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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살해미수 동경납치사건'의 역사적 의미
박정희 유신정권 조직적 개입, 단순납치 아닌 '살해미수', 박정권 몰락불러
 
장신기   기사입력  2004/08/05 [13:22]
* 최근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73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자행되었던 자신에 대한 동경납치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강력히 촉구하고 나서는 등 '동경납치사건'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에 장신기 씨가 지난 2004년 8월 5일자 기고문 "'김대중 살해미수 납치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다시 올립니다-편집자 주.
며칠 뒤 8월 8일은 이른바 지난 73년 ‘김대중 납치 사건’이 발생한 지 31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 사건은 박정희 유신 체제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에 큰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한일관계 그리고 한미일 관계의 특성을 알게 해주고 이 사건 이후로 유신 체제에 대한 반대가 국내외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여러 가지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한 여러 가지 증언과 취재 등의 결과로 사건의 본질이 ‘김대중 살해 미수 납치’에 있다는 사실이 상세하게 밝혀진 상태임에도 아직도 이 사건에 대한 개념규정은 ‘김대중 납치’로 되어 있는데 이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사건 발생 31주년을 앞두고 이 사건에 대해서 ‘김대중 납치 사건’이라는 개념 규정 대신에  ‘김대중 살해 미수 납치’이라는 개념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함과 동시에 그 근거를 상세하게 제시하려고 한다.

역사적인 사건의 성격을 제대로 정립하기 위해서는 1차적으로 해당 사건에 대한 엄격한 개념 규정이 필수적이다. 개념규정이 모호하거나 본질과 어긋나게 될 경우는 역사적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파악하는 데에 혼란을 제공하게 되며 더군다나 사건의 개념을 규정하는 데에 있어서 권력의 논리가 개입되게 될 경우 역사적 진실이 흐려지게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점이 발생할 수도 있다. 더군다나 부정한 독재 권력자에 의해서 발행한 어두운 과거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한국 현대사의 현실을 볼 때 위와 같은 문제점은 한국 사회가 해결해야만 하는 시급한 당면 과제이기도 하다.

▲김대중 선생이 동경에서 납치된 후 극적으로 생환, 동교동 자택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 인터넷 이미지
그런 관점에서 보면 73년 8월 8일 일본 동경에서 발생한 이른바 ‘김대중 납치사건’ 역시 역사적 개념규정을 제대로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사건 발생 후 이 사건에 대해서 유신 정부는 ‘김대중 사건’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고 이것을 고수하였는데 이 개념에는 정부 책임론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다. 유신 권력은 이 사건에 정부의 조직적인 개입이 없었으며, 김동운 1등 서기관의 개인적 범행으로 몰고 갔다.

김대중 사건이라는 규정이 유신 정권의 입장을 반영한다면 김대중 납치사건이라는 규정은 김대중에 대한 암살의혹이 강하게 제기되지만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기 힘들었던 사건 발생 이후의 엄혹한 국내 정세 상황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뒤 진상 규명이 이뤄지기 시작하면서 사건이 진실이 살해 미수후 납치였음이 명백하게 밝혀진 것이다.
 
따라서 현재 통용되는 ‘김대중 납치’ 사건이라는 용어는 진실의 절반만을 담고 있는 것으로서 한계를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는 이 사건의 명칭을 김대중 살해 미수 납치 사건이라고 정확하게 개념규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유신 권력이 김대중을 살해하려고 했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것은 다음의 여러 가지 경우를 통해서 증명될 수 있다.
 
사건 최종 책임자들은 책임을 회피하거나 국가 기구의 조직적 개입 자체를 부인하는 등 거짓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통해서 진실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미국 관련자들은 박정희 정권이 김대중을 살해하려는 것으로 파악하여서 박정희 정권에 압력을 넣어서 김대중을 극적으로 살려주었다는 증언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박정권의 의도를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피해 당사자인 김대중의 증언을 볼 때 범인들이 살해할 의사를 가지고 구체적 행동을 취했음을 알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처럼 사건이 진행되었던 긴박한 순간에 대한 증언뿐만 아니라 박정희 유신 정권의 성격과 김대중의 반유신 투재 운동의 성격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구조적인 접근을 통해서도 이 사건의 핵심은 납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김대중 암살 후 사건 은폐’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72년 10월 17일 유신 선포 당시 김대중은 일본에 있었는데, 일본에는 김영삼, 양일동, 송원영 의원 등 당시 야당 인사들이 있었다. 다른 의원들은 유신 선포 후 귀국을 하였는데 김대중은 귀국을 하지 않고 해외에서 반유신 투쟁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당시 국내는 유신에 대한 반대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김대중은 71년 대선에서 대중민주체제와 남북 화해 협력 노선을 내세우면서 박정희 근대화노선의 핵심인 반공에 기초한 개발독재론을 정면에서 비판하였는데 김대중의 노선은 민중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어냄으로 해서 박정희 대통령을 긴장시켰다.

▲"유달산아 네게 넋이 있다면, 영산강아 네게 뜻이 있다면 이 김대중을 버리지 말아다오." 김대중의 이 절규처럼 호남은 그와 약 40년을 함께 했다(사진은 1969년 삼선개헌반대투쟁 당시 연설하는 모습)     © djroad.com 제공
 
김대중은 71년 선거에 대해서 ‘그 동안 지배 계급 내에서의 여야 투쟁만을 목격했던 민중들이 진정 자신들을 위한 정치지도자가 출현했다는 점에서 열광했으며, 민중들의 마음 속에 깊게 자리 잡혀 있는 평화통일에 대한 열정을 한 곳으로 모아서 이끌어 갈 수 있는 정치지도자가 나왔다는 사실에 열광했다’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로 인하여 박정희는 김대중에 대한 일종의 공포심과 콤플렉스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극우냉전세력들의 김대중에 대한 공포심과 콤플렉스는 김대중의 진취적인 진보노선과 민중들의 열망을 수렴함과 동시에 정치적 열망을 일깨우면서 민중역량을 극대화시키는 김대중의 정치 지도력에 기인한 것이다.
 
획일적인 명령과 복종 그리고 지배와 순응이라는 전근대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던 박정희와 전두환을 비롯한 정치군인들은 김대중의 정치노선과 민중적 리더십에 대해서 공포심과 콤플렉스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미 71년 총선 직전에 트럭을 동원해서 김대중을 암살하려고 했을 정도로 박정희 권력은 유신 이전부터 김대중에 대한 정치테러를 감행했던 것이다.
 
그런 김대중이 72년 유신 선포 당시 일본에 있었고 귀국을 하지 않고 해외에서 반유신 투쟁 운동을 전개하게 되자 박정희 정권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박정권을 더욱 신경쓰이게 하는 것은 김대중의 활동성과였다.
 
당시 해외에서의 김대중의 반유신 투쟁 운동은 두 가지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하나는 재미 재일 교포들에게 한국의 민주화와 평화 통일을 방향성과 희망을 불러일으키고 이들을 조직화하여서 반유신 투쟁 운동의 근거지를 확보한 후 한국에서의 반유신 투쟁 운동을 고무하려는 것이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1973년 7월 6일 미국에서 한민통이 조직되었고 일본에서도 김대중 노선(대한민국 절대 지지, 선민주 후통일)으로 운동의 방향성이 결정된 8월 4일의 5인 회담 이후 8월 13일에 정식으로 조직하기로 하였다.(그런데 일본 한민통은 김대중이 8월 8일 납치 되어서 김대중이 없는 가운데 결성되었다.)
 
그리고 두 번 째로는 미국과 일본의 정계, 언론계, 학계 인사들과 광범위한 접촉을 하여서 이들 국가의 대한 정책의 기본 방향인 ‘선안보 후민주론’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한국의 민주화의 필요성을 역설하여서 양 국가의 대한 정책의 방향을 선회하도록 하는 데에 있었다. 당시 미국과 일본의 ‘선안보 후민주론’은 한국국민과 민족의 민주 역량을 과소평가하고 무시하는 일종의 강대국 우월주의적 사고의 발로로서 한국은 반공의 보루로서 존재하면 된다는 입장 하에 개발독재론을 옹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강대국의 대한정책이 한국의 민주화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김대중은 간파하고 있었고 특히 미국에 대한 비판은 용공적 태도로 여겨지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김대중은 절망하고 있는 해외 교포들과 한국의 민주화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미국 일본의 지배 세력 모두에게 ‘한국의 민주주의 전통은 뿌리가 깊으며, 한국 민중은 민주주의를 위한 강한 열망과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역사적 사례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으며, 한국민이 현재와 같은 어려운 처지에서 곤란을 겪는 이유는 이승만, 박정희 독재 권력에 의해서 정치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함과 동시에 미국과 일본이 반공을 명분으로 해서 독재 정권을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민주화가 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김대중은 한국의 민주화 문제를 통일 문제와 관련시켜서 사고를 하고 있으며 한국의 분단과 그 이후에 독재 권력 유지에 있어서 미국과 일본의 책임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당시에 금기시되었던 분단과 통일 문제를 미국 책임론과 연계시켜서 사고하고 있었다. 김대중이 제기한 강대국 책임론은 근본적으로 한국 현대사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 기초한 것으로서 한국 현대사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가 80년대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당시 김대중의 인식은 선진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김대중이 해방 이후에 좌우 합작 노선에 의한 중도 민족주의 세력의 신국가 건설 노선에 동참하였던 것을 고려해 볼 때 김대중이 그 당시에 형성된 민족 이성을 굳건히 지키고 발전시켜왔다는 해석을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김대중의 활동은 한국의 민주화 문제를 국제적 차원의 문제로 확장시킴과 동시에 역사적으로 볼 때도 해방과 분단 형성과 연관시켜서 사고함으로 해서 일종의 전시파시즘 체제를 구축하려는 박정희 유신 정권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활동이 지속될 경우 유신 정권의 존립이 흔들릴 수도 있다는 판단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국내에서는 어떠한 형태의 반유신 운동도 제기되지 못하는 상황임에도 김대중이 해외에서 대단히 활동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은 박정희로서는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이해하면 박정희 정권의 본래의 목적이 단순한 납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해 후 사체를 유기하여 사건을 은폐하는 데 있다는 추론을 할 수 있다.
 
이미 김대중은 광범위한 국내외적인 역량을 축적한 상황이므로 박정권으로서도 김대중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위해는 정치적 부담이 너무 큰 것이었다. (8월 8일 납치 당시 범인들이 김경인 전 의원한테 한 말인 '소란을 피면 한국의 수치가 된다'에서 알 수 있듯이 사건 자체가 외부에 알려지면 큰 파장이 올 것이라는 것을 범인들도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박정권은 김대중에 대한 위해를 은밀한 방법으로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고 박정권의 행위가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위해 대상인 김대중을 살해해야만 하는 것이고 사체도 유기하여서 사건을 은폐하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건 뒤의 결과에서 알 수 있듯이 해외에서 김대중을 납치한 행위 자체만으로도 이미 이는 엄청난 국내외적인 파장을 가져와서 박정권에게 큰 정치적 타격을 주었던 것을 본다면 외부에 공개할 것을 전제한 ‘단순한 납치’는 박정권의 본래의 목적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러므로 박정권은 본래 김대중을 암살하고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지만 호텔에서의 암살계획은 김경인의원의 등장으로 실패하였고 두 번 째 바다에서 수장시키려던 계획은 미국의 압력에 의해서 좌절되었기 때문에 처음에 의도와는 다른 납치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위와 같은 박정권이 처한 구조적 환경에 따른 행위의 성격을 분석하는 방법을 통해서 박정권의 의도를 분석해낼 수 있다.
 
이 뿐만 아니라 다른 사건들과의 비교를 통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는데, 박정권은 정적과 자신의 비판세력에 대한 살인을 한 적이 있다는 점에서 ‘살인’을 정권의 통치 수단의 하나로서 활용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김대중에 대한 살해 의도는 박정권의 본질상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점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납치가 목적이었다면 8월 8일에서 8월 13일까지 시간을 끈다는 것 역시 말이 안된다.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린 이유는 본래 목적인 암살이 실패하고 이 문제에 관련된 미국과 일본 정부와의 3각 협의가 진행되면서 사건 처리에 대한 대략적인 틀을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박정희 정권이 암살 계획을 주도하고 일본의 우익 정치 세력이 이에 적극 협력하였다고 할 수 있으므로 암살을 공모한 한국과 일본의 정치 세력 사이에 집중적인 사후 대책이 논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여러 가지 직접적인 증거들과 정권의 의도성에 대한 면밀한 분석 그리고 사건 진행 과정과 박정희정권의 성격들을 고려할 때 이 사건은 ‘김대중 살해 미수 납치 사건’이라고 개념규정하는 것이 역사적인 타당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의 김대중 납치사건은 진실의 절반만을 담고 있는 개념으로서 이는 사건의 본질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을 당시에 형성된 불완전한 개념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건 발생 31주년이 되는 올해부터 이 사건에 대해서 ‘김대중 납치’사건이라는 개념 대신에 ‘김대중 살해 미수 납치 사건’이라는 개념 규정을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 편집위원
 
* 본문은 DJroad.com 주관, 8월 7일 영광에서 열리는 제2회 홍어투어 "김대중선생님과 통일의 한마음 축제" 발제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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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08/05 [13:2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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