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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적인 대선 정치판, 여성은 없다
[정문순 칼럼] 여성의 정치적 소외와 남성정치 과잉, 한국 정치의 과제
 
정문순   기사입력  2007/12/17 [08:09]
대선 정치판의 여성 소외
 
흔히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과분한 찬사를 받고 있지만, 정치의 맨 얼굴을 숨김 없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차라리 정치의 꽃이라는 말이 더 적합할 것이다. 후보들은 모든 유권자들을 다 행복하게 해주겠노라고 약속하지만, 이는 그들이 특정한 정치 세력을 대변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기만할 뿐이다.
 
여성 비하 발언을 여러 차례 한 전력이 있는 대통령 후보조차 선거판에서는 여성을 위해 정부가 육아를 책임지게 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성의 정치적 시민권이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나라라면, 표를 긁어모으기 위해 남발되는 선심성 공약보다는 여성을 배제하는 일상의 현실이 선거에 반영되기 쉬울 것이다.
 
‘경제’가 삶에서 최고의 가치가 된 나라에서 대통령 후보들마다 국민이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겠다는 공약에 온통 투신하고 있다. 후보들이 경제 공약으로 주저 없이 내세우는 데 매력을 느낄 만한 것은 일자리 펑펑 늘리기이다. 300만 개와 250만 개는 이명박과 정동영, 이회창 후보들이 각각 약속한 신규 일자리 수다. 그러나 이 수치에 대한 합리적 근거는 제시된 적이 없다. 자신이 집권만 하면, 경제성장률이 마법이라도 통한 듯 지금보다 두 배 가량 늘 것으로 일단 상정하고 나서, 경제성장 증가분과 일자리 증가의 관계를 조사한 예년 통계에 근거하여 주먹구구식으로 더하고 곱한 결과일 뿐이다.
 
이에 한 술 더 떠서, 멀찍이서 뒤쫓는 처지인 문국현 후보는 아예 해마다 100만 개씩 5년 동안 총 500만 개 만들기를 거침없이 내세웠다. 500만 개 중 절반은 다른 후보들의 계산법을 본받아 태어났다. 자신의 집권 후 연 8%의 경제성장을 기대하고, 그것에 맞추어 나온 ‘창조적’ 셈법일 뿐이다.
 
2006년 한국 경제는 4.5% 성장했다. 경제 성장기를 지나 선진국 진입을 앞두고 있는 나라로서는 적지 않은 수치라는 평가가 앞선다. 중국 같은 고성장 국가도 연 10% 성장이 벅찬 사정을 감안하면, 성장률 7%(이명박 후보)니, 8%니 하는 건 근거 없는 숫자놀음에 불과할 것이다. 허깨비 숫자를 현실화하고자 한다면, 그들이 믿는 구석은 무엇일까.
 
답은 하나밖에 없다. 집권자의 강력한 권위에 의존한 밀어붙이기식 통치를 기대하지 않고서야 거품과 환상이 넘치는 공약은 나올 수 없을 것이다. 논리로 안 되면 힘으로라도 통하던 시대는 이미 있었다. 경제적 약자의 희생을 강요하고 목표 달성을 위해 경제주체들을 쥐어짠 것이 수출을 팍팍 늘려 주었던 시절은 그리 먼 옛날이 아니다.
 
그들은, 군사 통치와 경제의 고속 성장이 일치했던 시대를 은연 중에 염두에 두었을 수 있으며, 이명박 후보에게는 좀 더 노골적으로 그런 면모가 드러난다. 대통령 후보들이 민주적 집권자가 아니라 권위주의적 통치자를 꿈꾸는 면면은 남성 정치의 과잉만을 노출하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수직적 위계 질서가 남자다움으로 통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자리는 쓸려나가고 없을 것이다.
 
경쟁과 승자독식의 가치에 올인하는 1위 후보에 맞불을 놓기 위해 정동영 후보는 사람 냄새가 나는 따뜻한 무언가를 내세우고 싶었다. ‘가족이 행복한 나라.’ 정동영 후보의 캐치프레이즈는 가족의 행복이 보장되지 않은 우울한 현실을 불러일으킨다. 공약상으로는 중산층의 몰락과 서민층의 빈곤화, 비정규직의 증가 등으로 가정의 울타리가 와해되고 있는 현실을 염두에 두고 있음이 비쳐지고 있다. 그러나 활자로 찍힌 공약에 드러나지 않는 ‘가족행복론’의 이면에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식의 전형적인 가부장주의가 놓여 있다.
 
정 후보는 최근 유세 현장에서 대기업 지원에 치우쳤던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의 경제 정책을 변명하면서, 10년 전 외환위기 때는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큰아들’ 격인 대기업을 먼저 살렸으니, 자신이 집권하면 ‘둘째 아들’인 중소기업과 ‘셋째 아들’인 서민을 살리겠다고 말했다. 그의 사고방식은 가족 구성원을 큰아들-둘째 아들-셋째 아들 순서로 위계화하여 등수를 매기는 데 거리낌이 없다. 아버지와 장남이 중심을 이루는 가부장주의 구도 속에 여성은 당연히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가부장적 가족 개념을 고스란히 국가에다 끌어 붙인다는 것이다. 정부를 곧 확대된 가족으로 보는 사고라면, 집권자인 대통령은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 격에 해당한다. 맏아들부터 막내 아들까지 차례로 ‘살리는’ 힘을 가진 사람은 이 서열 구도의 정점인 아버지 곧 나라의 대통령이다. 민주주의 국가의 집권자가 권위적인 가부장이라고 주장하는 셈이 돼버린다.
 
이에 동조라도 하듯, 정 후보의 부인은 남편을 지지하는 연설에서 “한 가족의 장남이며, 가장이었던 정동영 후보를 앞으로 5년 동안 이 나라의 가장으로 내주겠다”고 했다. 애석하게도, 집안에서 가장 먼저 태어난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가부장 자리를 꿰찬 자는 자신의 후사가 될‘큰아들’(대기업)부터 챙길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밖에 들지 않는다. ‘막내 아들’(서민 남성)보다 서열이 더 처지는 어머니와 딸의 자리는 어디에 있는가.
 
대선 후보들 중 이명박 후보만큼 말보다 일을 잘 하는 것이 최고라며, 과학적 근거 없이 주먹구구식 숫자를 공약으로 늘어놓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과정과 절차는 뒷전이고 무작정 실천력과 추진력만을 노골적으로 내세우는 그가 요지부동의 지지율 1위를 고수하고 있는 것은, 여성 정치의 현주소를 잘 드러낸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가 민주적 절차를 얼마나 경시하는 사람인지는 공약을 들여다볼 것도 없이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리고 있는 그의 지난 몇 년간 돈과 관련한 행보를 통해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노골적인가 은근한가의 차이가 있을 뿐 대선 후보로서 소통과 대화에 귀를 닫은 독불장군식 색깔이 그 혼자만의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유권자들이 가장 강력하고 권위적인 통치력을 행사할 것 같은 후보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한, 여성의 정치적 소외와 남성 정치의 과잉은 당선자의 시대가 넘어서야 할 가장 큰 숙제가 될 것이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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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12/17 [08:09]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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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감쟁이 2007/12/31 [17:43] 수정 | 삭제
  • 임의 긇을 읽을 때마다 내가 남자라는 게 항상 부끄럽습니다. 건필하세요.
  • 인권신장 2007/12/19 [19:14] 수정 | 삭제
  •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여성들의 수가 많이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고위층에 속하는 여성들의 행태를 볼작시면...
    그들 역시 보수적이고, 권위적이고, 경직되고, 위계적인 모습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하찮게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여성 정치인들의 전투적이고 정당이기적 행태를 보면
    그런 행태가 남성만의 전유물은 아님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기존의 기득권층들이 해 왔던 행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거죠.

    그러므로 이제는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것을 '가부장적'인 것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남성들도 많이 있고,
    또 그런 여성들도 많이 있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보수적이고 권위적이라는 말을 남성들에게만 적용하는
    단어인 '가부장적'이라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상정하는 것은
    현실과는 전혀 맞지 않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