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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Cine의 비디오 되감기] 버스, 정류장
'17+32'의 해석학과 '34+32'의 해석남녀ba.info/css.h
 
공희준 Cinema Jockey   기사입력  2002/07/23 [23:17]
{IMAGE1_LEFT}오늘에야 내가 심각한 정치중독자임을 깨달았다. 날개 잃은 영혼들이 서로의 상처와 아픔을 보듬어주는, 요리조리 젓가락으로 안팎을 골고루 휘젓고 뒤적여도 도저히 정치적 코드와는 맥락이 닿지 않는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자타칭 지지도 1위를 달리고 있다는 어느 대통령 후보자의 실루엣이 떠오른 탓이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남자 주연(재섭 : 김태우)이 여자 주인공(소희 : 김민정)에게 "싫으면 말고"란 말을 툭 던진다. 여자 주인공의 반응이 독특하고 유쾌하다. "...면 말고"라는 어투에는 강한 자신감이 배어 있다는 설명이다. 자신감이 결여된 듯한 이 표현에는 외려 청자의 상황과 입장을 철저히 무시하는 화자의 지독한 오만과 독선이 깃들여 있다는 해석이다. 이 대목에 이르러 "아니면 말고!"를 굵고 튼튼한 정치적 자일(Seil)로 삼아 대권고지의 8부 능선에 도달한 엘리트 정치인의 의식 저변에 깔리 정서적 골계미가 살짝 내비친 것이다.

정치적 착잡함에 기대어 "버스, 정류장"에 내 자신의 체험을 녹인다. 유감스럽게도 직접 경험한 실제 체험이 아닌 주변 사람들의 경험을 채굴해 정제한 대리적 추체험이자 내 실현되지 않은 욕망의 전차자국이 남긴 씁쓸한 픽션의 영사다.

「씨네21」에서 소설가 고종석은 직립보행을 인류의 본원적 특질로 규정했다. 나는 여기에 더해 인간이 가진 유적(類的) 특성의 하나로 사계절이 뚜렷한 기후에 사는 다년생 동식물 중에 상록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유일무이하게 겨울잠을 자지 않는 점을 들고 싶다. 재섭과 소희가 인간이 의무적으로 타자의 인생을 조금씩 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는 신에서 이런 되바라진 상상을 하게 되었다. 남의 인생을 살기 원하면서도 정작 타자가 자신의 삶을 살기는 바라지 않을 것이라는 주인공들의 추측은 대체로 타당하다. 덧붙여 추가하자면 타자의 인생을 사는 시간은 욕구충족에 필요한 물적 토대를 구축하는데 할애될 거이고, 자신의 삶을 사는 기간은 축적된 욕망을 발현하는데 바쳐질 것이다. 욕망을 예비하는 것보다는 욕망을 발산하는 것이 더욱 즐겁다.

욕망의 제국인 미국을 위시한 대다수 힘센 나라들은 춘하추동이 뚜렷한 기후대에 분포되어 있다. 사람이 겨울잠을 잔다면 세계는 지금보다 훨씬 평화롭고 조용할 것이다. 또라이 부시도, 썰렁한 고이즈미도, 골치 아픈 김정일도 겨울만 되면 일제히 자빠져 잔다면 지구는 현재보다 단연 안온한 장소가 될 것이다. 미군은 세계를 전쟁위기에 몰아넣는 무도한 불량배이자 자국의 군산복합체를 지탱해주는 최대 수요자에서 쿨쿨 겨울잠에 빠진 3억 미국인의 편안한 숙면을 수호하는 조용하고 점잖은 불침번이 되리라.

{IMAGE2_RIGHT}이런 황당무계하고 엉뚱한 착상은 나로 하여금 "버스, 정류장"의 주인공으로 감히 발탁되는 데까지 무모하리만큼 죽 연장된다. 희한하게도 내게 주어진 역할은 32살의 학원강사 재섭이 아니라 17살의 여고생 소희다. 나는 소희가 된다. 겨드랑이가 가려워지더니 돌연 가슴이 보드랍고 살며시 부풀어오른다. 가랑이 사이가 근질거리더니 남성성을 표상하는 결정적인 신체적 구조물이 서서히 오그라들며 사라지는 이적(異蹟)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아 지랄 같다. 이건 도저히 내가 소화할 수 없는 배역이다. 나는 그냥 34세 남자로 남기로 결심한다. 차라리 여고 1년생 소희를 32살의 노처녀 학원강사로 훌쩍 성장시키는 것이 훨씬 낫겠다. 당연히 영화의 중심축과 시점은 32살의 학원강사인 그녀에게 옮겨진다. 나는 그녀의 번민과 고뇌를 관객에게 매개하고 번안해 전달하는 주연급 조연의 자리로 한 걸음 물러난다. 영화의 구도는 '17+32'에서 '34+32'로 급작스럽게 전환된다.

그녀는 일터에서 은근히 따돌림당하는 처지인 은따다. 좌절과 실망만을 안겨준 대학시절을 별로 그리워하지 않는다. 그 당시 누구보다도 열심히 이상을 좇으며 치열히 싸웠지만 이후의 삶의 궤적은 꿈이 지나갔을 궤도와는 이미 멀어진지 오래다. 재섭이 다른 남자와 결혼을 앞둔 과거 여자친구인 혜경과 해후했을 때 직면했을 당혹스런 환멸과 공허를 내 상대역으로 출연하는 32살의 여강사도 흉부 깊숙한 곳에 아물지 않은 흉터로 간직했을 게다. 재섭의 아이를 가졌던 대학동창 혜경의 천연덕스럽게 변모한 모습에서 발화한 모멸감은 그녀의 후배와 결혼이 예정된 옛 애인이 신부감을 데리고 나온 자리에서까지 자신을 추근댔던 해프닝에서 재차 연소했을 것이다.

17살 여고생 소희를 탈선하게 한 원인이 부패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정이었다면, 나를 삐딱하게 만든 것들은 왕후장상이 환경적 여건에 의해 생득적으로 정해지고, 패자와 승자가 본인의 자질과 소양과는 무관하게 태생적으로 점지되는 세상의 졸렬함이다. 소희는 원조교제를 한다. 나는 먹고사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주의주장들과 사통한다.

"버스, 정류장"에서 소희와 재섭이 만나고 헤어지며 다시 재회하는 배경은 동네와 동네를 연결하는 시내버스 정류장이다. 소희보다 나이 먹은 수컷인 내가 영어를 가르치는 여자로 분장한 재섭과 밀회하는 공간은 도시와 도시를 이어주는 시외버스 터미널이다.

소희는 겁 없이 재섭의 자취방에 들어갔지만 우리는 갈 곳이 없다. '17+32'의 영화의 주인공과는 달리 '34+32'의 우리는 몸이 충동질하는 즉자적 외침을 금제할 하등의 이유가 없으므로 도리어 둘 만의 내밀한 곳으로 갈 수가 없다. 둘 다 얌전히 잠만 자는 조건으로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나 함께 동면에 들어가기로 약속을 정하지 않은 이상 우리가 안심하고 몸을 뉘일 안전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제작한 명필름 작품이다. 이름만으로 판단하자면 감독은 상당한 미모를 겸비한 재원이다. 눈치 없는 이들은 어떤 여배우와 착각하겠다. 여성의 시선으로 그려진 32살 남자는 실제에 비교해 섬세하고 섬약하다. 그가 세상을 향해 외치는 곳은 오로지 헤어진 애인과 동일한 예명이 붙여진 창녀의 골방 안에서다. 20대의 광장을 벗어나 30대의 밀실로 잠적한 사내는 10대의 어린 여자를 통해 슬그머니 광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40대 중년남자의 어설픈 사랑타령이 역겨운 10대 소녀는 스스로 옥문을 걸어 잠근 마음의 감옥으로부터 탈출할 시나리오를 30대 남자로부터 전수 받는다. 그녀가 맞이할 20대가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지 나는 예측하지 못한다. 다만, 30대가 된 그녀가 내가 허구로 제작·감독·주연·각색한 영화의 30대 여자 강사처럼 10대 소년의 감성으로부터 영원히 떠날 생각이 전혀 없는 제 또래의 철부지 사내를 통해 세상으로 돌아갈 용기를 얻어야 할만큼 힘들고 고단한 20대를 살지 않았으면 한다.

재차 고질적인 정치중독증이 발작한다. 이 영화의 제목은 "버스 정류장"이 아니라 "버스, 정류장"이다. 사이에 낀 쉼표의 기능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해부해보는 일도 꽤나 흥미로운 작업이다. 정류장이 있어야만 버스는 승객을 태우고 내릴 수 있으며, 버스가 오고 감으로써 정류장은 제 구실을 한다. 상대가 있음으로 내가 있다는 초보적인 관계의 윤리학을 감독은 관객에게 설파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마 그럴 게다. 대통령과 대통령의 손녀, 총리와 총리의 아들, 두 쌍의 관계를 축조하는 벽돌의 하나가 같은 대한민국 국적 소지자일 것이라는 초보적 관계의 윤리학이 무너짐으로 하여 이 나라가 이토록 개판 5분 직전으로 굴러 떨어진 것이니까. 마침표가 아닌 쉼표임을 곱씹자. 아직도 우리에게는 초보적 관계의 윤리학을 지리멸렬시킨 고귀한 태생의 인물들을 충분히 버스에 태워 아주 멀리 보내 버릴 다섯 달이란 귀중한 반전의 런닝타임이 주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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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7/23 [23:1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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