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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베트남, 오늘은 이라크' 성전시작
'저항투쟁은 이라크독립 향한 첫걸음', 게릴라투쟁 전개
 
안찬수   기사입력  2003/11/04 [17:50]

이라크인의 저항이 날로 거세지고 있다는 점이 더욱 더 분명해지고 있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라크에서 2일 발생한 게릴라식 공격으로 미군 16명이 사망한 사건과 관련해 일부 세력이 ‘동맹군’을 몰아내려 하지만 미국은 결코 이라크에서 도망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어떤 식으로 도망쳤는가를.

기이한 일일 수도 있다. 미국이 ‘종전’을 선언하기 이전, 전쟁이 한창이던 때 아랍 위성 방송 <알 자지라>는 이라크인이 추락시킨 미군 헬기의 사진을 공개한 적이 있었다. 그때 미군 헬기는 멀쩡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난 2일 바그다드 서부 팔루자 인군에서 격추된 치누크 헬기의 잔해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과연 이라크 저항 투쟁은 어떤 통합적인 지도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타리크 알리는 <가디언> 인터넷판 11월 3일자 글에서 조심스럽게 ‘이라크 민족해방전선’의 결성을 내다보고 있다.

▲타리크 알리(Tariq Ali)의 글     ©guardian.co.uk
타리크 알리에 의하면, 미국의 이라크 점령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시대의 식민주의’이며, 이에 대한 이라크인의 게릴라식 저항 투쟁은 ‘식민지 점령에 저항하는 고전적인 게릴라 투쟁’이다. 그는 프랑스의 식민주의에 저항했던 알제리 사람들의 투쟁의 역사를 떠올리고 있다. 우리에게는 알제리의 투쟁은 낯설다. 오히려 일제에 저항했던 우리들 자신의 역사를 떠올리는 편이 나을지 모르겠다. 말하자면, '미국 vs 이라크=일본 제국주의 vs 식민지 조선'이다.

식민지 암흑기에 한국인은 언제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수 있게 될지, 쉽게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결코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렇듯이 이라크 민중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게 되기를 꿈꾸면서 미국의 점령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타리크 알리는 예언적으로 “이제 곧 모든 외국 군대는 이라크를 떠나야만 할 것이다. 만약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쫓겨나고 말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오늘자 외신에 따르면, 태국은 긴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447명의 이라크 주둔 부대원을 전원 철수시키기 위한 비상계획을 마련 중이라 한다.

[관련기사] 안찬수, 미국이 점령하는한 이라크에 평화는 없다, 대자보(2003. 9. 3)

타리크 알리(Tariq Ali)의 글은 이미 <대자보>에 소개한 바 있다. 알리는 <뉴레프트 리뷰>의 편집자이며, 이번 주에 베르소 출판사에서 <바빌론의 부시(Bush in Babylon)>를 출간할 예정이다. 국내에는 <1968년: 희망의 시절 분노의 나날><전쟁이 끝난 후><근본주의의 충돌> 등이 번역되어 있다. (옮긴이 주)


몇 주 전, 미 국방부 소속 사람들은 오래 된 영화 한 편의 상영에 초대를 받았다.

그 영화는 <알제리 전투(Battle of Algiers)>였다.(원제는 La Battaglia di Algeri, 질로 폰테코르보 감독이 1965년에 만든 영화. 1957년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이 프랑스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알제리인들의 무장투쟁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구성한 영화. 옮긴이 주) 프랑스는 질로 폰테코르보 감독의 이 고전적인 반식민주의 영화 상영을 금지한 바 있다. 이런 영화를 상영한 목적은 순수하게 교육적인 효과를 노린 것이라고 추측된다.

프랑스는 전투에서는 승리했다. 그러나 전쟁에서는 졌다. 적어도 펜타곤(미 국방부)은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저항투쟁이 반식민주의(anti-colonial)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다.

영화를 통해 우리는 거의 반세기 전에 알제리 지하운동 조직이 수행했던 갖가지 투쟁 양상을 볼 수 있다. 지난 주 이라크의 팔루자나 바그다드에서 영화를 찍었더라도 그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때도 점령군은 그런 저항활동을 ‘테러’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묘사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때도 사람들이 붙잡혀 가서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받았으며, 사람들이 숨어 있던 가옥들은 파괴되었으며, 저항투쟁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의 친척들은 괴롭힘을 당했으며, 억압은 가중되었다. 그러나 끝내는 프랑스인들은 철수해야만 했다.

전쟁 종결 이후(postwar) 미국 병사의 사상자 수가 침공 기간 동안의 사상자보다 더 늘어났기 때문에(이라크인의 사상자는 적어도 1만 5천 명의 희생이 생겨났다) 현재 미국에서는 갖가지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하고 있다. 

미국이 점령하고 있는 상태의 이라크가 사담 후세인이 통치하던 이라크보다 훨씬 더 나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규모 실업이 생겨났다. 일상생활은 비참하다. 점령자과 그들의 꼭두각시들은 기본적인 생활 설비조차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자신들의 막사를 청소할 때조차 이라크 사람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남아시아인들이나 필리핀 이민자들을 부르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시대의 식민주의(colonialism in the epoch of neo-liberal capitalism)’다. 미국인이나 미국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에게는 우선권이 주어지고 있다.

점령된 이라크에서는 기껏해야 정실 자본주의(crony capitalism)의 과두 지배체제 즉 벡텔과 핼리버튼(미국의 이라크 점령으로 가장 큰 이득을 챙기고 있는 대표적인 미국 회사, 옮긴이 주)의 세계주의가 형성될 것이다.

이 모든 조건들이 저항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며, 수많은 이라크 청년들로 하여금 투쟁에 나서게 만들고 있다. 투쟁에 나선 사람들을 밀고하려는 이들은 거의 없다. 이 점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왜냐면 대중들의 무언의 지지가 없다면 지속적인 저항 투쟁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라크 저항 운동 조직의 투쟁으로 말미암아 미국 내에서 조지 부시의 입장은 약화되었으며, 민주당 정치인들이 백악관을 비판할 수 있게 되었다. 하워드 딘은 2년 내에 미군이 전면적으로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예전에 전쟁을 반대했지만 점령을 지지하고 이라크인의 저항을 비난하던 사람들조차 이제는 미군이 철수하지 않으면, 전쟁광들의 계속적인 목소리를 듣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라크의 실패로 말미암아 이란과 시리아에서 벌이고자 했던 ‘모험’이 무한정으로 늦추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몇 달 사이에 있었던 일 가운데 아주 우스꽝스러운 모습 가운데 하나는 폴 월포위츠가 바그다드에서 기자회견을 하면서 “주요한 문제는 이라크에 너무 많은 외국인이 있다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라크인들은 대부분 점령군을 진짜 ‘외국인 테러리스트’로 여기고 있다. 왜? 어째서 그런가. 누군가 한 국가를 점령하면 식민주의자의 행동거지를 보여주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보스니아나 코소보처럼 저항이 없는 곳에서조차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이라크처럼 저항투쟁이 있는 곳에서는 가자 지구나 관타나모 기지를 혼합한 일만 일어날 뿐이다.

이라크 점령은 어리석은 점령이며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이라크에서 나온 자료에 따르면 현재 40개 이상의 서로 다른 저항조직이 있다. 이들 저항조직은 바트당 당원, 점령을 지지한 이라크 공산당의 배반행위에 분개한 반대파 공산주의자, 이라크 군인, 점령으로 말미암아 해고된 관료, 수니파 및 시아파 종교단체 등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담 후세인의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고 현재 망명 생활을 하고 있는, 이라크의 위대한 시인들인 사아디 유세프(Saadi Youssef)와 무다파르 알 나왑(Mudhaffar al-Nawab)은 이라크의 양심이라 할 수 있는 인물들이다. 

점령을 비난하고, 외국 세력의 앞잡이 혹은 매국노들에 대해 경멸을 퍼붓고 있는, 그들의 노기 어린 시는 저항 정신을 북돋아주고 있으며, 그 정신을 새롭게 만드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유세프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앞잡이들의 낯짝에 침을 뱉어 주리라. /나는 그들의 투기장에 침을 뱉어 주리라./나는 선언하리라. 우리가 이라크의 국민이라고./우리가 바로 조상대대로 이 땅의 핏줄을 이어왔다고.”

나왑은 이렇게 읊고 있다.

“자유를 위해 무기를 들지 않는 전사를 결코 신뢰하지 마라./ 나를 믿어라. 나는 화장터에서 불로 태워졌다./ 진실은, 너의 대포만큼만 너도 힘이 있을 뿐이라는 것. 사람들이 칼과 포크를 휘두르는 건/ 그들의 배에 눈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다시 말해, 다른 아랍인들이 이라크인을 도와주기 위해 국경을 넘고 있다 하더라도 저항투쟁은 분명 이라크 사람들의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바그다드와 나자프에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이 있는데, 왜 아랍인들이 서로 도와주면 안 된단 말인가.

저항 투쟁의 핵심적인 사실은 그 투쟁이 분산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점령군에 대해 저항하는, 고전적인 게릴라 전쟁의 첫 번째 단계다. 어제 미군의 치누크 헬기가 공격을 받아 추락한 것과 같은 패턴의 공격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 저항 운동 조직들이 다음 단계의 공격에 나설지, ‘이라크 민족해방전선’을 만들어나갈지에 대해서는 이제 곧 알게 될 것이다. 

마치 ‘정직한 브로커’처럼 행동하고 있는 유엔은 어떤가. 특히 이라크에서 유엔은 문제다. (살인적인 경제 봉쇄의 집행자이자, 앵글로-아메리카의 12년간에 걸친 폭격의 후원자였던) 지난 사실은 차치하고, 10월 16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라크에 대한 수정 결의안을 통과시킴으로써 다시 한번 망신거리를 만들었다. 결의안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통치위원회에 대한... 국제사회의 긍정적인 반응...(그리고) 이라크 국민을 동원하기 위한 통치위원회의 노력을 지지한다.” 운운.

얼굴에 웃음기를 띤 사기꾼인 아흐메드 찰라비에게는 유엔에서 이라크를 대표하는 자의 자격이 주어졌다. 베트남 사람들이 폴 포트(Pol Pot)를 전복한 이후에도 미국과 영국은 십여 년 넘게 그에게 계속 캄포디아의 대표 자격을 주어 왔었다는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폴 포트는 1976년 캄포디아 공산당의 총서기가 된 뒤, 중국의 지원을 받아 총리가 되었으나 1979년 친베트남군에 의해 프놈펜이 함락된 이후 해임되었다. 옮긴이 주) 

유엔 안보리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기준이란 야만적인 무력인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그런 무력을 전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유일한 권력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남반구나 그리고 그 밖의 수많은 곳에서 ‘유엔이란 곧 미국’을 뜻하게 된 것이다. 

아랍 세계에는 현재 이원적인 점령지가 있다. 하나는 미국-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그리고 이라크다. 바그다드가 함락된 이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초기에는 크게 상심했지만 저항운동이 부상함으로써 그들도 용기를 얻고 있다. 

바그다드가 함락된 이후, 이스라엘의 전쟁 지도자 아리엘 샤론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 봐라, 너희들의 보호자가 사라지고 없다.” 마치 팔레스타인의 투쟁이 사담 후세인이나 다른 어떤 개인에게 의존하고 있었다는 듯이 말이다. 

현재 가자 지구와 바그다드에서는, 지도자가 없기 때문에 아랍 세계가 패배했다는, 오래된 식민지적 관념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중인 것이다. 그리고 사담 후세인이 내일 죽는다 하더라도 저항 투쟁은 점점 더 증가할 것이다.

이제 곧 모든 외국 군대는 이라크를 떠나야만 할 것이다. 만약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쫓겨나고 말 것이다. 그들이 계속해서 주둔하고 있는 것은 폭력에 박차를 가하는 행위일 뿐이다.

이라크 국민이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게 될 때, 그들은 국내사회 구조를 결정할 것이며 외국에 대한 정책도 결정하게 될 것이다. 이로써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가 결합할 수 있으리라고 사람들은 희망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라틴아메리카에 생기를 불어넣은 것이며 제국이 매우 불쾌해 하는 것이다.

이라크 사람들에게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리고 미국과 영국의 시민들이 부러운 눈으로 볼 수밖에 없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저항(opposition)이다.

원문은  http://www.guardian.co.uk/comment/story/0,3604,1076480,0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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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11/04 [17:5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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