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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맑시스트들(?)의 페미니즘 들여다보기

'그들만의 진보' 속에 매몰된 여성주의 바로보기
 
한현   기사입력  2002/07/26 [17:12]

김규항의 글이나 신현준의 글을 보면 그들이 과연 페미니즘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감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김규항은 자신이 비난하는 페미니즘은 단지 '중산층 인텔리' 여성인 '지식수입상'이 '인류보편의 인간해방'을 거스르며 그들만의 권익을 주장하는 페미니즘에 국한되는 것일 뿐이라고 발뺌하며, 인류의 해방에 걸림돌이 되는 일부의 페미니스트에 대해 일침을 가하는 진정한 '맑시스트'를 자처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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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한겨레21 이정용 기자

하지만 김규항의 글에서 나타나듯이 그들은 최보은의 '박근혜지지' 파문에 한정해서, 박근혜를 지지한다는 의사를 보인 일부 페미니스트에 대한 비난을 하는 것이 아니다. 기실은 그 사건은 단지 '그 페미니즘'을 언급하는 단초를 제공해 줬을 뿐 이전부터 그네들은 '여성이 아닌 다른 사회적인 약자들의 사회적 억압에 무관심하며 계급의식이 부재하다'는 이유로 그녀들을  '진보와 상관이 없'고 '다른 사회계층을 억압하는데 일조'하면서도 자신들이 억압을 받고 있다고 징징대는 '마뜩찮은' 기득권자로 분류하고 있다. 김규항은 그의 글에서 최보은의 박근혜지지 주장을 '주류 페미니즘"의 저급한 사회의식의 한 예라고  일컬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저급한 부류가 있음을 행간으로 시사함과 동시에 일부의 페미니스트들을 뭉뚱그려 '주류'라는 묘사도 서슴치 않는다.

[관련기사]
정문순, 타자의 배려 없는 도발과 만용을 경계한다-박근혜 논쟁과 김규항의 페미니즘 비판에 대해, 대자보 86호
편집부, <자료> 페미니즘, 그 논쟁의 경과, 대자보 86호
신현준의 지상만가, 마침내 그 페미니즘의 위기가? 월간 [말] 2002.7월호
김영옥, '덜 떨어진' 맑시스트와 '제대로 안 떨어진' 맑시스트의 차이? 언니네

그 '주류'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한다.
"가부장제와 싸운다는 주류 페미니즘은 실은 그 선전장치의 성실한 일부다. 유한하기 짝이 없는 그들은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사회적 억압을 일반화하여 카타르시스하는 데 열중함으로써, 모든 여성이 제 억압을 통해 보편적 인간해방운동에 이르는 정당하고 필연적인 기회와 가능성을 성실하게 차단한다."

그는 그 글에서 '주류'가 문제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첫번째 글('그 페미니즘')에 대해서 분개하는 페미니스트에게는 '주류'만을 문제삼은 자신의 글은 그녀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며 오독을 하지 말 것을 준엄히 훈수한다.

하지만 그의 글 속에 나타나는 '주류'와 '비주류'의 구분은 한국의 페미니즘의 지형도를 현재 한국의 진보들이 마뜩찮아하는 페미니즘과 그렇지 않은 것을 작위적으로 구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백 보 물러나서, 그의 말마따나 일부 페미니스트와 여성단체를 '진보'라고 하기에 어려움이 있다고 치자. 그렇다고 구체적인 인물에 대한 실명비판이나  몇몇 단체에 대한 거론과 같은 '범위의 한정'을 하지 않고 무작정 '주류'라고 싸잡아 비판하는 것은 타당한가? 자칫하면 그 '주류'의 범위는 그가 의도하건 그렇지 않건 무한정 뻗어나가 그가 '마뜩찮아'하지 않을 법한 여성주의자와 단체에 대해서도 포괄적으로 일반인들의 뇌리에 박힐 여지도 있다. 여성주의자라며 이름 앞에 성을 두 개 붙인 여자들에 대해서 아직까지 부담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분위기가 지배적인 사회임을 감안한다면 밑도 끝도 없는 '주류'라는 묘사에 주의가 요구됨은 말 할 나위 없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의 비판 범위는, 그가 언급하는 '주류 페미니즘'이라는 허구의 대상에만 한정되지도 않는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그의 비판기준으로 판단해보면,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혹은 여성해방을 위해 운동하는 여성들이 여타의 운동보다 여성운동에 중점을 두고 여성해방을 그들의 거대담론으로 책정하고 있으므로,  그러한 '페미니즘' 진영 전체, '여성해방운동' 자체가 여타의 '사회적 약자의 편을 드는' 진보운동에 방해가 되는 존재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그네들에게 있어 여성해방운동은 진보가 아닌가보다. 그(들)의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그들이 여성해방운동을 '보편적 인간해방'과 궤를 같이 한다고 여길 수 있게 하려면, 모든 여성주의자와 페미니스트와 그 관련단체가 그 '진보들'이 관심 있어 하는 이슈에 발벗고 나설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한국에서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건 90년대 이후지만 한국 여성운동/페미니즘의 역사는 이미 한 세기에 가까운 오랜 전통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출발부터 여성해방과 인간해방을 함께 고민하는 건전한 전통을 가져왔으며, 여성평우회, 여성단체연합, 여성노동자회, 여성민우회 등을 조직한 80년대에는 ‘여성의 문제’를 양보하다시피 하면서까지 사회진보에 몰두했다.", "‘나만의 해방’을 믿는 모든 운동은 어떤 절실한 사정을 담더라도 그저 피억압자의 추악한 복수극에 불과하다"는 그의 글은 그 예이다.

그에게 있어서 진보의 축에 들려면 아마도 '운동계의 멀티플레이어'여야만 가능 할 것이다.  

물론 여성이라고 그네들이 주장하고 인정하는 '진보운동'에 관심이 없으라는 법은 없을 것이고, 여성단체들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단위의 운동에 동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성운동가와 여성주의자들, 그리고 그에 관련한 단체들의 공통된 정체성은 그들이 가장 현실적으로 억압받고 있다고 느끼고 개선하려는 부분인 '여성해방'에서 찾을 수 있고, 자연히 그것이 그녀들의 신성한 전선이 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그것을 탓할 명분은 어디에도 없다. 그것이 여성주의자, 여성운동가, 여성단체의 존재이유이니까.

혹여 여성단체가 여타 운동단체들과의 연대에 소홀하다면 그것으로 트집잡힐 수는 있겠다. 허나 기본적으로 여성운동을 하고 여성해방에 절대적으로 관심이 집중되며, 그런 기조를 유지하는 것 자체에 대한 비판은 여성운동을 '운동'으로서 인정하지 않으려는 그 '진보'들의 치졸함에 다름 아니다.

그런 이유로 하여 김규항이 비난한 그 '주류'에 속하지 않을 법한 여성주의자와 단체들이 반발을 하는 것이다. 그들의 반응은 그가 지적한 '오독'이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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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최보은-박근혜 인터뷰, 말지 3월호

생각해보라.
돈 있는 집안에 태어나 교육 잘 받아 학벌도 남부러울 것이 없어서 좋은 직장에 취직해 연봉도 꽤 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런데 그가 받고 있는 유일한 사회적 억압은 단 하나 그의 피부색이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억압에 눈떠서 흑인인권운동에 조력을 하든, 뛰어들든 한다면 그 사람에게 '너는 다른 사회적 억압에 도무지 무관심하구나. 인류의 보편적 해방을 위해서 일해야지 그게 뭐냐'하고 말할 수 있을까?

또, 유일한 사회적 억압이 '육체적 장애'인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 사람이 장애인의 인권에 대한 운동에 사력을 다하고 있다고 '다른 사회적 약자에 무관심하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그리고 그네들이 주장하는 그 '계급의식'이 부재하다는 딱지는 가히 마녀재판, 인민재판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겠다. 그들의 신성한 전선인 '진보'가 좌파임을 상기해보면 계급의식이라 함은 '부르주아' 타령의 이면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주류'페미니스트에 대해서 여성해방에만 관심을 가지고 여타의 사회적 억압에 무관심하다'며,  '계급의식이 부재'한 '인텔리 중산층'이라고 진단한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소외당하고 억압받지 않는 계층', '노동자계급과는 괴리되어 있는 존재'라는 함의를 지닌 '부르주아'라는 딱지를 가져다 붙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주류 페미니즘이 그런 저급한 사회의식에 머무는 실제 이유는 그 페미니즘의 주인공들이 작가, 언론인, 교수(강사) 따위 ‘중산층 인텔리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적 억압의 보다 분명한 피해자인 하층계급 여성의 고통을 이해할 만한 처지에 있지 않으며, 그 고통을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단지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사회적 억압인 성적 억압을 ‘남성 일반과의 문제’로 만드는 데 열중한다. "

그의 그러한 인식은 아마도 그가 좌파여서 일까?

여기서 계급의식, 사회의식으로 위장한 그의 '부르주아 혐오'는 실제로 '그녀'들이 '인텔리 중산층'에 포함되는지 여부도 불문에 붙인 채 의례 그럴 것이라는 가정하에, 사회시스템의 잘못으로 분배를 덜 받은 계급이 상대적으로 많이 분배를 받은 계급에 속한 사람들에 대해서 보이는 위화감과 적대감을 여과없이 표현하며 그들에 대한 자신의 '혐오'를 정당화한다. 모든 좌파가 그와 같은 사고를 하고 있다면 끔찍하다.

좌파에 대한 실망은 그들이 사회시스템의 개선에 관심을 갖기보다 무조건 자신들보다 잘 살고, 많이 누릴 것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 밑도 끝도 없는 혐오를 표현할 때이다. 그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한다면 그들이 '지존파'와 다를 게 무엇이 있겠나.

그는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현재의 복잡다단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를 무자르듯 구분하는 것일까?

물론 일반적으로 '잘먹고 잘사는 계층'의 인간들, '못먹고 헐벗는 계층'의 인간들하면 떠오르는 직종들이 있다. 하지만 그 일반적인 기준에 '부르주아, '프롤레타리아'를 대입해서 지금 시대 인간들의 생활양식과 양태를 이해할 수 있을까?

한 예로 데이비드 베컴의 가정부는 영국왕실에서 여왕 모후의 요리사였다가 모후가 서거하자 에드워드 왕자부부로부터 가정부로 일해달라는 제안을 받았으나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베컴집에서 일해주기로 했다고 한다.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 가정부는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또 김규항이 '부르주아'의 포섭범위라며 주장한 그 교수(강사)의 신분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물론 교수라 하면 사회 지도급 인사라 하기에 그 누구도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교수(강사)라고 해서 몽땅 '부르주아' 취급을 받는다면 억울한 심정이 드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정교수는 일정한 연봉이나 연구지원비, 인세 등으로 윤택한 생활을 한다손 치더라도, 그 외의 교수들과 강사들의 생활수준은 분명 천차만별이다. 지난 해에 대학교 (시간)강사들이 받는 돈은 1시간에 2~3만원에 불과하다는 얘기를 강사에게 직접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일주일에 연이어 2시간을 대학강단에 서서 폼나게 수업한다고 하더라고 한달에 8시간이니 1시간에 2만 5천원으로 계산하면 20만원을 받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적어도 대학원을 나와 박사학위를 받은 '엘리트'들인 그들이 강의를 하며 일반 샐러리맨들의 초봉 정도 받으려면, 2~3개 학교를 뛰어다니며 한 학교당 2과목 이상의 수업을 고정적으로 따내도 될둥 말둥이다. 그런 상황에 빗대어 자조적으로 표현한 것이 '보따리 장수'다.

상황이 이럴진대 어떻게 그 '부르주아' 타령이 100년의 나이를 먹은 맑시즘을 안이하고 나른하게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고 항변할 수 있을까?

아직도 김규항과 신현준은 '그 페미니즘'에 대해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에 주저함이 없으며,  '노력하는 마초' 혹은 'machismo가 아닌 misogyny'라며 자신들의 언어가 여성주의 자체에 대한 냉소나 경멸로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바란다는 어조를 줄곧 유지하면서, 자신들의 치졸함과 몰이해를 상대방의 오독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들의 작태를 바라보는 (그네들의 분류에 따라) 비주류일 법한 여성주의자들도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이유는, 그네들이 평소 글에서 주장했던 바처럼 "깨어있지 못하면 숨을 들이마시는 것과 같이 보수주의에 빠질 수 있다"는 '고정관념이나 편견'의 내재화를 그들 스스로는 극복하지 못하면서 입으로만 연신 떠들어대고 있다는 점이다.

* 본문은 독자기고입니다. 본문에 대한 반론을 환영합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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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7/26 [17:1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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