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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패로 찍지말고 차라리 최루탄을 쏘라
[비나리의 초록공명] 줄지어 늘어선 죽음, '침묵의 카르텔' 이제는 깨야
 
우석훈   기사입력  2006/08/09 [03:20]
1. 슬픈 죽음들, 하중근 열사 사망에 붙여 
 
하중근 열사의 죽음은 자꾸 생각을 하게 만든다. 결혼도 하지 못하고 마흔이 넘도록 아마 노조니 혹은 투쟁이니 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게 그야말로 하루하루의 삶을 넘기기가 어려웠을 이 중년 사나이의 죽음은 자꾸 생각을 하게 만든다.
 
사람이 다쳐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죽어서는 정말 안되는 것이다.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자꾸 죽는다. 농민들이 줄줄이 죽어나가고, 그야말로 각성된 민중이라는 단어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죽는다.
 
결혼도 해보지 못한 하중근 열사의 죽음은 자꾸, 자꾸 생각을 하게 만든다.
 
작년 시위에서 죽은 어느 한 농민에 대한 생각이 자꾸, 자꾸 난다. 그도 결혼을 하지 못했다. 농촌 생활이 그렇듯이 술도 좀 마셨을 것이고, 그래서 경찰에서는 속병이 있어서 죽었을 것이라고 했다. 보는 사람 속 타는 일이다. 농민회의 간부가 되는 과정까지 그의 삶이 어떤 것이었을지 주마등처럼 머리 속에서 그려진다.

하중근 열사에 대한 생각은 더욱 애처롭다. 도대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걱정을 하면서 노조, 그것도 비정규직 노조 한 가운데로 가게 되었을까?

▲ 2일 포항건설노농조합 조합원들이 고 하중근 씨의 영정을 들고 경찰의 폭력진압에 항의, 경찰청에서 항의집회를 열었다.     © 대자보
 
예전에 즐겨 부르던 ‘불나비’라는 노래가 갑자기 생각난다.
 
2.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위선이나 진실이나 하는 얘기들은 너무 고급스러운 얘기들이다. 하중근 열사에 대한 생각은 그야말로 ‘개죽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아무 것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그 흔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 하나 없이 사라져간, 결혼도 해보지 못한 어느 한 중년 사나이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세상이 나아졌는가? 그런 와중에 발생한 돌발적이고 우발적인 사태인가? 그런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문제들은 그대로 있고, 다만 국민소득이 20년 전보다 높아졌을 뿐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천박하고, 천민자본주의라는 본질은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성들이 많아졌다. 예전에는 재야라고 불렸던 사람들이 이제는 시민단체라고 단체 하나씩 꾸리면서 성들이 조금 많아졌다. 자본론은 들레쥬의 저작들로 바뀌었을 뿐이지만, 자본론이나 들레쥬나 알아듣기 힘들 말들이고, 결혼도 하지 못하고 그저 대책없이 늙어가는 중년의 사나이들에게 세상의 진실은 너무나 먼 곳에 있고, 도와줄 사람은 여전히 아무 곳에도 없다.
 
그리고 몇 개의 죽음이 새로 생겨났을 뿐이다.
 
3. 전태일이라고 문제를 풀 수 있겠는가?
 
전태일의 분신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분신이 좋은 것인가?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전태일의 분신에 대해서도 그런 일반론을 적용하기 어렵다.
 
지금 전태일이 우리에게 나타난다면 어떻게 될까? 아직 근대화의 길을 걷지 못하던 그 시절에 그래도 사람들은 전태일이라는 한 청년의 죽음에 대해서 안타까와했지만, 만약 지금 전태일이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눈도 깜박하지 않을 것 같다.
 
몇 년 전에는 너무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단식 같은 것을 했다. 난 후배들이 시켜서 5일의 단식을 해봤는데, 정말 죽을 지경이었다. 멀리는 지율스님의 초인적 단식이 있고, 가까이는 농업을 살리자는 강기갑 의원의 단식이 있었다.
 
물론 단식해봐야 아무도 눈도 깜빡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 명확하다. 설령 그러다가 분해서 죽더라도 TV와 미디어가 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죽어주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노무현 정권이 진정으로 죽지 않기를 바랬고, 죽음에 대해서 고민한 단 하나의 죽음은 지율스님의 죽음 밖에는 없는 것 같다. 그는 미디어가 바라는 속성들을 갖추고 있었다. 그 죽음 외에는, 다른 모든 죽음에 대해서 이 정권의 의사결정자들은 눈도 깜빡하지 않는 것 같다.
 
스스로 생각해보시라. 자신이 뭔가 불만이 있어서 뭔가를 외치다가 장렬히 죽는다고 해서 이 정권에서 눈이라도 한 번 깜빡하겠는가? (절대로 자살하지 마시라. 이 시대는 죽은 사람만 억울한 시대이다.)
 
슬픈 얘기지만, 이 시기, 사람 목숨값이 개값이다. 너무 슬픈 시기를 지금 많은 사람들이 죽지 못해서 살아가고 있는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이다.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하나씩 사라지는 죽음 앞에서 그런 말을 하기에는 너무 사치스럽다.
 
4. 최루탄!
 
한국 사회에서 최루탄은 DJ 때 사라졌다. 모두 기뻐했고, 나도 무척 기뻤다. 페퍼포그 앞에 서 있기가 괴로왔고, 한열이의 죽음 이후에 SY44가 무척이나 무서웠다. 내 몸에 있는 여러 개의 흉터 중에 아직도 남아있는 흉터들에는 사과탄이 만들어준 흉터들이 존재한다. 물론 이제는 아스라한 기억들처럼 너무나 작아지고 굳이 신경 쓰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흉터이다. 내 몸에 남은 사과탄의 흉터들처럼 채 10년이 지나지 않았지만 최루탄의 기억은 한국 사회에서 희미하다.
 
지금처럼 큰 시위가 있을 때마다 한 사람씩 방패에 찍히거나 혹은 어떤 둔기에 맞고 죽어야 할 상황이라면, 차라리 최루탄이 만들어주는 슬픈 ‘이격거리’라도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작년 말부터 진지하게 해보게 되었다. 어차피 시위와 격렬한 몸싸움이 필요한 것이 사회의 본질이라면 최루탄이라는 안전장치라도 필요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인간의 목숨’을 어느 정도로 귀하게 여기는 사회인 것인가에 관한 문제이다. 우리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가장 높게 쳐주었던 경우는 문산시의 홍수 때의 일이다. 한탄강댐을 만들기 위해서 댐의 필요성을 요구할 때 한 사람의 목숨값을 20억원까지 쳐준 적이 있다. 물론 정부보고서에 나오는 얘기이다. 보통의 경우는 호프만 방식 같은 보험수가로 계산하니까 우리나라에서 한 사람의 몸값은 싸게 보면 2억 정도 그리고 좋은 직장에 계신 분들은 10억까지 나오기도 한다. 정부의 계산 방식대로 하면 하여간 우리나라에서 아무리 귀하신 분이라도 20억원 이상의 계산이 나오지 않는다. 인간의 목숨을 기대소득으로 따지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목숨은 귀한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남자나 여자나, 혹은 그 어떤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도 모든 사람의 목숨은 귀한 것이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가 종료할 때까지 몇 명이 더 죽어야 하는 것인가를 약간의 추세를 통해서 계산해보고, 차라리 최루탄이라도 다시 도입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이 아닌가라는 계산을 해본 적이 있다.
 
경제학은 피도 눈물도 없는 학문이므로, 최루탄이라는 산업을 중심으로 고용과 경제 진작효과까지 다 집어넣고 계산해보면, 정부가 최루탄이라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꺼집어내는 것이 사회적 비용편익 분석을 해보면 더 유리할 수 있다. 원래 경제학의 결론은 그렇다.
 
그렇게 ‘살려야 한다’고 경제를 살리자고 난리치지만, 그 정신을 따르더라도 시위 때마다 죽는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나쁜 선택은 아니다. 국민경제도 살리고, 사람도 살린다고 경제학자는 말할 수밖에 없다.
 
5. 왜 정부가 최루탄을 사용하지 못하는가?
 
어차피 지금 물대포도 사용하고 스프레이도 사용하고 가능한 도구들은 다 사용한다. 시위대 입장으로 볼 때에도 정말 비인간적인 물대포 보다는 최루탄편이 낫다. 경제학적으로는 차라리 최루탄이 낫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다.

그런데 왜 노무현 정부는 최루탄을 사용하지 않는가? 그렇게 인간을 사랑하는가?
 
이 질문을 해봤는데,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우리나라 최루탄 산업의 생산라인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최루탄을 다시 도입하기 위해서는 수입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부터 다시 생산라인을 가동한다고 하더라도 과거와 같이 성능좋은 최루탄을 다시 만든다는 보장도 없고, 페퍼포그차들도 뽑아내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투자가 필요하고, 정말로 최루탄이 필요한 시기에 적시에 생산라인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국민을 억압하고, 경제적 약자들을 억눌러야 한다는 상황은 변한 것이 없는데, 현 정부가 최루탄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다만 최루탄 생산라인이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경제학자가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계산과 추론에 의한 결론을 찾은 다음에 나는 절망했다.
 
만약 최루탄 재고가 있다면? 이미 사용하고도 남았을 사용이다. 대추리에 군대도 투입하는 걸 보지 않았는가?
 
차라리 지금이라도 최루탄 생산라인을 다시 가동하고, 쓸데없는 도로 만드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돌려서 최루탄을 생산하기를 바란다.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지겠지만, 하중근 열사 같은 허무한 죽음들은 줄일 수 있다.
 
농민과 노동자들의 죽음은 현상황에서 피할 수 없다. 차라리 이런 허무한 죽음이라도 줄이면 좋겠다.
 
정부가 최루탄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더 민주적인 정부이거나 더 합리적인 정부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다만 지금 최루탄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생산라인을 다시 가동하라. 그래서 한 사람이라도 방패에 찍혀죽거나 둔기에 맞아죽는 사람들이라도 줄이자.
 
인간의 가치는 경제학자들이 추정하는 가치보다는 훨씬 귀한 존재이다. 설령 비정규직이고, 그들의 말대로 ‘일용직’이라도 목숨은 소중한 것이다.
 
지금은 민주화가 진행되어 최루탄은 필요하지 않은 시대인가? 아니다. 한미 FTA가 협상 종반으로 치달으면서 더 많은 목숨이 필요하게 될 것이고, 계획만 섰던 농업의 6헥타르 정책에 의해서 인구의 4~5% 정도가 농업에서 퇴출되면서 더 많은 목숨값을 이 사회는 치루게 될 것이다.

▲지난 2일 서울역광장에서 열린 故 하중근 열사 추모집회. 예고된 죽음, 이제 지성인이라면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 대자보 김오달
 
사람이 더 이상 죽어서는 안 된다. 현 상황을 인정하자. 한미 FTA 이후에 정부와 국민은 더 이상 대화할 수 없게 되었다. 현 정부의 ‘기업살리기’ 3년의 정책 기조 이후에 죽기 싫으면 집회라도 나올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더 늘어나고 있다.
 
차라리 최루탄이라는 장치가 만들어주는 이격거리라는 경제적 편익을 생각해보자. 물대포는 깔끔하기는 하지만 사태를 해결해주지는 않지 않는가?
 
노무현 정부를 평가하면서 전두환 때보다 더 많은 사람이 집회와 공안관련 사건으로 죽게되었다고 말하면서, 그 사태가 민주주의의 심화과정에서 생기는 불가피한 사회적 비용이라고 말하게 된다면 너무 슬프지 않은가?
 
6.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는가?
 
하중근 열사가 민주주의에 대해서 뭐를 알겠는가? 현 상황에서 민주주의 같은 고상한 말을 하면 안될 것 같다. 그가 생존권이라는 단어의 헌법적 의미에 대해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겠는가? 그런 말도 하면 안된다.
 
지금 우리는 정부가 완전히 불법파업이고 불법점거라고 부르고 있는 한 사건의 뒤에 남은 한 사나이의 주검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사학법 개정에 대한 한나라당의 반대, 과거청산에 관한 수구파들의 저항, 언론개혁의 지지부진함, 그런 것과 이 죽음이 상관이 있는가?
 
당신들은 만개한 형상을 구하였지만, 이 사나이의 죽음은 현실, 그것도 너무 초라해서 ‘철학적으로 꺼집어낼 것이 아무 것도 없는’ 한 가여운 사나이의 슬픈 삶과 그 현실에 관한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사회는 지금 이 사나이의 죽음에 대해서 철저히 침묵하고 있는 중이다. 불법파업? 그렇다고 사람이 죽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노조의 선동? 그것도 죽음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한 죽음은 다른 죽음을 예견하는 것이다. 불 보듯이 뻔하지만, 정부 시책에 맞추어 “잘 협조하기를 바란다”라는 말 이외에 이 정부가 지금 내놓을 말이 있는가? 이승만도 6.25 때 현명한 협조를 이야기하였고, DJ까지 이 땅의 모든 ‘목민관’들은 정부에 잘 협조해주기를 부탁하였다.
 
노무현 시대의 한 가여운 사나이의 죽음이 심각한 것은 줄줄이 늘어설 또 다른 죽음을 예고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게 사태의 본질이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섬뜩한 말을 한중근 열사의 죽음에도 부칠 것인가?
 
다 나라가 좋아지려니까 슬픈 일도 있고, 기쁜 일도 있다? 난 도저히 그렇게 말하지는 못하겠다.
 
이 죽음에 대해서 슬프도록 고민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 사회의 민주주의라는 것은 돼지발의 진주에 불과하다. 
 
그냥 차라리 최루탄도 쏘고, 저 멀치에 서로 떨어져서 구호라는 형태로 소리나 지르는 옛날 시위 형태로 돌아가자. 평화니 절차니 하는 위선은 걷어버리고, 현재 한국 사회가 딛고 있는 위기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자. 해결하기 어렵다면, 차라리 최루탄이라도 쏘고, 세상은 언제나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라는 만고진리의 답변을 받아들이자.
 
노무현 정권 이후에 도대체 몇 명이나 죽었는가? 그리고 얼마나 더 죽어야 “절차적 민주주의”를 위한 “가열찬 투쟁중”이라는, 이 위선의 가면을 벗겠는가? 세상은 나아지고 있다는 이 침묵의 카르텔이 얼마나 더 공고해져야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겠는가?
 
제발이지, 이 슬픈 사나이의 주검 위에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이상한 말 따위는 하지 마시기 바란다.
 
제발이지, 자신도 모르고 경제학자인 나도 이해하기 어려운, 경제살리기 같은 얘기나 대선놀음 같은 것으로 사태의 진상을 호도하지 말기 바란다.
 
지금 이 땅의 지성인에게는 줄지어 늘어선 죽음들을 막아야 하는 질문이 던져져 있다. 나는 차라리 최루탄이라도 쏘라는 답변을 제시한다. 최루탄이 아니라면 다른 대안이 뭔지, 소위 “수구파에 둘러싸여 열심히 싸우는 중인데, 왜 등 뒤에서 칼을 꼽느냐”고 3년 동안 소리치던 당신들, 대답 좀 해보시라. 도대체 어떻게 예견된 죽음을 막을 수 있는가? 이미 죽은 사람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죽게 될 사람들을 위해서 당신들은 무엇을 예비하고 있는가? 있다면 제발 좀 꺼내놓으시기 바란다.
 
지금 이 땅의 민중들은 배고파서 죽고, 슬퍼서 죽고, 억울해서 죽기 직전인 것 같다. 
 
 
* 글쓴이는 경제학 박사,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성공회대 외래교수, 2.1연구소 소장입니다.

* 저서엔 <88만원 세대>,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 <아픈 아이들의 세대-미세먼지 PM10에 덮인 한국의 미래>, <조직의 재발견>, <괴물의 탄생>, <촌놈들의 제국주의>, <생태 요괴전>, <생태 페다고지>,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등이 있습니다.

*블로그 : http://retired.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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