련을 거친 후 코헨은 드디어 정식으로 선발되어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다. 그에게 새롭게 부여된 이름은 카말 아민 타베드 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태어나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력이 시나리오처럼 꾸며졌다. 아주 교묘하게 조작된 것이다. 심지어 17세 당시 큰아버지와 낚시하면서 찍은 사진까지 가짜로 만들어 소지하게 했다.
 
코헨은 콧수염을 기르고 변장을 하여 새 이름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코헨은 아랍인들의 조직인 아랍인클럽에 자연스럽게 침투해 들어갔다. 그러나 남미, 특히 아르헨티나는 국제적인 스파이도시로서 구미각국의 정보기관은 물론이고 당시 소련 및 공산권의 공작원, 아랍의 공작원들이 우글거렸다. 심지어 나치의 정보요원들이 피신한 곳도 바로 이곳이다. 여기서 코헨은 가장 어려운 경험을 쌓았다.
 
코헨은 아르헨티나에서 아랍의 상류층들과 접촉의 범위를 넓혀갔다. 이들 가운데는 과거 실권자로 있다가 쫓겨난 바트당의 유력인사를 비롯하여 각국대사와도 친밀해질 수 있었다. 그가 가장 친밀하게 접근한 대상은 시리아 대사관 무관인 하페스장군(후에 대통령)이었다. 마침 이집트와 시리아가 틈이 갈라지고 쿠데타가 일어나 바트당이 집권하는 새로운 사태가 조성되자 코헨은 드디어 다마스커스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한 것이다.
 
코헨은 마지막으로 가족과 휴가를 보내기 위하여 텔아비브로 돌아갔다. 그는 자신에 차있었으나 그를 훈련시켰던 「늙은 너구리」교관은 “너무 서둘지 말라! 서둘면 반드시 실수가 있게된다.”고 경고했다. 그는 몇 주 동안, 극소형 송신기와 전기면도기 코드가 안테나 역할을 하는 특수한 무전기 그리고 특수 암호조립기 등을 지급 받고 재훈련에 들어갔다. 그는 재삼, 재삼 통신시간을 최대한 단축하라는 엄격한 지시를 받았다. 완벽한 스파이인 그가 언제나 저지를 수 있는 취약점은 바로 그의 과도한 자신감이었다.
 
1962년 1월 코헨이 아닌 타베드는 드디어 이태리 제노아에서 호화여객선 아스트리아호에 승선하여 베이루트를 거쳐 다마스커스에 도착했다. 그는 선상에서도 아랍의 언론인과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그는 이 언론인에게 무역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가장구실로 시내 중심가에 사무실 겸용의 아파트를 구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리하여 손쉽게 시리아 육군본부가 있는 근처에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코헨은 이 아파트를 중심으로 시리아 상류사회 내에 영향력을 키우면서 한편으로는 군 장교단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는 국영방송의 대남미지역 방송담당자로 활약도 했다. 그리고 틈틈이 깊이 사귀어 온 군 작전장교를 앞세워 전선의 진지를 시찰하고 뛰어난 기억력으로 하나하나를 모두 암기하고 정리, 종합하여 텔아비브로 송신했다. 이스라엘군은 시리아 군의 장비에 대하여도 상세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 물론 코헨이 제공한 정보가 대부분이었다.
 
그는 하페스장군이 대통령이 된 그 연줄을 이용하여 자기 아파트를 엽색행각(獵色行脚)을 위한 아지트로 제공하면서 더한층 군 간부들에게 깊숙이 침투했다. 한때는 집권 바트당에 정치자금을 두둑하게 제공하여 국방위원까지 추대되었고, 당에서는 그를 국방차관까지 내정했을 정도였다.
 
1967년 6월5일 이스라엘과 아랍간의 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 전쟁은 역사상 가장 짧은 전쟁으로 6일만에 결판이 났다. 이스라엘군이 난공불락을 자랑하는 시리아의 요새, 골란성을 10시간만에 완전히 함락시켰다. 병력수로는 열세한 이스라엘이 완전히 승리했던 것이다. 이때 이스라엘 국방부장관인 외눈의 모세 다얀장군은 후에 이렇게 술회했다. “엘리 코엔이 아니었던들 우리는 골란성을 함락시키기 위하여 더 많은 희생을 치렀어야 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 요새의 점령은 영원히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코헨이 다마스커스에 상륙하여 활동한지 4년만에 들통이 났다. 시리아 대간첩본부는 주변외국공관으로부터 간간이 전파 의 간섭현상을 유발하는 괴전파가 발생한다는 신고를 받았다. 장비와 기술이 부족한 시리아로서는 도저히 잡아낼 수가 없었다. 시리아는 소련측에게 방탐기술(方探技術)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소련은 즉각 방탐차량까지 제공하고 요원을 파견했다. 그러나 워낙 뛰어난 무전기로 송신을 하기 때문에 도저히 잡아내기가 어려웠다. 대간첩본부는 고의로 다마스커스시 전체를 정전(停電)상태로 만들었다. 그러나 주의심이 약해진 코헨은 그날 따라 건전지를 이용하여 송신을 하기로 했다. 송신 시간도 길었던 것이다. 이것이 결정적인 실수였다.
 
보안군은 코헨의 아파트를 포위하고 그가 송신하고 있는 순간에 급습했다. 그 자리에서 무전기는 압수되었다. 시리아군은 정교한 이 무전기를 보고 혀를 내 둘렀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수사를 담당한 군의 간부들이 하필이면 그의 아파트에서 놀다 간 탕아들이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코헨을 지하감옥에 묶어 두었다. 자기들의 죄상을 감추기 위해서.... 이스라엘측은 즉각 시리아의 간첩 10명과 현금, 트럭, 트랙터 등을 얹어서 교환하자는 제의를 했으나 시리아는 막무가내로 거부했다. 왜냐하면 코헨은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놓아둘 수 없다는 것이다. 드디어 1965년5월18일 새벽3시 35분 시리아 보안당국은 서둘러 코헨을 수천명이 모인 광장으로 끌고 나가 공개적으로 교수형에 처했다.
 
왜 이렇게 장황하게 한 영웅적인 이스라엘 스파이의 이야기를 계속하는가? 모사드는 바로 이스라엘의 역사와 더불어 운명을 같이 해 온 정보기관이므로 세계적으로 가장 강한 기관으로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그 바탕에는 이러한 애국적인 영웅들이 이스라엘의 역사와 더불어 존재했기 때문이다.

3. 모사드의 약사
 
모사드의 역사는 바로 이스라엘의 역사이다. 모사드는 이스라엘 건국의 중추기관의 하나였다. 팔레스타인은 아브라함과 모세가 유태인에게 준 「약속의 땅」이며 다윗과 솔로몬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고 찬란한 왕국을 누렸던 곳이다. 그러나 이민족에게 이 땅을 빼앗기고 설음을 받은지 2천년동안, 이스라엘 민족은 한시도 이 땅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17세기에 폴란드에서 유태인 대 학살사건이 일어났다. 1백만명의 유태인 가운데 25만명이 남의 땅, 폴란드에서 산다는 죄로 학살당한 것이다. 유태인들은 조국이 없는 것을 한으로 새겼다. 18세기가 되어서야 유태인들은 계몽주의 시민혁명 덕분에 이민족이 아니라 주민으로서 동격의 대우, 즉 권리와 의무를 가지는 시민으로서 대접을 받게되었다. 그러나 유태인들은 중상주의가 주류를 형성하는 시대에 이르러서야 상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물론, 돈을 거두어 드리는 수전노(守錢奴) 상인이 된 유태인들은 한층 더 다른 민족의 미움을 산것도 사실이다.
 
19세기 유태인 로드차일드는 나폴레옹에게 패한 윌리암이라는 사람의 재산을 은닉해주고 그 돈으로 은행을 세웠다. 그는 다섯 명의 아들을 각각 프랑크프르트,런던,파리,나폴리,비엔나에 보내어 국제정보의 수집과 금융산업을 발전시켰다.
 
약간의 부를 얻게된 후부터 유태인간에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또한 잊혀져간 히브리어의 재생작업이 진행되었다. 한때 러시아 혁명을 전후로하여 사회주의가 팽배해질 때 많은 유태인들이 자치가 허용될 것으로 기대했었으나, 곧 실망하고 결국은 팔레스타인을 찾아서 유태인만의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게 바로 시온이스트 운동의 시초이다.
 
이때부터 팔레스타인으로의 귀환운동이 시작되었다. 19세기말 약1만명의 시온이스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들어갔다. 그것이 제1차이민이었다, 1905년에 있었던 제2차 이민은 주로 청년사회주의자가 중심이 된 이민단이었다. 이들이 후에 이스라엘을 건설하는 주역들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젊고 패기있는 이상주의자들이었다.
 
당시 영국은 이 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터키를 몰아내고 프랑스, 러시아와 합동으로 잠정적인 비밀협정을 맺어서, 영국 외상 발 포어 경이 로드차일드은행의 총재에게 약속한대로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나라 건국을 허용하는 선언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전인구의 10%만이 유태인이었다. 그러므로 다수인 아랍인들이 일제히 항의하게 되자 영국은 할수없이 팔레스타인을 영국의 위임통치지역으로 남게 했다.
 
이때부터 유태인들의 대대적인 이주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시온이스트들은 1940년까지 무려 45만명의 유태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보낸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들 이주 유태인들의 여행에 필요한 각종 증빙서류를 제공하고 여행편을 마련해주는 대대적인 여행업무를 대행하는 기관이 필요했다. 이 기관이 바로 모사드의 모체이다.
 
모사드는 1937년 사회주의 노동운동과 비합법 군대인 하가나 지도자회의에서 제2차 이민입국 알선기관(모사드 레 알리아 베스)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모사드는 당초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두고 나치의 박해 때문에 살길을 찾아 피난 나온 유태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키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다가 발칸지역의 유태인들을 구하기 위하여 한때는 이스탄불로 본부를 옮기기도 했다.
 
모사드는 유럽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학살에서 유태인을 구출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이주사업을 벌려야 했으므로 활동영역도 점차 확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담당분야를 나누었다. 이민관계 일체업무를 담당하는 「하파라」, 강제수용소를 탈출하여 항구까지 호송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부리하」,그리고 무기구입을 담당하는 「레히레」 등등으로 각각 전문화했던 것이다.
 
이때 이스라엘의 가장 큰 적은 독일만이 아니었다. 아랍의 압력으로 팔레스타인으로 유태인 이주를 결사적으로 막고있는 영국도 잠정적인 적이었다. 모사드는 문자 그대로 사면초가 가운데서 유태인 이주공작을 벌리고, 자위의 방편으로 무기를 구입하고 그리고 유태인의 박해를 피하는 대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각국의 정보를 적시에 수집해야만 했다.
 
서부 유럽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태인들은 물론 영국군이나 미군에 자진 입대하여 시온이스트들의 이주운동을 간접적으로 돕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이주공작의 주체는 모사드였다. 이때부터 모사드는 전 세계에 정보망을 깔아 놓았다. 그리고 유럽에 본부를 두었으므로 철저한 자체 보안의식으로 무장했고 또 이를 생활화했다.
 
당시 이들의 이주공작은 참으로 눈부셨다. 전쟁 중이므로 유럽에서는 고물선 한 척도 얻기가 힘들었다. 그리하여 미국까지 건너가서 녹쓴 헌 배를 사와야 했다. 또 배만 있으면 무엇하겠는가? 프랑스나 이태리 해안에 정박을 할만한 안전한 작은 항구도 찾아야 했다. 이들이 자주 이용한 항구는 쌍 제롬이나 그랑 아레나스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모사드에게는 또 고민이 있다. 당시 유럽 전역은 엄격한 식량통제를 받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 1만명에 가까운 이주대기자들을 먹이는 문제가 가장 어려웠다.
 
프랑스 말세이유시의 쌍 사르트역 근처 은밀한 장소에 교묘하게 각국의 여권을 위조해 만드는 공장이 있었다. 이곳 책임자는 츠비 디보스테인 박사, 그는 이스라엘 정부수립 후 재무부의 고관까지 지낸 경제전문가이다. 입국사증(VISA)도 필요했다. 이것만은 부득이 남미 모국의 영사를 거금을 주고 매수하여 사증을 대량으로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뿐 아니라 초기의 팔레스타인으로 건너간 청년들은 아랍의 위협 속에 준군사조직을 하면서(예를 들면 「하가나」도 그 조직중 하나이다) 한 손에는 총, 한 손에는 삽을 들고 조국을 개척해야 했으므로 막대한 량의 무기가 필요했다. 이러한 무기를 밀수, 조달하는 기관도 역시 모사드였다.
 
모사드의 창설 초기, 요원들 가운데는 주로 시온이스트들이 많았다. 그들은 대부분 애국심이 왕성한 지하 군사조직인 하가나에서 선발되었다. 모사드는 이스라엘 건국의 기초가 된 유태인 밀입국을 돕는 이민 및 이주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여 이스라엘의 주민수를 몇십배로 증가시켰다. 다음단계는 이스라엘의 안보를 위하여 무기를 밀수해 드려오는 공작이다.
 
이런 일화가 있다. 모사드는 제일먼저 유럽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군 가운데 유태인 여단(Jewish Brigade)을 목표로 정했다. 여단에 지급된 소총, 권총, 수류탄뿐 아니라 점령지에서 수거된 폐기해야할 무기를 은익하여 뒤로 빼돌렸다. 그리고 무기관리에 비교적 소흘한 미군부대를 선택하여 그부대내 무기를 절취하는 공작도 벌렸다.
 
이렇게 확보된 무기들은 모두 이태리 밀라노로 집결시켰다. 밀라노에는 건설 중장비를 생산하는 파브리카 몬티라는 회사가 있다. 모사드는 그 회사에게 이스라엘을 개척하기 위한 건설장비를 구매도하고 비밀리에 수집된 무기들을 그 사이에 끼어서 팔레스타인으로 옮기 수 있도록 교섭을 하였다. 다행이 그 회사는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었다. 통관에 필요한 서류에서 시작하여 일체의 서류는 물론, 장비속에 탄약까지 충분히 확보할 수 있도록 교묘하게 은익하여 수송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소총이나 간단한 박격포 등을 밀수하는 것은 그래도 쉬웠다. 가장 어려운 것은 항공기를 훔쳐내오는 것이다. 모사드는 이것도 감행했다. 불가능이 없다. 모사드요원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이 전후 잉여물자로 처리하는 컨스텔레이션형이나 커치스형의 수송기를 몰래 사들여 일단 중미국가로 보낸다. 거기서 이태리로 보내어 최종 도착지는 팔레스타인이 되는 것이다. 2차 대전당시 하늘의 요새라고 불리는 B-17형 폭격기는 전쟁 후 민간항공기로 개조했으나 이스라엘은 이를 밀수하여 다시 폭격기로 개조했다. 모사드는 위장영화회사를 설립하여 뉴질랜드 공군의 소개영화를 찍는다는 구실로 영국의 보파이터 폭격기를 임대한 후 이를 감쪽같이 콜시카 섬으로 빼돌린 후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보내었다. 이스라엘 공군은 결국 정식으로 전투기를 확보하여 창설한 것이 아니라, 모사드가 밀수한 각국의 비행기를 교묘히 개조하고 발전시켜서 창설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전 세계가 놀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유태인의 수가 많아지고 무기가 확보되었다고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주변 여러 나라의 정보가 절실히 필요했다. 아랍제국의 정보는 물론이고,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유태인 박해의 정보, 심지어 이주사업을 방해하는 영국의 기도도 상세히 파악해야 했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된 직후부터 이미 아랍제국의 위협속에 살수밖에 없는 것이 이스라엘의 국가적 숙명인 것이다. 직접적으로 위협을 가한 나라만해도 시리아, 이집트, 이락, 욜단, 레바논등 5개국이고 리비아와 예멘까지 합치면 면적으로는 50배, 인구로는 20배나 되었다. 안보상 전면적인 위협을 받고 있는 초대 수상 데이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아랍측의 정보가 생명선 이상으로 중요했다. 그리하여 수상으로 취임하면서 즉각적으로 독립투쟁 당시 있었던 모든 정보역량을 끌어 모아 재편을 했다. 최초에는 다섯 개 분야로 나누었다.
 
하나는 샤이(SHAI)라고 불리는 준군사조직 하가나의 정보기구였고, 둘째는 신 베스(SHIN BETH)라고 하는 국내보안기구, 세 번째는 영국위임통치하의 팔레스티나로 이주업무를 대행해준 알리야 베스(ALIYAH BETH), 모사드의 전신이다. 네 째는 외무부내에 설립되 정보국으로서 외국의 정보기관과의 협력을 위해 창설된 기구였다. 다섯 번째 기구가 경찰의 사찰기구였다. 이스라엘은 그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건국초기부터 이처럼 정보수사기관을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시일이 가면서 정보기관간에 협조도 잘 안되고 기관마다의 권한다툼과 업무의 중복에서 오는 공로경쟁이 기관의 효율을 떨어트리게 했다. 벤구리온 수상은 1951년 드디어 정보기관의 일대 수술을 가하고 재편했다.
 
우선 모든 국내 보안수사기능 즉 미국식으로는 FBI기능은 신 베스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대외 정보수집 기능은 양분하여 군사작전을 위한 적의 기도, 전략과 전술은 군 정보기관인 아만(AMAN)으로 귀속시켰고, 대외정보수집기능 즉 CIA기능은 모사드로 편입했다. 모사드는 엄격하게 그 기능을 풀이하면 정보의 수집과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기관(The Institution for Intelligence and Special Assignment)인 것이다.

4. 이스라엘의 정보운영체계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은 이제 보안수사기관, 국가정보수집기관, 그리고 군 정보수사기관으로 대별된다. 그러나 이 기관들이 어떻게 협조하고 상호 유기적인 관게를 유지하는가의 문제는 우리들에게 많은 참고가 될것이다.
 
텔 아비브의 북쪽 교외에 근대적인 오피스텔 건물이 있다. 1층에는 은행의 지점, 우체국, 여행사 사무실이 자리잡고있다 지하차고를 들어가면 입구에 각층마다의 입주자들의 표시가 되어 있다. 건축설계 사무소, 보험회사 대리점, 무역회사. 등등 바로 이 건물 꼭대기 층의 무역회사 사무실이 이스라엘의 국가안전보장회의 조정위원회( 히부리어로 Menoumeal Sherouthe Habitachon)자리잡고 있다. 이곳이야말로 안가(安家)인 것이다.
 
위원회의 의장은 통상 모사드의 부장이 겸임하는데 의장을 가리켜 메노메(Menoume), 즉 책임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부원들은 통상 그를 「영감」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조정위원회는 보통 매주 1회씩 개최된다. 의장인 모사드 부장의 오른쪽에는 군사정보기관인 아만의 장이 앉고, 왼쪽에는 국내 보안, 수사를 전담하는 신 베스의 장이 앉게된다. 다른 참석자는 외무성 조사국장과 해외 거주유태인을 관리하는 「유태인 사무국」의 장이 참석한다. 또 어떤 때는 경찰청장이 합석하기도 한다.
 
테이블에 약간 떨어져서는 벽면에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중동 여러 나라의 큰 지도가 걸려 있고 많은 보좌요원들이 그 앞 책상에 앉아서 충실히 위원들의 회의 진행을 돕고 있다. 기관원들이지만 현역도 평복을 입어서 신분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가끔 경제학자, 사회학자, 아랍문제 전문가, 또 원자물리학자도 초빙되는 경우도 있다.
 
회의 용어는 특별히 제한함이 없이 각 국어가 통용된다. 유태인들에게는 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장점이 있다. 그들은 유랑했던 역사로 인하여 외국어에 모두 유창하다.영어,프랑스어,러시아어,독일어,아랍어.등등 자유자재로 말해도 별 불편이 없다. 그러나 가급적 히부리어를 쓸려고 모두 노력한다. 그렇지만 히부리어는 언어로서 복원된 지 얼마 안되어 경어가 없어서 모두 반말로 말하게 된다는 점이 흠이란다.
 
위원들은 모두 커피나 홍차를 마시면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게 되고, 형식에 얽매인 그런 회의진행은 아닌 것 같다. 주례회의는 특별한 안건이 없어도 소집이 된다. 왜냐하면 기관간의 정보교환이나 업무조정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서로 중복되는 업무를 조정하고 한계를 분명히 하며, 또 문서로 서로 정보를 교환할 때 보다 회의 때 대화로 업무협조 하는 것이 훨씬 보안 유지의 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 회의체는 확실히 일체감을 갖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 나라에서도 정보조정회의가 있었지만 박종철 사건이후, 이러한 회의체를 「관계기관 연석회의」라 하여 정부가 마치 음모를 꾸미는 회의로 취급되어 중단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회의장소가 될만한 안가(安家)도 전면 폐쇄하여 과연 비밀을 유지해야할 정보기관간의 조정회의가 어디서 개최되는지 ? ..... 교각살우(矯角殺牛)의 감이 없지 않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의 체계도

수 상
국가안전보장회의
조정위원회
 
외무부 국방부 내무부
조사국 모사드 아 만 신 베스 유태인
사무국
 
5. 모사드의 요원들.
 
이스라엘의 건국과 그후 아랍과의 전쟁이나 위협 속에서 생존하기 위하여 많은 영웅적인 신화를 남긴 모사드 요원들은 대개 마치 007영화에 나오는 제임스 본드처럼 연상하기가 쉽다. 그러나 막상 그들을 만나보면 지극히 평범한 시민이요 공무원임을 알게되고 놀라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특수훈련을 받았다하여 미국 영화배우 슈와츠네거 처럼 체격이 건장하지도 않다. 그 가운데는 근시 안경을 쓴 학자형의 요원도 있고 상점이나 주유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네 아저씨 같은 인상의 요원도 있다.
 
모사드의 초대부장인 이세 하렐(Isser Harel)은 1968년 4월 26일 ꡔ마리브ꡕ지 기자와의 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나라 정보요원들은 문자 그대로 국가공무원이다. 그들은 어떠한 특권도 없다. 신분상으로는 모두가 민간인이다. 비록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요원이라 하더라도 봉급이외 한푼도 더 받지 아니한다. 유일한 특전이 있다면,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고 나면 고과 점수를 잘 받게 되고 결과적으로 연금에 가산점이 붙게된다는 것 외에는 다른 특전이 없다.
 
우리는 여성 정보요원들도 고용한다. 개중에는 대단히 중요하고도 위험한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한 여성들도 많다.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임무수행 중에 희생된 여성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의 절대적인 원칙이 있다. 그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여자 공작원의 성적인 매력을 이용하거나 성적인 유혹을 통하여 임무를 수행하여서는 안 된다는 철칙이다.“
 
모사드요원들은 통상 개별적으로 모집된다. 학생들이 대학에서 수업을 받고 있는 순간에도 모사드의 선발요원들이 멀리서 그들을 하나 하나 점검해 본다. 또 군복무 중 정보요원으로 소질이 있는 그런 병사에게는 선발요원들이 접근해 간다. 그들은 언제나 같은 말을 하면서 접근해간다. “국가의 안전보장을 위해서 싸우는 어떤 기관에 일할 생각이 없습니까?” 넌지시 묻는다. 선발요원들의 설득은 매우 집요하다. “무슨 일을 하는 곳입니까 ?” 반문하면 그들은 대개 이렇게 말한다. “무슨 특별한 일이 아니라, 예를 들면 몇 주일 동안 아랍에서 발행되는 신문을 집중적으로 읽고 그 중에서 기관에 도움이 될만한 기사를 스크랩하는 따위의 일입니다.”
 
일단 선발이 되면 요원들에 대한 훈련은 매우 엄격하다. 기억술, 미행감시의 발견 및 탈미법,무선통신,호신술,사격술,파괴활동을 위한 폭파술....등등. 교육은 철저히 1대1교육, 장소는 텔아비브 근처의 안가에서 이루어진다.
 
모사드요원들은 특수한 임무를 수행한다해도 특별한 명예를 얻거나 특전을 받지도 않는다. 그리고 영웅으로 환대를 받는 일도 없다. 이스라엘은 거물급 간첩에 대하 전설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독립투쟁 당시 모두가 영웅적으로 싸웠던 것이다. 또한 이 조그마한 나라에서 비밀공작기관에서 일했거나 협력한 사람은 부지기수다. 지금은 그들이 사업가로 생업에 종사하거나 고급공무원, 신문기자, 대학교수 등으로 활약하고 있다. 주변이 모두 적으로 포위된 이런 나라에서의 정보활동은 특수활동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이며 이스라엘의 독립과 생존을 보장하는 가장 정상적인 활동이다.
 
그래서 위에서 소개한 엘리 코헨의 미망인이나 유가족들도 국민들의 사랑과 추앙을 받고 있지만 텔아비브 교외의 조그마한 집에서 얼마 안 되는 연금으로 근근히 살아가고 있다. 소련에서는 1969년 리하르트 조르게의 초상화가 그려진 우표가 발행되어 그의 영웅적인 활동을 찬양하였으나 이스라엘은 그와 필적할만한 코헨에 대하여 어떤 특별한 예우도 한바가 없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모사드요원들은 아직도 조국을 배반한 일이 없을 정도로 사기가 높다. 그들은 임무를 수행 중에 실수를 범한 일은 있다. 물론 오판하여 큰 사건을 저지른 일을 말한다. 그러나 조국을 배반한 일은 아직 없다. 그것은 종교적인 결속력에서 기인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2천년간 세계를 유랑하면서 조국 없는 설음으로 다져진 조국애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모사드는 조국과 더불어 생성했고, 독립을 쟁취한 단체이고, 건국 후 몇 차례의 아랍의 침략을 목숨을 걸고 막아낸 정보기관이라는 전통에서 오는 자긍심의 영향이 가장 큰 요인일 것이다. 그리고 시온이스트들의 전통인 평등사상이 또한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있다. 모사드요원들이 전혀 자기의 공로를 자랑하거나 특권을 바라지 않는 그 태도는 평등사상에서 오는 미덕이라 본다. 걸핏하면 자기를 내세우는 속물들은 단결의 암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일찍이 터득한 것 같다.
 
모사드는 미국의 CIA와는 달리 절대로 신분을 감추고 있다. 그리고 본부가 어디 있는지도 일반국민은 잘 모른다. 어떤 요원은 가족도 남편이 무엇을 하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단지 국가 안전보장회의 같은 안보기관에서 일하겠지 추측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오늘날 각국의 정보기관들이 모두 기관 내 배반자 또는 외부에서 침투한 두더쥐(Mole,서방 정보기관들은 기관 내 침투한 스파이를 이렇게 부른다)로 골치를 앓고 있다. 천하무적을 자랑하던 미CIA의 소련담당 공작관이 조국을 배반하여 소련 내 정보망을 몽땅 팔아 넘긴 「에임스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모사드 내는 이런 류의 배반은 아직 없다. 그 이유는 모사드의 요원들이 이스라엘 국민이나 정부와 완전일체감을 갖는 애국적 전통 때문이다.
 
정보기관의 요체는 철저한 자체보안에 있다. 기관에 속해 있는 사람들도 인간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생활의 뒷받침을 보장함으로써 돈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야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요원들이 만족할만한 삶의 명분, 즉 삶의 근거나 대의를 세워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요원들은 스스로 “내가 왜 이렇게 남의 눈을 피하면서 고생하며 살아야 하지?” 이런 반문을 수없이 하게된다. 특히 적지에 들어가 상부의 지시나 통제가 없이 무엇이든지 완전히 자기의 재량과 판단으로 행동하는 공작원이나 스파이의 경우는 더욱 그가 하는 행동의 의미를 가슴에 뚜렷하게 심어주어야 한다.
 
자체 보안이 가장 강한 기관으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영국의 MI-6, 그 기관이 어디 있는지, 부장이 과연 누구인지 존재조차 노출이 안된 MI-6도 두더쥐때문에 신뢰가 떨어졌다. 공산주의, 소련을 위하여 조국을 배반한 맥크린(Donald Maclean), 바체스(Guy Burgess), 필비(Harold Philby), 브란트(Anthony Blunt), 빅터 로스칠트(Victor Rothschild)등 5명은 모두 동시대에 대학을 졸업한 수재들이다. 그들은 대학시절에도 진보적 성향이었으며 남달리 정의감도 강했다. 그들은 모두 MI-6의 정보요원으로 특채되어 스페인 내란 때 참전했다. 이때 이들은 영국의 정책이 오히려 프랑코 독재를 돕는 결과가 되어 크게 실망했다. 그리고 인민전선을 후원하던 소련쪽에 가담하여 공산주의 동조자로 변했다. 그후 이들이 저지른 배반행위는 영국의 이익에 치명적 영향을 주었다.
 
미국도 철통같은 CIA의 기율을 유지하여 왔지만 월남전 때 흔들리게 되었다. 기관 내 젊은 엘리트들이 미국의 월남전 개입의 뜻을 납득하지 못했다. 월남 반전운동의 목소리가 정보요원들에게도 영향을 준 것이다. 이때부터 기관의 배신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또한 남미의 정보공작에 대하여 회의를 품음 공작관들이 기관에서 이탈하는 징후도 보였다. 특히 미국이 칠레에 개입하여 아옌데 정권을 무력으로 전복시킨 데 대하여 불만을 가진 곳이다. 그 가운데 필립 에이지(Phillip Agee)도 있었다.
 
정보기관에 소속한 모든 요원들은 24시간 긴장 속에서, 몸이 어디에 있든 모두 적진 한 가운데서 묵묵히 싸움을 하는 전사들이다. 비록 본부의 데스크에서 일을 해도 머리는 모두 정보의 원천인 적진 내에 있고, 입수되는 정보도 모두 적진 내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그러므로 극단적으로 신경이 예민한 상태에 있고 또한 적의 정보를 항상 다루고 있으므로 자칫 적의 생각과 비슷하게 옮아가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유능한 정보기관일수록 기관 내 요원들에게 주기적으로 정신과의사 내지는 심리학 치료와 검진을 받는다.
이렇게 예민한 정보관들에게 본부에서 납득할 수 없는 임무가 부여될 때에는 역작용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경우에도 「코리아게이트」라는 박동선에 의한 미 의원 매수공작이 벌어졌을 때, 가장 신임을 받고 유능했던 주미대사관에 근무중인 김상근참사관과 주뉴욕총영사관 손영호영사가 미 기관에 자수하여 모든 비밀을 털어놓고 보호를 요청한 일이 있었다.
 
이처럼 정보요원들은 언제나 고독함 속에서 스스로의 삶의 가치를 실험하면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강력한 신앙심이라든가, 불타는 조국애라든가, 이데올르기에서 오는 강력한 사명의식 등등으로 무장되어야 스스로 강력해질 수 있다. 모사드 요원의 경우는 학대받은 민족으로서의 강력한 역사의식, 이스라엘민족의 역사를 유지해야한다는 강력한 사명감으로 무장되어 있다.
 
모사드 요원의 사명의식을 확인하고 증명하는 좋은 예가 있다. 바로 이들은 이스라엘의 치욕의 역사를 극복하기 위하여 아르헨티나에 피신해 있는 유태인 학살의 원흉 아이히만을 감쪽같이 납치하여 이스라엘 법정에 세웠던 것이다. 모사드가 이 공작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무려 3년이상이나 걸렸다. 아이히만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피신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것은 1957년 가을이었다. 모사드의부장 이세 하렐은 남미에서 납치하여 대려올 때 발생할 수 있는 국제적인 분쟁 가능성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고려사항을 모두 검토하여 공작계획을 수립했다. 그리고 당시 수상인 벤 그리온에게 상세히 보고했다. 수상은 즉각 한마디 “행동하시오”라고 명령했을 뿐이다. 나머지는 부장이 책임을 지는 것이다.
 
아이히만을 납치해 오는데는 예상외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모사드요원들은 끈질기게 그를 추적하여 1960년 3월21일 납치에 성공했다. 이 공작은 이세 하렐부장이 직접 아르헨티나까지 가서 진두지휘를 했다. 왜 이처럼 그들은 심혈을 기우려 아이히만을 이스라엘 법정에 세웠을까? 유태인 학살의 복수심 때문만일까? 아니다. 이스라엘은 민족의 보존을 국가의 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다. 이를 훼손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허락치 않는 것을 기본 철칙으로 삼고 있다.
 
우리 나라도 독립운동 과정에서는 안중근의사나 윤봉길의사처럼 일제침략의 원흉들을 처단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해방 후에도 만약에 일제의 헌병이나 특무경찰들에 의하여 우리 민족이 무고히 학살된 사실을 상세히 기억해 두었다가 민족의 이름으로 단 한건이라도 처단하였다면 이 처럼 민족허무주의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

5. 모사드는 오늘도 옛날과 똑같이 활동하고 있다
 
모사드는 민족의 자긍심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세계 어떤 곳에서 벌어지는 대 이스라엘 테로에 대하여도 반드시 보복을 한다. 79년 1월22일 하오 3시35분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 서부지역 투에 베로둔 거리에서 5명의 청년이 탄 시보레제 스테이션 웨이건 이 길가에 주차해 놓은 폭스바겐을 지나는 순간 폭음과 함께 시보레 위이건과 폭스바겐이 동시에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 차에 탄 5명을 포함 8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18명이 중경상을 당했다. 차에 타고 가다 당한 사람 가운데 한사람은 바로 야세르 아라파트 PLO의장의 경호책임자 알리 하산 살라메였다.
 
살라메는 원래 텔아비브 근교에서 출생했고, 쿠웨이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67년 중동전쟁에 참여하면서 팔레스타인 게릴라 조직인 알 파타에 가담했다. 그는 알 파타의 비밀조직인 「검은 9월단」을 창설할 정도로 과격했다. 그후 그는 72년5월 오카모도 고오조(岡本公三)등 일본 적군파에 의한 이스라엘 로드공항(현 벤 구리온 공항) 난사사건을 배후에서 조종했고, 역시 72년9월 뮌헨올림픽 이스라엘 선수촌 습격사건의 배후인물이라는 것이다. 74년 「검은9월단」이 해체되면서 살라메는 아라파트의 경호책임자로 측근이 된 것이다.
 
그러나 모사드는 뮌헨습격사건만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73년7월 놀웨이에서 살라메로 오인하고 무관한 모록코인 웨이터를 살해했다. 이는 모사드 역사상 치욕적인 오판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끈질긴 추적 끝에 드디어 7년만에 살라메를 찾아서 보복을 감행했다. 이 사건으로 팔레스타인 사람 3명을 포함하여 모사드요원 14명이 가담한 것으로 밝혀져 수배를 받았으나 종적을 감추어 찾지 못하고 있다고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보도했다.
 
그러면 모사드는 아라파트의 경호책임자까지도 마음만 먹으면 희생시킬 수 있었는데 어째서 아라파트 자신은 그대로 두었을까? 이번 중동평화회담이 끝난 후 밝혀진 바에 의하면 아라파트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 모사드의 첩자임이 들어났다. 따라서 모사드가 그 동안 아라 파트에게 여러차례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당신의 생명을 언제라도 끝내게 할 수 있오”라고 한말이 위협이 아니라 사실임이 들어 났다. 그러나 모사드는 아라파트를 그대로 활동하도록 보장했다. 어쩌면 이런 깊은 생각이 오늘날 중동의 평화를 가능케 한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능력이 있어도 행사치 않는 그 무서운 힘은 모사드의 현명한 판단 때문에 오래 지속되는 것이나 아닌지......
 
아랍이 이스라엘의 민족에게 피해를 주면 어떠한 경우에도 눈에는 눈이라는 보복을 반드시 하는 이스라엘의 집념, 그 실행자는 바로 모사드이다. 1976년 6월27일 이스라엘 관광객 약80명이 탑승한 에어 프랑스기가 팔레스타인 게릴라에 의하여 납치되어 아프리카의 우간다 엔테베 공항으로 날아간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 역시 모사드요원의 정확한 정보와 이스라엘 특공대의 치밀하고 용감한 작전에 의하여 7월3일, 40분 동안 작전으로 기적적으로 구출되었다.
 
작은 나라일수록 이와 같은 치밀하고 다부진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생존이 가능할 것이다. 모사드는 그런 면에서 이스라엘의 독립유지에 절대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건국 초기 모사드에게 부과되었던 임무 가운데 하나는 무기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와서도 아직 그 임무는 철저히 수행하고 있는 것 같다. 1969년 크리스마스 날 프랑스의 세르브르항에 건조가 끝난 포함 5척이 깜쪽 같이 사라졌다. 이스라엘측이 탐을 낼만큼 우수한 이 배들을 모사드요원들이 은밀히 정박해 있는 항구에 침투하여 야음을 타서 이 배들을 몰고 가 버린 것이다. 이 작전의 총책은 프랑스주재 이스라엘 대사관 영사인 모르데차이 리몬, 9년동안 파리에 주재하면서 유럽의 무기를 구매하는 사절단장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세계여론이 떠들썩하고 있는 틈을 타서 이틀후인 27일, 이스라엘 특공대는 이집트의 라스 가레브 기지에 침투하여 그 기지를 수 시간 점거하고 특공대가 대동한 전문기술자로 하여금 소련제 레이더시설을 분해하여 고스란히 헬리콥터로 실어갔다. 이 레이더는 사정거리 3백KM로 최신 이동식 저공비행기 탐지용 장비였다.
 
이스라엘이 생존을 위하여 외국으로부터 무기를 대량 확보하고 있지만 아랍의 보이코트 때문에 구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미국은 그래도 대 이스라엘 무기판매에 비교적 자유롭지만 유럽 여러 나라들은 아랍측의 눈치를 안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처럼 비합법적인 방법으로라도 무시를 확보할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은 핵무기를 보유하는데 필사적이라는 사실은 이미 널이 알려져 있다. 그래서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재임중 이를 감시하기 위하여 U-2기를 이스라엘의 디모나 기지를 여러 차례 비행하여 항공사진을 촬영토록 했다. 그리하여 58년말 드디어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으나 대통령선거로 별다른 대책을 강구하지 못했다. 그러나 후임 케네디 대통령은 벤 구리온 수상에게 이스라엘 핵무기 중지를 강력히 요청했다. 이스라엘측은 디모나 기지에 대한 사찰을 하도록 허락했지만 그때는 이미 가짜 핵 시설을 설치하여 단순한 핵을 연구하는 시설로 위장한 뒤였다.
 
그런 한편 이스라엘은 핵무기 개발을 계속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문제는 핵연료의 확보였다. 1968년 11월 17일 라이베리아 소속 화물선 치어스베르크호는 네델란드 안트와프항을 떠나 화물을 이탈리아의 제노아항까지 수송키로 되어 있었다. 화물은 농축우라늄 2백톤이었다.그러나 그배는 제노아에 입항하지 않고 터키의 이스텐데룬항으로 갔다. 그리고 화물은 감쪽같이 지중해 상에서 분실되었다.
 
우라늄이 분실된 사실도 근10년후인 1977년에 미 상원 정보위원회에서 정보를 입수하여 조사가 개시되면서 노출되었다. 그것도 놀웨이에서 체포된 모사드요원이 이 사실을 자백함으로써 노출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미 10년이나 지난 사실을 조사하기는 대단히 어려웠고 당시 승선했던 선원 한사람만 겨우 발견하고 사실을 확인한바 그 화물선은 지중해 상에 도착했을 때 정체불명의 포함(이 배도 프랑스에서 탈취해간 것이다)에게 포위되었다는 것이다. 이 배를 나포한 포함에 있는 자들은 화물선에 적재된 화물을 다른 화물선으로 옮겨 싣게 하고는 달아나 버렸다한다. 화물을 탈취당한 치어스베르크호는 할 수없이 터키로 향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화물이 탈취되었음을 신고조차 안 했다는 것이다. 물론 화물선의 선원은 모두가 이중여권을 소지한 이스라엘 선원이었다. 그후 이 배의 항해일지를 확인한바 그 날짜의 내용은 완전히 찢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까지도 한번도 이스라엘이나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이 사실을 시인한 사실이 없다.

6. 모사드는 국가 이익을 지키는 첨병이다.
 
정보기관이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철저한 민족주의, 어쩌면 국수주의에 가까운 생리를 가지고 있다. 만약에 국가의 이익을 지키지 못하고 외국의 정보기관에 의존하거나 종속된다면 벌써 그 나라는 엄격한 의미에서 독립국가는 아니다. 자기 나라의 기밀조차 지키지 못한 나라가 어떻게 독립국가라 할 수 있는가?
 
고르바쵸프에 의하여 냉전체제를 해소하고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이 한창 진행되는 그 시점에도 소련의 KGB는 미 CIA에 침투하여 거금을 들여 에임스라는 소련담당 공작관을 매수, 포섭하여 소련내 깔아 놓은 미국의 정보망을 일망타진했다. 미국과 러시아가 화해를 해도 정보전쟁은 계속되고 있다는 산 증거를 우리에게 제시한 것이다. 이처럼 국가이익은 어떠한 경우도 지켜야하는 것이 정보기관의 생명인 것이다.
 
모사드는 미국 CIA를 포함하여 서방의 정보기관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83년 레이건 행정부 때에는 이란 콘트라게이트에 모사드가 직접 개입하여 미국을 돕기도 했다. 그러나 국가이익이란 측면에서는 철두철미 경쟁관계에 있다. 정보기관간의 관계는 한마디로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말이 나타나듯 정보기관의 비정한 단면을 말해주고 있다.
 
미국의 월스트리트 신문은 70년대 미국과 이스라엘 양국간에 치열한 정보전을 벌렸음을 폭로하는 기사를 보도한바 있다. 즉 미국의 FBI가 24시간 이스라엘 대사관을 감시했고 심지어 대사관내에 도청장치까지 설치하여 장기간 감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군사기술을 수집하려는 모사드 요원들의 활동을 감시하면서 사전에 대상이 되는 정부관리, 과학자, 기술자들에게 통고하여 함정을 만들어 놓고 그들의 꼬리를 잡으려 하였다는 것이다.
 
미국 내 모사드지부장 라피 이탄은 80년초 부임하면서부터 미국 내 정보망을 확보하기 위하여 맹 활약 하였고 심지어 미국 CIA나 FBI에도 망을 설치하기 위하여 대담한 접근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미 국방부 내 중동의 대테러 담당 고위관리인 노엘 카치에게 접근하여 중동 테러에 관하여 협조하는 대가로 모사드의 비밀요원으로 활약해 달라는 요청을 한 바도 있다.
 
1987년 미국 해군 정보지원센터(NISC)에 근무하고 있던 죠나탄 폴라드라는 자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간첩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76년 스탠포드를 졸업한 우수한 학생이었지만 미CIA에 근무했던 아버지 임지인 이스라엘에 가서 생활하다가 모사드요원으로 선발되었다. 그리하여 귀국 후 해군에 입대하여 정보지원센터에 근무하면서 엄청난 양의 정보를 이스라엘에 빼 돌렸다. 리비아의 방공체계, 미국과 소련의 함대 능력판단, 소련의 대아랍 무기수출현황, 파키스탄의 핵무기 제조능력, 중동지역의 미 스파이들의 신원....등등 참으로 귀중한 정보들이었다.
 
모사드는 미국 내에서 당시 소련 다음으로 정보망을 가장 많이 확보한 나라였다. 그러므로 미국이 감시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이처럼 모사드는 미국과 긴밀한 정보협력 체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언제나 경쟁관계에 있다. 더욱이 미국에는 강력한 유태인사회(Jewish Community)가 형성하고 있으므로 모사드가 정보활동 하기에는 안성맞춤인 나라이다.

7. 결 론
모사드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정보기관이다. 그 역사는 비록 서방측 정보기관과 비교하여 짧지만 그 능력은 탁월하다. 그 이유는 첫째 모사드는 이스라엘 건국의 주역이란 사실이다. 우리 나라도 일제에 저항하여 독립 투쟁했던 단체들 예컨대 의열단(義烈團)이나 다물단(多勿團) 또는 白凡 金九선생이나 鄭華岩선생 같은 분들이 중국에서 지휘했던 조직들이 해방 후에 건국하면서 우리국가기관으로 편입되었더라면 훨씬 더 우리 나라 정보기관의 수준은 향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이 우리의 정보기관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위한 폭압기관이 접목된 불행한 역사를 갖고 있다. 그래서 민족의 이익보다는 집권자의 이익을 보장하는 도구로 전락되었던 쓰라린 과거가 있었든 것이다. 이에 대한 과감한 개혁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정보기관은 민족의 이익을 위해 싸운다면 외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협력할 것은 협력하지만 민족의 이익과 엇갈릴 때에는 과감하게 싸울 수 있는 단호함을 갖추어야 한다. 민족의 이익에 투철한 정보기관은 아마 그 뿌리에서 오는 힘을 받을 것이다. 우리 정보기관은 뿌리부터 철저하게 다시 정립할 수 있을까?
 
둘째. 정보기관은 항상 대중 속에 있어야 한다. 모택동(毛澤東)의 전술을 역으로 적용하여 말한다면 그는 “인민은 물이요 게릴라는 고기”라고 정의한바 있다. 이 말은 정보기관은 고기요 대중은 물이라는 말로 뒤집어 말할 수도 있다. 정보기관의 요원이야말로 대중 가운데 소리 없이, 은밀하게 위치해야 한다. 그리고 항상 대중과 더불어 있어야하고, 대중의 사랑을 받아야 정확하고, 적시의 정보가 입수 가능하다. 정보기관이 대중 위에 군림하거나 뻐기는 그 순간, 대중은 떠나게 된다. 그때는 양질의 정보도, 대중의 협조도 얻지 못할 것이다. 모사드는 전세계의 유태인 사회의 지지만 받아도 정보활동을 충실히 수행 가능하다. 그러므로 모사드는 언제나 유태민중의 희망하는 일들을 앞장서서 완벽하게 완수해 왔다.
 
셋째, 정보기관은 우수하고 능율적이어야 한다. 정보활동은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과학의 수준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이 되었어도 정보활동은 과학의 힘만으로 완수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에 의한 정보(Human-Intelligence, 약칭 HUM-INT라 한다)는 지금도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나 한국의 정보기관은 바로 HUM-INT에 있어서 취약하다. 너무 안이한 방식으로 정보기관을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정보기관을 운영하는 것 자체가 전문적인 분야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보기관을 전문화해야 한다. 정보기관이 정보, 수사, 보안을 모두 담당하게 되면 전문화 할 수가 없다. 작고도 알찬 정보의 전문 기관이 있어야 한다.
 
미국의 CIA처럼 워싱턴 근교 랭리(Langley)라는 곳에 거창한 건물에 존재하는 정보기관, 거기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전부 알고 지나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게되는 그런 기관이 과연 보안을 생명처럼 여기고 비밀이 보장되는 우수한 기관이 될 수 있을까? 미국이라는 나라의 거대한 국력 때문에 그래도 미국 CIA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런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의 기관들은 과연 어떤 쪽인가? 모사드처럼 그 존재조차 비익이 되어 있는가 아니면 완전히 노출되어 있는가? 이제 한국의 국가안전기획부는 또 하나의 구호, 즉 “우리는 미국의 CIA처럼 되지 말고 MOSSAD처럼 되어야한다”고 외칠 때가 된 것 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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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08/09 [18:0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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