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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와 경향은 왜 조중동을 못이기나
[강준만의 세상이야기] 현대 저널리즘 창시자, 신문왕 퓰리처와 선정주의
 
강준만   기사입력  2009/09/01 [19:08]
미국 저널리스트 데니스 브라이언(Denis Brian)의 『퓰리처: 현대 저널리즘의 창시자, 혹은 신문왕』(김승욱 옮김, 작가정신, 2002)을 재미있게 읽었다. 955쪽에 이르는 두툼한 책이지만, 퓰리처의 삶이 워낙 재미있어 지루한 줄 몰랐다.

1847년 헝가리의 마코에서 한 유대계 헝가리인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조지프 퓰리처(1847~1911)는 미국의 남북전쟁 덕분에 1864년 미국에 가게 되었다. 당시 병력이 모자란 북군이 유럽에서 이민을 장려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당장 필요한 신병을 구했는데, 여기에 지원한 것이다. 그는 1865년 전쟁이 끝난 후 실업자 신세가 되어 뉴욕의 호화로운 프렌치즈호텔에 들어갔다가 호텔 포터에게 쫓겨나는 수모를 겪는다. 그는 23년 후인 1888년 이 호텔을 사서 건물을 부순 다음 그 자리에 뉴욕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짓는다. 1890년 완공된 이 건물은 16층으로 당시 미국에선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퓰리처의 그런 ‘아메리칸 드림’은 언론인 활동에서부터시작되었다. 그는 정치에도 관심이 많아 사실상의 정치인 노릇도 했다. 아니 신문이 정치를 위한 대용이었다. 그는 1875년 한 정치집회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 나라에서 금권의 성장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굉장한 것이었으며, 금권이 정부와 연계되어 정부에 이해관계를 갖게 된 것은 심상치 않은 일입니다. …… 수백만 명의 뜻이 아니라 백만장자들의 힘에 의지해서 스스로를 유지하는 정부가 워싱턴에 절대로 들어서지 못하게 합시다.”(16쪽)

▲ <퓰리처:현대 저널리즘의 창시자, 혹은 신문왕>     © '작가정신'
퓰리처는 죽을 때까지 이 발언의 취지를 지키며 자신의 신문에 그대로 반영했다. 그가 신문 경영자로 변신하게 된 계기는 1878년 12월 경매에 부친 『세인트루이스 디스패치』를 헐값에 인수하면서부터였다. 그는 곧 경쟁지인 『이브닝 포스트』와 합병해 『세인트루이스 포스트-디스패치』를 출범시켰다. 경쟁지인 『세인트루이스 스타』가 자꾸 자기 신문 기사를 표절하자 함정을 설치한 게 흥미롭다. 일부러 자기 신문에 엉터리 기사를 싣고 경쟁지가 그걸 표절하자 내막을 밝혀 골탕을 먹인 것이다. 결국 그 신문이 비틀거리자 그 신문도 인수했다.

퓰리처는 미친 듯이 일하는 일 중독자였다. 발행인이면서도 말단 기자처럼 여기저기를 쑤시고 다니면서 일일이 훈수를 뒀다. 시대가 좋았다. 당시 미국 사회의 부정부패가 워낙 심해 그걸 폭로하면 신문 부수가 막 늘어나던 시절이었다. 거기다가 퓰리처는 가십, 범죄, 유머, 스포츠, 오락 등 독자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기사를 싣는 데에 일로매진했다.

1882년 ‘제시 제임스’ 사건 보도는 퓰리처 상술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제시 제임스는 남북전쟁이 끝났는데도 여전히 남군 행세를 하며 17년간 법망을 피해 강도짓을 하고 다니는 전설적인 무법자였다. 그런데 묘한 건 남부 농촌지역에서 그가 로빈 후드 스타일의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체포가 더욱 어려웠다. 견디다 못한 미주리 주지사 크리텐든은 제임스 처단에 1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었다. 이에 제임스의 부하인 로버트 포드가 현상금과 더불어 자신에 대한 사면을 조건으로 제임스를 살해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킬 수 있는 사건에 혈안이 된 조지프 퓰리처의 보도 태도다. 그는 ‘배신’에 초점을 맞춰 로버트 포드가 비겁하다며 제시 제임스를 동정했으며, 크리텐든 주지사를 맹렬히 비난했다. 계속 이런 식으로만 나갔다면 위험했을 텐데, 퓰리처는 ‘줄타기’의 도사였다. 그는 남부색이 강한 다른 신문이 제임스의 패거리에게 포드를 죽여 복수할 것을 촉구하자, 이에 반발하면서 이 신문을 강하게 공격했다. 자신의 주장은 “범죄자로서 그 역시 법에 의해 판결 받고 법에 의해 다뤄질 자격을 갖고 있었다는 것뿐”이라는 것. 중요한 것은 이 문제를 둘러싼 논란 때문에 그달에 신문의 판매부수가 2만 부에서 2만 6600부로 늘었다는 사실이다.(120~127쪽)

『세인트루이스 포스트-디스패치』의 성공 덕분에 퓰리처는 1883년 5월 다 죽어가는 신문 『뉴욕월드』를 인수했다. 이미 10여 개의 쟁쟁한 신문들이 버티고 있는 뉴욕시장에서 『뉴욕월드』의 전망은 어두웠지만, 그 신문들은 모두 공화당 계열의 신문이었다. 그 반대로 가는 게 『뉴욕월드』의 살 길이었던 셈이다. 퓰리처는 사회개혁운동의 색깔을 강하게 드러내면서도 이전과는 달리 노동자들도 즐길 수 있는 이야깃거리들을 적극 개발했다. 그는 기사 내용이 황당할수록 잘 팔린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그래서 사실 확인 과정도 건너뛴 채 그런 기사들을 양산해냈다. 예컨대, ‘꼬리 달린 야만족 발견’ 같은 기사는 사실이 아니더라도 누가 명예훼손을 당했다고 시비를 걸 수 있는 건 아니었기에 오직 필요한 건 뻔뻔함이었다.

퓰리처는 특권계급에 대한 혐오를 강하게 드러내면서도 그들의 삶을 동경하는 독자들의 호기심도 충족시키는 이중 전술을 능숙하게 구사했다. “특히 여자들은 그가 경멸하는 이른바 귀족들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는 귀족들의 굉장한 저택과 화려한 생활, 약점, 재산 등에 대한 기사를 그림과 함께 실음으로써 자신의 원칙을 배반하지 않고도 여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그는 귀족들의 어떤 점도 미화하지 않았고, 그들 중 일부를 조롱과 경멸의 대상으로 만들기도 했다.”(158~159쪽)

퓰리처는 뉴욕의 일간지 발행인 중에서 최초로 별도의 체육부를 만들었으며, 살인사건 보도에서도 살해방법을 자세히 설명하고 현장 스케치 그림을 싣는 새로운 방법을 도입했다. 이는 자신이 아마추어 탐정이라는 공상에 빠진 독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이 유행이 되어 다른 신문들도 퓰리처의 방법을 그대로 베끼게 되었다. 재벌을 비난할 때에도 흥미 위주의 비교 기법을 선보였다. 예컨대, 2억 달러에 이르는 윌리엄 헨리 밴더빌트의 재산을 금으로 바꾸면 350톤은 된다면서 이것을 들어 올리려면 힘센 사람 7000명이 필요하고, 운반하려면 말 1400마리가 필요하다는 식이었다. 여기에 밴더빌트의 저택에서 겨우 몇백 피트 떨어진 곳에서는 아이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그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돈을 갖고 있는 것이 공정한 일인지에 대한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라고 주장했다.(169~176쪽)

그러나 퓰리처도 이미 특권층에 속할 정도로 많은 돈을 번 사람이었으며, 노동자들도 궁극적으론 부자가 되는 ‘아메리칸 드림’을 꾸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신문은 ‘아메리칸 드림’을 미화하는 동시에 그 드림을 이룬 부자들을 공격하는,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냈다. 또 다른 퓰리처 연구자인 조지 주어젠즈는 그런 ‘정신분열증적인 보도 태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뉴욕월드』는 월스트리트의 거물들을 해적이라 공격하고, 그들의 생활방식을 반사회적이고 천박하다고 공격하면서, 그들을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성공의 살아 있는 상징으로 미화했다. 이 신문은 발행될 때마다 거의 매번 자기 모순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모순이 바로 매력의 일부였다. 이 신문은 자신을 만들어낸 사회의 이상주의와 어리석음을 반영했을 뿐이며, 그것은 그 신문이 사람들의, 사람들을 위한 신문임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방법이었다.”(180쪽)

퓰리처는 “선정적인 신문이 고귀한 사회적 목표에 봉사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퓰리처의 기자들에게도 자제력은 결코 미덕이 아니었다. 그는 기자들에게 “어떤 인물도 신성불가침이 아니며, 도가 지나친 질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의 태도를 갖도록 압박했다. 기자들의 무례함에 대해 항의가 들어오면 퓰리처는 기자들이 워낙 열정이 넘쳐 자신도 어찌할 수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곤 했다.(186~193쪽)
 

퓰리처는 인종적 편견이 매우 강한 인물이었다. 아일랜드인, 독일인, 헝가리인을 제외하곤 그는 외국인들을 혐오했다. 그는 영국의 왕족과 귀족들에 대해서도 거친 독설을 퍼부어댔다. 그는 이탈리아인들은 ‘더럽고 불결한 악취 속에서 만족스럽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했으며, 프랑스인에 대해서는 볼테르, 루소, 위고를 찬양하는 구제불능의 멍청이들이라고 했다. 중국인들은 ‘야만인’이라고 무시했다. 저자인 브라이언은 퓰리처를 다음과 같이 옹호한다.

“퓰리처와 같이 지적이고, 경험 많고, 전체적인 시야를 지닌 사람이 이처럼 편협한 생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다. 그러나 그는 그 시대의 사람이었다. 그 시대에 아일랜드인은 독일인을 경멸했고, 독일인은 이탈리아인을 경멸했으며, 이탈리아인은 유대인을 경멸했다. 그리고 유대인은 아마도 그들 모두를 경멸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 그러나 퓰리처는 형편없는 대우를 받는 이탈리아인 노동자들을 대신해 사회개혁운동을 벌이는 등 이상할 정도로 일관성이 없었다.”(196~199쪽)

퓰리처는 언젠가 자신의 친구에게 속내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난 외국인이니까 결코 대통령이 되지는 못할 걸세. 하지만 난 언젠가 대통령을 당선시키는 사람이 될 거야.”(96쪽) 그런 신조 아래 퓰리처는 1884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그로버 클리블랜드의 승리, 1886년 뉴욕시장 선거에서 아브람 휴위트의 당선에 결정적 기여를 함으로써 언론 권력자로 우뚝 섰다.

퓰리처는 1887년부터 넬리 블라이라는 23세의 여기자를 앞세워 ‘잠입 취재’의 새로운 경지를 선보였다. 블라이는 정신병자 연기를 해 정신병원에 환자로 들어간 뒤 열흘 동안 생활하면서 그곳에서의 인권유린을 취재해 폭로하는 기사를 썼다. 이 기사로 검찰의 대대적인 수사와 더불어 병원 예산이 57%나 늘어나는 당국의 조치가 취해졌다. 다음 해에 블라이는 고객으로 위장해 거물 로비스트를 찾아가 어떤 법안을 매장시켜 달라고 요청한 다음, 로비스트에게서 뇌물을 줘야 할 사람들의 명단을 얻어낸 다음 그걸 폭로하는 기사를 썼다. 절도를 저질렀다는 허위 혐의를 만들어 교도소에 수감된 뒤 그곳에서 벌어지는 여성 수감자 학대를 폭로하는 기사를 씀으로써 당국이 여성 간수들을 채용하게끔 만들었다. 꼭 위장 잠입 취재를 하지 않더라도 센세이셔널하게 폭로할 거리는 많았다.

평소 편두통에 시달려온 블라이는 7명의 의사를 찾아가, 그들의 진단과 처방을 비교 평가하는 기사를 썼다. 흥미롭게도 7명의 진단과 처방이 다 달랐다. 이 기사는 의사들의 실명을 밝힘으로써 그들에게 망신을 주었다.  퓰리처는 1889~1890년에 쥘 베른의 소설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의사사건(pseudo-event)으로 이용했다. 블라이에게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직접 하면서 기사를 써 보내라고 했고, 독자들에겐 실제로 여행에 걸린 시간에 가장 가까운 답을 내놓은 사람에겐 공짜 유럽 여행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거의 100만 통의 응모 편지가 쏟아져 들어왔다. 덩달아 『80일간의 세계 일주』의 인기도 높아져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연극으로도 만들어졌다. 72일 만에 세계 일주를 마친 블라이는 그 과정에서 세계적인 명사가 되었다. 이런 일련의 잠입 취재 폭로 기사와 이벤트 연출에 독자들은 열광했고, 신문 부수는 쑥쑥 늘어났다.

이즈음 퓰리처는 시력을 거의 잃어 죽을 때까지 시각 장애인으로 지내게 되지만, 마키아벨리를 뺨칠 정도의 책략으로 자신의 신문을 완전히 장악해 계속 주도권을 행사해 나갔다. 퓰리처에게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란 재미없는 신문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1893년 발행부수가 50만을 넘어서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던 퓰리처에게 강력한 도전자가 나타났으니 그는 바로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1863~1951)였다.
 
광산업으로 재산을 쌓은 부자이자 미국 상원의원인 조지 허스트의 응석받이 외동아들인 허스트는 1896년 『뉴욕저널』로 퓰리처의 『뉴욕월드』에 도전하고 나섰다. 허스트는 돈으로 『뉴욕월드』의 기자들을 빼내갔으며, 심지어 『뉴욕월드』에 첩자까지 심어놓아 퓰리처는 기자들에게 지시를 내릴 때 암호를 사용해야만 했다. 허스트는 엄청난 성공을 거둔 만화 시리즈 ‘호건의 골목길’을 만든 리처드 펠튼 아웃콜트까지 『뉴욕월드』에서 훔쳐갔다. 이 만화의 주인공은 노란색 잠옷처럼 생긴 옷을 입고 있는 장난꾸러기 소년이었는데, 이 때문에 ‘노란 아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이 만화가 『뉴욕저널』의 1면에 실리면서 독자를 빼앗아가자, 퓰리처는 다른 ‘노란 아이’ 만화를 만들라고 지시를 내렸다. 이른바 ‘노란 아이’ 경쟁이었다. 이와 관련, 『뉴욕프레스』 편집국장 어빈 워드맨은 끔찍한 사건과 스캔들을 이용하는 두 신문의 방식에 ‘황색 저널리즘(yellow journalism)’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두 신문의 ‘황색 저널리즘’ 경쟁은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의 발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퓰리처의 『세인트루이스 포스트-디스패치』는 여전히 살아남아 이름을 떨치고 있지만, 퓰리처가 심혈을 기울인 『뉴욕월드』는 자식들이 팔아넘기는 바람에 사라지고 말았다. 퓰리처라는 이름은 그가 1903년 컬럼비아대학에 언론대학원을 세우라며 200만 달러를 기부한 것으로 빛나게 되었다. 이 돈이 매년 시상하는 퓰리처상에도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선정적인 신문이 고귀한 사회적 목표에 봉사할 수 있으며,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란 재미없는 신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퓰리처의 이런 원칙은 먼 옛날이야기일 뿐일까?

▲     © 대자보
언론개혁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사회개혁을 원하는 사람들은 『한겨레』와 『경향신문』이 조중동(조선-중앙-동아일보)보다 더 많이 팔리는 신문이 되길 원한다. 그러나 원하기만 할 뿐 그런 세상이 올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왜 그럴까? 자본력 때문에 도저히 안된다고 보는 걸까? 도대체 신문사의 자본력이 얼마나 되기에? 아무리 큰 신문사라고 해봐야 거대 기업들에 비하면 그야말로 구멍가게 수준인데, 오직 자본력 때문에 어렵다고 보는 건 좀 이상하지 않은가? 삼성을 든든한 ‘빽’으로 두고 있는 『중앙일보』가 『조선일보』를 확실하게 압도하지 못한다는 것도 좀 이상하지 않은가?

자본력이 매우 중요하긴 하지만, 신문사업의 경우엔 그게 전부일 수는 없다. 내가 보기에 『한겨레』와 『경향신문』이 조중동을 능가하기 어려운 이유는 ‘진보’라는 족쇄에 있는 것 같다. 진보의 색깔 자체가 문제라는 뜻은 아니다. 이 나라 국민의 반이 자기 집이 없는 세상에서 진보가 무슨 흉이란 말인가. ‘진보’라는 족쇄는 색깔의 문제가 아니라 진보이기 때문에 어찌어찌해야 한다는 무언의 규정력을 말한다. 조중동이 부도덕한 짓을 하는 건 별 흉이 안된다.
 
물론 『한겨레』와 『경향신문』은 열심히 비판을 해대지만 조중동은 물론 조중동 독자들도 눈 하나 깜박거리지 않는다. “뭐 세상이 다 그런 것 아냐?”라고 대범하고 가볍게 흘려 넘긴다. 그러나 『한겨레』와 『경향신문』이 부도덕한 짓을 하면 난리가 난다. 이 신문들의 존립 근거마저 흔들린다. 그것 참 이상한 일이다. 보수는 개판을 쳐도 별 타격을 입지 않는데, 진보는 개판 치면 죽음이라니, 이거 너무 불공정하지 않은가.

그러나 세상이 그런 걸 어이하랴. 현실을 보자. 신문 장사라는 게 도덕으로 하는 게 아니다. 부도덕한 게 훨씬 더 유리하다. 이건 인터넷에서 네티즌들이 주로 어디로 몰리는가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게 대중의 속성이며, 이는 신문 독자들의 경우에도 다를 게 없다. 도덕이 신문 선택의 기준이 전혀 아닌데도 그것에 얽매인다는 건 스스로 몰락의 길로 가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선정주의를 도덕의 문제로 볼 수 있느냐 하는 문제도 명쾌하게 답하기 어려운 것이다. 사실 진보 선정주의는 이미 『한겨레』와 『경향신문』이 조중동의 그 반대편 선정주의 못지않게 열심히 하고 있는 일이다. 정작 문제는 그들의 선정주의 레퍼토리가 너무 협소하고 옹졸하고 빈약하다는 데에 있다. 게다가 메시지의 포장술과 그 포장에까지 다가오게 만드는 유인술도 없거나 약하다.

지방신문은 더욱 고고하다. 전부라고 단언할 순 없겠지만,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전북지역 신문들을 두고 말하자면, 이들은 선정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일부러 신문을 재미없게 만들려고 발버둥치는 것 같다. 물론 지역 이익을 역설할 땐 낯 뜨거운 선정주의를 시도하지만, 이들 역시 오직 그 레퍼토리만 갖고 있을 뿐 전반적으로 보아 독자들의 주목을 쟁취해보려고 애쓰진 않는다. 신문 볼 테면 보고 말라면 마라, 순전히 이런 배짱 장사다. 체념의 지혜를 터득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그냥 습관이나 관성으로 그렇게 굴러간다. 지방 신문계에 퓰리처 같은 사람은 영영 나타날 수 없는 건가?
 
* 본문은 월간 <인물과 사상> 2009년 9월 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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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9/01 [19:0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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