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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불교문화의 산실 선학원, 역사의 무게 넘쳐
선학원에서 민족불교 지향한 만해와 만공 대선사를 생각한다
 
김철관   기사입력  2011/11/15 [15:13]
▲ 선학원     ©김철관
서울 종로구 안국동 선학원을 보며, 민족 불교 계승에 노력한 만해와 만공 대선사를 생각한다.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고 윤보선 전대통령 생가 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생가와 안국역 사이 중간쯤 좌측에 우뚝 서 있는 절하나가 있다. 바로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시대 불교 개혁의 원산지인 선학원이다. 선학원(禪學院, 서울 종로구 안국동 40번지)에서 조금 더 가면 안동교회가 나오고 고서를 많이 출판했던 명문당(明文當)이 나온다.

명문당 인근에 윤보선 생가, 지근거리에는 조선어학원 터와 ‘담 갤러리’의 담쟁이덩굴이 눈에 띈다. 이곳 주변은 유서 깊은 곳이 많다. 

특히 선학원은 일제 식민지시대 친일파와 관련 인사들이 어용 스님을 내세워 우리 민족 불교를 일본 식민지 불교로 하려하자 이를 지키려고 노력했던 곳이기도 하다.

선학‘원(院)’이 선학'사(寺)'나 선학'암(庵)' 등의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바로 당시 일제 식민지 치하 모든 사암(寺庵)은 사찰령(寺刹令)과 사법(寺法)의 직간접적인 사찰(査察)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본말사의 주지 취임까지 일제 총독부의 인가를 받아야 했으며, 모든 행사와 동산·부동산의 변동사항까지 사찰을 받았으므로 사암(寺庵)등의 명칭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총독부의 통치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선학원 창건 상량문’에 대중질(大衆秩)로 전하는 인물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불교의 천양의식이 투철하고 일제의 사찰정책에 비판적인 이들이 많았다. 이것을 보더라도 항일불교를 지향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선학원은 한국의 전통불교를 수호하고 일제의 사찰정책에 대항하려는 의식의 발로에 의해 창립했다고 할 수 있다.

선학원은 1921년 11월 30일 당시 남전․도봉․석두․만공․만해․성월․용성 등 조사 스님들에 의해 설립됐다. 이후 민족불교를 수호하고 한국불교의 전통선맥(傳統禪脈)을 계승해 오고 있는 불교성지이다. 특히 광복이후 왜색화된 한국불교의 청정성을 회복하기위한 정화운동의 산실이기도 하다. 1922년 선우공제회를 조직해 청정비구의 수행요건을 조성했고, 1931년 호법(護法)과 항일을 위해 조선불교선종 首座(수좌)대회를 개최했다.

선(禪)의 대중화를 위해 재가자를 중심으로 1931년 남녀선우회를 조직했고, 1935년 여성불자를 위한 수행공간인 부인선원을 개설했다. 특히 기관지 <선원(禪苑)>을 창간하기도 했다. 선학원은 1934년 12월 스님과 불자들이 재산을 출연해 재단법인 설립등록을 했다. 이후 1935년 이곳에서 제3차 수좌대회를 개최해 선종(禪宗)을 창종시켰으며, 1941년 유교법회를 개최하고 법행단(法行團)을 조직해 선학과 계율(戒律)의 종지(宗止)를 선양했다.

광복 이후 선학원을 중심으로 청정비구승들이 불교정화운동을 전개해 현재 불교 조계종이 탄생했다. 선학원은 현재 재단 산하에 중앙선원을 비롯해 전국 570개 분원과 포교원을 두고 있으며, 선의 수행과 보급을 위해 시민선방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선학원 설립해 참여한 인물 중 만해와 만공 스님은 교분이 두터운 스님이었다. 이들은 근대불교 개혁, 민족운동, 한국 전통 불교고수, 자존심의 몸부림을 위한 일제하의 고난의 가시밭길을 함께 걸었다. 당시 만해 한용운 대선사는 일제 식민지 통제를 전면 부정하면서 민족불교를 개천한 반면, 만공 대선사는 식민지 현실을 일부 인정하면서 선불교 전통의 고수를 통한 민족불교를 개척한 스님이었다.

 만해와 만공 스님은 친분이 두터웠고, 이들의 거침없는 대화, 법거량, 차별성 속의 동질성 등은 두 사람의 고매함, 담박스런 패기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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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1/11/15 [15:1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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