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에서 시청 건너편 일대는 시내 번화가로서 각종 집회와 행사가 단골로 열리는 곳이다. 평소에도 인파와 차량이 내는 소음으로 시끌시끌한 곳에 촛불집회가 열린 6월 첫날 저녁, 현장에서 2백 미터 가량 떨어진 벤치마다 경찰들이 촘촘히 앉아 있는 것만 빼면 멀리서는 집회 분위기가 별로 감지되지 않았다. 거리에 울려 퍼지고 있던 대중가요 노랫소리는 가까이 가기 전에는 집회에서 흘러나오는 건지 몰랐다. 참가자 중 한 사람이 촛불이 조용히 타오르는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서정적인 가요를 불렀던 모양이다.
자유 발언이 이어지고, 초등학생 아이가 부모에게서 배웠는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또랑또랑한 발음으로 불러 큰 박수를 받았다. 배고프고 목마른 이들을 위해 김밥과 삶은 계란, 생수도 돌아다녔다. 운동가요와 구호, 김밥을 접하니 누군가는 20년 전 학생 시절이 떠오른다고 했다. 20, 30대는 거의 알지 못하는 노래가 등장하니 사회자도 옛날 생각이 났는지 '훌라송'을 합창하자고 했다.
생각해보니 자유발언만큼은 옛날 집회의 모습이 아니었다. 조직적인 지도부가 행사 내용 전체를 장악하던 당시에 일반 참여자가 단상에 올라 마이크를 잡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어린아이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색깔의 시민들이 무대에 올라 발언하고 노래하고 춤추게 되면서 집회문화는 바람에 일렁이는 촛불처럼 역동적이고 발랄해졌다.
집회가 끝나고 촛불 대열은 인도로 이동했다. 행진이 시작될 때까지만 해도 바쁘게 움직인 사람들은 몇 시간째 벤치를 지키고 있던 교통경찰들뿐이었다. 그러다 시청 광장 주변을 돌 무렵 민주노총이 이끄는 대열 일부가 방향을 꺾어 도로로 나가려고 하자 어디에 대기하고 있었는지 전투경찰이 새까맣게 몰려나와 막으면서 한동안 긴장이 감돌았고, 인도 주변의 시위대 일부는 '비폭력'을 외치며 도로 행진을 말렸다. 그것 말고는 평온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틀 뒤인 3일은 시위대가 두 개의 차선을 확보하고 가두시위를 벌일 수 있었다. 가족 단위의 참가자도 많았다. 아이엄마는 잠 든 아이를 두 팔로 안고 걸었고, 장애인 엄마와 어린동생이 함께 탄 휠체어를 남자아이가 밀며 어른들의 구호를 따라 했다. 시청 광장에서부터 노래방과 룸살롱, 고기 냄새 풍기는 요릿집이 밀집한 유흥가까지 시위대의 구호가 이어졌고, 경찰은 교통을 정리하느라 분주했다. 가까운 거리의 시위대에게 쏘아대는 물대포와 분말소화기, 중상자가 속출한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에다 경찰특공대까지 등장하는 서울은 여기와는 딴 세상처럼 보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집회 현장에서 태극기가 등장하거나 애국가가 불리기 시작한 건 전국 공통인 듯하다. 창원에서는 행사 마무리를 꼭 애국가 합창으로 장식한다. 나는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부르는 순간 집회 참여자의 위상이 민주적 시민에서 애국하는 국민으로 바뀌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든다. 태극기나 애국가의 등장은 모든 시민을 대한민국인이라는 단일한 이름으로 부름으로써 미국산 쇠고기 문제에 대해 강한 호소력을 낳을 수 있을지 모른다. 태극기가 표상하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적 정체성은 한국을 못살게 구는 미국과의 대립적 관계를 자연히 설정하게 된다.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 문제를 한국과 미국과의 국가적 대립으로 설정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가 충족돼야 할 것이다. 미국의 축산업자들이 '애국심'이 투철하여 자국민에게는 좋은 고기를 먹일지언정 건강에 치명적인 쇠고기를 먹이는 걸 단념하고 다른 나라에 팔아먹는 데 골몰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미국 행정부에 대해서는 이들이 자국민의 건강보다 축산업계의 이익을 보장하는 데 치우쳐 있다고 말해서는 안되며 국민과 축산업 공동의 이익을 위한다고 말해야 한다. 그리하여 자국민에게만큼은 나쁜 고기를 먹이지 않으려는 축산업계와 정부의 배려로 미국에서는 광우병 환자가 한 명도 나오지 말아야 한다. 상식적으로 봐도 이런 전제들은 엉터리다.
채식운동가 존 로빈스가 쓴 <음식혁명>은 동물 사육에서 도축에 이르기까지 소비자의 건강과 안전을 철저히 도외시한 미국 육류업계의 실태를 알리고 있다. 책에 따르면 미국 축산업자들은 뇌 질병으로 도살된 동물은 사료로 쓸 수 없다고 된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도 않을 뿐아니라, 당국 또한 도축된 소 75,000마리 당 1마리 꼴로 광우병을 검사하는 등 미국의 광우병 관리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이것의 직접적이고도 가장 큰 피해자는 자국민에게 돌아갈 것이다. 미국에서 알츠하이머병으로 진단을 받은 사람은 400여만 명 안팎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병으로 사망한 사람들 중 연구기관에 따라 적게는 5.5%, 많게는 13%가 실은 인간 광우병 환자라고 보고되었다. 사정이 이런데도 미국 육류업계는 광우병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에도 광우병으로 고통받거나 희생된 사람들이 엄연히 있고 광우병에 대한 불안 때문에 육류 먹기를 꺼리는 사람들이 있다면, 광우병 위험 쇠고기에 무방비로 놓여 있는 미국인들은 육류업자와 그들을 대변하는 미국 정부의 부실한 검역 절차를 거쳐 한국에 들어올 쇠고기를 먹을 처지에 놓인 한국인들과 비슷한 것이다. 업자들은 30개월령 이상의 쇠고기가 자기 나라 안에서 안 팔리니 자국의 축산물 생산과 검역 실태에 대해 상대적으로 정보가 어둡고, 다루기 만만한 나라에서 판로를 찾은 것일 뿐이다. 그러니 광우병 문제를 한국 대 미국의 국가적 대결로 상정함으로써 우리와 동병상련의 처지에 있는 미국인 소비자들을 미국이라는 이름 안에 한 묶음으로 넣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태극기를 휘날리고 애국가를 부를 때는 아니다. 지금이야말로 나라의 경계를 넘어 같은 처지의 사람들끼리 연대와 협력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