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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촛불소녀'들이 이룩한 혁명
[정문순 칼럼] 미친 입시제도의 피해자에서 세상을 바꾸는 선구자로
 
정문순   기사입력  2008/06/23 [14:45]
<美 여고생들 ‘단체 임신’ 충격…한 학교서 17명 임신>. <"심심해서"..10대 4명 화염병 던져 마트 방화> 최근 신문에서 눈에 띄는 대로 건져본 청소년 관련 기사들이다. 언론에 보도되는 10대 청소년들은 동서를 막론하고 한심한 사고뭉치들뿐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철없는 짓을 보며 훈육과 계도가 마땅하는 생각에 확신을 굳힌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욕망이 담긴 프로그램대로 작동돼야 하며, 그들의 불만에 귀 기울일 필요는 없다.
 
입시지옥에 내던져진 아이들을 꺼내주기는커녕 불구덩이에 몰아놓은 이 정부는 아이들이 밟혀도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할 줄 알았다. 아침밥도 못 먹게 하고 학교에 불러 꼭두새벽까지 잡아 놓아도 “다 너희들 잘 되라고 그러는 거야” 한마디면 아무 소리도 못할 거라고 믿었다. 이들이 가장 먼저 촛불을 쥐고 광장에 뛰쳐나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촛불 민심의 포문을 열리라고 예상한 사람들은 누구도 없었다.
 
10대들이 말을 만들어내는 솜씨를 보면 그 혜안에 감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난마와도 같은 사회 문제를 하나의 구호로써 단순화해내는 능력은 문제의 핵심을 꿰뚫어보고 있다는 증거다. ‘교육자율화’, ‘0교시 수업’, ‘심야자율학습’ 등 교육 당국의 이상한 교육 용어는 시사 프로그램에서 어른들의 갑론을박 토론거리 정도는 될 수 있다. 그러나 10대들에게 교육자율화 운운은 아침밥도 안 먹이고 잠도 안 재우는 야비한 인권침해일 뿐 토론할 감조차 되지 못했다. “밥 좀 먹자.” “잠 좀 자자.”라는 구호만큼 교육자율화의 본질에 정확히 과녁을 맞춘 것은 없다.
 
지혜로운 자는 용감하다. 10대들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가 국민주권에 역행하는 것임을 직시했고 당당하게 불복종을 선언했다. 이 나라 대통령이 자신이 섬기겠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공언한 자국민을 광우병의 공포에 그대로 노출시키려는 기만적 행동에 어른들이 충격에 빠져있는 동안 망설일 틈도 없이 “미친 소, 너나 먹어”하며 이명박 정부에게 당돌하게 공격의 포문을 연 것도 10대들이다.
 
미국산 소와 교육 문제의 공통된 본질을 ‘미쳤다’는 언명으로 정리해낸 것도 10대의 탁월한 능력이었다. 10대들은 쇠고기와 교육이 대표하는 이명박 정부 정책 전반에 대한 단호한 평가를 가장 먼저 내렸다. 미친 교육의 가장 큰 피해자인 10대들은 미친 쇠고기의 수입이 가져올 여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먹고 자는 기본권 권리를 빼앗긴 10대들은 쇠고기 문제 역시 국민 기본권의 박탈임을 모를 수 없었다.
 
10대들이 촛불을 맨 처음 움켜쥔 것은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에 가장 많은 고통을 당한 이들이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중 여학생이 압도적이라는 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입시 지옥에 여학생들만 내던져진 건 아닐 것이다. 더욱이 연예인의 ‘오빠부대’를 이루며 허상만 좇을 것 같고, 자기 삶과 직결된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이 없어 국무총리 이름도 모를 것 같고, 명품 브랜드에 열 올리고 그 나이에 벌써 다이어트와 몸매 관리에만 빠져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어른들에게 그녀들이 촛불 민심의 선두 주자라는 사실은 이명박 정부의 일련의 미친 정책을 대하는 황당함 만큼이나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광화문 사거리에 앉아 시위를 벌이고 있는 10대 여학생들, 이들의 깜찍한 구호가 이채롭다.   ©김철관
 
소녀들의 반란을 읽어내려면 이명박식 교육이 성별 구분 없이 모든 10대들을 똑같은 피해자로 만들지는 않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경쟁과 승자독식 논리가 체질화된 남성 중심사회에서 무간지옥의 입시 정책을 대하는 체감도는 남학생과 여학생이 같다고 볼 수 없다. 살인적인 경쟁을 부추기는 교육 정책은, 세상은 원래 살벌한 정글이라고 믿고 있으며 그런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이 남자다움이라고 끊임없이 주위 어른들로부터 주입받고 있는 남학생들로부터는, 그들보다는 경쟁 논리에 익숙하지 못한 여학생들만큼의 거부반응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있다. 광장에 맨 먼저 몰려나온 소녀들의 존재는, 이명박 정부 교육 정책이 강남과 지방의 학생들 못지 않은 격차를 성별에도 작용하게 만듦으로써 성별 위계의 강화를 낳을 수 있음을 놓치지 못하게 한다.
 
깜찍하면서도 단호한 ‘촛불소녀’ 아이콘이 표상하는 소녀들에게서 나는 시대의 가장 억압받는 소외자이자 풀잎 같은 연약한 존재들의 본성을 이제야 읽는다. 시인 김수영은 생전에 4월 혁명의 기운이 몰락하는 것을 보았지만 절망으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는 혁명의 거대한 분출이 허무하게 사라지지 않고 기어코 억압의 바람을 능가할 것임을 유작시 <풀>에서 예언하고 죽었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누웠지만 그건 패배와 굴복이 아니었다. 풀은 세상과의 예민한 감응력을 결코 놓지 않았다. 풀이 드러눕는 건 다시 일어날 에너지를 비축함이었다. 울고 눕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혁명의 에너지를 흡입했다.
 
촛불소녀들은 성차별적인 무한지옥의 입시 경쟁에 질식을 강요당했지만 고통이 자신을 마냥 갉아먹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고통과 분노는 소진되지 않고 힘으로 비축되었다. 소녀들은 자신들의 분노를 시대의 고통인 ‘미친 소’ 문제와 접목시킴으로써 분노의 에너지를 촛불로 점화하고 광장으로 달려 나왔다. 풀의 역동적 에너지는 거칠 것이 없었다. 시내에 놀러 나온 소녀들은 가두 시위 대열 속에 있는 친구들을 보자 자연스럽게 합류하고 “이명박 물러가라”를 입을 모아 외친다.
 
풀은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풀은 자신을 말려죽일 듯한 바람의 위력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더 이상 바람의 힘은 풀을 조율하지도, 움직임을 좌지우지할 수도 없었다. 오직 풀의 움직임에 이끌려 수동적으로 반향할 뿐이었다. 광장의 촛불 정치에 압도당한 이명박 정치는 무력했다. 풀처럼 하찮게 취급당한 10대들의 촛불은 바람을 제압하고 광장의 노도를 이끌어냈다. 작고 가냘픈 손에 들린 촛불들의 힘은 기어이 바람을 드러눕게 하는 태풍으로 번지고 말 것이다.
 
삶의 에너지를 물욕과 부동산에 낭비하여 자신의 집값을 올려줄 것 같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은 어른들과 달리, 분노의 힘을 촛불로 승화시킨 소녀들에게 아직 놓칠 수 없는 세상의 소중한 희망을 발견한다. 촛불이 시민혁명의 반열에 오른다면 그 공은 오로지 10대 소녀들의 몫이라 해도 좋으리라.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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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6/23 [14:45]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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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2008/06/28 [21:39] 수정 | 삭제
  • 그 공은 오로지 10대 소녀들의 몫이란말대신 가장 많은 몫은 10대 소녀들이라고 고쳤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나그네의 충고는 안 들으셔도 됩니다.
  • 나그네 2008/06/25 [23:08] 수정 | 삭제
  • 여기도 빨갱이 끄나풀이 느러저 있구나?.

    나야 내게 주어진 명대로 나그네의 삶을 살다가 가겠으나,

    자네는 자네의 말한 그 말로 나그네의 삶도 못되고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구차한 목숨을 연명 하는구나.

    천사와 씨름하여 이긴 야곱도 나그네의 삶이라 하였거늘
    죽지못해 구차하게 연명하는 자네의 목숨은 무엇이라 하는고?.....
  • 나그네 에게 2008/06/24 [20:48] 수정 | 삭제
  • 야, 정신 좀 채려야겠다. 못차리겠으면,
    정신과 의사에게 가서 약이라도 사먹어라.
    그것도 않되면 죽어야지. 그런데 죽기도 어렵겠지?

  • 나그네 2008/06/23 [23:17] 수정 | 삭제

  • 철없는 애들 부추겨서 길거리로 내몰아 투쟁을 일삼는 짓들이
    전형적인 빨갱이들이 하는짓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수 있는가?

    빨치산 후손들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철면피 같은 자들이
    한국 땅에는 너무 많은데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루속히 색출해서 김정일에게 담아 보내서 그곳에서 쌀밥과
    소고기국 그리워하며 자자 손손이 충성하며 살도록 보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