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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미래의 운명을 예언하지 않았다
[류상태의 주일편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은 묵시문학 반영
 
류상태   기사입력  2013/07/20 [10:33]
오늘은 잘 알려진 영화 이야기로 주일편지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천삼백만 명이 넘는 관객이 관람하여 한국 영화사상 최고의 흥행 기록을 세운 <괴물>이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교우님께 소개하는 이유는, 이 영화가 성서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열쇠를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1. 영화 <괴물>

▲ 한반도 종교전쟁을 막기위한 류상태 목사의 고언이 담긴 「신의 눈물」(부제 : 한반도종교전쟁)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영화는 용산 미군기지를 배경으로 시작됩니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화학약품 병에 담긴 내용물이 하수구에 버려집니다.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포름알데히드입니다. “이걸 여기다 그냥 버려도 되는 겁니까?” 한국인 과학자의 물음에 상급자인 듯한 백인이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합니다. “한강은 매우 넓은 하천이요.” “그래도 이건 매우 위험한 독극물인데...” 한국인 과학자의 항변에 상급자는 쐐기를 박습니다. “당신은 그냥 명령대로 하면 돼!”

몇 년이 지났을까요. 한강에 이상한 물체가 떠다니고, 공원에서 놀이를 즐기던 시민들이 호기심에 몰려듭니다. 먹이도 주고 깡통도 던져주고... 이윽고 녀석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덩치에 비해 동작이 재빠른 녀석의 머리는 물고기를 닮았으나 몸체는 거대한 공룡을 닮았습니다. 마침내 수면 위로 솟구친 괴물이 한강시민공원에 착륙하여 닥치는대로 사람을 공격합니다.

박강두(송강호 분)는 중학 1년생인 딸 현서의 손을 잡고 정신없이 뜁니다. 한강변에서 간이매점을 운영하는 강두에게 이 시간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딸을 보호하는 것. 정신없이 달리다가는 넘어지고 또다시 일어나 달리기를 반복하던 강두는 자신의 손에 잡힌 아이가 현서가 아니라 또래 여자아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눈이 뒤집힙니다.

현서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괴물에게 돌진하는 강두. 평상시라면 결코 들어올릴 수 없을 콘크리트 구조물을 들고 녀석과 맞서 혈투를 벌입니다. 다행히 백인 청년 한 명이 합세하여 괴물을 한강으로 다시 쫓아내기는 하는데... 한참 후 저 멀리 사라지는 괴물에 물려가는 현서의 모습이 보입니다.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가운데 합동장례식이 벌어지고, 당국은 전염병의 발생을 경고하며 슬픔에 젖은 유가족들을 격리합니다. 현장에서 괴물과 사투를 벌여 녀석의 피를 뒤집어썼던 강두는 슈퍼바이러스 일급 보균자로 지정되어 격리 수용됩니다.

강두에게는 다음날까지 금식 명령이 떨어집니다. 그러나 건장한 체격의 이 사내는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골뱅이(?) 통조림을 몰래 따서 손가락으로 내용물을 휘감아 입에 몰아넣습니다. 통조림 안에 잔뜩 들어있는 내용물이 괴물의 모습을 많이 닮았습니다. 괴물은 한강에 살고있던 골뱅이 종류가 일으킨 돌연변이체였을까요?

얌전히 조사를 받던 강두의 핸드폰이 울립니다. 이어지는 다급한 목소리. 현서의 음성이 분명합니다. 아이가 너무 흥분한 탓인지 내용이 잘 들리지 않습니다. 어쨌든 현서는 한강변 하수구 어딘가에 살아있습니다. 강두는 죽은 줄 알았던 딸의 전화를 받고 아버지와 남동생, 양궁선수인 여동생과 함께 극적으로 수용소를 탈출하여 괴물사냥에 나섭니다.

그러나 녀석은 강합니다. 괴물이니까요. 심부름센터와 고물상을 뒤져 겨우 손에 넣은 낡은 엽총 몇 자루로 괴물사냥에 나서지만 아버지가 희생되고 강두는 다시 당국에 체포되어 치료(?)를 받게 됩니다. 이미 미국은 첨단 의학과 과학시스템을 동원하여 사건에 개입해 있습니다. 바이러스를 퇴치한다는 명목으로 한강 주변에 뿌려대는 ‘에이전트 옐로우’는 저리 마구 살포해도 괜찮은 것일까요?

강두의 몸에서 바이러스를 추출해야 할 미국인 의사는 이미 바이러스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 당국이 슈퍼바이러스의 존재를 확언해 온 만큼 어떻게든 바이러스는 존재해야 했고, 또한 효과적으로 퇴치되었음이 증명되어야 했습니다. 미국인 의사와 통역관의 대화에서 ‘no virus’라는 단어를 알아들은 강두는 소리를 지릅니다. “바이러스 없어? 바이러스 없구나!”

강두는 존재하지도 않는 바이러스를 이용하여 병원 수용소를 탈출하기로 합니다. 주사기에 든 바이러스 배양액(사실은 맹물)을 뿌리며 간호사를 인질로 잡고 탈출에 성공한 강두는 두 동생과 함께 괴물과 사투를 벌입니다. 화학물질에 의해 탄생된 괴물답게 석유를 좋아하는 녀석은 한 노숙자가 부어준 석유를 맛있게 받아먹습니다. 마침내 괴물은 강두의 여동생 남주가 쏜 불화살 한 방에 속속들이 타들어가는 처절한 파멸을 맞습니다.

2. 영화 <괴물>과 성서의 묵시문학

영화를 보지 못한 분들을 위해 내용을 조금 상세히 소개해 보았습니다. 혹 순서나 내용이 조금 틀리는 부분이 있더라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영화에서 시민을 보호해야 할 경찰과 군대 등 국가기관들은 슬프게도 미국 방역팀의 하수인 역할을 하기에 바빴습니다. 하지만 강두네 가족을 도와 용감하게 괴물 퇴치에 나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괴물의 입에 석유를 부은 노숙자와, 강두의 석방을 외치는 대학생들, 그리고 시민단체 회원 등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영화가 다분히 묵시문학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묵시’란 “전하고자 하는 중요한 개념을 감추어 표현한다.”는 뜻입니다. 그 옛날, 그리스나 로마 등 강대국의 침략에 저항하여 “역경의 세월을 잘 이기고 믿음을 지키라”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고자 하는 말을 사실 그대로 말했다가는 자신도 체포되고 글도 검열에 걸려 유통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들은 전하고자 하는 핵심 주제와 언어를 감추어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묵시문학’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성서에는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 두 권의 묵시문학이 전해집니다. 다니엘서의 저자는, 기원전 2세기 그리스 알렉산더 대제의 후예인 시리아의 독재자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치하에서 고난받는 유대인들에게 희망의 멧세지를 전하기 위해 여러 짐승을 등장시켜 강대국의 횡포를 묘사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로마제국을 짐승으로, 황제를 ‘666’이라는 사탄의 수로 묘사하며 절망에 빠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용기를 잃지 말고 믿음을 지킬 것을 호소했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세계를 유린하는 초강대국의 횡포를 ‘괴물’의 이미지에 묵시문학적으로 담아내는 솜씨를 보였습니다. 봉준호 감독이 ‘묵시문학’을 알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그의 천재성이 빛을 발하여 우연히 묵시문학적인 구도를 만들어낸 것일까요? 그도 아니면 제가 ‘오버’한 것일까요?

미국은 괴물의 탄생을 주도했으면서도 오히려 녀석을 제거하고 사태를 가라앉힐 적임자로 등장합니다. 첨단장비를 갖추고 구세주처럼 나타나는 세련된 ‘지구마을 지키미’의 화려한 등장을 대한민국은 그저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슈퍼바이러스 설을 퍼뜨려 초기에 사태를 제압하려는 초강대국과 ‘주권국가 대한민국’의 초라한 모습이 대비됩니다.

그래도 미국인 의사와 통역관의 결코 짧지 않은 대화 가운데 핵심 단어를 알아들고는 “no virus? 바이러스 없구나!”를 외치는 강두의 말에 관중은 폭소를 터뜨렸지만, 대량살상무기의 존재를 확언하며 이라크를 침공했던 미국의 오판과 뻔뻔스러움을 패러디한 그 한마디는, 마냥 웃기만 할 수도, 목놓아 울 수도 없는 슬픈 코미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합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너무나도 묵시문학적’이라고 생각하게 된 결정적인 장면은, 노숙자가 부어주는 석유를 맛있게 받아먹는 괴물의 모습이 정지화면처럼 클로즈업되었을 때입니다. 괴물과 석유. 이 영화가 초강대국의 횡포를 “감추어 표현했다”는 이보다 더한 물증이 있을까요?

‘화학물질’로 탄생하여 ‘석유’를 먹고 석유로 인해 자멸하는 이 생명체에 대한 영화가 ‘묵시문학’ 아니 ‘묵시영화’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미국은 이라크에 ‘화학무기’가 있다고 단언하여 침략을 정당화했지만, 사실은 당시 대통령 부시 일가가 개입되어 있고 미국의 국익에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석유’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무리한 침략을 했다는 비난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묵시문학에서 반드시 들어가는, 또한 들어가야만 하는 요소가 있다면, 그건 평화를 해치는 악마적 세력의 괴멸과 그 이후에 찾아오는 궁극적 평화, 즉 ‘구원’의 문제입니다.

영화에서 괴물은 몸 속 깊숙이 배어들어간 석유로 인해 총체적인 파멸을 맞습니다. 그런데 소심한(?) 혹은 섬세한(?) 봉준호 감독은 이 영화에서 이렇게 변명하는 듯합니다. “나는 미국을 고발하는 것이지, 미국인을 고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내용이 어디 나오냐구요? 영화를 보신 교우님은 강두와 함께 괴물과 처절한 혈투를 벌이다 희생된 백인 청년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한 명의 시민이라도 구하려고 괴물에게 몸을 던지는 백인. 봉준호 감독은 왜 굳이 이 백인(아마도 미국인?) 청년을 등장시켰을까요? 포름알데히드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수구에 부어버리는 과학자, 존재하지 않는 슈퍼바이러스를 기어코 입증시키려는 의사와는 대비되는 ‘한 미국인’을 영화에 집어넣어야만 그의 마음이 편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어쩌면 제가 많이 오버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기왕 오버한 김에 좀 더 진도를 나가 보고 싶습니다. 이 영화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본주의적 힘의 논리에 지배당하는 비참한 현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강두네 가족과 힘없는 소수자들이 뭉쳐 거대한 조직과 그에 의해 이루어지는 기막힌 현실세계에 맞서 싸웁니다.

영화에서 가장 약한 사람을 대표하는 설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강두네 가족이 그렇게도 지켜내고자 애썼던 현서에 의해 끝까지 보호된 어린 꼬마 아이가 아닐까요? 감독은 울어주고 묻어줄 가족이 있는 현서를 희생시킨 대신, 부모 없는 꼬마 아이를 살려 강두가 차려주는 밥상을 배불리 먹는 가족의 울타리에 넣어 주었습니다. 감독은 이 부분에서 우리에게 “구원이란 무엇인지”를 묵시적으로 말하는 듯합니다.

만일 제 추측이 맞다면, 이 영화는 봉감독이 ‘묵시문학’에 대해 알았건 몰랐건 철저하게 ‘묵시문학적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봉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시스템이 개인을 구원할 수 없다는 비관론이 내게 있는 것 같다. 독극물로 괴물이 생기고 그 괴물에게 더 큰 독극물인 독가스가 뿌려지는 악순환의 은유로 사회 모순을 그리고 싶었다. 자신도 약자인 사람들이 더 약자인 떠돌이 어린이를 지켜내는 결말에선 희망을 담고 싶었다.”

봉준호 감독은 “반미영화냐?”고 물은 기자의 질문에 “사회의 여러 모순 가운데 하나로 미국과의 관계를 설정했을 뿐 반미영화는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만일 다니엘서의 저자에게 “반그리스적인 글이냐?”고 묻는다면, 또는 요한계시록 기자에게 “로마제국에 저항하는 글이냐?”라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할 수 있었을까요? 감독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용한 묵시적 기호와 상징이 너무나 뚜렷하다고 생각되는 건 단지 제 삐딱한 성향 때문일까요?

3. 묵시란 무엇인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묵시라는 단어 ‘아포칼룹시스’는 ‘중요한 진리를 감추어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말 ‘계시’로도 번역되는 ‘묵시’는 미래의 운명을 미리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그때 당시의 하나님의 뜻을 같은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도입된 독특한 문학적 방식입니다.

▲ 1700년 기독교 역사와 정통 교리의 뿌리를 파헤친 류상태 목사의 소설 콘스탄티누스     ©인물과사상
구약성서의 대표적 묵시문학인 다니엘서는 서기전 2세기에 기록되었습니다. 매우 보수적인 신학자는 서기전 6세기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건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다니엘서의 저자는 알렉산더 대제의 친구이며 부하였던 시리아의 셀류코스 가문이 유다를 지배하던 시대에 살았습니다.

유대인의 종교를 멸시했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라는 별칭은 ‘세상에 나타난 신’이라는 뜻)는 유대인의 성경읽기를 금지시켰습니다. 성경을 읽다 발각되면 가차 없이 처형했으며, 할례를 행하면 그 아이와 아버지, 집행한 제사장까지 사형에 처했습니다. 그는 성경이 부정한 짐승으로 분류한 돼지를 성전에서 잡아 그 피를 성소에 뿌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 백성들의 동향은 주로 세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시리아의 정책에 타협한 사람들은 후에 사두개파를 형성했습니다. 끝까지 버티거나 항거하여 게릴라전을 펼친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후에 바리새파를 형성했습니다. 속세를 떠나 은둔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악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살기를 단념하고 사해지방으로 은둔한 사람들은 ‘쿰란공동체’를 이루었으며 이 사람들은 후에 엣세네파를 이루었습니다.

야훼신앙이 붕괴될 위기에 처한 그때, 거룩한 공동체를 지키려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글의 힘을 잘 알고 있던 그는,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독한 대가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 앞에 곧 거꾸러질 것이며 모든 악의 세력이 종식되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고 백성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사실대로 쓸 경우 저자는 체포되어 사형을 당할 것이고 책은 수거되어 폐기 처분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사실을 ‘묵시’로, 즉 ‘중요한 진리를 감추어 표현’하기로 하였습니다. 하여 그는 다니엘이라는 서기전 6세기의 위장인물을 등장시켰습니다. 그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모든 것이 4백년이나 흘러간 먼 과거에 기록된 것으로 위장시켜 글을 쓴 것입니다. 그것이 곧 ‘다니엘서’라는 묵시문학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성서의 문자에 갇혀있는 일부 보수적인 교회지도자들은 다니엘서를 당대의 불의와 핍박에 저항하는 묵시문학이 아니라 먼 미래를 예언하는 예언서로 보고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서는 결코 미래의 운명을 예언한 책이 아니며, 그것은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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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7/20 [10:3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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