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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닫힌 성찰에 대해
문부식 씨의 조선일보 인터뷰 발언과 관련하여
 
정문순   기사입력  2002/07/26 [02:31]
80년대 운동 주체들의 반성과 성찰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 90년대에 들어서였으니, 과거의 ‘전사’가 이제 또 한편의 ‘반성문’을 제출한다고 하여 그리 새삼스럽거나 이채로운 일은 아닐 것이다. 문부식 씨가 책의 출간을 즈음하여 신문사의 인터뷰에서 행한 발언이 그런 낯익음을 넘어서지 않았다면, 더욱이 그 발언이 조선일보의 입을 빌려 나오지 않았더라면, 그의 행보 역시 오히려 늦은 감이 있는 진보적 인사의 자기 반성이라는 반응을 넘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관련기사] 변희재, 당대비평이여, 답하라. {조선일보}를 어떻게 할 것인가? 대자보 52호
[참고기사] 김명인, "동의대사건 '민주화 인정' 못한다면-'내 안의 폭력' 뒤늦게 눈뜬 자 착시", 오마이뉴스

{IMAGE2_RIGHT}그 동안 당대비평이 중점을 기울여온 ‘우리 안의 파시즘’ 기획이 종종 진보적 지식인들로부터 받아온 비판과, 이들이 안티조선 운동과 빚은 갈등 등으로 인해 이 잡지의 진보성을 확신할 수 없다고 생각해온 사람이라면, 편집위원인 문부식 씨의 자기 반성이 (진보적 관점에서) 상궤를 벗어났다고 하여 그리 놀랍게 받아들일 일은 아닌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 항쟁과 동의대 사태를 비롯한 80년대 ‘민주화 운동’에 대한 그의 매몰찬 평가는 과거의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들로부터 파격적이라는 반응을 얻어내기에 족하다고 할 수 있다.  

문부식 씨의 인터뷰를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자기 성찰이나 반성에 관해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새삼 절감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뼈를 깎는 각고의 노력과 고통이 요구되는 성찰 자체의 속성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모습에서 자신의 내면과의 온전한 대면을 통한 성찰이 곧 타자에 대한 이해까지 보장해주지는 않음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남에 대한 배려가 뒷받침되지 않는 성찰이라면, 그것을 일러 성찰이라고 말하는 것도 옳지 않을 것이다. 물론 문씨가 영웅이나 투사로 불리기를 거부하고 과거의 자신에게서 폭력성을 찾아내고 반성하는 자세에 이르기까지 얼마만한 어려움을 겪었을 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거니와 그것만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더 필요한 것은 자기 성찰의 어려움 못지 않게 타자의 내면을 헤아리는 것의 어려움을 고려하고, 어렵게 성취한 자성을 남에 대한 이해와 접합시키는 일로 나아가는 것이어야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건대, 비록 조선일보의 의도가 작용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왜 그의 ‘반성문’을 말하는 자리에 자신과 직접 관계도 없는 동의대 사태와 광주 항쟁이 첨가되어야 하는지 납득하기 힘든 것이다.

동의대 사태를 말하자면, 이 사건과 문씨가 주도한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은 책임 소재와 원인 등을 따져볼 때 ‘폭력’으로서의 성격이 같다고 말할 수 없다. 문씨가 자신이 의도하고 실천에 옮긴 ‘폭력’에 대해 십분 반성하는 것이야 뭐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당사자들이 의도하지 않은 불행한 결과를 빚은 사건까지 ‘제 눈의 안경’에 의해 재단하고 있지 않은가. 문씨가 그들이 자신만큼 스스로를 자책하고 치열하게 반성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그는 사태의 원인과는 상관없이 동의대 사태 관련자들이 그 동안 얼마만한 회의와 죄책감을 감당했을지, 평생 불행한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삶의 속박감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것인지 살피기보다, 자신에게 국한하여 적용되어야 할 ‘폭력의 성찰’을 그들에게까지 확대하여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반성이나 성찰은 남이 자신의 것을 대신 해 줄 수도, 자신이 남에게 강권할 수도 없는 일이다. 자기가 성찰할 대상은 그 자신의 행위에 제한되어야 할 뿐이며 타자의 내면에 대해 함부로 말할 권리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그는 왜 남에게 자기 식의 반성을 쉽게 요구하는 것일까. (엄밀히 말하면 그가 주도한 미문화원 방화 사건일지라도 그 자신이 해석과 성찰을 독점할 권리는 없다고 볼 수 있다.)

{IMAGE1_LEFT}동의대 사태가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받는다고 해서 곧 당사자들이 불행한 사태에 대한 짐을 벗을 수 있다거나, “희생자에 대한 인간적 예의”를 지키지 않은 태도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국가에 의한 민주화 운동의 인정은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역사의 기억으로 남겨질 뿐 당사자들 개인의 내면은 그런 것과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동의대 사태가 어떻게 규정되든 당사자 개인들이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하는 몫까지 영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파악해야 한다. 개인의 섬세한 내면, 당대비평 식 표현으로는 ‘삶의 결’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 한 남에게 요구하는 반성은, 궁극적으로 자기 욕망의 강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의심을 받기에 족할 것이다. 문씨가 자신이 반성한 만큼의 것을 남에게 요구하고, 자신의 반성적 사유의 회로 속에 남의 사고가 맞추어지기를 바란다면 오히려 그것이 타자에게 폭력으로 느껴질지 모른다. 아마도 폭력에 대한 문씨의 사고는, 비판자들로부터 약자의 폭력에 중점을 둠으로써 국가나 강자의 폭력을 간과한다는 평가를 받는 ‘우리 안의 파시즘’을 주창해온 당대비평의 편집위원이라는 자신의 위상과도 결부해서 해석되어야 할지 모른다.

문씨의 인터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비판은 조선일보와의 관계이다. 공안검사를 방불하게 하는 그의 발언도 발언이려니와, 폭력에 관한 그의 견해가 자신 및 과거 진보 세력의 ‘폭력’과는 비할 수 없는 규모의 폭력의 진원지와 결합한다는 점에서 폭력에 대한 성찰의 성김과 빈약함이 여실히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의 ‘반성적 성찰론’에 감동을 받은 조선일보는 인터뷰를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국가 폭력과 이에 맞선 운동권의 폭력이 맞부딪치며 숱한 비극을 양산한 80년대를 ‘광기의 시대’로 규정한 문씨의 저서는...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문씨는 정녕 이 정의에 동의하고 싶은지 묻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적어도 조선일보에 한하자면 그의 발언은 국가 폭력과 운동권의 폭력이 대등하게 취급되는 셈이 되는데, 이를 두고 조선일보가 그의 의중을 확대 해석하거나 왜곡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동의대 사태를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일갈한 그의 태도나, 광주 항쟁에 대해 국가의 폭력에 민중의 욕망이 결탁된 것이라는 주장을 고려하면 그렇게만 보기는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그를 비롯하여 당대비평 사람들이 파시즘을 국가와 민중의 ‘합의독재’라는 개념으로 재단해온 시각이 가진 위험성에다, 광주항쟁에 대해 민중의 욕망 운운하는 문씨의 인터뷰를 생각할 때, 조선일보-당대비평-거대 폭력에 대한 방조라는 연결 고리가 그려진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이야기가 다소 엇나갔는지 모른다. 분명한 것이 있다면, 치열한 자기 반성 이후 남을 수용하는 것보다 자기 확장의 욕망을 추구하는 데 기울어져 있는 문씨는, 스스로 그렇게도 희구하는 국가와 제도로부터 독립된 ‘자율적 개인’이라는 위상과는 분명 거리가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에게서 80년대 투사에서 뒷걸음질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말해도 좋은 것인지. 그는 자신의 과거와 완전히 결별한 것일까. 타자에 대한 섬세한 배려가 동반되지 않은 그의 닫힌 성찰이 야기하는 부작용이 안타까울 뿐이다.  

* 필자는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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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7/26 [02:3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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