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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를 넘어서, 다시 마르크스로
[논단] 마르크스 사후 122주기, 맑시즘에서 다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이태경   기사입력  2005/03/14 [09:17]
칼 마르크스, 예수 그리스도 이후 가장 유명한 사내
 
오늘로 마르크스가 사망한지 꼭 122년이 되었다. 독일 라인강변에 위치한 트리어에서 1818년 5월 5일에 태어난 마르크스는 지구라는 이름의 별에서 64년을 머물렀다. 한 개인의 생이 행복했는지 불행했는지를 타인이 규정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때로 무례하기까지 한 일일수 있겠지만, 외견상 마르크스의 일생을 순탄함이나 안온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핍진함이나 고단함과 더 가까웠다고 평가하는 것은 대체로 무난한 평가라고 할 것이다.
 
성년이 된 이후 거의 언제나 그를 따라다녔던 가난은 심지어 자식들마저 삼켰고 그는 아비된 자로서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경험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비범한 재능과 탁월한 지적성취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동안 그리 주목받지 못하는 주변부 지식인에 불과했다.
 
하긴 그 누가 대영박물관 도서관 구석에서 각종 통계와 자료들을 뒤적이며 아침부터 밤까지 연구에 몰두하던 이 초라한 행색의 사내가 후세에 그토록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긍정적인 의미건 부정적인 의미건 인류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마르크스에 필적할만한 영향력을 후세에 행사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흔히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을 기준으로 해서 역사를 주전(主前, BC)과 주후(主後,AD)로 나누는 것처럼 근대 인류의 지성사는 마르크스 이전과 이후로 확연히 구분된다.
 
마르크스가 철학자, 역사학자, 경제학자, 정치학자, 혁명가 등의 다양한 면모를 지녔던 만큼이나 그가 성취한 지적업적의 높이와 폭은 높고도 넓어서 이후의 인문, 사회과학의 다양한 분야들 가운데 마르크스에게 빚지지 않은 분야는 없다고 해도 좋을 지경이다.
 
마르크스의 지적성취들이 단지 책 속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마르크스 사후 그에 대한 평가가 그토록 상반될 이유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의 이론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주의 국가들이 한때 지구의 절반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이 마르크스의 이론에 얼마나 충실했는가 하는 논의는 차치하자!
 
철저히 비주류 이론에 불과했던 맑시즘은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고,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국가들이 점점 늘어날수록 영향력이 커져서 사회주의권에서는 확고한 국가 이데올로기가 되었고, 서구 자본주의 진영에서는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맑시즘이 최초 마르크스가 저술한 원형 그대로 지속되었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맑시즘은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러시아에서 레닌주의와 결합하여 변모했고, 중국에서는 마오이즘에 국가철학의 자리를 내주었으며 서구 유럽에서도 다양하게 해석되고 재해석되었다. 주지하다시피 북한의 국가이데올로기인 주체사상은 맑시즘의 극단적인 변종이며 사실상 맑시즘과는 전혀 근친성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권불십년’이고 ‘화무십일홍’이라고 했던가!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말미암아 맑시즘의 영향력은 현저히 줄어들었고 이제는 국가철학은 고사하고 학문의 영역에서도 보수주의자들의 엄살과는 달리 철저한 소수파로 전락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은 맑시즘을 흘러간 유행가로 취급하고, 조롱거리로조차 여기지 않고 있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교정할 길을 맑시즘에서 찾고 있지만, 이들의 눈물겨운 노력에 비해 사회적 반향은 매우 미미한 것이 현실이다.
 
한때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전복시킬 이론적 무기로 평가되었던 맑시즘이 급속히 활력을 잃어버린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맑시즘을 이론적 기반으로 해서 성립되었던 사회주의 국가들이 파죽지세로 무너지자 맑시즘의 이론정합성이나 현실설명력은 뿌리부터 흔들렸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과거 존재했던 사회주의 국가들이 과연 맑시즘을 충실히 실천했는지 여부를 둘러싼 논쟁은 무수히 많았다. 열혈 맑시스트들은 죽은 마르크스를 적극 옹호하면서 과거에 존재했던 사회주의 국가들이야말로 맑시즘를 배반한 원흉들이라고 격렬히 비난했다. 이들의 규정에 의하면 구(舊 )소련은 ‘관료적 노동자 국가’이거나 ‘국가자본주의’체제였고, 나머지 사회주의 국가들도 별반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이 경제를 운용함에 있어서 채택한 -이제는 확연히 실패로 판명된- 계획경제나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마르크스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인가? ‘시장’ 대신 ‘계획’을 택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선택은 레닌이나 스탈린만의 잘못이었을까?
 
위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 경제학이 담고 있는 핵심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마르크스 경제학이 지닌 비밀의 봉인을 열어갈수록 우리는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이 그토록 ‘시장’을 불신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흔히 맑시즘이라고 불리는 거대담론은 정치, 경제, 법률, 종교 등을 아우르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고갱이는 역시 경제학이라고 할 것이다. 청년 마르크스는 1845년 「도이치 이데올로기」를 탈고한 이후 이전의 관심사였던 철학에서 극적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경제학 공부에 매진하는데 이는 흔히 ‘인식론적 단절’로 표현되곤 한다.
 
이후 마르크스는 죽을 때까지 경제학 공부와 저술에 힘썼고 수다한 저작들을 남겼다. 물론 마르크스 경제학의 완결판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러나 정작 완독한 사람은 거의 없는 ‘자본’ 이다. ‘자본’이야말로 마르크스를 마르크스이게 하는 기념비적 저술인 것이다.
 
과연 잉여가치는 실재하는가?
 
그렇다면 ‘자본’으로 대표되는 마르크스 경제학의 요체는 어떤 것일까? 마르크스 경제학이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모순을 어떻게 밝혔길래 그토록 많은 추종자들과 반대자들을 낳았던 것인가? 진정 마르크스 경제학은 자본주의의 매커니즘을 석연히 드러냈는가? 마르크스 경제학을 짧은 지면을 통해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많은 무리를 무릅쓰고 이를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마르크스 경제학의 중핵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잉여가치론’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사상 중 잉여가치론이 마르크스의 가장 큰 학문적 공헌이라고 할 정도로 그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적어도 엥겔스의 눈에 잉여가치론은 “그 동안 모호했던 자본주의 사회를 대낮같이 밝혀주는 논리”였다. 엥겔스는 잉여가치론을 통해서 노동 착취가 과학적으로 입증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서 나타나는 노동과 자본의 적대적 모순의 생성과 변화 그리고 그것의 종착역이 수미일관되게 증명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잉여가치론이라는 거대한 구조물은 두 개의 기둥에 의해서 떠 받쳐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살아있는 노동만이 가치를 창조한다는 ‘노동가치론’과 임금은 항상 생존비에 머무른다는 ‘생존비임금론’이 바로 그 두 개의 기둥이다.
 
노동가치론이 잉여가치론을 위한 대전제라면 생존비임금론은 노동가치론을 임금결정에까지 적용하여 잉여가치의 소재를 밝히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잉여가치는 생존비임금론을 통해서 세상에 나타나지만 그 과정 역시 노동가치론을 통하지 않고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마르크스 경제학이 사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용어들은 노동가치론과 생존비임금론을 설명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보게 된다.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이라는 개념은 노동가치론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고, 지불노동인 필요노동과 부불노동인 잉여노동은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특수성을 밝힘과 동시에 임금이 생존비에 머문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다. 결국 이런 소(小)개념들은 궁극적으로 잉여가치를 지향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 밖에도 다양한 개념들과 이론적 장치들이 등장하지만 이들을 다 설명할 수는 없을 듯하니 아쉬운데로 위에서 거론된 개념들을 통해서 잉여가치론을 거칠게(?) 설명해 보자!
 
마르크스에 따르면 살아있는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 그리고 어떤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을 생산하는데 투여된 노동시간에 의해서 결정된다. 한편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고용해서 가치를 생산케 하는데 그들은 항상 노동자들이 실제로 생산한 가치 보다 임금을 적게 준다. 그리고 그 임금은 노동자들의 생존비 수준에 머문다.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생존비 수준의 임금을 주고 남는 부분이 바로 ‘잉여가치’인 것이다.
 
마르크스의 주장을 조금 더 따라가 보자!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고도화 될수록 자본의 집적과 집중이 일어나고 개별 자본 간에 경쟁이 심해진다. 개별 자본가들은 격심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기술개발과 경영혁신에 힘쓰고 그 결과 불변자본-예컨대 기계 등-의 비율을 높이게 된다. 이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라 칭하는데 불행히도 자본가들이 이렇게 할 수록 이윤율은 저하되는 경향이 있고-살아있는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명제를 상기하라- 이러한 경향이 심화되어 마침내 자본주의는 위기를 맞게 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론에 따르면 자본주의 체제는 언제나 불의한 결과를 낳는 ‘악마의 맷돌’에 다름아니고 노동자들의 투쟁은 늘 정당한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모순은 개혁이나 개량을 통해서 치유될 수 없고 자본주의 체제의 전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따지고 보면 ‘잉여가치론’으로 상징되는 마르크스의 주장이 그토록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그 논리의 수미일관성과 현실설명력 때문이었다. 마르크스가 활동하던 18세기 중후반의 영국과 유럽은 빈부의 격차가 극심하였다. 자본가들은 교외에서 안락한 생활을 즐긴 반면 노동자들은 돼지우리 보다 못한 거처에서 수십명씩 거주하며 하루 15시간 이상의 노동에 시달렸다.
 
공장과 탄광에서 여자와 아이들이 중노동에 신음하는 것은 예사였고 굶주림과 질병은 마치 그림자처럼 노동자들을 따라다녔다. 영양실조와 각종 질환에 시달린 노동자들은 파리처럼 죽어나갔다.
 
놀라운 것은 이런 결과가, 노동자들이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하루 15시간 이상의 노동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발생한다는 사실이었다. 청년 마르크스는 이런 현실에 격렬한 분노를 느꼈고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원인을 규명하는데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마르크스는 스미스, 리카도, 멜더스 등의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지적성취를 발판삼아 거대한 이론의 성채를 구축하는데 성공한다. 이 이론이 바로 앞에서 설명한 ‘잉여가치론’이다. 언뜻 봐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잉여가치론’은 이론체계가 수미일관할 뿐만 아니라 당대의 현실을 잘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점점 가난해지는 노동자들과 그 반대편에서 주체할 수 없이 많은 부를 키워가는 자본가들이 공존하는 이유는, 노동자들이 생산한 잉여가치를 자본가들이 합법적으로 착취하기 때문이라는 설명만큼 그럴듯하고 매력적인 주장이 또 있을까?
 
모순과 질곡으로 가득찬 자본주의 체제에 염증을 느껴 새로운 대안을 찾는 사람들에게 마르크스 경제학은 복음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 절망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사람들이 마르크스 경제학을 이론적 무기로 삼은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할 것이다. 또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던 혁명가들이 대부분 잉여가치론의 세례를 받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들이 시장을 극도로 불신하고 그 대안으로 ‘계획’을 고안해 낸 것도 일면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마르크스 경제학의 정수인 ‘잉여가치론’이 과연 이론정합성이나 현실설명력에서 정말 뛰어난가 하는 점이다.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잉여가치론’의 두 가지 기본전제는 ‘노동가치론’과 ‘생존비임금론’이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바와 같이 노동가치론은 실증된 이론이라기 보다는 ‘선언’에 가깝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가치의 실체는 노동이며 상품과 자본의 가치는 노동시간으로 측정된다는 전제를 수용하면, 자본은 가치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할 뿐이며 이윤은 노동착취의 결과라는 결론은 이미 예상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보면 잉여가치론은 설명이 아니라 동어반복에 불과한 것이다. 자본을 사용하면 생산량이 증가하지만, 노동시간으로 가치를 설명하는 맑스주의에서는 자본은 절대로 가치를 생산하지 못한다. 그러나 자본을 사용하게 되면 생산량이 늘어나는 현상을 꼭 그렇게 봐야할까? 이 부분에서 '억지’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 보다도 노동, 자본, 토지가 모두 상품생산에 기여한다고 보는 것이 보다 현실을 올바로 설명해주는 것이 아닐까?
 
또한 마르크스가 주장한 ‘생존비 임금론’ 역시 많은 난점들을 내포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생존할 당시에는 노동자들의 임금 수준이 생존비 수준에 머물렀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렇지 않은 노동자들이 훨씬 많은 것이 현실이다. 예컨대 서구 유럽의 노동자들에게 주택과 자가용 자동차, 적절한 여가활용, 장기간의 여름휴가 등은 자본가들이 제공하는 최저한의 임금을 통해 해결이 가능하다. 어떤 측면에서 보더라도 서구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이 생존비에 머문다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라는 평가를 면할 수 없을 듯 하다.
 
마르크스가 묵시론적으로 예측한 자본주의의 종말도 그리 잘 들어맞는것 같지는 않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해서 이윤율이 저하되고 이는 자본주의의 위기로 이어질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예측은 일견 그럴 듯 하지만 아직까지 실현된 예는 없는 듯 하다. 무엇보다 자본가들이 그런 행위가 자신들의 목줄을 조인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왜 계속 할 수 밖에 없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마르크스의 주장에는 빠져있다.
 
마르크스가 끊임없이 고안해 내었던 ‘사회적 필요노동’, ‘평균이윤율’, ‘복잡노동’, ‘단순노동’ 등의 개념들은 자신의 이론이 지닌 이러한 난점들을 보완하기 위한 피나는 노력은 아니었을까? 점점 가난해지는 노동자들과 부자가 되어가는 자본가들 사이에 존재하는 수수께끼를 풀기위해서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끊임없이 착취한다는 가정을 연역한 채 마침내 부여잡은 실마리가 ‘잉여가치’는 아니었을까?
 
노동자들이 계속 궁핍해지는 원인을 ‘잉여가치’에서 찾은 마르크스의 설명 보다는 그가 ‘본원적 축적’이라고 명명한 엔클로져 운동으로 인해서 농토를 잃은 수 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었고, 이들이 산업예비군으로 변하면서 임금이 하락하였다는 설명이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현실설명력이 떨어진다는 점과 여러 이론적 난점들을 감안해 보면 마르크스 경제학은, 정치한 논리와 빛나는 개념들의 출몰에도 불구하고 ‘허무의 언덕에 쌓아올린 논리의 바벨탑‘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러나 마르크스에게 배우자
 
맑시즘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잉여가치론’의 과학성이 뿌리채 흔들리고 있는 지금 마르크스는 완전히 잊혀져야 할 몽상가에 불과한가? ‘과학’이라고 자평했던 잉여가치론이 ‘헤겔적인 잠꼬대’로 취급되는 작금의 상황에서 마르크스에게 배울 것은 전혀 없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비록 그의 이론은 현실을 설명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의 정신은 언제까지나 계승되어야 할 인류의 값진 유산이다.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의 처지에 아파하고 그들을 집요하게 연민했던 마르크스의 정신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던지는 헌신으로 나타났다. 신자유주의의 파고가 모든 것을 삼키고 있는 오늘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야말로 우리가 항상 마르크스에게 배워야 할 덕목인 것이다.
 
그 밖에도 불의에 대한 저항, 체제가 처한 구조적 모순을 밝히려는 지적 탐구, 보다 인간다운 세상에 대한 꿈 등등 우리가 마르크스에게 배워야 할 것은 너무나 많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인간적인 것 가운데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라고 갈파했던 비범한 정신의 소유자 마르크스!
 
거짓 지식인들이 횡행하는 한국사회에서 새삼 그와 같은 헌걸찬 지식인이 그립다. / 편집위원
 
* 본문에서 남기업 박사의 논문 '헨리조지의 대안적 경제체제 연구'를 필자의 동의를 얻어 일부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 필자는 토지정의시민연대(www.landjustice.or.kr)의 정책위원으로 활동 중입니다.  

* 글쓴이는 <대자보> 편집위원, 토지정의시민연대(www.landjustice.or.kr) 사무처장, 토지+자유 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블로그는 http://blog.daum.net/changethecorea 입니다.
대자보 등에 기고한 칼럼을 모은 [한국사회의 속살] [투기공화국의 풍경]의 저자이고, 공저로는 [이명박 시대의 대한민국], [부동산 신화는 없다], [위기의 부동산]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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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03/14 [09:1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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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주 웃겨여 2005/10/06 [06:36] 수정 | 삭제
  • 헨리 포드

    "유대민족은 다른 모든 국가들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지상의 유일한 국가이다... 이 세상에서 오늘의 미국정부처럼 국제유대인에게 종속되어 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영국이 이런일을 했다’, ‘독일이 저런 일을 했다’고 떠들지만 사실 그 모두는 유대인들이 한 일이었다... 요즘 미국인은 전 세계에 타락하고 탐욕스럽고 잔인한 인간들로 알려져있다. 왜인가? 그것은 유대인들의 금권(金權)이 이 나라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천재성은 그들은 땅 대신 사람을 벗겨먹고 산다는 것이다. 그들은 다른 민족의 사람들처럼 땅을 일구거나 천연자원으로 상품을 생산하여 삶을 꾸려가는 대신 그런 일을 하는 다른 민족들의 피를 빨아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들판과 공장에서 땀을 흘리는 일은 다른 민족들에게 맡겨둔체 유대인은 이들이 거둔 결실을 착취한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의 기생적인 천재성이다.... 내가 국제유대 권력에 반대하는 이유는 모든 전쟁의 배후에는 그들이 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어느 나라가 승리하거나 패배하건 간에 돈의 권력은 항상 승리한다. 그 어떤 전쟁도 이들 없이는 시작되지 않고 그 어떤 전쟁도 이들의 허락없이는 끝나지 않는다. 내가 이들에 맞서는 이유는 이들은 조국도 없으면서 모든 나라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기 때문이다... 평화를 외치는 사람들은 대부분 전쟁이 왜 일어나는지도 모른다. 평화주의를 내건 단체들은 그저 표면 위에서 목청을 돋울 뿐이다. 국제자본이 모든 국가위에 군림하는 누상정부로 존재하는 한 평화는 불가능하다... 국제자본은 평화적인 산업이 아니라 전쟁으로 돈을 번다. 이러한 근원을 파헤쳐 이들을 대중에게 노출시키고 무력화시키지 않는다면 평화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 문제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국제적 돈의 권력은 유대인의 것이기 때문이다.” (Wall Street Journal, January 26, 1926)





    World Deceived by Jewish Matrix



    요즘이 아인슈타인 무슨 백주년이라서 그런지 출판사 홈페이지 몇 군데를 둘러보니 이름을 보아서는 유태인으로 보이는 저자들이 쓴 아인슈타인 책들이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계시된 본문을 조금 읽어봤는데 예상대로 아인슈타인과 같은 독일의 유태인들은 신의 선민다운 그들의 훌륭한 재능과 고결한 도덕성에도 불구하고 부당하게 핍박만 받았던 약소민족처럼 기술되어 있더군요. 이 분들의 출간방향이 어떤 것인지는 제가 잘 모릅니다만, 감히 말씀드리건데 그와 같은 허상을 전파하는 것이 그리 값진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미국과 유럽에 넘쳐나는 유태인 지식인, 언론인, 저술가, 식자들은 한결같이 그들 자신을 아무런 잘못도 없이 박해 받았던 뛰어난 민족으로 묘사하길 좋아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지난 세기 100년 동안 1억의 인류를 사지에 몰아넣은 공산주의 운동이 실제로는 유태인 대자본가들의 돈에 유태인 맑스주의자들의 거짓말과 증오가 합작된 유태인들만의 기독교 서구문명 전복운동이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또 그들 유태인이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정권을 장악한 다음 짜르와 그의 가족을 몰살시키고, 민중을 해방시키고 나라의 주인으로 만들어주겠다던 약속과는 정반대로 3천만의 무고한 러시아, 우크라이나, 발틱3국의 인민을 ‘반혁명분자’로 몰아 학살하고 나머지는 강제노동수용소에서 개나 소처럼 부렸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일찍이 유태인들의 공산주의혁명 운동과 더불어 이들이 퍼뜨렸던 허구, 기만적인 관념들의 폐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유태인들이 러시아의 주인이 되면 러시아 사람들의 가죽을 벗겨죽일거라고 예언했었습니다. 믿기 힘든 일이지만 이와같은 예언은 수십년 뒤 그의 조국에서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볼셰비키 비밀경찰 사령부의 지하실에서 유태인 고문관들은 재미삼아 희생자들의 사지를 절단하고 눈알을 뽑고 가죽을 벗겨 죽였습니다. 비슷한 시기 헝가리에서도 유태인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2차대전 발발 전 3년 동안 스페인에서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미국과 영국과 프랑스의 유태언론이 ‘민주화’ 운동으로 거짓선전한 이 나라의 國共내전에서 수많은 애국자와 성직자들이 가당치도 않은 ‘인민의 적’이란 혐의를 뒤집어 쓰고 유태인 공산주의자들에게 무참하게 살해되지 않았습니까? 스페인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는 구호를 외치며 세계각지에서 몰려든 유태인 공산주의 폭도들은 가톨릭 신부의 머리를 잘라 축구공처럼 차고 다녔다고 합니다.



    또한 ‘봉건왕정-민주정-공산주의’라는 그들만의 정권탈취 공식에 따라 인구의 1퍼센트도 안되는 그들이 자신의 조국이라고 여기지도 않았던 독일에서 좌익혁명을 일으켜 바이마르 공화국을 세우고는 볼셰비키 폭력혁명을 시도하다 독일 애국자들의 저항으로 수포로 돌아가자 ‘독일최초의 민주정’이라는 사탕발림 하에 국가의 요직을 독점하여 정치와 경제를 농단하고 진정한 독일인들을 빈곤과 절망에 몰아넣었던 사실을 아십니까? 오늘의 미국처럼 독일의 주요 대중매체를 소유했던 그들은 독일의 전통문화와 가치관을 조롱하고 깎아내리면서 공산주의와 반역, 부친살해, 마약사용, 프리섹스, 동성애와 포르노를 ‘모던’하며 ‘진보’적인 것으로 설교했습니다.



    유태인들은 한마디로 ‘남에 나라에 와서 X판치는’ 자기들에게서 정권을 빼앗은 히틀러를 정벌하기 위해 자기들이 일으킨 2차대전을 히틀러가 일으켰다고 거짓말합니다. 그들은 히틀러가 죽이지도 않은 600만명에 대해 떠들면서 자기들이 죽인 3천만과 지금도 그들이 죽이고 있는 팔레스타인과 이라크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습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국제적인 유태인 거물들의 압력으로 유럽과 캐나다에서는 이런 얘기를 하는 것조차가 불법입니다. 아도르노라는 유태인 맑스주의자는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건 야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의 동족인 유태인들이 죽인 사람들에 대해서 같은 비통함을 표시했다는 기록이 있습니까? 참으로 이 보다 더한 위선과 외식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2차대전에서 몇 명의 미국인, 영국인, 러시아인, 독일인, 프랑스인이 죽었는가를 한번 아무에게나 물어보십시오. 그들은 아마 대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몇 명의 유태인이 죽었는가하고 물으면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거의 모두가 “600만명”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런 일을 아무런 힘도 없는 약소민족이 성취할 수 있습니까?



    1차대전 직후 수백만의 아르메니아인들이 터키에게 ‘인종청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 누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그 때나 지금이나 아르메니아인들에겐 헐리우드 영화사나 CNN, ABC, CBS, HBO 방송국,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겐 또한 그들의 고난에 대한 정식학과를 개설해줄 하버드나 예일대학 교수도 없고 그들에게 만행을 저지른 범죄자들을 사냥하여 벌 줄 시몬비젠탈센터나 ADL도 없을 뿐더러 이런 단체들에 매년 수천만 달러에 달하는 돈을 기부해줄 세계적인 갑부들도 없습니다.



    유태인들은 자기들의 학정과 포학성에 견디다 못해 일어난 주인민족들을 파시스트, 나치, 테러리스트, 증오범죄자, 크랙팟, OOO 등으로 손가락질하며 공격합니다. 그리고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CNN만이 전부인줄 아는 한국사람들은 나치와 아랍 테러리스트는 이유없이 유태인과 그들이 꿰차고 있는 미국을 증오하는 흉악무도한 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양심적인 미국인들이 이스라엘에 종속된 미국정부의 중동정책을 비판하고 있지만 물론 한국사람들은 이들이 벌인 시위나 이들이 쓴 글들에 대해 알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태인 언론은 이들에 대한 기사를 한 줄도 보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며 보도를 하더라도 실상 미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진정한 애국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을 반유대주의 극우분자나 인종증오자들로 왜곡 폄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한국에 있는 사람들도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하게 될 테지요.



    한국인들, 특히 한국의 식자들은 좌우를 떠나 유태인의 정신적 노예나 다름없습니다. 칼 맑스, 촘스키, 마르쿠제, 루카치, 홉스봄, 포퍼, 마이제스, 그람시, 프롬, 노이만, 벤야민, 라캉, 레비스트로스, 데리다, 푸코, 프로이드, 베르그송, 프리드먼, 월러스틴, 호로위츠, 스트라우스, 아인 랜드, 아렌트, 손택, 글로리아 스타이넘, 제레미 리프킨, 앨빈 토플러, 피터 드러커 etc etc... 우리 나라 지식인들이 신주처럼 떠받드는 서구의 지식인들은 죄다 유태인들입니다. 칸트나 피히테, 볼테르나 토크빌 같은 진짜 유럽인 사상가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이것이 진정 유태인이 만들어내는 무슨 무슨 ‘주의(-ism)'들이 인류의 복지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들 사이에서는 ’창녀의 자식‘으로 부르는 예수님을 필두로 기독교에 대한 모든 것을 증오하는 유태인 맑스주의 지식인들이 퍼뜨린 계급투쟁론이 20세기 전반 유럽과 후반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어떤 비극을 초래했습니까? 아직까지도 ‘진보적’ 유태인들의 사상적 독소에 찌들어 있는 우리 나라의 좌파 식자들과 현재 우리사회의 좌우 분열상이 이와 무관하다고 보십니까?



    요즘 뭐한다는 사람들이 TV에 나와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똘레랑스나 다양성이나 문화적 다원주의가 뭔지나 알고 하는 소린지 정말 한심할 따름입니다. 미국의 니오콘을 논하며 미국이 보수화되고 있다 떠드는 사람들도 한심하긴 마찬가지 입니다. 이들은 미국이 어떻게 굴러가는 나라인지 개념조차 없습니다. 이들은 미국이 보수우경화되고 있다 떠들지만 그렇다면 미국정부가 왜 해마다 더 많은 제3세계 이민자들을 받아들여 진짜 미국인들을 그들의 조상이 세운 나라에서 소수민족으로 만들려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죽는날까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아파타이드를 지지했던 유태인 데리다가 왜 미국과 유럽을 상대로는 무제한적 이민자 수용으로 민족국가를 해체해버려야 한다고 설교했는지도 알턱이 없겠지요.



    모 일보를 보니 그 신문의 러시아 특파원이라는 분은 우크라이나의 유센코가 대통령이 된걸가지고 오렌지혁명이니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써놓았더군요. 아마 다른 신문들도 논조가 비슷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서방의 주류라는 AP, 로이터, 타임, 뉴스위크 같은 유태인 선전매체들은 절대진리일 테니까요. 그러나 이들은 유태언론이 쳐놓은 ‘신자유주의 개혁’이라는 연막 뒤에서 국제적인 유태인 머니맨들이 벌이는 ‘민영화’노름이 뭘 의미하는지를 모르며, 우크라이나의 기간자본을 ‘민영화'하기로 약속한 유센코를 이스라엘과 월스트릿이 밀어주었다는 사실도 모릅니다. 조지 소로스의 무슨 열린사회 재단인가 하는 희한한 단체가 동구권에서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감감합니다. 유태인들이 소유하고 제작하는 타임紙가 “현대의 로빈후드”로 띄워주고, 칼 포퍼라는 고상한 유태인 철학자를 추종하는 소로스인 만큼 좋은 일을 하고 있겠지 정도로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진실입니까?



    사람이 자기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일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릴려면 양쪽의 얘기를 다 들어봐야 합니다. 그러니 누구를 심판할 때 원고와 피고의 말을 다 들어보는게 아니겠습니까? 왜 사람들은 유태인들의 말만 듣고 그들의 거짓말과 절반의 진실만을 믿는 걸까요?



    예수님은 오늘날 유태인의 조상인 바리새인들을 일컬어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찬 독사의 자식들”이라 하셨고 그들의 감화를 경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말세에 가서는 거짓말이 진실이 되고 악인이 선인으로 둔갑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루터와 쇼펜하워는 유태인을 거짓말의 천재라고 불렀습니다. 프랑스의 문호 위고는 “거짓말과 도둑질이야말로 유태인의 표상”이라고 그의 작품에 썼습니다.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수상은 유태인은 남의 나라 사람들을 부려 그들의 전쟁을 치르게 한다고 했고 그리스의 작곡가 테오도라키스는 유태인은 만악의 근원이라 했습니다. 그들이 단지 유태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단순한 인종적 증오심이나 유태인이 가진 재물과 권세를 시기해서 그런 말을 했던 것입니까?



    로마 정치가 키케로는 사람이 역사를 모르면 평생 어린애로 남는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중동에서 미국의 부시가 치르고 있는 ‘테러와의 전쟁’이 유태인 월포위츠나 뉴욕타임스의 크로새머가 말하는 것처럼 중동인들의 “자유해방”과 “민주주의”를 위한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믿는 분들께, 주제넘지만 꼭 들려드리고 싶은 얘기입니다.

  • sk 2005/03/19 [02:30] 수정 | 삭제
  • 당신이 한 말은 이미 자본론에 조목조목 설명이 되어 있다구,
    주류 경제학의 피상적인 잣대로 해석하려 하니 이런 망발을해 대지
  • 2005/03/17 [11:26] 수정 | 삭제
  • ㅇ토지역시 노동자의 노동력 없이는 "쓸모있는, 생산력을 갖춘" 토지가 될 수 없다. 토지 그자체로써 의미를 갖고 잉여가치를 생산해 내지 못한다.

    ㅇ생존비 임금론 역시, 지금 시대에는 맞지 않는다는 말...
    원시시대(먹고살기에 급급햇던 시기)에서 기계로 상품을 생산하는 시대(생산력의 향상)로 변화되어 왓듯이,
    지금의 시대는 첨단기계에 의한 생산력의 과잉시대이다. 이 첨단기계역시 노동에 의해 만들어졌다는건 빼놓더라도,
    현시대의 상품은 생필품외에 문화예술, 서비스등 눈에 보이지 않은 상품이 다수를 점하고, 이역시 자본가들이 노동자의 노동력을 통해 만들어낸 상품으로 이 상품의 소비를 원활하게 하여 이득을 취하기 위해선 이런 문화활동, 서비스 소비활동을 할 만큼의 임금을 노동자에게 주어야 하는것이다.
    노동자가 곧 소비자이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왜 이런 눈에 보이는것들을 외면하고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론등이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단언하는지 알수 없다


  • lifa 2005/03/16 [19:35] 수정 | 삭제
  • "그러나 자본을 사용하게 되면 생산량이 늘어나는 현상을 꼭 그렇게 봐야할까? 이 부분에서 '억지’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 보다도 노동, 자본, 토지가 모두 상품생산에 기여한다고 보는 것이 보다 현실을 올바로 설명해주는 것이 아닐까?"

    이 역시 '억지'로 느껴지는군요.

    1원의 자본이 100원의 상품을 만들어 낸다는 말과 1원의 자본이 1원의 상품을 만들어낸다는 말,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이 억지입니까?
  • 마담 2005/03/15 [13:27] 수정 | 삭제
  • 수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