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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자동차의 조직력, 여성노동자의 소외가 원인
[정문순 칼럼] 남성 노동자의 절반 임금, 여성 노동자의 현실 개선해야
 
정문순   기사입력  2009/08/18 [11:55]
전쟁을 방불하게 했던 쌍용자동차 사태가 극적으로 타결되었지만 당사자들은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을 것이다. ‘타결’이 아니라 노조의 일방적인 ‘굴복’일 뿐이라는 평가를 반박하기 쉽지 않은 건 사실이다. 정리해고 숫자를 조금 떨어뜨린 것 말고는 노조가 얻은 게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답이 궁색하기는 하다. 그러나 사면초가의 처지에서 전면 투항을 하지 않은 것은 대공장 노동운동의 저력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할 수 있다. 비슷한 상황에서 조직력의 와해로 자진 해산을 하기도 하는 비정규직 노조의 경우와 비교하면 그 차이는 뚜렷하다. 그들이 어떤 환경에서 2달 하고도 보름을 버텼는가. 
 
한국에서 노동자가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알고 싶으면 쌍용차 사태를 보면 된다. 한국에서 생산 현장의 노동자는 천시받고, 노동운동은 불온시되는 것이 전통이더니 언제부터인가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의 피를 빨아 제 밥그릇만 챙기는 이기주의 집단이라는 오명까지 쓰게 되었다. 쌍용자동차 파업은 이 세 가지를 모두 안고 있었다. 이런 ‘탄탄한’ 여건 위에서 국가와 자본은 막다른 길에 내몰리다 저항하는 노동자들의 저항을 테러로 몰아 짓밟기에 바빴다.
 
노동자 경영 참가율이 0인 회사에서 경영 실패의 책임이 노동자에게 떠넘겨진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나라, 자신들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용보장도 함께 요구했지만 평소에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비정규직도 챙기라고 질타하더니 정작 쌍용차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고용보장을 함께 요구하는 목소리에는 모른 척하는 후안무치의 나라, 물과 전기를 끊고 의료진 출입을 가로막는 등 인간을 인간으로 대우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의 비인간적인 처사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크게 울림을 갖지 않는, 감수성이 말라버린 나라에서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암흑의 처지에서 77일 동안 저항하고 버틴 이들에게 패배자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처지에서 배수진을 치고 ‘옥쇄’까지 각오한 듯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의 ‘영웅적인’ 저항은 어디에서 동력을 찾을 수 있는가.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폭염 속에 인간다움을 포기한 자들의 야만에 맞서 수개월 간 인간 이하의 삶을 버틸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민주노총은 노동자의 강고한 동지애와 단결의 힘이라는 익숙한 어법에 의지하겠지만, 탄탄한 조직력의 ‘배후’에 있는 건 사실 좀 더 현실적인 것이다. 
 
▲ 쌍용차 노사의 마라톤 협상이 진행되던 지난 3일 오후, 경기도 평택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정문 앞에서 노조원의 가족들이 서로의 팔을 건 채 경찰의 해산 작전에 맞서고 있다.     © CBS노컷뉴스

알다시피 모든 쌍용 노동자들이 동지애를 보인 것은 아니었다. 해고냐 아니냐에 따라 그들은 적과 동지로 갈라졌다. 해고를 용케 면한 노동자들은 공장 안에서 굶주리고 있는 동료들과 동지애를 나누지 않았다. 그들의 동료는 의약품 반입도 가로막는 회사를 포함하여 어제의 동료를 테러범 때려잡듯 하는 경찰이나 경비용역이었다. 비해고 노동자들은 동료애가 없는 사람들이며 저 혼자만 살겠다고 양심을 잊어버린 사람들인가. 그들도 농성 노조원처럼 부양 가족이 있는 것은 똑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용케 잘리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딸린 ‘입’들을 굶게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뿐이다.
 
비해고 노동자들에게 연대와 동료애보다 중요한 건 어제까지 한솥밥을 먹거나 이웃으로 살던 동료와 그 가족들이야 어찌 됐든 자기 가족만큼은 살아남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생존의 절박한 긴장을 어렵사리 모면한 이들이, 자신과 다른 처지가 된 동료들에게 눈길을 돌릴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힘들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위태롭게 확보한 자신의 목숨줄을, 그 줄을 함께 잡자고 하는 해고 동료들 때문에 놓치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동료들을 적으로 돌려세우는 것도 무리는 아닐지 모른다. 남이 죽고 내가 사는 생존 싸움의 정글에서 나눔이란 애초에 없는 것이다.
 
컨테이너 등 농성장 곳곳에 휘갈겨진, 가족을 그리워하는 낙서는 농성자들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다. “여보, 미안해.” 남편들은 위장이 오그라들고 목이 타들어가는 자신을 보고도 물 한 모금 넣어줄 수 없었던 아내에게 오히려 미안해한다. 가정의 경제력이 한 몸에 집중된, 누군가의 남편이거나 아버지인 장년 이상의 정규직 남성 노동자들은 자신의 한 몸을 위해서 싸우지 않았다. 정리해고가 제 입에 거미줄 치는 것으로 끝날 일이라면, 테러범 잡는 무기를 사용하고 발암 최루 분말을 비 내리듯 퍼부어주는 대접을 해주는 자들에 대한 절망감을 감내해가며 버텨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회사가 무너지거나 자신이 잘려도 항변할 힘이 없는 무력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지에서는, 목숨 걸고 싸울 수 있는 대기업 노동자들은 차라리 부러울 수도 있는 존재이다. 2007년 포항 포스코 본사를 점거 농성하다 끝내 제 발로 내려온 비정규직 남성 건설노동자들에게는 그나마 밥을 건네주려고 울부짖던 아내들이 있었지만,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의 운동은 가족들의 응원을 받지 못한다. 농성장의 여성 노동자들은 현장에 들이닥친 남편이나 시부모의 손에 끌려가기 일쑤다.
 
그녀들은 한 가정의 핵심적인 경제 주체가 아니며, 가족의 생계를 온전히 책임질 수 없는 비정규직 중의 비정규직인 여성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시부모나 남편이 원한 건 돈을 잘 벌지 못하는 직장에 굳이 다니려는 며느리나 아내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돈을 잘 버는 아들이나 자신에게 앞치마 두르고 돌봄 노동을 해줄 사람이었다.
 
경제 활동이 남자에게 쏠려 있고 여성 노동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는 사회는 직장을 잃게 되는 아버지와 남편을 목숨 걸고 싸우는 투사로 변모시킬 수밖에 없다. 용산 참사 당시 불구덩이가 될 망루를 올라갔던 아버지와 남편들도 땅 위에서는 평범한 서민 가장이었다.
 
자신이 아니면 가족 중에 돈 벌 사람이 없다는 절박감이 누군가를 투사로도, 누군가를 동료의 희생 덕분에 자리를 보전하고도 철면피 야수로도 만드는 현실은, 남자보다 적게 일하지 않는데도 절반 이하의 임금밖에 받지 못하는 여성 노동자의 현실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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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8/18 [11:55]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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