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에 존경받을 만한 어른이 드물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애초부터 품었던 뜻과 소망이, 자신과 자신이 속한 가문의 부귀영화를 위한 것이었던 사람들이야 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그 반대편에 있었던 사람들도 후배들이 본 받을 만한 귀감으로 남은 예가 그리 많지 않다. 아니 많지 않은 게 아니라 거의 없다. 하긴 질곡의 한국 근현대사를 통과하면서 한 개인이 자신이 지닌 높은 이상과 굳은 신념을 끝까지 보존하기란 결코 녹녹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인간이 진흙으로 만들어진, 따라서 연약하기 그지없는 존재임을 감안할 때 이런 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근년 들어 부쩍 활발해진 이른바 사회원로들의 공적 언행에 생각이 미치면 미간이 찌푸려진다. 자칭, 타칭의 사회원로들이 원로라는 일종의 상징권력을 이용해 한국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시도는, 그들 대부분이 일제와 군사독재정권에 협력했던 사람들이라는 점과 그들의 주장이 합리적인 근거를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중(二重)으로 부당하다. 한편 한국사회를 소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원로들의 우국충정(?)에 천주교의 큰 어른이라 할 김수환 추기경이 가세한 듯해 적잖이 걱정스럽다.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김수환 추기경이 26일 혜화동 성당을 찾은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에게"한나라당에 대통령 후보가 여러 명 있어 불안하다. (차기 대선에서는) 누가 대통령이 되는 것 보다 정권교체가 잘 되는 것이 중요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김 추기경은 강 대표에게 "국민들이 믿을 곳은 한나라당 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게 잘해 달라"는 덕담(?)도 건넸다고 한다. 김 추기경의 발언이 파문을 일으키자 천주교측과 한나라당측에서 각각 진화에 나서고 있는 모양이지만, 파문이 쉽게 가라앉기는 어려울 성 싶다. 무어라 변명하건 김 추기경이 한나라당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공적 자리에서 표명했다는 사실 자체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지도자라고 해서 선호하는 정당이나 애호하는 정치인이 없으란 법은 없지만, 이를 공적인 자리에서 발언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이는 정교(政敎)분리의 원칙을 김 추기경 스스로 허무는 행위이며, 자신이 지극히 애호하는 정당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함으로써 직간접으로 한국 정치지형에 영향을 끼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김 추기경의 26일 발언은 매우 부적절했다. 또한 김 추기경의 발언은, 한국사회를 대표하는 원로이자 천주교의 정신적 수장이라는 평가를 듣는 분의 의식의 현주소를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미국 없이 통일을 할 수 있겠느냐. 우리끼리 할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김 추기경의 발언에서 숭미(崇美)주의의 표징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울러 "(사학비리 등으로) 문제되는 사학도 있지만 수적으로 얼마 되지 않는다"면서 "그것은 그것대로 다스리되 그냥 둬도 되는 것을 왜 문제를 만드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김 추기경의 발언에서 지적 게으름의 기미를 읽는 일도 비교적 손쉽다. 설화(舌禍)에 휘말린 김 추기경이 자숙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한국사회에 어른다운 어른이 없다는 사실을 재삼 확인하는 심정은 씁쓸하기만 하다. 그나저나 한국사회 주류언론들의 행태도 한심스럽기 짝이 없기는 매일반이다. 복덕방에 모여 앉은 노인들이 세상사에 참견하는 수준의 이야기를 대서특필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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