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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진리를 독점할 수는 없다
[류상태의 주일편지] 개신교인은 사람을 존중하는 법부터 배워야
 
류상태   기사입력  2013/02/16 [05:11]
설 명절은 잘 지내셨는지요. ‘교회는 차례와 제사문화를 존중해야 한다’는 제목으로 보내드린 저의 지난 주일편지로 인해 불편을 느끼신 교우님들이 더러 계셨던 것 같습니다. 저의 견해에 동의하고 격려해주신 교우님들께 감사드리며, 또한 동의하지 않는 교우님들의 신앙과 진정성도 존중하고 싶습니다.

서로 다른 견해에 대해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은 신앙과 종교의 영역 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사순절 첫째주일입니다. 사순절은 부활절 전 40일 동안 우리 주님께서 겪으신 고난의 의미를 되새기며 동참하는 기간입니다. 그래야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에 올바로 다가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여 오늘은 주님께서 들려주신 탕자의 비유, 즉 집 떠난 둘째 아들을 간절히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비유를 함께 나누며 ‘오늘의 우리 한국 교회, 이대로 좋은지’ 돌아보고자 합니다.

1.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시는 아버지

누가복음 15장에 나타난 이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에 내용을 잘 모르시는 교우님을 위해 요점만 간략히 정리하겠습니다.

어느 날 가출을 결심한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졸라 상속받을 재산 중 절반을 받아내 집을 떠났습니다.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모두 탕진한 아들은 뒤늦은 후회와 함께 그리운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아버지께서 다시 받아주실지 확신하지 못한 탕자는 고심 끝에 종으로라도 일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던 아버지는 멀리서 그가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맨 발로 뛰어나가 끌어안으며 성대한 잔치로 환영해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마도 우리 한국 교회 강단에서 가장 많이 선포되는 말씀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탕자의 비유’라고 알려져 있지만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라고 해야 더 적절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저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라는 표현이 본문의 뜻을 이해하는데 더욱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을 가려내자면, 둘째 아들을 주인공으로 보기보다 두 아들을 무한히 기다리고 용서하시는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탕자의 비유’로만 이해하면 둘째 아들과 아버지가 이야기의 중심이 되고, 큰아들은 조연의 역할로 그치게 되며 이야기를 듣는 분들의 관심에서 멀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기다리는 아버지’로 이해하고 읽으면 작은 아들보다 오히려 큰 아들이 갖고 있는 문제가 더욱 심각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 같았던 이야기가 큰 아들의 불평과 항의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성경에 기록된 큰 아들의 항의 내용입니다.

밭에 나가 있던 큰아들이 돌아오다가 집 가까이에서 음악 소리와 춤추며 떠드는 소리를 듣고 하인 하나를 불러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하인이 “아우님이 돌아왔습니다. 그분이 무사히 돌아오셨다고 주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게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서 달랬으나 그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는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종이나 다름없이 일을 하며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저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지 않으시더니 창녀들한테 빠져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버린 동생이 돌아오니까 그 아이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까지 잡아주시다니요!” 하고 투덜거렸다. (누가복음 15:25~30, 공동번역)

큰 아들의 항의를 받은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그를 달래주었습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 그런데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 (누가복음 15:31~32)

듣기에 따라 공평하지 못한 아버지의 궁색한 변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아버지의 이 말씀이 우리 기독교 복음을 한 마디로 정리한 명쾌한 선언문처럼 들립니다. “하나님은 선인이나 악인이나 가리지 않고 햇볕과 비를 내려주신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절대무한의 사랑과 용서를 나타내는 간단명료하면서도 완벽한 선언으로 저에게는 다가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들은 큰아들의 반응이 나타나지 않은 채로 이야기가 중단되었기 때문입니다. 작은 아들의 가출 문제는 그의 몸과 마음이 다 돌아옴으로 해결되었지만, 큰 아들은 몸만 아버지와 함께 있을 뿐 마음은 아버지를 떠나있는데 그의 마음이 어디로 향할 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기다리는 아버지는 오래 참고 기다려서 작은 아들을 되찾았으나 이제는 큰 아들이 돌아오기를 다시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큰아들은 결국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될까요? 저와 함께 주일편지를 나누며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고민하시는 교우님들이 계시기에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 믿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2. 큰 아들의 가출

그러면 왜 큰아들은 동생의 돌아옴을 아버지와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주지 못했을까요? 그가 보기에는, 아버지의 처사가 매우 불공평했기 때문입니다.

큰아들은 가출한 적도 없고 아버지의 재산을 팔아먹는 짓도 하지 않았으며, 아버지 말씀을 거역하지 않기 위해 애썼습니다. 반면에 동생은 재산의 절반을 가지고 가출한 문제아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자신에게 해 준 것이 별로 없는데 반해 재산을 날리고 거지꼴로 돌아온 동생에게는 지난 잘못은 전혀 문제 삼지 않고 오히려 환대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불만을 터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이야기에서 큰아들을 등장시킨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쩌면 예수께서 이 비유 말씀을 하시면서 진정으로 새겨듣기를 원하는 대상은 둘째 아들보다 큰아들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 그러니까 겉으로는 성실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으나 안에는 용서 없는 이기심으로 가득 찬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아니었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했고, 거룩한 삶을 사는 자기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총애를 받기에 합당한 선택된 사람들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며, 하나님을 떠나 제멋대로 살아가는 죄인들과 이방인들은 그에 합당한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과 가르침은 그들의 신앙을 송두리째 뒤흔들었습니다. 여인들과 이방인, 죄인 가릴 것 없이 아무하고나 어울리고, 죄에 찌든 그들이 오히려 자기들보다 더 옳고 하나님 나라에 가깝다고 독설을 퍼붓는 예수님을 그들은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들은 평생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왔는데, 실컷 죄 짓고 살다가 뒤늦게 회개한답시고 예수와 어울리는 파렴치한 사람들도 용서할 수 없지만, 그들과 어울려 희희락락하는 예수는 더더욱 용서할 수 없는 악독한 자요 유대 공동체 신앙의 근간을 뒤흔드는 이단자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를 중시하는 사람들과 조건 없이 모든 생명을 하늘 아버지의 존귀한 딸 아들로 품으시는 예수님의 시각 차이는 그토록 컸고 매우기 어려운 골이 되었습니다.

3. 큰아들과 한국교회

그러면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교우님들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며, 다음으로는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하는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목사는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께 헌신하겠다고 서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 섬기듯 교우님들을 섬기고 세상의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교우님을 섬기기보다 스스로 군림하여 교우님들께 맹목적 순종을 강요하는 목사들이 있으며, 심지어 교회를 사유재산처럼 생각하여 자식에게 세습하는 일부 대형교회 목사도 있습니다. 교회의 내실을 다지기보다 건물짓기 경쟁으로 교우님들께 과도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고, 세상에 평화를 심기는커녕 갈등과 분란을 일으키는 교회 지도자들도 있습니다.

물론 한국 교회가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교우님 섬기기를 주님 섬기듯 하며, 세상에 평화를 심기 위해 온갖 고초를 마다하지 않는 진실한 목사님들도 많이 계십니다. 그 분들에게는 진실로 머리 숙여 존경심을 표하고 싶습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예수께서 들려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좀 더 자세히 들어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둘째 아들을 받아주는 대가로 그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었던가요? 탕진했던 돈을 되찾아 오라고 하셨던가요? 냄새나는 옷을 벗어버리고 깨끗이 목욕하고 몸단장한 다음에 오라고 하셨던가요?

아버지는 아무 조건 없이 둘째 아들을 맞아주셨습니다. 그러나 교리적 시각에 사로잡힌 설교자들은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한 가지 중요한 조건이 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왔다는 바로 그것 때문에 아버지께서 용서하신 것이다. 집을 떠난 탕자는 비참한 거지신세였고 그것은 구원받지 못한 상태를 뜻한다. 아버지께로,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한, 탕자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비로소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용서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었습니다. 집에 있을 때나 집을 떠난 후에나 아버지의 사랑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달라진 상황은 단지 아들이 선택한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나 방탕한 삶을 산 것도, 그래서 괴롭고 외로웠던 것도 모두 아들의 선택에 따른 결과였습니다. 만약 아들이 집에 돌아가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독립하여 살아가면서 아버지와 관계를 회복하였다면 그것 또한 해피엔딩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집을 나갔다, 또는 집으로 돌아왔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마음이 떠났다가 돌아왔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심각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버지와 집을 늘 동일선상에 놓고 본문을 해석하는 데 있습니다. 집을 떠난 것은 곧 아버지를 떠난 것이고, 집으로 돌아와야만 아버지께로 돌아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갖고 있는 치명적인 결함이고 병입니다.

교리주의자들에게 본문에서의 집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떠나면 하나님을 떠난 것이고 교회로 돌아와야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라고 그들은 해석합니다. 이런 해석의 결과로 50년 전까지도 천주교는 “가톨릭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지금 천주교는 개신교를 형제로 포용하고 있지만 목사들 중에는 여전히 가톨릭은 사탄이며 그곳엔 구원이 없다고 가르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형제를 정죄하는 모습을 하나님은 어떤 마음으로 내려다보고 계실까요?

4. 하나님의 은총은 천하 만물에 차별 없이 적용됩니다.

저는, 오늘날 하나님의 은총은 차별 없이 만민에게 적용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만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선하고 바르게 살아가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독선과 배타야말로 큰아들의 심보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들도 여전히 큰아들의 신앙, 큰아들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자기 신앙에 대한 확신으로 너무 쉽게 이웃을 판단하고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는지요? 자기와 같은 방식, 자기와 같은 신앙, 자기와 같은 종교가 아니면 다 잘못된 것이며, 지옥불에 떨어질 불쌍한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신앙인이 아직도 우리 한국 교회에는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셨습니다. 혹 문제가 있더라도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셨습니다. 아니, 예외가 있기는 있었습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어서는 안된다고, 특정 종교조직 안에 들어와서 수련을 쌓아야만, 종교의식과 의무를 다해야만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존중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교리를 배우기 전에, 우리 예수님처럼,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독점하려는 무모한 욕심을 내려놓지 않으면 우리 기독교는 끊임없이 우리 사회와 지구마을에 갈등을 양산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구원을 받아야할 대상은 교회 밖에 있는 분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한국 교회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기독교 뿐 아니라 역사상 지구마을에 꽃핀 수많은 아름다운 종교들, 아름다운 문화들을 통해서도 당신을 충분히 나타내셨고, 그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고자 애쓰는 모든 지구마을 이웃들에게 아무 차별 없이, 아무 전제도 없이,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작은 아들이 돌아왔으나 큰아들의 가출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집안에 있지만 아버지를 떠난 큰아들은 언제나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될까요? 교회 안에 있지만 하나님을 떠난 교회지도자들과, 그들의 가르침에 세뇌되어 배타 교리를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과 혼동하는 가엾고 순진한 한국 교회의 많은 교우님들은 언제나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게 될까요?

[참고] 사순절의 의미에 대해 알고 싶은 교우님은 아래 글을 읽어주십시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사순절은 부활절 전 40일 동안 우리 주님께서 겪으신 고난의 의미를 생각하며 동참하는 기간입니다. 그래야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에 올바로 다가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올해의 부활절은 3월 31일인데, 날짜가 매해 바뀌는 이유는 부활절을 ‘춘분이 지난 후 첫 만월이 뜬 다음 주일’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올해 춘분(낮과 밤의 길이가 똑같아지는 기준점으로 양력 3월 21일경) 이후 첫 보름달이 뜨는 날은 3월 26일(음력 2월 15일)이기에, 부활절은 그 다음 주일인 3월 31일이 됩니다.

이렇게 부활절이 결정되면 그 날로부터 40일을 거슬러 올라가 사순절이 시작되는데, 그 첫날은 항상 수요일이 됩니다. 부활절을 기준으로 엿새 여섯 주(6*6=36)를 거슬러 올라간 후 다시 4일을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일은 글자 그대로 ‘주님의 날’을 의미하기에 날짜 계산에서 제외합니다.) 이 날은 지난 모든 과오를 돌아보며 재를 쓰고 회개한다는 의미로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라고 하는데, 바로 지난 2월 13일이 고난주간이 시작된 재의 수요일이었습니다.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는 관습은 구약시대부터 이어져온 것으로, 회개기도를 드릴 때 우리의 모든 잘못을 태워 없앤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듯 사순절은 우리 주님의 가르침과 몸소 겪으신 고난의 의미를 생각하고 동참하며 우리의 잘못을 회개하고 바른 신앙과 삶으로 부활절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기간입니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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