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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공>, 전쟁없는 한중일을 위한 예술
[비나리의 초록공명] 일전불사 기운 높아지는 한중일 위한 첫번째 예술
 
우석훈   기사입력  2007/01/27 [13:38]
보통 나는 영화에 대해서 심각하고 정색을 하면서 글을 쓰지는 않는데, 영화 <묵공>은 몇 번의 메모에 걸쳐서 글을 쓰면서 다듬고, 가능하면 많은 지면을 할당해주는 매체에 기고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유덕화가 정색을 하고 영화를 만들었는데, 나도 최대한의 예의를 갖출 생각이다. 내가 예의를 갖추어서 글을 쓰는 영화 제작자는 마크 마이어스와 주성치 정도이다. <쿵푸 허슬>은 몇 번 글을 쓰려고 했었는데, 영화가 너무 어렵고 두꺼비의 상징을 끝내 풀어내지 못해서 글을 못 썼다. 잘 모르면 입다무는 것도 하나의 예의이다.
 
1. 홍콩 영화의 맥락
 
홍콩 영화에 주목할만한 사람이 홍콩 누와르 시절에 동시에 등장했다. 주윤발, 장국영, 주성치 그리고 이보다 약간 중량감이 적게 유덕화가 등장했다. 장국영은 먼저 하늘나라로 떠났고, 주윤발은 미국으로 떠났고, 이제 둘 남았다. 자기 세계를 먼저 연 것은 주성치의 경우다.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영화 <쿵푸 허슬>에는 중국에 합병당한 홍콩에 대한 주성치의 세계관이 그려져 있다. 상징이 너무 많아서 내 능력으로는 해석 불가능이다.
 
주성치는 제대로 된 배우교육을 받고, 그야말로 튼튼하게 길러진 기본기로 처음부터 천재로 등장해서, 다른 배우들이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때 열심히 돈을 모아서 제작자로 나섰다. 그래서 자신의 세계를 가질 수 있게 되었는데, 아직 주성치가 그리고 싶은 세계의 모습은 단편으로 밖에 등장한 적이 없다.

유덕화는 중졸이고, 우리 식으로 비교하면 장정일과 비슷한데, 그래도 장정일이 '시인만 있는 이상한 도시의 천재 소년'으로 비교적 일찍 두곽을 드러낸데 비하여 유덕화는 정말 잡초 인생처럼 10대와 20대를 죽지 않고 간신히 살아서 30대가 되었다. 우리가 본 유덕화는 30대의 모습이다.
 
어떤 면에서는 비토 타케시와 비슷하다. 이 암흑의 사나이는 코메디언으로 일본을 장악하고, 그도 나이를 먹고 비로소 영화 제작을 시작했다. 비토 타케시가 영화를 처음 만들 때 사람들은 피식거리면서 비웃었고, 아무도 타케시 영화가 지금과 같은 타케시 풍이 될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소나티네>의 앞 장면에 나오는 잔혹하면서도 감정없는 마피아 중간 보스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이 비토 타케시의 젊은 시절의 진짜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유덕화가 영화를 제작한 것도 비슷한 방식으로 사람들은 긴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모골이 송연하도록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유덕화는 61년생이다. 우리나라의 그 나이의 정치인들이 하는 모습이나 그 나이의 예술가들이 가지고 있는 조로와 우울증을 생각하면, 유덕화는 적어도 한국, 중국, 일본의 예술가들을 긴장하게 만든다. 중졸에 시시껄렁한 누와르 영화의 따분한 킬러나 보스 역할이나 하던 B급 배우에 불과한 이 배우가 드디어 자신의 돈으로 만든 영화를 한중일에 내어놓았다. 그게 바로 <묵공>이다.
 
2.
 
영화 <묵공>은 한중일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너무 극명하게 보여준다. 중국도 잘난 척하지만, 묵자에 관한 얘기들을 찾아내고 다시 해석하는 일을 하지는 못한다. 중국 지식인들도 지금 돈에 취해서 정신 못차리 듯이 스케일과 힘에 빠져있는 느낌이 든다. 묵공은 일본 만화를 원본으로 하고 있다. 그림이 워낙 일본만화답지 않게, 마치 슬램덩크 1-2권을 보는 듯이 조악하다. 그러나 얘기만은 워낙 정교하다. 한중일 중에 아직 일본의 디테일을 따라갈 정도로 깊이 고민하는 예술가는 없다. 그 점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디테일을 일본에서 가져오기로 마음 먹은 유덕화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영화 <묵공.의 한 장면. 전쟁을 막기위해서는 평화를 준비하라는 구호가 있지만, 현실에서는 얼마나 허망한 구호인가...    
 
만화 <묵공>은 일본에서 두터운 매니아층을 가지고 있는 좀 어려운 만화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은 영화로 만들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다면적 플롯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당신 같으면 온몸에 멍이 들고, 와이어를 허리에 매달고 20년 동안 벌었던 돈을 집어넣어서 드디어 영화를 만드는데 어떤 스토리를 선택할 것인가? 처음부터 영화에 맞지 않는 만화를 집어들은 유덕화가 생각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배우로서의 안성기를 아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영화 <무사>에서 보여준 <수성>의 공성전에서 보여준 그 눈빛과 몸짓을 사랑하지 않기는 어렵다. 그가 이번에는 중국 최고의 <공성> 전문의 장군으로 나온다. 왜 안성기일까? 2중의 설명이 가능하다. 무사의 연장선에서 설명할 수 있고, 그가 한국의 국민배우라는 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어쨌든 이 영화는 시작하기 전부터 한중일을 묶어놓고 시작하고, 이 거대한 오케스트레이션의 지휘는 홍콩의 유덕화이다. 초반부터 해석이 만만치 않다. 한중일에 홍콩의 꿈과 불안 같은 것들이 덧붙여져 있는 구도이다.
 
영화의 스탭은 일본 사람들이 맡았다. 만약 중국 배우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영화를 너무 익숙한 일본 영화라고 생각할 뻔했다. 오래된 중국의 묵가에 대한 전설을 되살려낸 일본의 디테일과 또한 그런 장면들을 묘사하는데 전문적인 일본의 스탭과 한국의 국민배우가 결합된 것이 이 영화를 만든 제작팀의 모습이다.
 
3.
 
영화는 구로자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에 대한 오마쥬로 시작한다. 공성전의 수성편에서 지형을 살펴보고 3방에 대한 방어태세를 갖추고 한 쪽 길을 열어주는 장면은 바로 이 영화에서 시작되었다. <전함 포템킨>의 오데사 계단 장면이 하다못해 <영웅본색 2>에서 다시 오마쥬로 등장하듯이 7인의 사무라이 역시 대형 전투에서 곧잘 사용되는 장면이다. 하긴, 일본 스탭들이 자신들의 영웅을 모방하겠다는데야...
 
전쟁의 깃발신은 <카케무샤>에서 바람과 불, 산과 같은 깃발에서 가져온 듯하다. 중국 영화에는 깃발신은 잘 안 나온다. 게다가 화살도 중국 전통 문양이 아니라 흰 꼬리를 가지고 있는 일본식 화살이다. 이쯤되면 아주 익숙한 사무라이 전투 장면, 흡사 <난>에 나왔던 장면들이 가지고 있는 미학적 완성도에 기댔다는 생각을 해봄직 하다.
 
4.
 
묵가는 묵자라는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제자백가 중의 하나인데, 요즘 식으로 얘기하면 전문가 집단에 가깝고, 서양식으로 표현하면 토목공과 대장공들의 모임인 프리메이슨과 비슷하다. 실제로 실험하고 기계를 개발하는 일들을 주로 했던 집단이고, 그 와중에 병법에 달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의 배경인 조나라 시절보다 조금 뒤에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게 되는데, 이 때 묵가들이 진시황의 비밀부대처럼 움직여서 통일에 기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묵가들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 여기에 대해서는 전설이 구구한데, 그저 킬러에 비슷한 상황이 되어버린 것을 비관한 어느 제자가 독살했다는 전설이 좀 유력하다. 그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로마 시절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프리메이슨은 나중에 연금술과 연결된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집단이 역사에 한 번 등장하기는 하는데, 조선조가 건국되면서 조선조에 복속되기를 거부한 승려들이 1진은 금강산으로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덜 강경했던 2진은 지리산으로 가게 된다. 이 때 금강산으로 간 승려들을 당취라고 부르는데, 실제로 조직을 갖추어서 암살집단처럼 되었다고 가끔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약간 과장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사명대사까지 이 당취의 비밀조직이 이어진 것으로 얘기하기도 한다. 조선생활사나 민중사에 당취에 관한 얘기들이 가끔 등장하는데, 우리말의 '땡중'이라는 표현은 이 암살집단이 된 당취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 묵가가 평화의 정신을 가졌다는 해석보다는 기술과 관련된 일종의 과학집단이라는 사실이 영화를 재밌게 보는데 더 중요하다. 전쟁을 통해 전쟁을 막을 것인가 혹은 '겸애'를 통해 전쟁을 막을 것인가는 영화 내에서 하고 싶었던 진짜 얘기는 아니다. 묵가집단이 당시로서는 신기술을 가지고 있고, 토목과 재료학에 강했던 사람들이라는 정도로 보아도 나머지 얘기를 해석하기에 충분하다.
 
유덕화가 묵가 정신을 오늘날에 되살리기 위해서 영화를 만들었을까? 만화 원작을 가지고 온 유덕화는 사실 묵가에는 관심이 없고, 전쟁과 전쟁을 막기 위한 무엇인가에 더 관심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5.
 
한중일은 최근 5년간 전쟁이 기운이 점점 강해지고, 미움이 강해지는 중이다. 누군가 나서서 끊임없이 '전쟁하지 말자"고 얘기하고, 그런 기운이 강해져야 한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데, 유덕화가 그 깃발을 먼저 들고 나선 셈이다. 영화의 메시지는 영화를 보면 누구나 알 수 있게 쉽게 되어있고, 또 반복해서 속삭이거나 외치거나 질문한다.
 
"전쟁은 뭐 하러 하는가?"
 
전쟁하지 말자는 얘기다. 앞으로도 절대 세 나라가 싸우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간단한 메시지를 공을 들여 스펙타클에 담아낸 셈이다. 영화는 소설과는 다르다. 주 메시지를 너무 감추어서는 효과가 별로 없다. 그런 점에서 유덕화는 '반전'이라는 흔해 빠진 얘기를, 그러나 한중일이라는 맥락에서 대중적으로 처음 꺼내놓은 셈이다.
 
한중일의 세 나라 국민들이 같이 즐길 수 있는 예술 중에서 전쟁하지 말자고 직접 외쳐댄 것은 이 번이 처음이다. 유덕화가 영화를 준비하고 있을 때, 우리나라의 대표 소설가 조정래는 독도를 지키기 위해서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했고, 또 다른 대표 사상가 김지하는 중국의 동북공정은 큰일날 일이라고 했다. 심지어 민주노동당은 독도에 대표단이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유덕화가 영화를 준비하고 만들고 있던 시기에 벌어진 일들이다. 그리고 다른 예술가들과 인문학자들은 황우석을 열렬히 지지하고 있던 바로 그 시기에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사실 부끄럽다.
 
6.
 

그러나 유덕화의 시선은 한편으로는 잔인하다. 만화의 원 스토리를 별로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의 시선이 잔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꿀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꾸지 않았고, 또 화면의 시선들을 따라가면 유덕화의 메시지는 조금 잔인하다.
 
성안에는 1세대와 2세대로 나뉘어진다. 황제와 우장군은 1세대이다. 2세대는 그야말로 왕자처럼 떠받들어지면서 살았던 세자와 충신의 딸, 그리고 졸병일 뿐인 사수가 2세대이다. 1세대는 철저하게 부패했고, 그들에게는 아무런 가망이 없다. 죽었거나 살았거나 그 세대에게 다음을 기대할 수 없다. 잔인한 설정이다. 그리고 2세대는 정의롭고 새로운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유능하다. 그들에게는 희망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세자는 1세대인 우장군의 화살을 받고 어이없이 죽고, 여장군은 황제에게 목젓이 잘려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물에 빠져 죽고, 마지막으로 목숨으로 건진 사수는 활을 쏘기 위해 꼭 필요한 손목을 잘리게 된다.
 
2세대를 대표하는 다음 세대는 1세대에 의해서 어이없이 죽거나 목젓이 잘리거나 자신의 활동의 전부인 손목이 잘린다. 유덕화의 눈을 따라서 이 상황을 보면, 이게 한중일이 전쟁에 도달하게 되는 이유다. 잔인하고 무서운 설정이고,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게 되는 상황이다. 목젓이 잘린 여장군의 사연은 너무 무섭다. 영화는 반복해서 그녀가 소리 지르고 싶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 장면을 보여준다. 할 말은 있지만, 말은 할 수 없고, 말 하려고 하면 목젓을 잘라버린다는, 만화의 설정이나, 그 설정을 그대로 받아든 유덕화나 잔인하고 잔인한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
 
사실 이렇잖아? 이런 말을 스크린을 따라서 반복해서 하고 있다.
 
중국이나 일본에 대해서 적개심을 품지 말자고 말하면,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사람들이 달려들어 목젓을 뽑아버릴 기세이지만, 이건 일본이나 중국이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황제의 통치를 위해서 전쟁을 만든 것이라고 말하면 정말로 목젓을 뽑아버릴 형국이 펼쳐지는데 10년이 채 걸리지 않을 태세이다. 한중일, 전부 마찬가지 상황을 내부적으로 겪고 있다.
 
매국노가 먹는 밥도 아까울 것이다.
 
7.
 
묵가 혁리는 2세대가 사망하고, 1세대가 다시 권력을 잡은 성을 빠져나오면서 고아들을 데리고 나온다. 그가 가느다랗게 남겨놓은 희망이다.
 
손목이 잘린 사수는 땅에 칼을 꼽아놓고 갑자기 사라진다. 착하고 충성심 많았던 병사일 뿐인 사수가 충성심의 의미와 싸워야 할 의미를 땅에 꼽고 자신의 길을 간다. 그러자 같이 있던 두 명의 사수도 활통을 던져버리고 어디론가 떠난다. 이 장면이 영화가 주문하는 장면이다. 열심히 사세요, 여러분.
 
8.
 
성문에 갇혀있던 조나라 병사들은 퇴각하면서 "여기서 죽겠다'는 자신들의 장군을 들쳐매고 고향으로 떠난다. '형님, 집에 가십시다, 그려.' 명분이 사라진 전쟁터에 한 사람의 목숨이라도 괜히 버리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다. 질서 있는 퇴각은 이런 걸 의미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잠시 든다.
 
9.
 
한중일 간에는 앞으로 10년이 지나면 일전불사패가 더 늘어날 것이다. 19세기 후반 유럽이 그랬고, 결국 일전불사를 하게 되었다. 싸우지 말자는 첫 목소리가 이 지역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나온 셈이고, 그 얘기가 홍콩에서 나왔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생각해보게 된다. 홍콩은 영국도 싫어했고, 중국도 싫어한다. '자치구' 홍콩을 사랑하는데, 이 자치구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가 주성치 버전의 영화와 유덕화 버전의 영화의 양대 축을 만드는 셈이다.
 
이 시기에 한국에서 나온 영화들은 <한반도>와 같이 일전불사패들의 영화들이 더 많다. 일본은 어땠을까? 비토 타케시와 같이 일본사회의 폐부를 파고 들어가는 영화들과 <워터보이즈>처럼 사회 내부의 아픔을 지역과 공유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들에 대한 영화들이 있었다.
 
영화가 예술인 것은 맞고, 이 지역에서는 아방가르드에 해당하는 것도 맞는 것 같다. 영화의 완성도는 어느 정도일까? 이건 전쟁영화라는 장르로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장르로 생각할 것인가에 따라서 해석이 복잡할 수 있다. 나중에 한중일의 관람객수를 비교해보면 조금은 더 뚜렷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메시지와 중요한 메시지라도 영화는 일단 재밌어야 하고,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채플린이 위대하다고 지금까지 칭송받는 것이 아닐까?
 
이제 자신의 발을 뗀 유덕화가 부디 좌절하지 않기를 빌고, 또 채플린만큼 위대하거나 이소룡만큼 오랫동안 가슴에 남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빈다.
* 글쓴이는 경제학 박사,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성공회대 외래교수, 2.1연구소 소장입니다.

* 저서엔 <88만원 세대>,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 <아픈 아이들의 세대-미세먼지 PM10에 덮인 한국의 미래>, <조직의 재발견>, <괴물의 탄생>, <촌놈들의 제국주의>, <생태 요괴전>, <생태 페다고지>,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등이 있습니다.

*블로그 : http://retired.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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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1/27 [13:3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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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르 2007/01/29 [02:03] 수정 | 삭제
  • 역사에서 보아왔듯이, 일본은 힘의 균형만 무너지면, 다시 침략해옵니다. 일본문화의 특징이라면 자유분방함과 가벼움 그리고 거기서 오는 윤리적 해이입니다. 전쟁의 승산이 맞아떨어지면 다시금 가볍게 전쟁을 일으킬것입니다. 지금 일본이 평화를 말하는 이유는 일방적인 승산은 없기 때문이지 그들이 평화를 사랑해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한반도처럼 유치한 으르렁거림의 메세지를 보내는 것도 한심하지만, 평화의 미소를 순진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우습습니다.
  • 깊은생각 2007/01/27 [23:51] 수정 | 삭제
  • 전쟁이 '왜' 일어나는가 사람들의 마음이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희미하게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요즘의 한국사람들이 그러하죠. 성난 한국인, 이 말이 맞아 떨어집니다. 하여튼 성나 있습니다. 원인이야 많죠. 보이는 모든 것들이 성나게 하겠죠? 그런데 가진게 너무 많아서 탈인 '정몽준 의원' 같은 분이 전쟁 얘기를 하는게 참 그러합니다. '성난' 사람들이 '정몽준 의원' 같은 분에게 '공감'을 하는 순간부터 마음으로 전쟁상황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는 것일까요? 묵공에 대한 님의 예지에 입각한 탁월한 해석 즐겁게 읽었습니다. 한중일 세나라가 달러를 너무 많이 갖고 부자가 되다 보니, 뻑하면 전쟁얘기를 하게 된 것인지? 세나라 모두 '성난'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