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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과 번민에 싸인 겟세마네의 예수님이 좋다
[류상태의 주일편지] 사람 위에 교리아닌 교리가 사람 위해 있는 것
 
류상태   기사입력  2013/03/16 [08:47]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애타게 기도하셨던 ‘겟세마네 동산’으로 교우님들과 함께 찾아가 생각을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1. 십자가의 길을 피하고자 번민하시는 예수님

예루살렘 입구에 있는 겟세마네는 하나님과 대화하기 좋은 한적한 동산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거기서 밤을 지새우며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우셨는지 “근심과 번민에 싸여” 함께 간 제자들에게 “지금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라고 호소하시며 깨어 중보기도해줄 것을 당부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땅에 엎드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38~39, 공동번역). 어찌나 간절히 기도하셨는지 같은 사건을 기록한 누가복음에는 “땀이 핏방울같이 되어서 땅에 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2:43~44, 표준새번역. 공동번역에는 이 부분이 본문에는 없고 관주로 설명되어 있음).

어쩌면 이런 겟세마네의 예수님께 실망하신 교우님도 계실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좀 더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셨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마음이 드실 수 있겠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초연한 모습을 보여준 위인들이 역사에는 수없이 많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앞두고 제자들이 피신하라고 간청했지만 악법도 법이라면서 의연하게 독배를 마셨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니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라며 십자가 고난을 피하고 싶어 하시는 예수님의 연약한 모습은 우리를 충분히 당혹스럽게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연약하신 예수님이 참 좋습니다. 34년 전 어느 날, 대학 졸업반이었던 저는 목회자의 길을 가야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하며 기도했습니다. 여느 한국의 기독교인처럼 저 역시 보수적인 신앙공동체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평생 복음을 전하며 사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은 없어보였습니다. 하지만 목사로서의 삶을 제가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때 성경을 묵상하며 기도하던 중 겟세마네의 예수님을 새롭게 만났습니다. 너무나 친숙한 말씀이었지만 그때는 전율을 느낄 만큼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절망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시는 한없이 의기소침해지신 예수님, 그 예수님이 저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를 주셨는지요...

그렇게 겟세마네의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고 나서, 저는 비로소 목회자의 길을 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연약하실 때가 있었구나. 그렇다면 내가 약해지거나 지치고 쓰러져도, 절망감에 사로잡혀 투정을 부려도 크게 야단치시지는 않겠구나. 오히려 더 잘 이해하시고 도와주시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때 저에게 목회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주신 분은 물 위를 걷는 기적의 예수님이 아니라, 수천 명을 먹이고 병든 자를 일으켜 세우시는 위대한 예수님이 아니라, 심히 고민하며 기도하시는 겟세마네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서 멈추지는 않으셨습니다. 날이 밝으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 할 처절한 상황이었지만, 피하고 싶고 도망가고 싶지만, 심히 고통스럽고 겁도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의탁하시는 주님의 기도는, 진정 믿음의 기도가 무엇이며,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 마음 깊이 새겨주었습니다.

교우님들도 살다보면 힘드실 때가 있겠습니다. 그 때 우리 예수님처럼 그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께 투정도 부려보십시오. 제가 만난 하나님은, 유창한 기도보다, 담대한 믿음의 기도보다, 비장한 헌신의 기도보다,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드리는 기도를 좋아하는 분이십니다.

2.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일까요?

성경 66권(개신교에서 사용하는 성서의 경우이며 가톨릭은 외경이 포함되어 조금 더 많습니다) 가운데 원본이 일부라도 남아 있는 책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한글 성서들은 고대 사본들을 서로 대조하여 최대한 원본에 가깝게 만든 히브리어(구약)와 헬라어(신약) 원문 성서를 다시 우리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대 사본 중에는, “땀이 핏방울같이 되어서 땅에 떨어졌다.”는 누가복음 22장 43~44절의 기록이 없는 사본도 있습니다.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한 그 시절에는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베껴서 복사본을 만들었는데, 복음서 기자들의 기록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되거나 자신의 생각을 보충하고 싶어서 누군가 적어 놓은 것이 본문과 섞여 함께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하나의 완전무결한 경전으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손을 거쳐 기록되었을 뿐 아니라 보존된 원본이 하나도 없기에, 본문비평과 전승사비평 등 성서비평을 통해 최대한 원본에 접근하려는 신학적 연구 작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앞선 누가복음의 기록을 다른 번역본들과 표준새번역은 본문에 포함시켰고 공동번역은 제외하는 등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도 이런 신학적 해석과 선택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 교회에서는 이런 열린 신학을 위험하게 여기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정작 위험한 것은 성서비평이 아니라 성서에 기록되었다고 하여 그대로 흠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자 하시는 분은 저의 1월 13일자 주일편지 <성경에는 신화와 전설, 역사가 함께 담겨 있다>와 1월 20일자 주일편지 <성경에 담긴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을 참조해 주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성서의 세계를 바르게 알고 올바른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신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기록된 글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찾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작업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고통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래야 생동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 안에 가두는 오류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제 교우님들과 함께 만만치는 않지만 그 작업을 함께 해보고 싶습니다.

복음서에는 고뇌하고 번민하시는 겟세마네의 예수님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엄격하고 확신으로 가득 차 있는 예수님도 등장합니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오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과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암시하고 예언하시는 예수님은 겟세마네의 예수님과는 달라도 너무나 다릅니다. 다음은 그 중 한 구절입니다.

그 때에 비로소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버림을 받아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게 될 것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하게 하셨던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시며 꾸짖으셨다. (마가복음 8:31~33, 공동번역.)

자신의 예언을 이해하지 못하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거침없이 말씀하시는 예수님과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가 괴로워 죽을 지경”이라고 그토록 번민하고 괴로워하시며 제자들에게 (거기엔 베드로도 있었습니다) 중보기도를 부탁하시는 예수님을 교우님은 아무런 마음의 불편도 없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으신지요?

이 말씀 외에도 복음서에 나타나신 예수님은 한없이 자비로우신가 하면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기도 하시며,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반면에 격하게 분노를 표출하기도 하셨고, 특히 당시 종교지도자들에 대해서는 입에 담기 어려운 폭언을 퍼붓기도 하셨습니다. 이런 다양한 예수님상은 복음서가 기록되기 전에 예수님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이 있었고 그런 대조되는 전승들이 복음서 기자들에게 함께 수집된 결과임을 반증합니다.

복음서 중에서 가장 빨리 기록된 마가복음의 기록연대는 서기 70년경입니다. 예수님 사후 40년이 지나서야 기록되었고 그 전에는 많은 단편적인 전승과 기록이 있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합니다. 다행스럽게도 복음서 기자들은 상이한 기록들을 억지로 꿰어 맞추려 하지 않았으며, 예수님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함께 복음서에 담았습니다.

복음서 기록자들이 그렇게 솔직하게 기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성서무오설이라는 후대의 교리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의 고귀한 삶과 가르침을 후세에 전할 의도가 있었을 뿐이며, 자신들의 기록이 나중에 성서라는 책으로 또한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기록된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복음서가 ‘예수님에 대한 여러 전승의 집합’임을 나타내는 사례의 하나로 예수님의 탄생설화에 담긴 족보를 비교 분석해보고 싶습니다. 탄생설화는 마가복음에는 없으며, 그보다 십여 년 늦게 기록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등장합니다. 하지만 두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족보는 다른 전승에 의존해 있기에 매우 다를 뿐 아니라 서로 아귀가 맞지 않아 어느 한 쪽이 틀리거나 양쪽 모두 틀리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타난 족보를 비교하여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표로 만든 것입니다. (이름은 개역성경의 표기를 따랐으며, 저의 책 <한국 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에서 가져왔습니다.)
 
▲     © 류상태

마태복음의 족보는 아브라함부터 예수님의 아버지인 요셉까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고, 누가복음에서는 요셉에서 시작하여 아담까지, 그 위로는 하나님까지 거꾸로 올라가며 기록되어 있지만 양쪽의 차이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의 계보는 두 복음서가 거의 일치하나 그 다음부터는 후손의 이름이 거의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름이 같은 사람이 몇 사람 등장하지만 세대가 다르고, 무엇보다 아담에서 요셉까지의 계보가 마태복음에서는 60대인데 누가복음에서는 75대까지 이어집니다. 혹자는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아버지인 요셉의 족보, 누가복음은 어머니인 마리아의 족보를 따른 것이기에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그런 암시는 복음서 어디에도 없습니다.

3. 십자가의 의미는 ‘교리적 대속’이 아니라 ‘불의에 굴복하지 않은 위대한 정신’에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 교우님들은 대부분,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지고 대신 죽으셨기에,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믿음, 이른바 ‘교리적 대속신앙’을 갖고 계십니다.

하지만 저는 교리적 대속신앙을 갖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고 넘어서지 않으면 부활신앙도 왜곡될 수밖에 없고, 그 배타적 교리로 인해 발생하는 무서운 갈등과 폭력이 우리 기독교와 지구마을의 미래를 덮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리적 대속신앙은 예수님만을 유일한 구세주로 믿는 신앙형태 이외의 어떤 구원의 가능성도 인정할 수 없는 배타적 속성을 안고 있으며, 결국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를 부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것이 옳다면 그 ‘배타적 진리’를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님 사후 한참 세월이 흐른 뒤에 만들어진 교리입니다.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예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도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다가 예수님 사후 40년이 지나서 비로소 복음서에 기록된 ‘전승’이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복음서 기자가 직접 들었거나 정확한 자료 조사를 통해 객관적 증거를 확보한 후에 기록한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유일하신 참 아들이며, 본질상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시기에, 인류의 죄를 대속할 유일한 구세주로서의 예수, 그것은 로마제국의 안녕과 통일을 절실히 원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제국의 이념적 구심점을 세우기 위해 서기 325년 니케아에서 회의를 열고 참석한 주교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통일된 의견을 내놓도록 압력을 가해 만들어진 결과입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분으로 선포하고 다른 해석을 차단하기 전까지 약 300년 동안은 오늘날처럼 예수님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신앙이 공존했으나, 니케아에서 태동된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기독론이 이후 천여 년 동안 중세 암흑기를 지배하는 기독교의 중심교리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으신 교우님은 저의 책 <소설 콘스탄티누스>를 참조해 주십시오.)

하지만 르네상스 이후, 유럽에서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 전통 기독론이 재해석되었고, 이제는 열린 신학을 통해 대부분의 교회들이 배타 교리에서 벗어나 포용주의를 거쳐 다원주의 신학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불교를 비롯하여 이웃종교와도 자유롭게 교제하며 소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 근본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한국에서는 여전히 다원주의 신학이 이단으로 배척되고 있습니다.

지금 저에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의미 있는 이유는, 우리의 죄를 교리적으로 대속한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고난의 길을 능동적으로 선택하신데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하늘 아버지의 뜻을 저버릴 수 없다는 그 의로운 선택 말입니다.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말고 적당히 타협하며 지내야 했지만, 정복자 로마의 정치체계에도 순응해야 했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건 잠시는 살아도 결국은 영원히 죽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잠시 죽음으로 영원히 사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주님의 그 선택이, 영혼의 눈이 멀었던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해주었고, 정신적 영적으로 장애를 겪으며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을 자유와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십자가 사건의 진정한 의미는, 이처럼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예수님의 위대한 정신이 뚜렷한 본이 되어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삶을 의와 생명의 길로 이끈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제는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 어떻게 사는 것이 참다운 삶이며 생명의 길인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뚜렷이 알게 되었고, 예수님처럼 하늘 아버지의 뜻을 선택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로, 저는 주님의 대속을 믿으며 예수님을 저의 구세주로 고백합니다. 주님을 알지 못했을 때, 저는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기 위한 이기적인 삶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부족하지만 하늘을 우러르며 사는 새로운 삶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옛사람이 주님의 십자가 위에서 죽고, 새사람으로 다시 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저를 구원해주셨고, 지금도 제 마음과 삶 가운데 살아계십니다.

이렇게 주님의 아름답고 찬란한 삶과 말씀은 그를 따르는 수많은 제자들의 마음과 삶 가운데 다시 살아나 세상을 뒤바꾸는 힘이 되고 생명이 되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겟세마네의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지금도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천 년 전, 나는 처절한 자신과의 싸움 끝에 하늘 아버지의 뜻을 선택했다. 너는 어떤 선택을 하려느냐?”

아무리 선하고 바르게 살아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이 살아도,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영접하고 주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지 않으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고 믿는 교리적 대속신앙은 우리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와는 너무나 다를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아무 전제 없이 하늘 아버지의 자녀로 선포하신 예수님의 삶과 뜻을 크게 배반하는 것입니다.

또한 교리적 대속신앙은, 그렇게 믿는 사람을 ‘예수의 사람’이 아니라 ‘교리에 종속된 노예’로 만들어 자주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박탈할 뿐 아니라, 다양한 신념과 문화 속에 살아가는 이웃들의 삶과 문화를 부정하고 갈등을 일으키기에, 이제는 우리가 반드시 극복하고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될 한국 교회의 과제입니다.

4. 사람이 교리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교리가 사람을 위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규율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절대계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고 말씀하시며 병든 사람을 고쳐주시고 배고픈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자르는 것도 묵인해주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율법은 절대계명이 아니라 사람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눈에 율법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예수님은 사악한 이단자로 보였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무례한 자이며, 거룩한 유대공동체에 흠집을 내는 위험천만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준 건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안식일로부터 사람을, 율법으로부터 사람을, 그리고 마침내 종교조직으로부터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오늘 우리 한국 땅에 다시 오신다면, 배타 교리를 하나님의 말씀처럼 여기고 그것에 매여 우리 자신과 이웃들의 삶을 옥죄는 한국 교회에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사람이 교리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교리가 사람을 위해 있다.”

사순절 한가운데 있는 지금, 우리가 어떻게 해야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이 사순절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까요? 절대계명처럼 되어 있는 기독교의 주요 교리가 사람의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재해석될 때, 또한 성서의 문자 안에 갇힌 하나님의 말씀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성서비평과 열린 신앙에 의해 되살아날 때, 그때 비로소 예수님께서 받으신 십자가의 의미도 되살아나 한국 교회가 진정한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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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3/16 [08:4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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