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마르크스, 예수 그리스도 이후 가장 유명한 사내 오늘로 마르크스가 사망한지 꼭 122년이 되었다. 독일 라인강변에 위치한 트리어에서 1818년 5월 5일에 태어난 마르크스는 지구라는 이름의 별에서 64년을 머물렀다. 한 개인의 생이 행복했는지 불행했는지를 타인이 규정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때로 무례하기까지 한 일일수 있겠지만, 외견상 마르크스의 일생을 순탄함이나 안온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핍진함이나 고단함과 더 가까웠다고 평가하는 것은 대체로 무난한 평가라고 할 것이다.
성년이 된 이후 거의 언제나 그를 따라다녔던 가난은 심지어 자식들마저 삼켰고 그는 아비된 자로서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경험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비범한 재능과 탁월한 지적성취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동안 그리 주목받지 못하는 주변부 지식인에 불과했다.
하긴 그 누가 대영박물관 도서관 구석에서 각종 통계와 자료들을 뒤적이며 아침부터 밤까지 연구에 몰두하던 이 초라한 행색의 사내가 후세에 그토록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긍정적인 의미건 부정적인 의미건 인류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마르크스에 필적할만한 영향력을 후세에 행사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흔히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을 기준으로 해서 역사를 주전(主前, BC)과 주후(主後,AD)로 나누는 것처럼 근대 인류의 지성사는 마르크스 이전과 이후로 확연히 구분된다.
마르크스가 철학자, 역사학자, 경제학자, 정치학자, 혁명가 등의 다양한 면모를 지녔던 만큼이나 그가 성취한 지적업적의 높이와 폭은 높고도 넓어서 이후의 인문, 사회과학의 다양한 분야들 가운데 마르크스에게 빚지지 않은 분야는 없다고 해도 좋을 지경이다.
마르크스의 지적성취들이 단지 책 속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마르크스 사후 그에 대한 평가가 그토록 상반될 이유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의 이론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주의 국가들이 한때 지구의 절반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이 마르크스의 이론에 얼마나 충실했는가 하는 논의는 차치하자!
철저히 비주류 이론에 불과했던 맑시즘은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고,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국가들이 점점 늘어날수록 영향력이 커져서 사회주의권에서는 확고한 국가 이데올로기가 되었고, 서구 자본주의 진영에서는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맑시즘이 최초 마르크스가 저술한 원형 그대로 지속되었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맑시즘은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러시아에서 레닌주의와 결합하여 변모했고, 중국에서는 마오이즘에 국가철학의 자리를 내주었으며 서구 유럽에서도 다양하게 해석되고 재해석되었다. 주지하다시피 북한의 국가이데올로기인 주체사상은 맑시즘의 극단적인 변종이며 사실상 맑시즘과는 전혀 근친성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권불십년’이고 ‘화무십일홍’이라고 했던가!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말미암아 맑시즘의 영향력은 현저히 줄어들었고 이제는 국가철학은 고사하고 학문의 영역에서도 보수주의자들의 엄살과는 달리 철저한 소수파로 전락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은 맑시즘을 흘러간 유행가로 취급하고, 조롱거리로조차 여기지 않고 있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교정할 길을 맑시즘에서 찾고 있지만, 이들의 눈물겨운 노력에 비해 사회적 반향은 매우 미미한 것이 현실이다.
한때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전복시킬 이론적 무기로 평가되었던 맑시즘이 급속히 활력을 잃어버린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맑시즘을 이론적 기반으로 해서 성립되었던 사회주의 국가들이 파죽지세로 무너지자 맑시즘의 이론정합성이나 현실설명력은 뿌리부터 흔들렸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과거 존재했던 사회주의 국가들이 과연 맑시즘을 충실히 실천했는지 여부를 둘러싼 논쟁은 무수히 많았다. 열혈 맑시스트들은 죽은 마르크스를 적극 옹호하면서 과거에 존재했던 사회주의 국가들이야말로 맑시즘를 배반한 원흉들이라고 격렬히 비난했다. 이들의 규정에 의하면 구(舊 )소련은 ‘관료적 노동자 국가’이거나 ‘국가자본주의’체제였고, 나머지 사회주의 국가들도 별반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이 경제를 운용함에 있어서 채택한 -이제는 확연히 실패로 판명된- 계획경제나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마르크스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인가? ‘시장’ 대신 ‘계획’을 택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선택은 레닌이나 스탈린만의 잘못이었을까?
위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 경제학이 담고 있는 핵심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마르크스 경제학이 지닌 비밀의 봉인을 열어갈수록 우리는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이 그토록 ‘시장’을 불신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흔히 맑시즘이라고 불리는 거대담론은 정치, 경제, 법률, 종교 등을 아우르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고갱이는 역시 경제학이라고 할 것이다. 청년 마르크스는 1845년 「도이치 이데올로기」를 탈고한 이후 이전의 관심사였던 철학에서 극적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경제학 공부에 매진하는데 이는 흔히 ‘인식론적 단절’로 표현되곤 한다.
이후 마르크스는 죽을 때까지 경제학 공부와 저술에 힘썼고 수다한 저작들을 남겼다. 물론 마르크스 경제학의 완결판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러나 정작 완독한 사람은 거의 없는 ‘자본’ 이다. ‘자본’이야말로 마르크스를 마르크스이게 하는 기념비적 저술인 것이다.
과연 잉여가치는 실재하는가? 그렇다면 ‘자본’으로 대표되는 마르크스 경제학의 요체는 어떤 것일까? 마르크스 경제학이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모순을 어떻게 밝혔길래 그토록 많은 추종자들과 반대자들을 낳았던 것인가? 진정 마르크스 경제학은 자본주의의 매커니즘을 석연히 드러냈는가? 마르크스 경제학을 짧은 지면을 통해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많은 무리를 무릅쓰고 이를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마르크스 경제학의 중핵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잉여가치론’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사상 중 잉여가치론이 마르크스의 가장 큰 학문적 공헌이라고 할 정도로 그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적어도 엥겔스의 눈에 잉여가치론은 “그 동안 모호했던 자본주의 사회를 대낮같이 밝혀주는 논리”였다. 엥겔스는 잉여가치론을 통해서 노동 착취가 과학적으로 입증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서 나타나는 노동과 자본의 적대적 모순의 생성과 변화 그리고 그것의 종착역이 수미일관되게 증명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잉여가치론이라는 거대한 구조물은 두 개의 기둥에 의해서 떠 받쳐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살아있는 노동만이 가치를 창조한다는 ‘노동가치론’과 임금은 항상 생존비에 머무른다는 ‘생존비임금론’이 바로 그 두 개의 기둥이다.
노동가치론이 잉여가치론을 위한 대전제라면 생존비임금론은 노동가치론을 임금결정에까지 적용하여 잉여가치의 소재를 밝히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잉여가치는 생존비임금론을 통해서 세상에 나타나지만 그 과정 역시 노동가치론을 통하지 않고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마르크스 경제학이 사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용어들은 노동가치론과 생존비임금론을 설명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보게 된다.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이라는 개념은 노동가치론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고, 지불노동인 필요노동과 부불노동인 잉여노동은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특수성을 밝힘과 동시에 임금이 생존비에 머문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다. 결국 이런 소(小)개념들은 궁극적으로 잉여가치를 지향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 밖에도 다양한 개념들과 이론적 장치들이 등장하지만 이들을 다 설명할 수는 없을 듯하니 아쉬운데로 위에서 거론된 개념들을 통해서 잉여가치론을 거칠게(?) 설명해 보자!
마르크스에 따르면 살아있는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 그리고 어떤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을 생산하는데 투여된 노동시간에 의해서 결정된다. 한편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고용해서 가치를 생산케 하는데 그들은 항상 노동자들이 실제로 생산한 가치 보다 임금을 적게 준다. 그리고 그 임금은 노동자들의 생존비 수준에 머문다.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생존비 수준의 임금을 주고 남는 부분이 바로 ‘잉여가치’인 것이다.
마르크스의 주장을 조금 더 따라가 보자!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고도화 될수록 자본의 집적과 집중이 일어나고 개별 자본 간에 경쟁이 심해진다. 개별 자본가들은 격심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기술개발과 경영혁신에 힘쓰고 그 결과 불변자본-예컨대 기계 등-의 비율을 높이게 된다. 이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라 칭하는데 불행히도 자본가들이 이렇게 할 수록 이윤율은 저하되는 경향이 있고-살아있는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명제를 상기하라- 이러한 경향이 심화되어 마침내 자본주의는 위기를 맞게 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론에 따르면 자본주의 체제는 언제나 불의한 결과를 낳는 ‘악마의 맷돌’에 다름아니고 노동자들의 투쟁은 늘 정당한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모순은 개혁이나 개량을 통해서 치유될 수 없고 자본주의 체제의 전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따지고 보면 ‘잉여가치론’으로 상징되는 마르크스의 주장이 그토록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그 논리의 수미일관성과 현실설명력 때문이었다. 마르크스가 활동하던 18세기 중후반의 영국과 유럽은 빈부의 격차가 극심하였다. 자본가들은 교외에서 안락한 생활을 즐긴 반면 노동자들은 돼지우리 보다 못한 거처에서 수십명씩 거주하며 하루 15시간 이상의 노동에 시달렸다.
공장과 탄광에서 여자와 아이들이 중노동에 신음하는 것은 예사였고 굶주림과 질병은 마치 그림자처럼 노동자들을 따라다녔다. 영양실조와 각종 질환에 시달린 노동자들은 파리처럼 죽어나갔다.
놀라운 것은 이런 결과가, 노동자들이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하루 15시간 이상의 노동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발생한다는 사실이었다. 청년 마르크스는 이런 현실에 격렬한 분노를 느꼈고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원인을 규명하는데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마르크스는 스미스, 리카도, 멜더스 등의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지적성취를 발판삼아 거대한 이론의 성채를 구축하는데 성공한다. 이 이론이 바로 앞에서 설명한 ‘잉여가치론’이다. 언뜻 봐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잉여가치론’은 이론체계가 수미일관할 뿐만 아니라 당대의 현실을 잘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점점 가난해지는 노동자들과 그 반대편에서 주체할 수 없이 많은 부를 키워가는 자본가들이 공존하는 이유는, 노동자들이 생산한 잉여가치를 자본가들이 합법적으로 착취하기 때문이라는 설명만큼 그럴듯하고 매력적인 주장이 또 있을까?
모순과 질곡으로 가득찬 자본주의 체제에 염증을 느껴 새로운 대안을 찾는 사람들에게 마르크스 경제학은 복음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 절망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사람들이 마르크스 경제학을 이론적 무기로 삼은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할 것이다. 또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던 혁명가들이 대부분 잉여가치론의 세례를 받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들이 시장을 극도로 불신하고 그 대안으로 ‘계획’을 고안해 낸 것도 일면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마르크스 경제학의 정수인 ‘잉여가치론’이 과연 이론정합성이나 현실설명력에서 정말 뛰어난가 하는 점이다.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잉여가치론’의 두 가지 기본전제는 ‘노동가치론’과 ‘생존비임금론’이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바와 같이 노동가치론은 실증된 이론이라기 보다는 ‘선언’에 가깝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가치의 실체는 노동이며 상품과 자본의 가치는 노동시간으로 측정된다는 전제를 수용하면, 자본은 가치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할 뿐이며 이윤은 노동착취의 결과라는 결론은 이미 예상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보면 잉여가치론은 설명이 아니라 동어반복에 불과한 것이다. 자본을 사용하면 생산량이 증가하지만, 노동시간으로 가치를 설명하는 맑스주의에서는 자본은 절대로 가치를 생산하지 못한다. 그러나 자본을 사용하게 되면 생산량이 늘어나는 현상을 꼭 그렇게 봐야할까? 이 부분에서 '억지’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 보다도 노동, 자본, 토지가 모두 상품생산에 기여한다고 보는 것이 보다 현실을 올바로 설명해주는 것이 아닐까?
또한 마르크스가 주장한 ‘생존비 임금론’ 역시 많은 난점들을 내포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생존할 당시에는 노동자들의 임금 수준이 생존비 수준에 머물렀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렇지 않은 노동자들이 훨씬 많은 것이 현실이다. 예컨대 서구 유럽의 노동자들에게 주택과 자가용 자동차, 적절한 여가활용, 장기간의 여름휴가 등은 자본가들이 제공하는 최저한의 임금을 통해 해결이 가능하다. 어떤 측면에서 보더라도 서구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이 생존비에 머문다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라는 평가를 면할 수 없을 듯 하다.
마르크스가 묵시론적으로 예측한 자본주의의 종말도 그리 잘 들어맞는것 같지는 않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해서 이윤율이 저하되고 이는 자본주의의 위기로 이어질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예측은 일견 그럴 듯 하지만 아직까지 실현된 예는 없는 듯 하다. 무엇보다 자본가들이 그런 행위가 자신들의 목줄을 조인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왜 계속 할 수 밖에 없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마르크스의 주장에는 빠져있다.
마르크스가 끊임없이 고안해 내었던 ‘사회적 필요노동’, ‘평균이윤율’, ‘복잡노동’, ‘단순노동’ 등의 개념들은 자신의 이론이 지닌 이러한 난점들을 보완하기 위한 피나는 노력은 아니었을까? 점점 가난해지는 노동자들과 부자가 되어가는 자본가들 사이에 존재하는 수수께끼를 풀기위해서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끊임없이 착취한다는 가정을 연역한 채 마침내 부여잡은 실마리가 ‘잉여가치’는 아니었을까?
노동자들이 계속 궁핍해지는 원인을 ‘잉여가치’에서 찾은 마르크스의 설명 보다는 그가 ‘본원적 축적’이라고 명명한 엔클로져 운동으로 인해서 농토를 잃은 수 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었고, 이들이 산업예비군으로 변하면서 임금이 하락하였다는 설명이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현실설명력이 떨어진다는 점과 여러 이론적 난점들을 감안해 보면 마르크스 경제학은, 정치한 논리와 빛나는 개념들의 출몰에도 불구하고 ‘허무의 언덕에 쌓아올린 논리의 바벨탑‘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러나 마르크스에게 배우자 맑시즘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잉여가치론’의 과학성이 뿌리채 흔들리고 있는 지금 마르크스는 완전히 잊혀져야 할 몽상가에 불과한가? ‘과학’이라고 자평했던 잉여가치론이 ‘헤겔적인 잠꼬대’로 취급되는 작금의 상황에서 마르크스에게 배울 것은 전혀 없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비록 그의 이론은 현실을 설명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의 정신은 언제까지나 계승되어야 할 인류의 값진 유산이다.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의 처지에 아파하고 그들을 집요하게 연민했던 마르크스의 정신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던지는 헌신으로 나타났다. 신자유주의의 파고가 모든 것을 삼키고 있는 오늘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야말로 우리가 항상 마르크스에게 배워야 할 덕목인 것이다.
그 밖에도 불의에 대한 저항, 체제가 처한 구조적 모순을 밝히려는 지적 탐구, 보다 인간다운 세상에 대한 꿈 등등 우리가 마르크스에게 배워야 할 것은 너무나 많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인간적인 것 가운데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라고 갈파했던 비범한 정신의 소유자 마르크스!
거짓 지식인들이 횡행하는 한국사회에서 새삼 그와 같은 헌걸찬 지식인이 그립다. / 편집위원
* 본문에서 남기업 박사의 논문 '헨리조지의 대안적 경제체제 연구'를 필자의 동의를 얻어 일부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 필자는 토지정의시민연대(
www.landjustice.or.kr)의 정책위원으로 활동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