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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노무현대통령 곁에 누가 남았나?
[비나리의 초록공명] 경찰만 남은 노 정권, 정말 아무도 남지 않았다
 
우석훈   기사입력  2006/11/25 [13:24]
1.  87년 6월과 2006년 11월, 그리고 시인이 떠난 자리  
 
87년 6월 명동성당에서 시인들은 앞 줄에 서 있었고, 소설가들은 뒷줄에 서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소설가들이 시인보다 덜 용감하다는 말이 아니고, 두 예술방식이 얼마나 다르게 움직이는가를 얘기해주는 말이었다. 난 얘기를 들을 때마다 그래도 뒤에서 구경하면서 가슴이 움직이는 시인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는 했었다.
 
2006년 11월, 그때 명동성당에 있던 시인들은 다 어디갔는지 모르겠다. 역사 이래로 시인들은 희랍의 영웅들이 죽어가던 순간이나 페스트가 창궐하던 시기에도 시대의 아픔과 변화를 노래하고는 했다. 아무리 궁궐 깊숙한 곳에서 몰래 일어나는 일이라도 시인들의 눈을 피하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인류의 삶과 함께 시인들은 늘 함께 있었고, 기쁠 때나 우스울 때나, 그리고 슬플 때와 분노할 때 늘 맨 앞에서 먼저 노래하던 사람들이 바로 시인이었다.
 
그런데 2006년 11월, 대관절 우리들의 시인은 어디에 가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는 재능을 가진 시인들은 어느 시대에나 태어나기 마련이고, 인디언 부족들의 사냥이나 하다못해 구 유고연방 코소보의 학살현장에서도 시인들은 나오기 마련인데, 지금은 시인이 보이지 않는다.
 
87년, 현장 맨 앞줄에 서 있었던 그 전설 같은 시인들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가? 지금 이 중요한 역사의 현장에서, 음산한 '제로 똘레랑스'의 주문을 한명숙씨가 외치고 있는 이 현장에서, 정작 노래 불러야 할 시인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시가 주고, 사랑이 죽었다고 했던가?
 
시인 대신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한명숙씨가 '제로 똘레랑스'라는 음울하고 기괴한 노래를 대신 부르고 있다. 전쟁 중에도 '용인'의 정신이 싹트지만, 이 땅에선 "절대로 봐주지 않겠다"는 노래가 대신 울려 퍼지고 있다. 사랑의 찬가 대신 제로 똘레랑스의 노래가, 삶의 축전 대신 경찰 찬가가, 그리고 삶의 애환대신 권력의 찬송가들이 퍼진다.
 
전쟁 중에도 나오지 않았을법한 이상한 가락들이 TV와 신문을 가득 채운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울려퍼지는 소음들은 기괴한 반향음을 만들어내고, 그 잡음들 사이로 역사가 전진한다. 참 이상한 일이다.
 
2.
 
역사라는 게 참으로 기묘한 것이다. 87년 체계의 대통령 5년 단임제를 불평하면서 옛 역사의 마지막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지금 이렇게 사람들 앞에 맨 몸으로 서게 될 일이 벌어질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는가. 그야말로 권력무상이고, 역사의 무상함이다.
 
지금 노무현씨와 성난 군중들 사이에는 아주 얇은 경찰력만이 남아있는 셈이다. 권좌 주위에 그렇게 많던 사람들은 어느덧 모두 사라지고, 군중들 앞에는 경찰과 공무원들만이 남아있다. 그 얇은 버팀막이 얼마나 버티겠는가. 총과 칼은 강해보여도, 그렇게 제국이 통치된 적은 없다. 조작도 하고, 공작도 하고, 통치술도 발휘하고, 회유도 하고 그러는 것들이 힘만으로 제국이 유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걸 사람들은 정치라고 불렀다.
 
노무현씨와 군중들 사이에 서 있는 정치인은 지금 한명숙씨 밖에 없다. 지금 누가 막후에서 노무현씨를 위해서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하고, 약속을 하고, 소위 소통이라는 것을 시도하겠는가. 한명숙씨도 경찰 뒤에 숨어버린 지금 노무현씨와 군중들 사이에는 정말 아무도 없다. 
  
지난 2000년 총선 시절 노무현 후보의 '공터 동영상'을 본 적이 있다. 부산 빈 공터에서 횟집 아줌마의 텅빈 표정 속에서 혼자 마이크를 잡고 당황해하던 노무현씨를 본 적이 있다. 나도 마음이 짠했었다. 그 후로 5년이 지났나, 6년이 지났나. 노무현씨는 다시 혼자다. 슬프게도 혼자다.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경찰봉으로 통치를 하겠다고 결심한 순간 모든 지도자는 혼자가 되었다. 오래 갈 것 같아도, 생각보다 그게 그렇게 오래 가지 않는다. 해피엔딩으로 끝난 경찰국가는 역사상 없다.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외롭다는 말이 있더니, 공터에 서 있던 노무현씨가 지금 군중 앞에 서 있던 노무현씨보다 더 외로울까? 아마 그는 태어나서 가장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외로움을 덜자고, 사람들이 죽어나갈 수는 없는 법이다. 역사라는 것이 원래 그렇다. 힘으로 누르고 버틸 수 있을 것 같지만, 생각보다 역사는 사람들의 피를 아낀다. 언제나 힘 있는 사람의 편에 서 있는 것 같지만, 늘 그렇지는 않다. 그래서 왕조가 명멸하고, 공화국이 다음 공화국으로 넘어간다.
 
지금 노무현씨가 그 역사의 전환점에 딱 외롭게 서 있다.
 
3. 늙어 죽거나 그냥 죽거나!
 
농민들은 지금 아무 힘도 없고, 돈도 없다. 1인당 농가부채가 누적으로 수천만원은 족히 넘는데, 아직 300만명이 농민이 농사를 짓고 있다. 노무현씨가 지난 3년 동안에 이 사람들에게 너무 혹독하게 대했다. 박정희도, 전두환도, YS나 DJ도 공화국의 역사에서 농민들을 이렇게 막 대한 적은 없었다. 이 사람들을 너무 죽음으로 몰아붙였다. 2006년 11월, 길거리에 선 농민들은 "늙어 죽거나 그냥 죽거나!"라는 말을 가슴에 담고 있다. 올해가 넘어가면 다시는 삶을 삶처럼 살아볼 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진실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노무현씨는 이 300만명을 너무 무책임하게 대했다. 힘없다고 그렇게 막 밀어붙이는 것은 정치인이 할 일은 아닌데, 하여간 그렇게 했다.
 
미국과 한국의 공업 경쟁력은 2배 정도 차이난다. 이 차이를 없애야 기업들이 살아남는다. 기계적으로 계산하면 간단하다. 두 사람 중에 한 명은 그만두면 된다. 그나마도 한국 산업이 버틸 때의 일이다. 멕시코식으로 전환되면, 그보다 더 줄게 되거나, 고용의 질이 그만큼 나빠진다. 노동자가 천만명이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대학생들이야 공부 잘 해서 좋은 데 취직하는 길이 있다고 하지만, 40대와 공장 노동자들과 50대와 60대 농민들은 이 공화국의 변화에서 더 갈 곳이 없다. 살 길이 막막해지는데, 길거리에도 나와서 외쳐봐야 하지 않겠는가. 이게 2006년 11월의 상황이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집값 때문에 걱정이라고는 하지만, 집값 걱정은 없는 시골에 사는 농민들에게는 당장 내년의 생활비가 걱정이다.
 
삶의 대전환에서 길거리로 나선 사람들이 딱 만난 것이 노무현씨의 경찰들이다. 그 사이에는 시인도 없고, 종교인도 없고, 학자도 없고, 전문가들은 더더군다나 없다. 그 사이를 메우고 서 있어야 할 정치인들은 지금 대선 놀음에 정신들이 없으시다.
 
농민의 자식이라고 대선후보로 농민회 앞에 섰던 노무현씨의 운명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그야말로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되었나"라는 영화 <짝패>의 마지막 대사가 딱 어울리는 상황이다.
 
앞 길이 뻔한 삶의 질곡과 경찰들 사이에 갇혀버린 사람들의 머리 위로 "관용은 없다"는 한명숙씨의 노래만이 흘러퍼지고 있다. 겨울이 시작되는 12월, 경찰 공화국의 길거리에는 시인들의 노래 대신에 한명숙씨의 경찰 귀곡성만이 거리를 스산하게 만든다.
 
경찰의 힘으로 지켜진 적이 없던 공화국의 역사를 생각하며, 전두환 옆에는 노태우가 있었음을 상기하게 된다. 지금 노무현씨의 곁에는 경찰과 공권력 외에 누가 있을까... 
* 글쓴이는 경제학 박사,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성공회대 외래교수, 2.1연구소 소장입니다.

* 저서엔 <88만원 세대>,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 <아픈 아이들의 세대-미세먼지 PM10에 덮인 한국의 미래>, <조직의 재발견>, <괴물의 탄생>, <촌놈들의 제국주의>, <생태 요괴전>, <생태 페다고지>,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등이 있습니다.

*블로그 : http://retired.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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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11/25 [13:2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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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나 너는너 2006/11/26 [20:43] 수정 | 삭제
  • 그때 그 시절 그 시인덜 지금은 어디 짱박혀있니.지난 탄핵때는 민주당이 주도한 탄핵을 쿠데타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 지롤덜허더니 김홍신이헌테 재봉틀 선물받아서 아가리덜 꼬메고 얼루 튄겨.그런겨.자고로 문학허는 새끼덜이 썩어 나자빠진 이런나라에서 무슨 희망을 볼 것이더냐.민나 개씨부럴새끼덜아.
  • neung1an 2006/11/25 [19:21] 수정 | 삭제
  • '원효'가 두 가지 테제를 질문으로 제시하죠...
    1. 하나의 칼이 그 칼 자신을 벨 수 있을까?...
    2. 하나의 손가락이 그 손가락 자신을 가리킬 수 있을까?...
    '상식적'으론 불가능한 얘기죠...
    칼이나 손가락 모두 타자인 '너'를 향할 뿐이니까요...
    자기 자신인 '나'를 향할 수는 없다는 게 상식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가볍게 말을 하는 건지두 모르겠어요...
    그런데 어쩌죠?...
    원효는 결국 타자인 '너'를 향하는 칼은 없다구 말하는 거 있죠...
    그런데 어쩌죠?...
    원효는 결국 타자인 '너'를 가리키는 손가락은 없다구 말하는 거 있죠...
    해서... 원효는 이렇게 얘길 하죠...
    하나의 칼은 다만 자기 자신인 '나'를 벨 뿐이다... 라구요...
    하나의 손가락은 다만 자기 자신인 '나'를 가리킬 뿐이다... 라구요...
    해서... 사람은 입을 좀 무겁게 놀릴 필요가 있는 건지두 모르겠어요...
    '제로-똘레랑스'두 마찬가지 겠죠...
    '제로-똘레랑스'는 어쩌면 '제로-똘레랑스'를 처음 발설한 사람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적용될런지두 모르는 일이겠죠...
    지금 그렇게 되어가구 있잖아요...
    원효는 기본적으로 말을 자기독백으로 봅니다...
    그 사람의 말 한마디를 들어보면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또... 그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가 다 보인다는 거예요...
    사람은 말로써 자기 자신을 표현하기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말'하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는 걸어다니는 이력서겠죠...
    이제 말 많은 화자(話者)들에게...
    그동안 말 잘 들어온 청자(聽者)들이 그 무언가를 돌려줘야 하는 시기군요...
    우리 청자들은 말조차 빼앗겨버렸으니 다만 할 수 있는 일은 '행동' 밖에는 없는 거겠죠...
    말은 말하기를 즐겨온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되돌려주고...
    언제나 그랬듯이 우린 다만 몸으로 움직일 뿐인 거겠죠...
    말이 말에게 되돌아가는 것두... 칼이 칼 자신을 베는 것이요...
    행동이 행동으로 되돌아가는 것두... 다만 손가락이 손가락 자신을 가리키는 이치일 뿐인 거겠죠... 후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