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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탈종, 2대 조계종 종정 '청담' 의 삶과 사상
진관 스님 <청담대종사의 실천불교사상 연구>, 일본불교 극복 그려
 
김철관   기사입력  2013/11/24 [10:25]
▲ 표지     © 초롱
대한불교조계종 2대 종정을 역임했고, 한국불교정화운동을 주도한 ‘청담 대종사’ 실천불교사사상을 연구한 책이 출판됐다.

불교정화운동의 선구자로 불린 '2대 조계사 종정 청담 스님'을 고찰한 <청담대종사의 실천불교사상 연구>(초롱출판사, 2013년 11월)는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인권위원장인 진관 스님이 펴냈다.

평소 잘 알고 지낸 진관 스님은 지난 20일 오후 조계사 대웅전에서 거행된 불교인권상(밀양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가 받음) 시상식 때 읽어 보라며 준 책이다.

청담은 1954년 5월 20일 일본불교의 시대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36년 동안 개화기 조선에 전해진 일본종교의 잔재를 청산하고 조선 불교계의 명예를 회복하려 불교정화운동을 주도한 스님이었다.

청담 선승은 불교개혁주의, 실천불교, 불교정화운동 등으로 한국 불교계의 토대를 마련했고, 한국 정치계에도 불교사상을 입문하게 했던 불교사상가이기도 하다. 한국불교에 있어 실천사상을 온몸으로 수행했던 원효의 불교사상과 정토사상을 모범으로 수행한 승녀였다.

고종 39년인 1902년 11월 19일(음력 10월 20일) 경남 진주시 수정동에서 이화식과 제주 고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한 청담의 본명은 이찬호이고, 법명은 순호, 법호, 청담 등으로 불리었다.

24세에 일본 불교 교단에서 출가해, 그가 살았던 시대는 조선불교를 유신하고자 했던 개화파 김옥균, 유대치, 이동인, 무물 등의 움직임이후 개화시기 탄생한 불교계의 종파 원종, 조선불교 선교 양종, 미군정시대, 불교조계종 분단시대, 이승만 시대, 박정희 시대 등 질곡이 시대였다.

24살 때 일본 소윤지(송운사) 아카모토 준가 스님에게 득도를 했고, 반야심경을 5일 만에 다 외워 노 스님이 놀랐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청담은 2년 7개월 동안 일본 불교교단에서 출가수행자의 역할을 하다 조선에 귀국해 1926년을 기점으로 불교정화운동에 참여해 비구승단의 정통성을 회복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래서 불교 조계종 교단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청담은 17세(1919년)때 전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났고, 그는 보통학교 학생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이로 인해 체포돼 1주일 감금돼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1921년 2월 28일 진주제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차점이와 결혼했다. 1922년 부친이 사망하자 진주고등공립학교를 휴학한다.

그는 당시 선학원 선우공제회에 참여해 활동했다. 선학원은 일제 사찰령이 발표된 이후 일본불교의 영향에 의해 전국적으로 일본불교로 교화 돼가는 현상을 접한 승려들이 선을 표방하면서 출범한 선종의 본부를 말한다. 23세 때 친구 박생광 화가의 주선으로 일본에 건너가 송운사 아키모도 준가 밑에서 출가 수행자 역할을 했다.

청담은 27세 때 당대의 선승 만공을 친견했고, 만공은 전법계를 청담에게 내렸다. 하지만 그는 거절하기도 했다. 이렇게 만공선사를 만나 전법계를 거절할 정도의 청담이 견성했다고 소문이 전국에 퍼지자 고향 진주 연화사에서 초청법회를 열었다. 절 안은 초만원이었고, 온 시내는 경축 일색이었다. 법회를 마치고 셀 녘에 떠날 속셈이었는데 어머니가 집에 가 잠시 쉬고 갈 것을 애걸한 것이다. 어머니는 집으로 아들을 끌어드려 ‘제발 씨 하나만 떨어뜨려 놓고 가라’고 애원했다.

모친은 ‘그래 너만 산부처가 되면 다냐’고 했다. 그는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됐다. 설령 지옥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어머니 뜻에 순종하기로 마음먹었다. 속세에 있을 때 결혼한 아내와 동침을 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청담의 인간성을 발견하게 된다. 어머니의 애절함에 복종이라도 하듯이 요청을 수용한 것은 결단력이 없으며 아니 됐다. 청담과 원효의 사상적 면에서 본다면 상통한 점이 조금 있다. 청담은 이런 고백을 통해 그의 인간성을 고찰할 수 있다. 청담은 1931년 1월 17일 생인 딸의 존재를 인정했다. 청담은 자신이 행한 행위에 대해 보살행을 실천했다. 그리고 용맹전진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참회정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청담은 1935년 설악산 봉정암 안거를 시작으로 수행정진을 했다.

40세 되던 해인 1941년 청담은 성철을 만났다. 청담과 성철은 10살 차이임에도 도반같이 지냈다. 성철은 청담을 도반으로 삼아 스스로 위안하고 상호 협력해 정진했다.

청담은 45세 때인 미군정 시대 성철 등과 함께 불교계의 새로운 결사운동으로 해인사 총림을 발표한다. 이 때 미군정은 정권을 이전하려는 참이었다. 불교계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참고로 총림은 수행승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수행할 수 있는 선원, 강원, 율원 등을 갖춘 종합 수도도량을 말한다.

1948년 47세 때 첫 상좌 '정천'을 두었다. 이후 고성 문수암에서 정진했고, 53세 때 선학원에서 승단 정화를 위해 제1회 비구승대회 임시종회에서 도총섭이라는 직책을 맡게 된다. 교단 정화추진준비위원회에 참여했고 이승만과 조선불교 현안에 대해 면담을 하기도 했다. 54세 때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이 됐다. 55세 때인 1956년 2월 15일 네팔 수도 카투만두에서 열린 제4차 국제 불교도 대회에 동산, 효봉 등과 함께 한국불교대표로 참석했고, 방콕 불교대회도 참석했다.

56세 때 해인사 주지가 됐고, 59세 때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했다. 이 때 불교대책위원장을 맡았다. 장면(천주교)과 윤보선(기독교) 등 기독교 정부에서 불교계의 소외가 두드러졌다. 4.19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장면 정부는 신과 구파의 주도권 싸움으로 인해 바른 정치를 하지 못했다. 61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에게 대처승 계열은 찬양했고, 박대륜 총무원장도 찬양했다.

박정희는 혁명공약으로 불교계를 제압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두 개의 대한불교조계종을 자신의 권력 구도에 의한 정치적 후원자로 이용했다. 1962년 3월 6일 당시 청담은 대한불교 조계종 종회의장으로 불교재건 총회에서 종헌을 선포했다. 1962년 4월 14일 대한민국 문교부에서 대한불교조계종 명칭으로 사회단체 등록을 하면서 통합종단이 탄생했다. 효봉(조계사측)을 초대 종정으로 총무원장에 임석진(법륜사측) 등이 활동을 했다. 1966년 10월 15일 효봉 종정이 밀양 표충사 서래각에서 입적을 한다.

1966년 11월 30일 2대 통합종단 종정으로 65세인 청담이 선출된다. 24세에 출가해 65세에 불교조계종 종정이 됐다는 것은 조계종에 대한 공로가 있었다는 반증이다. 67년 2월 8일 백양사가 통합조계종에 협력함으로써 종단의 분쟁은 막을 내렸다.

▲ 진관스님이 지난 20일 불교인권상을 준 밀양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 주민들과 사진을 촬영했다.     © 김철관
청담 종정은 67년 7월 25일 해인사에서 종회를 소집해 이성철 선사를 해인사 해인총림 방장에 추대했다. 이 회의에서 이청담 종정과 손경산 총무원장이 동국대 재단 운영을 놓고 의견이 맞서 임시 중앙위원회에서 둘 다 사표를 냈고, 왠지 사표는 즉각 수리가 됐다. 다음날인 26일 새 종정에 윤고암 스님과 박기종 총무원장이 선출됐다. 첨암은 종정 5년의 임기를 1년도 안돼 사표를 낸 것이었다.

윤고암 종정과 박기종 총무원장 체제는 불교계 안정을 바라는 많은 종도들의 뜻을 받들어 염원인 불교계의 발전을 위해 나섰고, 이 시점에서 66세 청담 전 종정의 조계종단 탈종 사태가 발생했다. 불교계가 혼란을 거듭했고, 당시 청담은 소명서를 통해 ‘20년간 불교 정화운동의 횃불잡이로 심혈을 기우러 보았으나 나의 무능력과 부덕한 소치와 시운의 탓인지 종단의 정화 재연이 앞길이 어두워 가기만 한다’고 밝히기고 했다.

대법원의 합법적 판결을 통해 대한불교종단에 복귀해 1970년 7월 중앙종회에서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으로 다시 선출됐다. 총무원장으로 취임하면서 봉은사 토지를 팔려고 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이 때 법정 스님이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청담 총무원장의 명의로 봉은사 토지가 팔려나간 것이라 보는 데는 문제가 있다.

전임자가 행정적인 절차를 마련한 후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 바로 청담 총무원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박정희 정권에서 이전 총무원장과 함께 개발을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1971년 11월 15일 새벽 세수 70세 법납 45년의 청담 총무원장이 열반을 한다. 불과 1주일 전에 아침 텔레비전에 출연했고, 11일에는 이화여대 강연, 13일은 원주 1군사령부 법당준공식 참여, 14일에는 온 종일 도봉산 암자의 신도법회에서 설법을 했다. 이는 갑작스러운 비보임이 틀림없다. 평소 만소에 표표연(漂漂然)해 거침없던 청담다운 대왕생일지 모른다.

어쨌든 청담대종사는 용선선사의 정신을 실행하고자 했다. 조선불교계의 역사성을 바르게 고찰하고자 한국불교의 전통적인 선을 중흥하려고 했다. 1954년 5월 20일 이승만의 정화유시로 인해 힘을 얻어 불교정화운동에 나섰는데, 이는 오늘 날 조계종이라는 종단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었다. 불교계의 최고의 지위 총무원장과 종정을 역임하면서 정치적인 입장을 취하는 최고의 정치가로서의 역할도 했다.

<청담대종사의 실천불교사상 연구>를 쓴 진관 스님은 중앙승가대학교 실천응용학과 문학박사이다. 동국대학교 응용선학과 박사과정 수료하고 박사 논문을 제출한 상태이다. 불교인권위원회 공동대표,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인권위원회 위원장이다. 고려불교사 정리 등 불교관련 수많은 저서와 시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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