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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민족보다 인간에 대한 연민 넓혀주다
[정문순 칼럼] 민족공동체의 운명보다 개별 인물들의 약동하는 삶 그려
 
정문순   기사입력  2008/05/13 [11:23]
<토지>와 밥상머리 유년의 추억
 
오래도록 책장 안에 묵혀 두었던 <토지>를 다시 꺼내 든 건 작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접한 뒤였다. 지금도 하동 평사리 드넓은 들판에는 농민들이 목에 수건을 두른 채 땀을 쏟고 있고 최참판댁 솟을대문은 안개 속에 우람한 위용을 과시할 것 같은데, 작가는 <토지>에 손에 잡힐 듯 살아 있는 호흡을 부여하고 자신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토지>를 생각하면 내 머릿속에는 어린 날 흑백텔레비전 연속극으로 옮겨진 한 장면이 떠오른다. 최참판댁 당주 최치수의 피살로 한바탕 난리가 난 대목이었다. 범인 중 한 사람은 놀랍게도 댕기머리 휘날리고 다니던 어린 하녀인 귀녀(貴女)였다. 하인이 주인을 죽이다니. 더욱이 내겐 최치수의 죽음보다 그 배역을 배우 백윤식이 맡았다는 사실이 더 뜻밖이었다. 당시 숱한 반공 전쟁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하여 포화 속에 혼자 살아남으며 맹활약 중이던 그였다. 여기서도 주인공이겠거니 했는데 실망스럽게도 초장에 죽어나간 것이다. 그런 이야기거리를 밥상머리에서 가족과 나누던 기억이 희미하게 난다.
 
어른이 되어 <토지>를 활자로 만났을 때 평사리 주민들의 대화에서 나는 어릴 때 알 듯 모를 듯 무심히 흘려들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향 언어가 떠올랐다. <토지>에서는 영남뿐만 아니라 호남에서 함경북도까지 팔도의 지역 언어가 메아리치지만 내가 유독 평사리 마을 사람들이 등장하는 대목을 좋아하는 건, 밥상머리에서 듣던 부모님의 언어가 불러오는 유년의 추억 때문일 것이다. 물론 작가의 태생이 경상도 방언을 능란하게 할 수밖에 없는 처지 덕분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연로한 부모님 세대마저 예전만큼 잘 쓰지 않는 경상도 남쪽 끝자락의 토속어를 내 기억의 갈피에서 끄집어내어 문학적 향기를 입혀준 것은 <토지>밖에 없다. 자신의 뿌리인 언어에 대한 집착은 나뿐만이 아니어서 어떤 이는 외국에 나갈 때면 <김약국의 딸들>을 꼭 챙긴다고 한다. 낯선 말들만 있는 이국 땅에서 박경리 문학의 토속 언어는 서구화된 음식 속에서 발견하는 어린 시절 토장국 내음과도 같을 것이다.
 
지주를 위해 싸우는 소작농들
 
연재 시작 이후 작가의 손끝을 떠나기까지 걸린 기간이 25년, 그리고 강산이 네 번 바뀌는 세월 동안 세 번의 드라마와 한 번의 영화로 만들어진 <토지>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든 스쳐가는 인연도 없기란 힘들 것이다. <토지>를 설명하는 데 흔히 붙는 문구 또한 여느 한국인이라면 저항감 없이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민족’이나 ‘한’(恨)이다. 물론 <토지>는 민족주의 정서가 작품의 전편을 휘감는 주조를 이루고 있음은 부인하기 힘들고, 이것이 방대한 분량의 쉽지 않은 작품임에도 수많은 독자의 열광을 낳게 한 대중성과도 무관하지 않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토지>의 시간 배경은 일제의 침탈이 본격화한 구한말(1897년 한가위)부터 8.15해방을 맞는 날까지며, 모든 인물들의 인생 역정은 식민 통치라는 시대적 규정을 벗어나서 설명할 수 없다. 남편 길상의 수감과 둘째 아들의 징병으로 숨막히는 나날을 견디고 있던 서희는 해방 소식을 듣는 순간 “자신을 휘감은 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식민 억압의 해소가 곧 이 장대한 서사의 종결점이요, 민족모순의 쇠사슬이 끊어지느냐 여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으므로 당대의 다른 억압은 부차적으로 다루어지게 된다.
 
작품 초반, 최치수가 해외에서의 의병 운동 계획을 나타내는 개화 양반인 친구 이동진에게 그것이 ‘군왕’과 ‘백성’ 중 누구를 위한 행동이냐고 물었을 때, 이동진의 대답은 ‘군왕’도 ‘백성’도 아닌 ‘산천’을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물론 ‘산천’은 민족 공동체가 뿌리 내린 이 땅의 터전을 말할 것이다. 근왕주의의 해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개명 양반 이동진의 처지로서는 국왕과 백성, 어느 쪽에 기울어지기보다는 일제의 침탈을 이 나라 사람 모두에 대한 동등한 억압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쉬울 것이다. 이는 국왕과 백성 가리지 않고 상하 모두를 아우르는 민족의 자리에 있는 작가의 지향점을 드러낸 것이라고 말해지지만, 그만큼 ‘산천’ 안의 다른 모순을 소홀히 하는 작가 의식을 드러내주는 것이기도 하다. “조선인 모두, 뭐니 해도 우리의 설 땅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땅이 없다고 느끼는 정도가 지주와 소작인에게 똑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토지>에서 양반이든 백성이든 지주든 소작인이든 일제 침략 앞에서는 똑같은 중량의 피해자로 인식되며, 피억압자로서 민중에 대한 작가의 인식은 불철저하다. 박경리에게 ‘갑오농민전쟁’은 1970년대 당시 국학 연구의 한계에 영향을 입은 탓도 있지만 조선 봉건체제에 수탈 받는 농민이 위주가 아닌 동학교도들이 중심이 된 운동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그나마 작품 전면에 돌출하지도 않는다. 또 친일파 조준구에게 땅을 빼앗기고 간도로 이주하여 독립운동가들의 지원으로 강탈당한 재산을 되찾아 돌아오는 만석꾼 지주 서희의 행로는 일제 수탈과 항일의 차원인 양 그려지며, 최참판댁 소작인들 또한 땅 주인이 조준구에게 넘어가자 그에게 저항하고 의병 조직과 연계함으로써 마치 소작농이 옛 지주를 지키는 일이 독립운동인 것처럼 돼버린다.
 
조준구의 공동 피해자가 된 서희와 작인들이 간도로 함께 떠났다 귀환하여 고향에 안착하는 것은 식민지 수탈과 그에 대한 저항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수탈 이전 평화로운 삶의 터전 회복이라는 의미를 부여받는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지주와 소작농과의 대립이 조금도 없다는 것이 전제가 돼야 한다. 과연 서희의 할머니 윤씨 부인은 “근동 어느 지주보다 관대하여 농토와 농민과 최참판댁 사이의 순환은 아주 순조로웠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계급이나 민족 내부 문제의 불철저한 인식 때문에 <토지>는 한국 대하소설 계보에서 <임꺽정>과 <장길산> 등 민중소설이 거둔 성가에 견주어 폄하될 수밖에 없었다.
 
<토지>가 보인 민족에 대한 집착은 작인에게 친절한 지주가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마저 놓칠 정도로 허술할 뿐 아니라, 민족모순의 형상화 자체도 미숙한 편이다. 자료의 한계상 불가피했겠지만, 국내외에서 전개되는 다양한 항일운동은 작품에 돌출하는 일이 드물고 대부분 인물들의 입을 통한 김 빠진 뒷담화 형태나 서술자의 요약, 정리를 통해 전달된다.
 
인물의 성격 형상화 측면에서도, 소설 초반부에서 작가가 공 들여 집중하고 있는 김환이란 신비적 인물은 작가의 의욕과 달리 민족모순과 개인사적 고통을 거칠게 봉합해놓은 면모가 강하다. 처형 당한 동학 교주의 아들 김환은 항일 조직의 지도자라는 외양을 띠고 있으나, 친모 윤씨부인에게서 버림 받은 혼외출생자라는 태생의 약점이 빚은 한과 허무에 잠식당하는 그의 내면은 엄정한 자기 단련과 투철한 현식 인식이 요구되는 독립운동가의 전형적 자질과 어울린다고 할 수 없다. 항일 운동에 왜 투신했는지 알 수 없는 인물을 운동가로 내세운 탓에 외세의 수탈과 억압 문제가 제대로 드러날 수 없는 것이다.
 
대하 속에 숨은 지류들;  생명 본연의 자유로움
 
그러나 텍스트는 담론을 낳는 순간 자신을 배반하는 이면적 담론을 낳기도 한다. 장편소설이 한 인간의 총체적 형상화라면, 대하소설은 개인들이 이룬 한 집단의 총체적 운명을 다룬다. 그 범위가 넓어질수록 텍스트는 단일한 담론의 틀에 맞춰 풀이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진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욱 풍부하고 다양한 흐름이 이면에 숨어 있음을 알 때, 우리는 <토지>의 대하를 구성하는 수많은 지류와 줄기를 파악할 수 있다.
 
민족주의 담론이 노정하기 쉬운 가해와 피해, 침략과 수탈이라는 대립적 구도에서는 인물이 어느 한쪽에 편입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친일파에게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친일 행각도 서슴지 않는 서희는 일제에 동조하는 가해자인가 아니면 피해자인가. 거대담론의 틀을 깨는 순간 최서희는 악인도 선인도 아니며, 민족주의자도 반민족주의자도 아니다.
 
최참판댁은 선대부터 여성의 힘으로 일궈온 가계사가 있다. 남자들은 요절했거나 무력했다. 거기에다 윤씨 부인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혼외 자식 김환을 낳고, 며느리이자 서희의 어머니 별당아씨는 최참판댁의 핏줄임에도 배척당한 김환과 야반도주함으로써 남성 가부장제의 여성 착취적 순혈 구도를 조롱하고 깨뜨린다. 그나마 윤씨 부인은 혼외 자식을 집으로 데려오지 않았고 별당아씨는 스스로 최참판댁에서 나갔지만, 서희는 아예 집안 하인 출신인 길상과의 결혼을 통해 명문가의 ‘깨끗한’ 피를 ‘오염’시켰으며,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길상을 보호하기 위해) 두 아들에게 어릴 때만이나마 자신의 성을 물려주는 모계 대물림을 실행한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보이는 서희의 태도는 봉건주의의 몰락과 식민화라는 두 겹의 상황에 직면한 한 여성의 치열한 응전과 분투인 셈이다. 아쉬운 것은 서희의 이러한 역할은 고향으로의 귀환까지이며, 그 이후 부자로 평범하게 사는 그녀의 모습은 서사에서 별다른 의미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고 보니 민족-반민족의 구도에 강박되지 않을 때 남는 것은 작품 도처에서 튀어나오는 개별적인 수많은 인물들의 현란한 형상이다. 거기에는 죽어 마땅한 악인도 없다. 조준구는 구제할 길 없는 악당의 전형으로 나오지만 봉건제도의 숨이 다할 무렵 몰락 양반의 비루한 처지를 그만큼 극적으로 드러낸 인물은 없을 것이다. 뻔뻔스럽고 악랄함에서 조준구와 막상막하인 임이네 역시 따지고 보면 그녀의 비정상적인 성정은 살인 죄인으로 몰려 죽은 자의 아내로서 여자 혼자 몸으로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세상을 살 수 없는 절박한 처지에서 나온 방어벽일 수 있다.
 
<토지>에서 비치는 것 같은 한이나 운명은 인간이든 집단이든 타고나거나 어찌할 수 없이 주어진 소극적인 것이 아니다. 인물들이 사회적 억압에 짓눌리거나 왜곡될수록 두드러지는 것은, “인간을 묶은 보이지 않는 속박” 없이 자유로운 본성을 누려야 할 인간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다. 삶의 이러저러한 구속에 “죽어도 얽매이고 싶지 않은” 강포수와, 산속에서 바람과 햇빛이 키웠다는 천애고아 출신의 몽치는 작가의 이상이 투영된 도가적 인물들이다. 사상가로서 박경리가 생명주의나 생태주의에 천착한 것도 제도나 관습의 틀에 일그러지지 않는 인간의 원형적 순수함과 자율성에 대한 희구에서 기인할 것이다.
 
국권 상실, 신분제, 출생의 약점 등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억압에 침해당하기 쉬운 개별적인 생명에 대한 작가의 안쓰러움은, 작품이 전면에 내세운 민족주의 담화의 집단주의적 성격과 충돌하는 듯한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작가는 말년에 민족주의도 배타적인 이념일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개인이 민족이라는 집단 공동체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임을 말하면서도, 집단의 의지에 속박되지 않는 자율적인 존재를 모색한다는 점에서 <토지>는 민족주의의 한계와 극복 가능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텍스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게 <토지>는 하나로 묶여 움직이는 민족 공동체의 운명이 아니라 개별 인물들의 약동하는 삶을 통해 인간에 대한 연민과 이해를 돕는 책으로서 가치가 있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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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5/13 [11:2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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