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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에게 군대문화를 말하게 하라
 
정문순   기사입력  2002/03/11 [12:34]
"시(詩)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볼기를 맞은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것다/ 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 내 별별 이상한 도둑 이야기를 하나 쓰것다. "  오적(五賊) 첫 부분

31년 전 김지하 시인이 담시 <오적>을 발표할 당시, 중앙정보부는 볼기가 불이 나게 맞을 각오를 한 작가를 무시무시한 반공법 위반으로 잡아갔다. 당시 지배권력의 아량으로는 자신들을 천하에 '흉포'한 '도둑'으로 풍자한 시를 문학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었던 것이다. 지금 부산대 여성주의 웹진 『월장』의 기사와 관련하여 일군의 예비역들이 벌이고 있는 소동을 논하는 이 자리에 옛날 필화 사건을 글머리에 꺼내는 이유는, 문학적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기는 그때의 공안당국이나 월장의 기사에 불만을 터뜨리며 사이버 테러까지 서슴지 않는 익명의 예비역들의 심사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여성은 예비역을 풍자하면 안된다?

문제가 된 웹진 월장의 기사가 예비역들에게 공격을 받는 주된 근거는 대체로 두 가지다. 즉 기사 내용이 예비역들의 실상와 다르다는 것과, 군사문화의 피해자인 예비역들을 일방적인 가해자로 둔갑시켜 놓았다는 것. 월장의 기사에 불만을 품고 한창 난리를 치고 있는 예비역들이건 예비역 중에서 상대적으로 온건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건 월장의 기사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기사가 '감정적이고 비약적인 논리'로 전개되었음에 동의한다. 과연 그런가? 그러나 그 중 가장 문제가 된 기사, '예비역이 싫은 몇 가지 이유'를 막상 꼼꼼이 읽어보면 초장부터 사정은 전혀 달라진다.

"솔직히 내가 가진 예비역에 대한 악감정은 나 스스로가 봐도 비논리적이다. '나'라는 '발 좁은' 한 인간이 대학 사회에서 접할 수 있는 너무나도 수적으로 한정된 사람들을 기준으로 성급하게 내린 결론이기 때문이다. 이건 나 스스로가 현재진형형으로 반성하는 점이라는 걸 미리 밝혀둔다...쉽게 생각하기로 했다. <예비역이 싫은 몇 가지 이유>, 제목 그대로 내 생각이 비논리적이건 말건 간에, 싫은 이유를 쓰는 거지 뭐, 난 이래서 니들이 싫다. 그럼 니들이 내 궁색한 논리에 토를 달아라. 난 그들에 대한 좋은 감정, 내 반성의 지점들을 다 무시하고, 예비역을 100% 적대관계라 상정한 후 욕만 늘어놓을란다."

정말 월장 기사가 직설적으로 모든 예비역들을 싸잡아 공격했는지 여부를 살펴보려는 사람으로서는 맥이 풀릴 정도의 사족에 가까운 해명이다. 글쓴이는 스스로 자신의 글이 '비논리적'이라고 말함으로써 그것이 논리적 엄정성과 타당성을 객관적으로 따질 수 있는 건조한 글이 아님을 밝힌 것이며, 예비역에 대한 욕만 늘어놓겠다고 미리 전제함으로써 설령 다소 과장된 표현이 있더라도 예비역 독자들에게 양해를 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글쓴이가 혹시나 있을지 모를 예비역 학우들의 반발을 의식하고서 풍자적으로 쓴 글임을 구태여 친절하게 밝히고 있는 이상, 그런 글을 감정적이니 비약적이니 따지는 것은 대단히 우스운 노릇이다.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풍자란 대상의 약점을 과장되게 폭로하거나 야유하는 표현 방식이다. 따라서 대상에 대한 문제 인식만 갖추고 있다면, 과장이나 비약이 수반됨은 대단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마치 흥부전에서 놀부가 오장칠부를 가지고 있다는 표현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독자는 없으며, 장화홍련전에서 계모 허씨의 용모를 언급한 대목 중, 그 입술을 썰어놓으면 한 사발은 되겠다고 한 표현을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똥개훈련' 따위 자극적인 표현만 눈여겨보고서 모든 예비역들을 모독한 것이라고 분노를 폭발시키는 일군의 예비역들의 처사는 대단히 치졸하고 유아적이다. 게다가 '감정적인 문체'를 구사한 부분에 대해서는 글쓴이 스스로 사과를 표명하지 않았는가.

월장 기사를 처음으로 다룬 인터넷신문 『뉴스보이』의 기사는 예비역들의 불만이 응집되어 폭발하도록 오히려 선동하는 구실을 했다. 해당 기사의 글쓴이 표중규라는 이는 기자라는 이름을 내걸고, 월장의 기사들이 '남성성'을 무조건 공격한다는 등 성난 예비역들을 대변하는 전형적인 마초의 논리를 펼치고 있다. 그는 기사의 의도와 풍자적 글쓰기 기법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필진들이 일방적으로 예비역을 매도했다는 기사를 씀으로써, 사건의 파장을 줄이려고 애쓰기는커녕 도리어 예비역들의 광란을 부추기는 데 일조했다. 여기서 표씨의 독해력 수준을 잠깐 언급한다. 이를테면 학내에서 '불법(비디오) 유통업자들의 십중팔구가 예비역들이다'는 월장의 기사를, '모든 예비역들을 불법 포르노 유통의 주범으로 몰고' 있다고 기상천외하게 풀이하는 식이다. 월장에 분노하는 예비역들은 실상 이런 수준의 독법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이 월장 기사에 대해 논리적 오류라고 꼬집은 '잘못된 일반화' 운운은 거꾸로 자신들의 오류와 무지를 말하는 것일 따름이다.

예비역은 피해자인가?

월장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 글들이 주로 개인의 경험에 의존한 것이기에 객관성이 떨어진다고 말하지만, 체험적 글쓰기 방식은 되려 진실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보다 나는 글쓴이의 체험에 의존한 글쓰기 방식은 오히려 풍자의 강도나 문제 의식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본다. 비판의 효과로 따지자면, 월장의 글들은 특유의 과장된 몸짓으로 허를 찌르는 『딴지일보』 투의 거침없고 세련된 풍자나 패러디에 미치지 못한다. 풍자를 하더라도 '100% 사실'에 입각해서 써야 한다는 조심성이, 질주하려는 글쓴이의 의식을 붙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기사에 언급된 내용은 누구나 알고 있고 얘기되는 일반적인 내용일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새롭거나 놀라운 것은 없다. 예비역들이 음담패설을 잘 한다, 집단 폭력을 잘 행사한다, 후배들에게 권위적이다 등의 말은 여성들 뿐 아니라 당사자들 사이에서도 자주 입에 오르내리고 인정되는 것들이다.

다만 그동안 여성의 입으로 그들만의 문화에 대해 "싫다."라고 공개적으로 발설하는 것이 힘들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 군사 문화의 다른 이름인 예비역 문화의 문제성을 인식하는 사람이라면 기사에 대해 근본적으로 반발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동안 드물게나마, 제대한 남자 대학생들은 '인격에 많은 문제점을 보인다'거나, 특히 '여성에 대한 냉소주의, 소비주의적 경향이 강해진다는' 여학생의 지적은 있어왔다.[박노자, '인간성을 파괴하는 한국의 군사주의' 당대비평10호] 만약 예비역들이 이를 군대 책임으로 돌리고 자신들은 군사문화의 피해자임을 부각시키려 한다면, 먼저 우리 사회의 근간이 되어온 가부장적 군사문화의 뿌리 깊은 폐해를 인정해야 한다. (마초 예비역들이 자신들을 군사문화의 피해자라고 명명하는 것도 모순이다. 그들이 피해자라고 자각하는 순간, 군사문화의 부정적인 면모를 인정하는 셈이 되며, 여성 등 군대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모습이 부정적으로 비쳐왔음을 동시에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죄 없는 자신들을 매도하지 말라고 난리를 칠 이유도 없는 것이다.)

  과연 예비역들의 말마따나 그들이 국가주의의 희생양이라는 점이 가해자라는 점보다 부각되어야 하는가? 물론 월장 운영진의 입장은 예비역이 피해자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며, 예비역 문화를 낳게 한 근간이 군사주의에 있음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예비역들은 결코 군대라는 제도적 폭력의 희생자일 뿐이 아니다. 군대에서 겪는 가공할 폭력을 내면화한 남성은, 제대 후 병영 문화를 고스란히 답습한 조직 사회에 적응하는데 적합한 인적 자원으로 환영 받으며, 그 과정에서 여성과 장애인 등 군복을 입을 수 없는 이들은 정치적 소수자로 재배치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켜주었으니 군에도 가지 못한 허약한 자들을 상대로 독점적 권력을 누리는 것은 당연하다는 의식이 있다. 군 복무는 건강한 남성들이 제대 후에 사회에서 누릴 특권을 보장받기 위해 치르는 한시적인 희생 제의이자, 분단을 빌미로 병영적 사회질서를 유지하려고 하는 국가와 정치적 다수자 남성들의 소극적 공모라는 측면도 살펴야 한다.    

  사실 예비역들이 자신들을 국가주의의 피해자로 생각해달라고 하는 것은, 자신들을 철저히 물화된 수동적 존재로 생각해달라는 위험한 말과 다르지 않다. 이 점에서 그들이 국가주의를 직접 욕하지 않고 자신들만 난도질했다고 월장을 다그칠 일이 아니라, 기사에서 자신들을 타율적 객체로 묘사하지 않은 데 대해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이 아닐까. 월장이 예비역들을 도마 위에 올려 놓은 건 그들을 문제 해결의 적극적 주체로 판단하는 신뢰가 뒷받침되지 않고는 불가능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들의 피해자 의식은 그 자체로 상당히 문제적이다. 이들이 '월장이 지적한 예비역 문화가 실제와는 다르다는 것에 더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관련기사)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신들에게 체화된 군사문화를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으려는 시각이 완강히 버티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자신들을 군대의 희생자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들의 희생양 의식은 그 근거나 실체가 애매모호하고 기형적으로 뒤틀려 있으며, 제대 후 평생에 걸친 제도적인 보상으로 상쇄되는 과정을 통해 상당히 변질되어 있다. 그들의 내면에는 젊은 날 군대에서 죽도록 고생했다는 억울함과 더불어, 사회적 약자들은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자신들만이 해냈다는 우월감이 뒤얽혀 있다. 만약 그들이 진정 군대의 피해자라고 생각한다면, 병역을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서는 안된다. '신성한 의무'를 수행했다는 사람이, "나는 피해자란 말이야." 라고 항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비역들이 나라를 지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노라고 말해서도 안되며, 그 자부심을 건드린 '철없는' 여자들을 공격해서도 안된다. 그들이 월장 운영진을 성토하러 몰려간 곳이, 하필 자신들을 죽도록 고생시킨 가해자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국방부의 홈페이지란 말인가?

  박노항을 생각해서라도 치가 안 떨리는지? 참으로 군대에 대한 피해의식이 아로새겨진 사람이라면, 처음 만나는 사이라도 군대 이야기로 술잔을 기울이거나 지옥 같은 병영 생활을 추억으로 떠올리는 것을 감당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처럼 예비역들의 분노는 자신들이 피해자임을 몰라주는 사람들에 대한 항변으로만 볼 수는 없다. 국가로부터 당한 폭력을 제대 후의 보상을 통해 승인하면서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성역화 의식에 길들여진 그들로서는, 지금 그 허위 의식에 균열을 낸 이들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성역과는 무관한 순수한 피해자일 뿐이라는 자각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군필자 가산점 논쟁과 호주제 폐지 운동 등에 대한 그들의 파괴적인 대응에서도 잘 나타난 바 있다.    

맹수에게 거울을 비쳐주면 적으로 알고 덤비거나 피한다. 반면에 침팬지는 거울 속의 동물을 자신으로 알아차린다. 유인원은 다른 동물과 달리 자아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월장에 실린 자신들의 모습을 보고 으러렁댄 일군의 예비역들에게도 근대적 자아 개념이 없다. 근대인은 혼자다. 그는 이성과 합리성이라는 등불을 들고 어둠 속에서 홀로 길을 찾는 존재이다. 그러나 병사가 참호를 몰래 파고 그 속에서 책을 읽었다는 이유로 보안대에 끌고 가는 한국의 군대라는 곳에서는 반성하고 성찰하는 개인이 양산되기란 꿈 같은 일이다. 군사문화에서는 나와 너, 개인과 개인이란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우리 아니면 남, 아군 아니면 적군, 희지 않으면 검은 것 밖에는 없다. '우리'가 남일 수는 없는 법. 그러니 믿을 것은 '우리'끼리 뭉치는 것밖에 없는 일군의 예비역들은 '개떼'로 몰려다니며, 거울을 비춰준 이들에게 무지와 야만을 행사한다. 월장의 필진 중 개인의 이름으로 자신의 글에 대한 사과문이 나왔어도 이들이 단체 명의의 사과문을 끈질기게 요구했던 것은, 자기 내면에 개인 의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대표성도 구심점도 찾아볼 수 없는 이들 무리에게 개별 자아는 없고 오로지 성난 군중만 있을 뿐이다. 그 뒤틀린 의식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그들의 모습을 보며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병영적 사회 질서의 가장 가혹한 '피해자'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여성들의 말을 허하라  

월장의 기사들은 사유와 글쓰기 방식이 하나로 통일된 정교한 글이 아니다. 그 내용과 형식 사이의 간극을 날렵하게 뛰어넘어 읽지 못하는 마초 예비역들의 반응을 생각하면, 월장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예비역들이 한바탕 웃으라고 익살을 떨었는데 웃음은커녕 욕설이 터져나온다면 대학 공간의 군사주의에 대한 말 걸기는 일단 실패했다고 본다. 그러나 여성의 입으로 누구도 건드리기 힘들었던 성역을 깨는 작업을 시작했다는 의의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딴지일보에서는 국회의원들을 4년마다 털갈이하는 동물로, 예비군들을 개구리복만 입으면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는 희귀동물이라 조롱한 적이 있어도, 자신은 동물이 아니라고 항의하는 국회의원과 예비군이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등굣길에 후배들이 예비역 선배에게 야구빳다로 기합 받는 모습을 보고 통탄하는 글을 교지에 실은 남학생이 무사하지 못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런데도 예비역들을 실컷 욕하지도 않은 여자들은 돌을 맞다니! 대학 캠퍼스에서 암묵적으로 용인되고 있는 성역화된 예비역 문화에 대해 여성들이 더 이상 못 참겠다는데야 누구라도 그 말하는 입을 다치게 할 권리는 없다.

  봇물처럼 터져나올 여성들의 입을 막아서는 안된다. 예비역들이 이번 기회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여성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없었는지 자성하는 계기로 삼는다면 오죽 좋으련만, 그녀들로 하여금 제대한 남자들과의 소통 불가능성을 새삼 확인하도록 하거나, 여성의 이름으로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좌절하게 만들까 두렵다. 예비역들은 어렵게 입을 연 여성들을 때려잡는 데 열을 올릴 일이 아니라, 자신들에게도 말할 기회를 달라고 요구해야 한다. 그들에게도 신성한 국방 의무라고만 명명된, 병역에 대한 공식적 담론을 걷어내고 내면의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낼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제발 안티월장 같은 폐쇄적인 사이트에서 놀지 말고 소통의 공간을 찾아, 개인의 이름으로 나오기 바란다. 그때 월장이 흔쾌히 멍석을 깔아주지 않는다면 나는 기꺼이 예비역 편에 서겠다. 예비역의 말을 허(許)하라고!

피에쑤: 나도 너희 예비역 넘들을 비꼬았다. 고까우면 덤벼 봐!  

* 본 글은 대자보 59호(2001.5.16)에 발표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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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3/11 [12:3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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