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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신앙은 받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것
[류상태의 주일편지] 교회 다니기 싫으시면 다니지 마십시오.
 
류상태   기사입력  2013/06/15 [10:56]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들려주신 천국의 비유 중 하나를 선택하여 우리 기독교 신앙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마태복음 20장 1~16절에 기록된 ‘포도원 일꾼과 품삯의 비유’인데, 그 내용을 간추려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이상한 주인의 이상한 셈법

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이른 아침에 나갔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돈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 아홉 시쯤에 다시 나가서 장터에 할 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당신들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 그러면 일한 만큼 품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니 그들도 일하러 갔다. 주인은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오후 다섯 시쯤에 다시 나가보니 할 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어서 “왜 당신들은 하루 종일 이렇게 빈둥거리며 서 있기만 하오?” 하고 물었다. 그들은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주인은 “당신들도 내 포도원으로 가서 일하시오.” 하고 말하였다.

날이 저물자 포도원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차례로 품삯을 치르시오.” 하고 일렀다.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그런데 맨 처음부터 일한 사람들은 품삯을 더 많이 받으려니 했지만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밖에 받지 못하였다. 그들은 돈을 받아들고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하고 따졌다. 그러자 주인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보고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 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하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마태복음 20장 1~16절, 공동번역)

본문은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으로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경제문제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셨다면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이라 하더라도 당시는 물론이고 오늘날에도 공감을 얻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우리 사회의 경제질서는 엉망진창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처신이 계약상으로는 하자가 없습니다.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일꾼들과 합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불공정한 대우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나와서 일한 사람과 오후 늦게 합류하여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에게 같은 임금을 지불하는 고용주를 어느 누가 공평하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나 이 말씀은 본문 앞부분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이기에, 예수께서 임금문제의 정당성 여부를 논하려고 도입한 이야기가 아니며, 매우 부조리해 보이는 보조관념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원관념, 즉 하늘나라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읽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비유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원관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늘문은 언제나 항상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언제,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오더라도 하나님은 똑같은 사랑, 충분한 사랑으로, 그 사람을 품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예수님 오시기 오래전부터 하나님을 믿어왔던 이스라엘 백성이건, 허랑방탕한 생활로 가산을 다 탕진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온 탕자와 같이 하나님을 떠나 살다가 뒤늦게 합류한 이방인이건, 하나님은 당신께로 나아오는 사람들을 아무런 차별 없이 똑같은 사랑, 충분한 사랑으로 받아주신다는 것이 이 비유 말씀이 전하는 주요 메시지입니다.

2. 하늘 문은 누구에게나 항상 열려 있다

이 비유 말씀이 초창기 예수사람들에 의해 전승되고 마침내 복음서에 기록된 이유는 본문의 끝부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아마도 초창기 교회 내부에서는, 일찍부터 공동체를 위해 헌신한 사람과 뒤늦게 교회공동체에 합류한 사람 사이에 어떻게 차등을 두고 예우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적지 않은 고민과 이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공동체는 오랜 기도와 토론 끝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든 차별을 넘어 의무와 권리를 똑같이 나누는 고귀한 자매형제”라는 믿음의 고백으로 이 갈등을 넘어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이런 공동체의 결정을 부당하다고 느낀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일찍부터 공동체에 헌신해온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공동체를 위해 더 많이, 그리고 더 오랜 시간 동안 헌신해온 그들이 서운해 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교회공동체는 기존의 모든 차별과 신분을 넘어선 공평하고 정의로운 세상, 즉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새로운 공동체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세상 나라 백성들과 다른 점은, 앞선 사람이 더 많이 갖고 뒤처진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기득권을 다 내려놓고 뒤늦게 합류한 자매형제를 기꺼이 끌어안으며 똑같이 나누고 누림으로써 이루어지는 새로운 세상이라는 것이 당시 예수사람들의 믿음이고 고백이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새 하늘과 새 땅의 질서였습니다.

하여 본문의 말씀은, 이런 새로운 질서를 이해하지 못하고 기득권을 주장하며 교회의 일치를 방해하는 사람들은 먼저 참여했다 하더라도 뒤쳐질 수밖에 없고, 비록 뒤늦게 공동체에 합류한 사람이라도 새 질서에 잘 적응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면 새로운 세계에서는 앞선 사람이 될 것이라는 예언과 경고, 또한 격려의 뜻이 담긴 말씀입니다.

이런 초창기 예수사람들의 신념은 우리가 잘 아는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재산의 절반을 모두 탕진해버린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그를 끌어안고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를 보고 맏아들은 심사가 뒤틀려 ‘아버지의 부당한 처사’를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맏아들을 달래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 그런데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 (누가복음 15장 30~31절, 공동번역)

맏아들이 아버지의 처신에 불만을 가진 이유는 신앙의 의미를 대가와 보상에서 찾으려했기 때문입니다. 맏아들이 집에서 아버지와 고생하며 일하는 동안 둘째는 실컷 놀고 재산을 탕진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아들을 차별 없이 똑같은 사랑으로 대하는 아버지의 처신은, ‘대가와 보상’이라는 시각으로 보면 불공평하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맏아들과는 전혀 다른 시각을 갖고 계셨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와 늘 함께 있었기에 아버지의 모든 것을 함께 소유하며 자유롭게 누려온 반면에, 둘째는 아버지를 떠났기에 오히려 자유를 잃고 고통스런 삶을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하여 이제라도 둘째를 품어 안아 모두가 함께 자유와 풍요를 누려야 옳다는 것이 아버지의 생각입니다.

3. 받기를 바라는 신앙에서 누리는 신앙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우리 기독교신앙의 진정한 의미는 무언가를 얻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포도원에서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이 주인의 처사를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는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만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1시간 밖에 일을 하지 않은 품군에게 아침 일찍부터 일한 자신과 동일한 보수를 준 주인에 대해 부당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을 ‘대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보지 말고 ‘누림’이라는 측면과 함께 생각해보면 어떻겠습니까? ‘누림’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먼저 일한 사람은 일한만큼 누렸습니다. 일 자체에서 오는 기쁨과 함께,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기에 안정된 삶과 보람을 아침 일찍부터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나중에 온 사람은 해야 할 일을 찾지 못한 채 마음을 졸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고통일 수 있습니다. 먼저 온 사람은 일을 해서 고통을 받고 나중에 온 사람은 놀아서 즐거웠던 것이 아니라, 일한 사람은 즐겁게 일했고 일하지 못한 사람은 해야 할 일을 찾지 못해 고통을 받았으니, 이제부터는 모두가 함께 일하고 함께 누리자는 것이 주인의 뜻입니다.

일의 의미와 기쁨을 찾지 못한 채 오로지 대가만 생각하고 일을 하는 것과, 일 자체에서 의미를 찾고 기쁨을 누리는 것과는 이렇게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 자체의 의미와 기쁨을 찾지 못한 채 오로지 대가만 생각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힘들고 피곤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가기 위해서, 남보다 더 축복받기 위해서, 또는 하늘나라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이 이 땅에서 큰 돈 벌고 출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기에, 그래서 힘들고 피곤하지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교우님이 계신다면, 그것은 우리 기독교신앙의 의미와 가치를 한낮 이기적인 목적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순수한 믿음도 아니고 진정한 신앙도 아닙니다. 겉으로는 열심히 부모님을 모시지만, 그래야 부모님이 집도 물려주고 유산도 물려주실 것이기에 힘들고 피곤하지만 효도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진 자식을 진정한 효자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보다 재산을 먼저 생각하는 자식은 불효자식일 수밖에 없으며,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한 가정의 행복을 진정으로 누리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자신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무엇에 더 관심이 많은 분은 신앙적으로 불효자식일 수밖에 없으며, 진리 안에서 진정으로 자유와 기쁨을 누리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교우님들께 부탁드립니다. 받으려는 생각을 넘어 누리는 신앙생활을 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진정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며, 죽은 다음에 가는 천국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천국을 누리고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4. 교회 다니기 싫으시면 다니지 마십시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에는 ‘죽은 다음에 가는 천국’만 강조하고 ‘지금 여기서 누리는 천국’을 부정하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그런 교회들은 교우님들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가르치기보다 교회를 중심으로 생활하라고 가르치며, 교우님들이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성실한 사회인으로 살아가도록 돕기는커녕 교회조직을 위한 희생과 봉사에 매진하도록 강요합니다.

이런 교회중심의 신앙, 정확히 말하면 예배당중심의 신앙은 “세상은 악하고 구원은 기독교에만 있다.”는 교리적 독선에서 나온 것으로 교회조직을 유지하고 그 규모를 키우는 데는 효과적일 수 있으나, 교우님들의 바른 신앙과 삶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올바른 교회는 교우님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도우며, 가정과 사회를 소중히 여기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도록 도와줍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교우님의 행복한 삶에는 별 관심이 없고, 오로지 교회조직의 팽창과 교회지도자들의 사익을 채우는데 혈안이 되어 교우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교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므로 교우님이 다니시는 교회가 교우들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지, 아니면 교리적 편견과 교회팽창논리에 갇혀 교우님의 바른 신앙과 행복한 삶을 방해하는지 냉철하게 판단하고 점검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교우님이 다니시는 교회가 바른 궤도에서 이탈했다고 판단되시면 그 교회에 다니는 것을 진지하게 재고해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십일조를 비롯하여 이런저런 명목의 헌금과 주일성수 등 무거운 의무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교회를 조심하십시오. 교우님과 가정의 행복을 소홀히 여기는 교회, 조화로운 삶보다 극단적인 교리를 강조하는 교회에 계속 다니면, 급기야 균형 있는 신앙을 잃고 편협하고 배타적인 종교인으로 세뇌당해 반사회적 성격장애를 겪게 될 수도 있으므로 그 교회로부터 반드시 벗어나셔야 합니다.

교회출석을 하지 않으면 큰일날것처럼 교우들을 겁박하는 교회지도자들이 우리나라에는 많습니다. 하여 교회를 옮기고 싶다거나 다니기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쩔 수 없이 교회출석을 계속하는 교우님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교회를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거짓 교회들이 도태되고 교회지도자들도 정신을 차려 복음의 정신에 바로 선 진정한 교회들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할 신앙의 필수사항은 예수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사는 것이지 교회출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 다니기 싫으시면 다니지 마십시오. 특히 자기가 시무하는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큰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교회지도자는 사기꾼이 틀림없으므로 반드시 그 교회에서 나오셔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교우들에게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것은 일부 교회지도자들이 강조하는 ‘주일성수’와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지, 주일날 하루 종일 교회에 나가서 충성봉사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 한국교회의 문제점과 그 대안을 꾸준히 모색하는 류상태 목사 . 최근 한반도 종교갈등의 대안을 모색한 <신의 눈물>을 출간했다.    ©대자보
그러므로 교회의 종이 되지 마시고 주인이 되십시오. 교회생활이 즐겁고 행복하시면 교우님이 출석하시는 교회에 열심히 다니셔서 그 행복을 계속 누리십시오. 하지만, 현재의 교회생활이 괴롭고 힘드시다면 교우님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교회로 옮기십시오. 아예 교회생활을 그만 두고 싶으시다면 아무 염려 마시고 그렇게 하십시오.

교회 안 나가면 벌받을까봐 두려워 할 수 없이 나가는 신앙은 하나님을 편협하고 잔인한 신으로 믿는 것이기에 오히려 하나님께 큰 결례가 됩니다.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으로 고백되는 우리 하나님께서 교우님들의 합리적인 판단에 의한 자유로운 선택에 대해 벌을 주시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우님들도 이제는 교회출석을 선택의 문제로 받아들이십시오. 다시 말씀드리지만, 교우님이 지금 다니시는 교회를 떠나면 벌을 받는다고 교역자가 말한다면, 반드시 그 교회를 나오셔야 합니다. 그런 교회를 계속 다니게 되면 그 교회의 노예, 목회자의 노예, 그리고 교리의 노예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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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6/15 [10:5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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