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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절과 교회를 찾습니다
[정문순 칼럼] 기복 장사에 빠진 종교, 해법은 없나
 
정문순   기사입력  2013/12/17 [01:46]
초겨울의 산사는 고즈넉했다. 절 입구에서 풍경 소리가 땡그랑 들리자 어떤 관람객은 언제 들어도 좋은 소리라고 했다. 돌이끼가 피어 있는 오래 된 불상도 세월의 무게를 가늠하게 해 주었고 까치밥 하나만 달고 있는 감나무도 보기 좋았다. 

그러나 이 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들은 절에 들어서기 전부터 줄 지어 늘어선 크고 작은 석등들이었다. 다녀본 절집 중 석등이 이렇게 많은 곳은 보지 못했다. 불전 안의 모습은 더 놀라웠다.

굴 속에 굴이 또 나오는 불전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불상으로 가득 찼는데 불상마다 시주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입구에 돈을 바치고 공덕을 성취하라는 안내문을 보니 좀 서글퍼졌다. 저 많은 석등들도 보나마나 돈 많은 보살님들이 소원을 빌며 바친 것이리라. 본디 절에는 석등이 하나밖에 없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나의 불빛만으로도 세상을 모두 비추는 데 충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 개가 천 개로 통하는 겸양의 힘을 모르는 절이라면, 무수한 석등은 곧 욕심과 탐욕의 개수와 동일한 것은 아닐까.

오래 된 절의 입구에는 ‘하마비’라는 비석이 있다. 말을 타고 온 지체 높은 사람이라도 부처를 뵙고 싶으면 말에서 내려서 오라는 뜻이다. 말에서 내리는 사람은 속세에서 가지고 온 거드름도 지위도 욕심도 모두 내려놓고 몸을 굽히고 사천왕상을 지나갔을 것이다. 

중생의 욕심을 경계했고 비움을 알았던 사찰이 오늘날 어쩌다 노골적으로 돈을 밝히는 지경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기왓장을 벌여놓고 시주를 권하지 않는 절이 없고, 입시 때는 학부모의 불안에 편승하여 한몫 보려고 작정하지 않는 사찰이 없고, 사람들이 좀 찾는다 싶으면 중찰불사를 일으키지 않는 곳이 없다. 더 많은 신자와 돈이 오게 하려면 부처의 코앞까지 길을 뚫어 자동차 배기가스와 온갖 속세의 소음을 끌어들이는 불경을 사찰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 같다. 말의 진입도 막았던 시절이 있었음을 아는지 모르겠다.

입시, 취업, 승진, 사업 등 어리석은 중생이 남을 떨어뜨리고 자신만 잘 되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빌더라도 이기적인 욕심을 들어주는 부처는 없다며 준열히 꾸짖지는 못할망정 기복 장사에 앞장서는 사찰이 널려 있는 것도 문제지만, 사찰의 장삿속에 영합하여 무슨 소원이든 지성으로 빌면 들어준다고 믿으며 피 같은 생 돈을 갖다 바치는 신자들도 한심한 것인지 불쌍한 것인지 요량하기 어렵다. 물론 누구나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종교를 대할 수도 있다.

종교를 보는 태도가 반드시 고상하거나 숭엄한 구도의 행위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아버지를 여읜 뒤 생전 처음 찾아온 심란함에 비로소 반야심경을 읽어볼 생각을 했다. 초파일 절밥 얻어먹으러 다닐 때 말고는 절을 찾는 일이 별로 없는 내가 경전 몇 줄 읽는다고 부처가 선친의 극락왕생을 도와주리라고는 믿지도 않았고, 문자를 통해서라도 내 마음을 달래는 힘을 얻는 것이 우선이었다. 고상한 불경을 고작 마음의 켕김을 푸는 데나 소비하는 내 방식이 매우 격이 낮은 것만은 틀림없지만, 그래도 입시 대박 기원 수준의 천박한 탐욕만큼은 모든 종교에서 경계해야 한다고 본다.

세상이 타락했는데 종교만큼은 예외가 아니어야 한다는 생각도 부질없는 욕심일지 모른다. 신자들이 헌금·시주를 바치는 대가로 개인의 이익을 갈구하는 것은, 모든 것을 교환과 거래의 대상으로 바꾸는 자본주의의 속물적 생리를 충실히 따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쁜 권력과 불의에 정면으로 맞선 박창신 신부 같은 이가 있어 비신자인 나도 종교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지는 못한다. 종교가 드러내놓고 천박해진 한국 사회의 토양에서 배출하기 힘든 종교인을 볼 때 종교에 더없이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나도 관점을 수정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종교가 중생의 고통이 되는 근원과 싸우거나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역할을 고민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겠다.

중생의 이기적 욕망을 부추겨 스스로 믿지도 않을 극락과 천국의 입장권을 팔고 헌금이나 시주의 크기에 따라 선별적으로 구원이나 복을 받는다는 거짓을 퍼뜨림으로써 자신들이 떠받드는 신에 대한 불경 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하고, 끝내 세상을 더한 아비규환 지경으로 이끄는 데 일조하는 행태만큼은 자제해야 하지 않을까. 가난한 종교와 교회를 보기가 참 어려운 세상이다.

* 본문은 12월 10일 경남도민일보 게재 칼럼을 손본 글입니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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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12/17 [01:4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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