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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의 힘; 남성들아, 시장 바구니를 들어라
[정문순 칼럼] 시민적 연대의식 보태진다면 촛불은 한단계 더 도약한다
 
정문순   기사입력  2008/07/09 [12:57]
큰맘 먹고 유기농 물품 매장에 들렀더니 한 봉지에 7500원 하던 실팍한 국산 땅콩이 11,000원으로 껑충 뛰어 있었다. 중국산이라면 3000원이나 할까. 생산량이 많지 않은 친환경 농산물은 산지 작황 상태에 따라 가격이 춤을 추는 경우가 흔하다. 빈손으로 나오기 민망해 주인 눈치를 살피며 도망치듯 나와서 집 근처 슈퍼마켓으로 향했지만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매장을 아무리 뒤지다시피 해봐도 인공첨가물이 끼어 들지 않은 가공식품을 찾을 수 없어 한숨만 나왔다. 아이를 굶길지언정 해로운 걸 먹일 수 없다는 결심이 서면서 여기서도 빈 손으로 나오려고 했으나 작심은 얼마 가지 않았다. 더운 날씨에 아이스크림 찾는 아이가 떠올라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다짐하며 빙과류가 쌓인 냉동고로 걸음을 옮겼다.
 
식품 구입으로 적잖은 시간을 매장 안에서 ‘고뇌’하는 것이 피곤하고 불편한 일상의 하나이지만, 여성들에게 그 경험이 축적되지 않았다면 그들이 촛불 집회 현장을 유모차와 함께 누비고, 때로는 유모차로써 경찰의 살수차를 막아서기도 하고, 시민단체가 십 년 넘게 땀을 쏟아 부어도 좀체 성과를 얻을 수 없었다던 조·중·동 반대 운동을 활짝 꽃 피우게 하는 결실은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여성들에게 조·중·동 거부는 거창한 언론개혁운동 차원에서 소화된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소비 활동의 주체인 자신의 처지와 연관되어 있다. 여성으로서는 가족에게 건강한 음식을 먹이고 싶은 욕구를 부정하라고 요구하는 세력은 자신의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는 자들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녀들이 기업들에게 조·중·동에 광고를 넣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 역시 정당한 소비 활동을 보장받기 위한 행동이다. 그러기에 요리 사이트인 <82쿡닷컴>에서 조선일보를 성토하는 글과, 외국에 나갈 기회가 생겼는데 루이뷔똥 가방을 어디서 사면 좋겠냐고 질문하는 글이 한 공간에 나란히 있는 것은 어색한 일이 아니다. 명품을 구매하기 위해 사전에 정보를 알아보는 것 역시 조·중·동에 광고 싣는 기업 제품을 사지 않는 것과 다름없는 합리적인 소비 활동일 것이다.
 
아무리 봐도 광우병 위험 소의 수입을 단념하지 않는 정부의 태도는 내 새끼, 내 가족에게 나쁜 것 먹이고 싶지 않는 여성들의 소박하고도 당연한 생각에 도전하는 것이라 단박에 결판이 나지 않더라도 이미 승패가 판가름 난 싸움에 집착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무지하기로서니 이런 무모한 싸움을 벌이는 정권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딱하고 한심스러울 지경이지만, 이 정권이 기반하고 있는 지지 세력이나 정권의 반여성적 성격을 알면 납득이 안 가는 건 아니다. 
 
▲     © 대자보

가끔 친정에서 딸에게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보내오는 음식을 펼쳐 보며 난감할 때가 많다. 어머니가 한 요리 중 지지거나 볶은 음식들은 ‘식용유’라 불리는 트랜스지방산의 대표격인 정제 콩기름으로 조리한 것들이다. 더욱이 미국산 콩은 유전자 변형이 의심스럽기도 하다. 아무리 어머니 손맛이 배어 있는 추억의 고향 맛이라 하더라도 트랜스지방산 어쩌고 하는 것의 해악을 아는 한 선뜻 입에 댈 수가 없었다. 정보 깨나 안다는 젊은 주부들이 화학적으로 정제하지 않은 압착식 올리브 기름이나 포도씨 기름에 열광하는 동안, 식품에 대한 정보가 수십 년 전에 머물러 있는 노인은 트랜스지방산이 무엇인지, 그것이 왜 나쁜지 알지 못해 여전히 친정 부엌에는 오래 전부터 써오던 기름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 인색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집착하기 쉬운 구세대를 지지 기반으로 삼고, 식품 구입에서 조리에 이르는 과정까지 여성들이 일상에서 몸으로 느끼는 ‘고뇌’를 배려할 줄 모르는 반여성적인 정부라면 광우병 위험 쇠고기에 빗장을 푼 조처가 가져올 파란을 미처 예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들 과자에 당연한 것처럼 들어가는 합성첨가물조차 거부하며 몇 시간씩 슈퍼마켓을 헤매는 여성들에게 광우병에 대한 의심이 풀리지 않는 쇠고기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막아야 하는 치명적 흉물이라는 것도 모를 정도로 이 정부의 여성적 감수성은 낙제점이다. 이는 여성이 소비와 재생산 활동을 통해 기른 학습 능력과 감수성을 철저히 무시한 결과다.
 
여성들을 촛불집회와 언론개혁 운동의 주체로 세울 수 있는 힘은 역설적이게도 여성에게 재생산과 소비 활동의 역할을 전적으로 부여하는 성별 분리 체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지식인 남성이 버터와 치즈 성분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걸 보고 놀란 적이 있다. 가게에서 아이 먹일 유제품을 고르며 포장지에 쓰인 깨알 같은 글씨에서 몸에 안 좋은 물질이 들어 있나 없나 따지는 일을 해본 적이 없는 남성이라면 광우병 문제에서도 여성만큼의 심각성을 몸으로 느끼기는 어려울 것이다. 최근 쇠고기 추가협상에 대한 만족도를 묻는 여론조사에서도 광우병 위험에 대한 인식 정도나, 정부의 협상에 대한 불신이 남성보다 여성에게서 훨씬 더 높게 나왔다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촛불의 원동력이 된 이 위대한 소비 활동을 여성에게만 맡겨놓을 일은 아니라고 본다. 남성이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을 오래도록 서성이는 소비 노동을 감당하지 않고 생산의 주체에만 머물러 있는 한 자신과 가족의 입에 들어가는 쇠고기의 안전성에 대한 감수성은 무딜 수밖에 없다. 가정 경제에서 재생산과 소비 주체의 역할을 남성과 여성이 함께 나누었다면 촛불집회의 힘은 지금보다 더욱 커졌을 것이다.
 
누구나 내 새끼, 내 가족의 건강을 걱정하기에 촛불의 힘은 폭발적으로 불 붙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내 가족을 챙기는 마음에 머무르는 한 촛불의 한계 또한 명백하다. 얼마 전 미국산 쇠고기 운송 작업 거부를 밝힌 화물연대의 생존권 파업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는, 수년 전 화물연대가 부르짖은 똑같은 요구에는 비난 일색이었던 험악한 여론을 씁쓸하게 떠올리게 한다. 쌀 개방 협상 당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쌀 농사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던 농민들에게 동의하지 못했던 도시민들의 정서를 생각하면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완강하게 반대하는 오늘의 촛불 역시 냉정하게 돌아보게 만든다. 쇠고기든 쌀이든 식량주권을 내놓는 순간 자신과 가족의 입에 탐욕스런 미국 축산 자본이 낳은 병든 쇠고기가 들어오고, 곡물 메이저 기업들의 농간으로 인해 황금을 주고도 쌀을 살 수 없는 처지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지금까지 촛불은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을 따지는 소비자와, 검역주권 문제를 염려하는 주권국가 국민의 처지를 주로 대변해왔다. 내 새끼 내 가족의 건강에 집착하는 가족 중심적 감수성에서 약자와의 연대에 대한 시민적 감수성으로의 전화가 촛불에 주어진 새로운 과제가 되기를 기대한다.
 
광우병이 묻어 있지 모를 쇠고기를 울며 겨자 먹기로 섭취해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촛불에도 연대해야 하고, 소 사육을 포기할 지경에 내몰린 축산 농민들에게도 손을 내밀어야 하는 등 촛불이 할 일은 많다. 이미 화물연대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과 반하는 미국산 쇠고기 운송 작업 거부를 천명함으로써 연대를 실천하고 있다.  촛불은 여전히 지금보다 도약, 진화, 승화할 수 있는 기회가 무한히 주어져 있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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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7/09 [12:5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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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객 2008/07/10 [09:30] 수정 | 삭제
  •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좋은 글 자주 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