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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의 민족문화 죽이기
덕수궁 터 미대사관 신축논의를 지켜보며
 
강임산   기사입력  2003/12/12 [11:33]

지난 12월 3일 고건 국무총리 주재 하에 관계장관 간담회를 열어, 덕수궁 터 미대사관 신축문제가 논의되었다. 이날 논의된 바에 따르면 “덕수궁 터에 미대사관만은 허용 하자”는 정부와 청와대의 기본방침이 이미 굳어진 듯 하다. 당초 미대사관 측의 계획은 덕수궁 터 위에 미대사관(15층)과 직원용 아파트(8층), 그리고 해병대 숙소(4층) 모두를 세우는 것.

▲옛 덕수궁 터     ©한겨레
그러나 이에 대해 국민들의 비난여론과 시민사회단체의 거센 반발, 그리고 무엇보다 그간 덕수궁 터 미대사관과 아파트 신축과정상의 절차로 진행되었던 지표조사결과 ‘보존’판정이 떨어지자 당초 계획을 전면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에 미대사관측은 궁색한 변명과 함께 “다른 건물은 아니더라도 대사관만은 짓도록 양보 하겠다”는 양보안 아닌 양보안을 우리 정부에 제시하게 되었고, 정부도 이를 ‘적극’ 검토한 끝에 미대사관 측의 방안으로 최종 방침을 굳힌 것이다. 이미 한 차례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연기시킨 끝에 이러한 방침을 정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들 양보를 한 것도, 상황이 조금이라도 나아진 것은 하나도 없다. 이는 한마디로 “눌러 죽이지 않을 테니, 토막 내 죽이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국민을 우롱하고 기만한 것이다. 더 나아가 정부의 이러한 방침은 ‘그릇된 선례’로 남아 이후의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우선 소위 ‘양보안의 허구’를 들여다보자. 미대사관 직원용 아파트와 대사관 청사를 신축하겠다는 곳 모두 역사적 가치가 높은 옛 덕수궁 터다. 더구나 그곳은 궁궐의 영역 가운데 가장 상징적이고 중요한 부분에 해당한다. 물론 어느 한 곳 중요한 곳이 없겠냐마는 문제의 본질은 궁궐 터였다는 ‘역사적 장소성’에 있다. 이른바 ‘제한 개발론’의 허구는 그 전체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성을 갖는 곳에서는 아무런 효력을 갖을 수도 없고, 이것이 더더군다나 양보안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미 30년 전에 UNESCO에서 확인한 원칙이기도 하다.

▲ 현재 미대사관과 덕수궁터의 지도모습    ©한겨레
다음은 ‘법절차를 앞두고 부적절한 발언’을 일삼는 문제를 따져보자. 아직 그 날짜는 정확히 잡혀있지 않지만 대략 12월 20일을 전후로 문화재위원회를 열어 이번 문제를 심의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간의 지표조사결과를 토대로 덕수궁 터 위에 외교공관을 허용할 것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회의인 것이다. 이는 문화재보호법에서 정하는 ‘법 절차’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외부환경의 영향력 없이 엄정하고도 객관적으로 진행되어야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앞두고 정부와 청와대가 소위 ‘기본방침’을 먼저 운운하며 왈가왈부한다는 점이다. 이는 한마디로 문화재위원들을 향해 “(한미관계를 위해)알아서 잘 판단해 달라”는 암묵적인 주문에 다름 아니며, 문화재위원회의 권위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망동이 아닐 수 없다. ‘법과 원칙’을 강조하는 참여정부의 일관된 입장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참고로 문화재위원회의 결정은 법적 효력을 갖는 것은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뒤엎을 수 있다. 하지만 지난 40년간 단 한번도 이런 선례는 없었다. 과연 그 선례가 나올 것인지도 지켜볼 일이다.

다음은 소위 ‘선물론의 허구’를 살펴보자. 미국 측이 각종 민감한 한미간 현안을 덕수궁 터 미대사관 신축문제와 연계시켜 압박을 가하고 있다. 이에 청와대 일각에서는 “(작금의) 불편한 한미관계 개선을 위해 덕수궁 터를 선물하자”는 이른바 ‘선물론’이 상당히 공감을 얻는 분위기다. 차라리 ‘조공’이라면 모를까 덕수궁이 미국에 보내는 ‘크리스마스 선물’일 수는 없다. ‘악마에게 자기 영혼을 파는 파우스트’이야기는 문학에서만 족하다는 얘기다. “선물로 주자”는 이번 사태의 이 대목에 이르면 청와대와 정부 당국자들이 문화유산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극명하게 보여주고도 남는다. 문화유산은 문화유산의 문제로 풀어야지, 더구나 불평등한 한미관계 속에서 이를 해결해 보자는 협상의 도구로 전락시킨다면 노대통령 개인의 통치사는 물론 역사 속에도 커다란 오점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다음으로 소위 우리 정부의 ‘문화유산 보존 포기선언’의 문제점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청와대 고위관계자란 어떤 분께서 “관계 부처장들의 실사 결과 신축 부지 주변에 고층 건물이 많이 들어서 있는 등 (대사관을) 짓지 못하게 하는 것은 설득력이 약한 것으로 판단됐다”며 덕수궁 터에 미대사관 직원용 아파트를 제외한 대사관청사만을 짓도록 방침을 정했다고 한다. 이는 매우 절망적인 상황인식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해 “과거 개발로 인해 훼손된 문화유산은 포기 하겠다”는 ‘문화유산 보존 포기선언’이라는 것이다. 문화재보호법이라는 실정법도, 그리고 문화재청이란 부처의 존재근거도 이 대목에 이르면 모두 부정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포기선언’의 논리에 따른다면 향후 여타의 이유로 진행되는 개발행위를 막을 근거도 없으며, 문화유산은 영영 포기해야만 한다. 미국 측이 당초 이러한 상황논리를 강변할 때만 해도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망언’이라고 일축했지만, 미국의 백악관도 아닌 대한민국의 ‘청와대’로부터 이러한 논리가 또다시 되풀이 되고 있다면 이를 과연 어떻게 봐야하는가? 문화유산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나날이 달라지고 있는 추세를 감안하더라도, 이는 시대에 역행하는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문화유산의 문제는 ‘문화유산 보존의 시각’으로 접근하고 풀어야함은 마땅하나, 지금의 문제는 이미 문화유산의 문제를 넘어선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문화유산을 지켜내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선례를 만들었다”는 본보기를 만들어야 할 때가 아닐까? “법 절차와 원칙에 따라 처리하겠다.”는 정부와 청와대의 말이 ‘민란으로 치닫고 있는’ 부안사태에만 해당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 본문은 본지와 기사제휴 협약을 맺은 문화연대에서 발행한 주간문화정책뉴스레터 '문화사회' http://culture.jinbo.net/ 에서 제공한 것입니다.
* 강임산씨는 덕수궁터 미대사관아파트 신축반대 시민모임 공동집행위원장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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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12/12 [11:3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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