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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과리의 숨바꼭질과 뒤틀린 욕망
조선일보 아침論壇 ‘평등과 권력의 숨바꼭질’을 읽고b
 
임흥재   기사입력  2002/11/15 [07:23]
{IMAGE1_LEFT}이 글을 쓰는 나의 심정은 참담하다. 성석제의 동인문학상 수상 소식을 접하면서 나는 십수년 전의 과거와 만났다. 몇몇 평자들이 성석제와 황만근, 동인문학상과 조선일보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 나는 종신심사위원의 한 명인 정과리 교수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 분은 나의 은사다. 그가 동인문학상의 변경개편과 함께 종신심사위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안 것도 최근의 일이다. 그만큼 나는 불민한 제자일뿐더러 나의 은사님의 기억에 ‘내 이름이 남아 있기나 할까’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분명 술고프던 방황의 시절에 스승과 제자로 같은 캠퍼스 같은 강의실에서 마주앉아 있었다.

당시 그 분은 지금처럼 국문학과의 교수가 아니었다. 외국문학을 강의하던 젊은 교수님이었고 주목받는 문학평론가였으며 복간을 시작한 ‘문학과 사회’(‘문학과 지성’이 복간 되면서 그 제호가 바뀌었다)의 편집동인이었다. 뚜렷한 목적도 없이 택한 전공에 대한 회의로 졸업을 위한 학점취득의 수단에 불과하던 수강이라는 학습행위를 학문에 대한 열정과 배움이라는 본래의 의미로 변화시켜준 이가 그 분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계간지의 제호처럼 ‘문학’과 ‘사회’라는 것에 대하여 눈을 떳고 책을 읽는 즐거움을 만끽하였다. 비로서 세상을 흐릿하게나마 바라볼 수 있는 시력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례사 비평에 대한 우려와 문학권력에 대한 비판이 행해질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교수님의 이름을 발견하면서도 나는 의도적으로 외면하였다. 무엇보다 내가 일상을 살아가기에도 벅찬 한 생활인일 뿐이며 내게 있어 ‘문학권력’과 상업적 출판자본의 소위 ‘포르노 마케팅’에 대한 근심은 하등의 상관이 없는 다른 세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별개의 공간으로 분리 되어 있던 것들이 내가 우연한 기회에 인터넷 공간에서 글쓰기라는 것을 하게 되면서 조금씩 관계 맺어지더니 급기야 오후 늦게 디지틀 조선을 웹서핑 하던 순간에 결정적으로 관계하도록 만들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의 관계는 불행하다. 이 문단까지만 정과리 교수가 나의 은사다. 내가 이미 예감하여 우리의 해후를 애써 피해왔던 것처럼 나의 존경심은 과거의 정신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다. 또한 ‘생각이 다른 은사님에 대한 야멸찬 공박 혹은 건방진 배은망덕이 아니냐’고 할지도 모를 독자들의 온정에 수긍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만 글의 말미에 가서 이 글을 쓸 수 있도록 나의 개안을 도와준 은사님에 대한 고마움과 한스러움을 밝힐 것이다. 이런 나의 고민으로 인하여 망설이던 시간에 이미 다른 동료기자(김헌식)가 ‘아침논단(평등과 권력의 숨바꼭질)’에 예시된 경우를 조목조목 비판하였으므로 나는 원론적인 측면에서 정교수님과 논쟁할 것이다.(자신과 관련된 논의에서 보여준 ‘사소한 것’에 대한 무시로 일관하던 태도로 보아 스승과 제자의 부끄러운 논쟁으로는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격에 어울리는 위치에서 이 글을 써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제자의 죄스러움도 굳이 숨기지 않겠다. 그러나 나는 나의 삶을 열심히 살아왔음으로 스승을 욕보이는 짓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그토록 경멸하는 (형식적 실질적 둘 다)‘평등’을 위해 일체의 존칭을 생략하기로 작정한다.

정과리의 ‘평등’과 ‘욕망’은 거짓이다

긴 서론은 나의 특수한 입장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 되었다. 이해하여 주실 것을 믿으며 정과리의 욕망 속으로 들어가보자.

[관련기사]아침논단, 평등과 권력의 숨바꼭질, 정과리, 조선일보(11.14)

“한국사회의 내장이 심하게 꼬여 곽란(癨亂)을 일으키고.... 사람들의 욕망이 한 곳으로만 몰려 병목현상을 일으킨 때문인 듯하고, .... 사람들의 욕망이라는 게 사촌이 땅을 살듯하면 배가 아파서 급전 빌려 너도나도 달려드는 평등에의 욕망이 아닌가 싶다”

이 말은 거짓말이다. 우선 곽란을 일으키고 병목현상을 일으킨 그 것이 한국사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 것은 물질적인 삶으로부터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는 인류보편의 문제이지 한국사회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는 의뭉스럽게 ‘카드빚’‘떳다방’‘사교육’ 등을 예시하며 한국사회의 문제임을 부각시키지만 우리보다 여건이 훨씬 나은 서구의 어느 나라에서나 있는 사회적인 문제이다. 공교육이 제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서구유럽에서도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명문 사립학교가 엄연히 존재하고 경쟁은 치열하며 막대한 사교육비가 실제로 지출되고 있다. 하물며 카드빚이라니?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은 그와 똑같이 되고 싶은 평등에의 욕망이 아니다. 어느 하나라도 더 가지고 싶은 인간의 욕심을 빗댄 속담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질시와 부러움, 즉 인간의 이기적인 속성을 가지고 평등에의 욕망 운운하는 것은 글의 논지를 그렇게 끌고가려는 정과리의 뒤틀린 욕망일 뿐이다. 말꼬리 잡는 정도까지 나아가면 실제로 급전 얻어 땅을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 지경의 한국사회라면 이 좁은 땅덩어리 어디에서 그 많은 매물을 찾을 수 있을지 나는 물어볼 수밖에 없다.

(강도와 살인 등) “갚는 방식에서마저도 남의 살과 내 입이 구별되지 않는 것이다”는 그야말로 침소봉대다.  과장과 허풍이 도를 지나쳐도 이 쯤 되면 기가 찰 노릇이다. 위 경우에 해당하는 범죄의 발생건수를 미국을 비롯한 물질적 번영을 구가하는 나라들과 비교해보시라. 카드빚을 갚기 위해 저질러진 범죄가 실제 늘었다해도 그 원인은 물질만능의 가치관과 무분별한 소비문화를 조장하는 미디어의 해악과 사회지도층의 부정부패 사치풍조인 것이지 어떻게 평등에의 욕망이 그 범죄의 원인으로 둔갑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정과리가 걱정하듯이 남의 돈이라도 쓰고 보자는 몰지각한 소비의 욕망은 ‘열심히 일한 당신’이 ‘떠나’지 못하도록 불평등하게 정형화된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일 뿐이다. 그러니 한탕주의에 쉽게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이 불평등한 사회에서 평등에 집착한 나머지 사회적으로 많은 역기능들을 야기시킨다는 말로 (즉 정과리의 주장처럼)들릴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평등에의 욕망은 인간 본래의 것이며 그 평등을 지향하기 위하여, 즉 좀 더 나은 생활을 위하여 내가 현재의 고달픈 일상을 견디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가도록 격려하는 긍정의 욕망인 것이지 정과리처럼 평등해서는 안 될 인간들이 쓸데없이 평등해지겠다고 강도짓이나 하는 부정의 욕망은 아닌 것이다.

“그 망할 사교육은 왜 기세등등한가? 평준화 이후 한국의 어린 학생들이 몽땅 잠재적 일류 대학생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평준화 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고등학교 입학으로 일류 대학생이 결정 되었다면 잠재적 일류 고등학생들이 양산될 것이 아닌가? 사교육의 폐해는 더욱 어린 나이부터 경험하게 될 것이 아닌가? 정과리가 졸업한 중부의 명문 D고를 비롯하여 서울의 K, S고 등을 들어가기 위해 일찍부터 지옥을 경험해야 한다는 말인가? 글의 말미에서 스스로 걱정한대로 “사고력의 현저한 감퇴를 조장하”는 그 입시지옥을 중학교에 진학하기 무섭게 경험해야 하는 것이 예측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평준화 하지않고 경쟁체제로 전환하면 없던 ‘사고력’이 증진 된다고 설마 우기지는 못할 것이다. 명문고에 진학하기 위하여 더욱 사교육에 매달려야하고 사고력과는 상관없이 시험을 잘치르기 위한 규격화된 교육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평론가 중에서도 어렵게 글쓰기로 유명한 자신의 변별력을 자랑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출신고가 평준화로 그 이름이 바래서 그런 것인가 또 아니면 자랑스런 자신의 S대를 아무나 들어오겠다니 기분이 상하셔서 그런 것인가?

누구나 잠재적 일류 대학생이 되고 사교육의 폐해가 심각한 것은 평준화 탓이 아니라 망국적인 학벌주의 때문이다. 정치 사회 경제계 등 사회 전부문에 팽배해 있는 학벌과 학맥의 끌어주기 밀어주기가 이 땅의 젊은이들을 자신의 적성과 장래의 희망과는 상관없이 일류대병에 신음하게 하는 것이고 그 학벌의 높은 담벼락에서 처절한 실패를 경험한 이 땅의 부모들을 몰지각한 일류대 선호병자로 만든 것이다. 평등과 평준화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평등과 평준화를 등치시켜 놓고 사교육을 논하는 그가 말과 글을 전공으로 수학한 선생이 맞기는 한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 평등은 한국인들의 마음 속에 잉걸처럼 타오르고 있는 내면의 불길인 모양이다. 그런데 그것은 한국인들을 공평하게 행복하게 해주기는 커녕, 갈증난 입에 소금을 부어댄 것처럼 더욱 조바심치게 한다.... 도미니크 슈나페(Dominique Schnapper)... 그는 ‘평등’이 민주주의를 해친다고 감히 말한다. ... 하나는 모두가 시민이고 모두에게 똑같은 법률이 적용된다는 점에서 ‘형식으로서의’ 평등이다. 또 하나의 평등은 모두가 똑같은 대우를 받고 똑같이 부를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실질적 평등’이다”

계속 반복되는 ‘한국사회의’ ‘한국인의’ 표현은 인류보편의 문제를, 지구촌 사회가 모두 공유하고 있는 문제점들을 뒤에 지적하고 싶은 정권(권력)의 실정 탓으로 몰아가기 위한 정과리의 치밀한 왜곡이다. 평등을 지향하는 것이 어찌 한국인만의 정서일 것인가? 또한 평등이 공평한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하는 것이 어떻게 한국사회만의 문제일 수 있는가?

‘똑같은 법률이 적용’ 된다는 점에서의 형식적 평등이라는 것도 실제 ‘똑같지 않은 법률의 행사’가 비일비재한 현실에서 그 의미의 중량은 감소될 수밖에 없다. 하물며 실질적으로 불평등한 사회에서의 계급간의 갈등은 이 세상 어느 곳에서나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이고 이를 시정하기 위한 평등에의 욕구는 ‘민주적임을 자처하는 정권’과는 상관없이 권력이 짊어지도록 운명지워진 것이다.

“이 ‘섭리적 민주주의’ 사회는 역설적이게도 민주주의의 골격을 망가뜨린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의 자원은 한계가 있는데, 개인들의 요구는 무한해서 결국 자원을 고갈시키고 민주주의를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이제 그것은 공공의 복리가 아니라 사사로운 이익들의 요구에 복종하게 되는 것이다.”

정과리는 위 주장이 “적어도 한국사회에서는 타당성이 있”고 여기에 끼여있는 중요한 변수로 “평등에 대한 조갈증을 방치한, 아니 부추긴 권력들의 무지 혹은 무계획 또는 그들 자신들의 권력을 향한 조갈증”이라고 우기면서 우루과이 라운드 이후의 농촌위기와 ‘농촌구조개선사업’에 들어간 40조원의 돈을 예로 들고 있다. 과연 그러할까?

인용문의 ‘자원’과는 약간의 의미차이는 있겠으나 유럽의 경제학자, 기업인, 과학자 등으로 구성된 로마클럽은 1976년 ‘성장의 한계’라는 보고서를 통해, 유한한 지구자원으로 볼 때 무한한 경제성장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정과리의 주장을 경제적인 측면에서 해석해보면 정확히 일치하는 견해일 것이다. 더욱이 ‘개인들의 요구’라는 것이 경제적인 재화의 분배에 거의 집중된 것이므로 이들 성장한계론자들의 주장은 민주주의를 ‘마비'시키게 될 것이라는 정과리의 주장과 진배 없다.

그러나 이들의 이론에 따르면 고갈되어야 할 천연자원은 여전히 남아있으며, 인구증가로 폭등할 것이라던 식량가격도 사상 최저수준이다. 즉 로마클럽은 기술적 진보와 인간의 적응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이 이론은 미국의 격월간 전문잡지 포린 팔러시(Foreign Policy) 11.12월호에 한 세기를 풍미했으나 21세기 들어 ‘역사의 쓰레기통’에 내던져진 대표적인 사상, 이론으로 소개되었다.

마찬가지 운명에 처한 마르크시즘의 예언과는 반대로 평등사회는 도래하지 않았으나 노동자들의 생활조건은 향상됐으며 사라질 것이라던 중산층은 오히려 두터워졌다. 이는 무엇을 시사하는가?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물적토대와는 상관없이 평등을 지향하는 인간의 정신은 한계와 고갈과 마비에 대항하여 끊임없이 진보한다는 것이고 이런 적응력이야말로 민주주의를 견인하고 추동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평등이 한 문화권 한 사회내부의 계급 혹은 계층간에만 존재하는 것이거나 평등해지려는 욕망과 실제적 불평등의 충돌이 우리 사회의 내부적인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세계화의 해일은 의미 그대로 초국가적인 것이고 정과리 자신이 한국경제 11월 3일자의 시론에서 언급한대로 “이익을 끌어내는 국가와 그로부터 극심한 고통을 겪는 국가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이는 국가간의 불평등 역시 엄존하는 현실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정과리의 주장대로라면 ‘평등주의의 염해에 난파’되지 않기 위해서는 불평등을 받아 들이고  거대자본국의 수탈을 수용하여 노비의 식량으로 연명하거나 ‘조갈증’을 버리고 꼭꼭 숨어 숨바꼭질이나 해야할 판이다. 자원의 보유와 기술의 수준에 따르는 불평등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런 불평등이 공공의 복리를 저해하는 것이지 국가간 계급간 계층간 혹은 개인간의 평등해지려는 욕구가 사사로운 이익들의 요구에 복종하도록 하는 것은 아니다.

정과리의 이중 잣대 혹은 인식의 모순

{IMAGE2_RIGHT}글이 너무 길어짐으로 해서 세계화에 대한 불평등의 문제는 서둘러 맺고 말았다. 그러나 기왕 작심하고 쓰는 글이기에 정과리의 이중성을 한 두가지 소개할까 한다. 정과리는 한국경제 4월 6일자에 프랑스 대선에서 르펜의 약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연히 프랑스 위성방송을 켰다가 입이 딱 벌어져 아래턱이 빠질 뻔 했다. 프랑스 대통령선거 1차 투표에서 극우정당인 ‘국민전선’의 르펜(Le Pen)이 현총리인 사회당의 조스팽을 제치고 2위를 한 것이다. 가히 폭탄테러 수준의 충격이라 할 만하다... 극우의 약진은 곧 파시즘의 부활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극우의 약진은 파시즘의 부활로 이어질 것이기에 턱이 빠질 정도로 놀란 그가 조선일보의 동인문학상 종신심사위원 수락에 대한 비판에 대하여 변명한 이유 중의 세 번째를 보면 그가 가치의 기준을 가지고 있기나한지 의문이 든다.

“셋째, 극우 이데올로기는 이성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우리 사회의 한 이념일 뿐, 철저히 박멸하여 그것이 감염시키는 걸 막아야 할 정도로 무서운 전염병이 아니다”

그의 말대로 가히 폭탄테로 수준의 말장난이다. 우리보다 앞선 정치문화와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대부분 인정하는 프랑스에서 극우 후보 르펜의 16.95%에는 파시즘의 부활을 걱정하는 사람이 수구족벌언론의 문학상 심사위원이 되면서는 극우라는 것이 얼마든지 이성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틀린 것인가? 아니면 정과리만의 이중적 가치기준의 오묘한 진리를 내가 냉철한 이성으로 해독하지 못한 것인가?

“독재와 파시즘을 가르는 기준은 두 가지다. 첫째, 독재는 통상 기존의 지배계층과 결탁하고 있는 데 반해 파시즘은 새로운 집단을 창출하려 하며, 이러한 의도는 궁극적으로 <새로운 인간>의 창조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둘째, 독재는 통상 억압과 통제라는 방식을 택하지만, 파시즘은 대중의 자발적이고 광신적인 동원을 이용한다는 것이다...<중략>... 그는 ‘힘없는 사람들’‘지위없는 사람들’‘배제당한 사람들’ 편임을 공공연히 드러내면서 그들에게 ‘꿈꾸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호소한다... ‘나 스스로 추위와 배고픔을 겪었다.’ 여기에서 나의 시선은 문득 한국의 정치판으로 옮겨 앉는다.”

그는 같은 글에서 밀자(P Milza)교수의 파시즘과 독재를 가르는 기준을 제시하면서 글의 목적이 궁극에는 현재의 대선후보를 향한 것임을 드러낸다. 르펜 같이 약자 이미지의 정치적 수단화가 파시즘의 부활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물론 대중의 자발적 동원이라는 요소가 빠져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파시즘과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단서조항을 삽입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가 의도했건 안했건 너도나도 서민후보를 참칭하는 현실에서 대중의 자발적 동원이라는 팬클럽을 가진 유일한 모후보는 그러기에 졸지에 파시스트가 되고 만다.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이라는 수식을 받으며 변화와 개혁의 정치혁명을 불러올 적임자를 파시스트로, 자발적 후원조직인 노사모를 파시즘 광신도로 몰고 있다는 오해를 받을 가능성이 충분한 이 글을 왜 써야만 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사실 적었다 지웠다. 쓰여진 시점이 노풍이 절정을 치닫던 4월 26일(서울경선 하루 전)이라는 의구심도 들었다.

그러나 지나간 시점의 글을 가지고, 그가 명시적으로 지적하지 않은 정치인에 대한 혐의점만을 가지고 자칫 일방적 주장이 될 수도 있는 의심을 토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만 그의 이상한 논리에 따르면(밀자의 파시즘과 독재의 기준이 다른 나라에서는 보편적인 가치기준일 수 있다 인정하여도) 그가 르펜에게서 다시 밀자에게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린 우리 나라에 이르면 극우주의자 르펜과 급진좌파로 까지 몰리고 있는 노무현이 같은 범주에 들고마는 기괴한 결론에 다다른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논설위원

사족>>기괴하다는 뜻의 그로테스크가 지닌 문학적 혹은 예술적 함의를 내게 가르쳐준 분이 정과리 교수다. 이 자리를 빌어 내게 스승의 뒷모습이 불길하고 추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안목을 길러주신 교수님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바친다. 또한 전혀 존경할 수 없는 모습으로 서계신 스승을 보아야 하는 나의 한스러움과 안타까움을 깊은 겨울밤의 이신들과 숨바꼭질하며 달랜다. 잠들지 못하면서도 영원히 깨지 않을 잠에 빠지고 싶다.  

* 이 기사는 하니리포터에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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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11/15 [07:2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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