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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적한 혜명당 대종사의 삶 그린 추모시집 선보여
인권운동가 진관 스님 <떠나가는 배> 펴내
 
김철관   기사입력  2013/12/07 [14:42]
▲ 표지     ⓒ 김철관
지난 9월 9일 입적한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사 혜명당 무진장 큰스님의 추모시집이 잔잔한 감동을 준다.

한국불교종단협의회 불교인권위원회 위원장인 진관 스님이 쓴 <떠나가는 배>(초롱출판사, 2013년 11월)는 혜명당 무진장 대종사의 열반 추모 시집이다.

이 시집은 혜명 큰스님이 태어난 후부터 출가와 수행, 입적까지의 일대기를 시로 표현했다. 한 인간이 출가해 수행자 교단에서 최고지위인 대종사 품계까지 받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혜명 스님은 2008년 대한불교조계종에서 대종사 품계까지 받았다. 그것도 포교사 스님으로 대종사라는 품계를 받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 시집을 펴낸 진관 스님은 혜명당 스님의 상좌로 있으면서, 지근거리에서 많은 것을 지켜보았다고.

나는 가야한다

파도가 넘치는 제주도를 떠나야 한다
가는 곳이 어디인지 모르지만 떠나가야 할 곳은 육지
끝없이 끝없는 길
그 길이 이어지는 노을 속 그림자 같은 세계
그 세계를 향해 나룻배를 타고 가야한다(중략)

내가 태어난 곳
그 곳을 버리고 가야한다
가다가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걸으리라
가다가 보면 내가 있어야 할 곳
아름다운 꽃 그리하여 마음에 대한 노래를 하는
그러한 세상을 향해서 가야한다(중략)

23살 되던 해 출가하기 위해
목포에서 법주사까지 걸어서 왔다
출가하러 왔다고 하니
도인을 만나려면 부산에 있는 범어사로 가라고 하였다
한 달 걸려 범어사에 상주하고 있는
하동산 스님을 친견 하였다

1932년 제주도에서 불교를 신앙하는 가정에서 태어난 김현홍(혜명 스님)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친 후인 23세에 출가를 했다. 먼저 출가한 사촌 동생이 “형 같은 분이 출가를 해야 불교가 발전한다”는 말에 힘을 얻어 출가를 결심한다.

제주도에서 배를 타고 목포에 도착해 걸어 충북 속리산 법주사까지 와 출가의 뜻을 전했는데, 스님들은 수용할 터전이 없다며, 부산 범어사 동산 큰스님에게 가라고 했다. 다시 걸어 부산 범어사에 이른다. 동산 노승은 그를 친견하자마자 부처님 당시의 아란 존자와 같은 모습으로 청년을 대해줬다.

이때가 바로 1956년 불교정화운동이 일어난 해였다, 범어사에 입산해 수계를 받고 해명이라는 불명을 얻은 후, 세수 82세로 입적할 때까지 포교 수행자로서 올곧은 삶을 살아왔다.

1980년 불교법난

1980년 불교법난이 일어날 때 침묵했다
한국의 스님들이 새벽에 끌려가 뭇매를 맞았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이 끌러갔다
전국에서는 탄허 큰스님 월산 큰스님이
계엄군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

그날에도 불교를 포교하기 위해서 나섰다
하루에도 쉬지 않고 불교 포교를 했다
이것은 전생에 맺은 인연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만 보아도 얼마나 청렴결백한 것을 알 수 있다

주지 한번 하지 않았던 것을 자랑으로
그러한 일을 하지 않았던 것을
그러나 그것은 약사를 지키는 불사
그러한 불사를 수행해야 한다
1980년대의 한국불교는 슬프다

매 맞아 죽어갔던 원철 스님을 생각한다
말하지 못할 사연이 있으면 그것을 풀자
불교법난을 치유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
그것을 바르게 실행하지 않고서는
불교는 발전할 수 없다

평소 감색 법복 2벌이 다였던 혜명당 무진장 큰스님은 대답 뒤에는 항상 상대방에 대한 ‘감사’의 말이 이어졌다고. 삼산 도문 대한불교조계종 조계사 주지의 시집 서문 ‘추모 글’을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스님 지내시기에 불편한 점이 없으신가요?”
“아닙니다. 편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스님 필요한 거 없으신가요?”
“아닙니다. 넉넉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한국불교 포교사에 한 획을 그었지만 드러난 모습은 그리 화려하지 않았던 혜명당 무진장 대종사. 그는 수 만회에 걸친 법문을 통해 대중에게 부처님 말씀을 전하면서도 사사로운 인연을 맺지 않았다. 오직 포교활동에만 전념해 살아온 스님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큰스님은 병상에서 ‘어머니’를 부르기도 했다는 것이다. 출가 수행자에게도 ‘어머니의 마음’을 친견하려는 인간적 모습이 느껴지기도 한 대목이다.

무진장 대종사는 열반하기전인 지난 2013년 7월 28일 동국대 병원 병상에서 “이제 일주일 이후에는 가야 할 때가 됐다”고 예언이라도 하듯 설법을 했다. 이후 9월 9일 열반했다.

청담 대종사를 잊지 못하리


파고다 공원에서 불교에 대한 포교를 할 때
청담 큰스님께서 언제나
20명을 후원할 수 있는 돈을 주었다
그래서 그 돈으로 먹을 것을 사서 주기도 했는데
이것은 불교를 포교하는데 자신감을 갖게 했다

대자대비하신 청담대종사를 잊지 못하는 것은
불교를 포교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어느 곳이던 간에 불교를 전하는 일을 행하라고
그렇게 말씀하면서 돈을 주었다
이러한 격려의 말씀을 듣고 있으면
용기가 났던 일을 기억해야 한다

청담대종사는 자비심이 많은 대종사였다
불교를 포교한다는 것은 불교의 종자를 심는 것
그것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는 말씀
그래서 쉬지 말고 불교를 전하는 것도
불사라고 가르친 청담대종사였다

파고다에 모인 대중들을 위해서 설법을 했다
참으로 영광스런 희망의 포교장소였다
포교사는 장소를 가리지 말고 포교하는 것
그것이 행복이며 포교사의 사명이라고 했다
불교는 대중들을 위해 어디에서나 해야 한다

혜명당 무진장 대종사는 1932년 제주도에서 태어나 1953년도에 출가했다. 1961년 27세에 동국대 입학해 1964년 32세에 졸업했다. 1976년 44세에 동국대학교 법사로 취임했고, 48세인 1980년 대한불교조계종 2대 포교원장에 취임했다. 1987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고, 1989년 4대 포교원장에 다시 취임했다. 1996년 64세에 대한불교조계종 포교대상, 2000년 동국대 불교대학원 겸임교수, 2007년 원로회의 의원, 2008년 대종사 품계를 받았고, 2013년 9월 9일 입적했다.

저자 진관 스님은 시집을 마무리한 글을 통해 “무진장 대종사님을 그리워하면서 한 권의 시집으로 헌공하고자 후학의 이름으로 시집을 발간했다”며 “특이할 만한 일은 내가 감옥에서 출소하는 날, (혜명) 스님이 승복 한 벌을 지어서 보냈는데, 그 옷을 평생 고이 간직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시집 <떠나가는 배>는 ▲한라산의 인연 ▲출가의 길 ▲만행 ▲가는 길 ▲포교의 전사 ▲인연들 등을 주제로 100여 편의 시를 수록했다.

수불 금정총림 범어사 주지와 삼산 도문 대한불교조계종 조계사 주지 그리고 원각성 동산반야회 복지실장 등이 추모의 글을 남겼고, 청화 스님, 윤지원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장, 법산 경일 동국대 명예교수, 최지원 문수사 주지, 진철문 시인 등이 추모의 시를 남겼다.

저자 진관 스님은 중앙승가대학교 실천응용학과에서 문학박사를 받았고, 동국대학교 응용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불교인권위원회 공동대표,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인권위원회 위원장이다. 저서로 불교사 등 많은 역사책과 다수의 시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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