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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대선, ‘내일을 향해 쏴라’
노무현과 권영길이 끝장내야 할 것은?ba.info/css.
 
임흥재   기사입력  2002/12/03 [05:44]
{IMAGE1_LEFT}모 대학원 신문사의 청탁으로 만나고 싶지 않은 정치와 어색한 만남의 시간을 가지며 불편해하던 중, 이인제의 탈당소식을 접했다. 고삐 풀린 망아지라면 몽둥이라도 들어 버릇을 고쳐놓으련만 도무지 인간사회에 길들지 않는 야생(野生)의 난동에서 인간의 할 일이란 별로 많지가 않다. 편안히 잠재워주거나 길길이 날뛰다 제 풀에 지쳐 쓰러지기를 기다리거나 도망쳐나간 울타리 너머의 잔혹한 맹수의 먹이사슬이 되어 생태계의 질서에 일조하기를 기다리는 것 정도일 것이다. 한 마디로 인간인 우리는 무기력하고 때문에 가슴이 미어 터질 듯 답답해지는 것이다.

이 땅의 정치, 좁게는 이번 12월의 대선을 바라보면서 답답하고 가슴 미어지는 것이 어디 한 두가지 일 것인가? 병역의혹설에, 대출금의 대북송금설에, 주가조작설에, 기양건설의 비자금 유입설에, 날씨에 관계없이 날라 다니는 철새이동설에, 도청폭로와 공작설에, 나라가 온통 설왕설래(舌往舌來)하며 양치질 한 번 안한 더러운 혀들로 넘쳐난다. 우리의 겨울이 마치 농밀한 키스씬의 계절인 것마냥 눈을 뜨면 혀를 내밀고 빨아대기 바쁘다. 그 너저분한 오랄 테크닉의 진수를 보여준 이인제의 횡수설(橫竪舌)을 보면서 생각의 창고에 의식적으로 쳐박아두었던 몇 개의 상자를 꺼내고야 만다.

노무현 - 감성의 지지 이성의 번민

나는 우선 노무현지지자임을 밝혀야겠다. 이미 많은 분들이 알고 있는 바를 굳이 서두에서 밝혀야하는 것은 나의 고민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정치인(온갖 술수와 모략이 난무하는 정치의 세계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비롯되는 것으로 사실 이 때문에 생기는 고민은 거의 해결 불가능한 것임도 고백해야 한다. 그를 지지함에도 내가 번민해야 하는 것은 소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정치행태와 혼재되어 있는 이념의 불확실성, 그로 인한 가치의 혼돈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내 번민의 일단은 잠시 뒤에 논하기로 하고 이 글에서 다루게 될 단일화의 진면목과 몇가지 주제들에 대한 내 입장을 피력하기 위하여 노무현을 지지하는 이유를 밝히는 것으로 글을 시작한다.

이성과 논리와는 별개로 감성적으로 나는 노무현이 좋은 것이다. 그와 같은 정치인을 일찍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정해진 혹은 정해놓은 그 길을 꾀부리지 않고 걸어가는 그가 거의 무조건적으로 좋은 것이다. 이 비논리적인 나의 외사랑이 비난의 대상이나 소재가 되어도 상관없다. 나의 마음이 그러하니까.

왜 그가 무조건적으로 좋은 것인가? 이 대답을 위하여 언젠가 읽은 적이 있는 ‘한겨레 21’의 기사 일부를 인용해야겠다. 김은형 기자인가 하는 분이 노암 촘스키와 더불어 행동하는 대표적인 지식인 하워드 진(Howard Zinn, 80, 보스턴대 명예교수)의 저서 <달리는 기차에 중립은 없다>(이후 펴냄)를 설명한 그 기사(작은 싸움이 꿈을 이룬다)에서 하워드 진은

“사회정의를 위한 운동에 참여하는 많은 이들이 받는 보상은 미래의 승리에 대한 전망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서 있다는,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작은 승리를 기뻐하고 가슴 아픈 패배를 참아내는 과정에서 얻는 고양된 느낌이다-함께 말이다”고 말한다.

김기자는 그가 여전히 폭력적이고 불의로 가득찬 세계에서 낭만적 이상주의자라는 비판에 개의치 않으며 유쾌한 낙관주의자로 남을 수 있는 것은 인간에 대한 믿음 때문이라고 말한다.

“역사의 모든 일은, 일단 벌어지고 나면, 마치 정확히 그런 식으로 일어나야만 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역사의 불확실성을, 뜻밖의 일이 벌어질 가능성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바꾸는 데서 인간행동의 중요성을 확신한다” 하워드 진의 말이다.  또한 그는

“변화의 과정에 참여하기 위해 거대한 영웅적 행동에 착수할 필요는 없다. 작은 행동이라도 수백만의 사람들이 반복하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는 냉소만이 세상을 버티어나가는 방법이 된 것처럼 보이는 지금까지 “희망을 고집”하며 싸우고 있다는 것이다.

이게 내가 노무현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다. 이인제처럼 추악하고 더러운 거짓말을 일삼으며 자신의 소아적 영웅주의를 포장하지 않는 것, 노사모가 작은 싸움을 반복하며 꿈을 이루어나가는 것에서 내가 희망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 이것이 내가 앓고 있는 편집증의 증상이다.

노무현과 권영길 혹은 왼편의 세상을 위하여

마찬가지 이유로 나는 노무현을 지지하면서 또한 민노당과 권영길을 좋아하고 그들에 대하여 우호적이다. 아니 나의 정치적 선택이 언젠가는 그들에게 행해지기를 바란다. 모순일까? 나는 그동안의 내 글에서 혹은 공식 비공식의 자리에서 노무현의 실험은 시작일 뿐이라고 분명하게 말하였다. 그렇다. 실험이다.

왜냐하면 내게 있어 노무현은 텅비어 있는 왼쪽의 황량한 들판에 건강한 진보의 성을 쌓는데, 그 길을 가는 와중에 만나는 수구냉전 세력의 왜곡된 반공 이데올로기라는 그 음험한 무저갱의 강을 건너는데 필요한 다리일 뿐이다. 세찬 수구의 급류를 무사히 건너게 해 줄 구명줄이고 짚고 건너야 할 징검다리일 뿐이다.

때문에 나는 그 실험이 무사히 행해져서 반세기내내 국민들을 위협하고 혹세한 수구들의 이념 농간질에도 두려움 없이 당당히 왼 편의 새로운 세상으로 우리들 모두가 건너갈 자신감을 얻기를 바라는 것이다. 노무현없이 ‘권영길과 함께 민노당과 함께 바로 건너면 될 것을 왜 노무현이를 앞장세워 한 참을 기다리게 하는가’ 하고 물으실 분도 있을 것이다. 무작정 건너면 ‘그 왼편의 땅에 우리의 도시가 건설될 것인가’ 하고 나는 반문한다. 그렇게 쉬운 것이었으면...

수구들의 영악한 계산과 철저한 차단으로 우리의 왼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우리의 새로운 세상을 건설할 물자도 인적 자원도 거의 전무하다. 우리의 시도는 급진이 되고 용공이 되고 건너면 바로 김일성이 김정일이 6.25 내전의 북괴뢰집단의 지뢰와 대포동 미사일과 핵개발의 공포만이 거기에 있을 뿐이다.  

우리가 깨부셔야 할 것은 수구혈통들이 세습하며 들이댄 총칼의 공포, 자신들의 권력승계를 위하여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 냉전과 전쟁의 공포, 적화통일될 것이란 유령의 공포다. 전후 복지국가의 등장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사회주의를 모태로 하여 성숙하여 왔다. 즉 자본주의에 대한 끊임없는 윤리적 비판과 그 대안으로 제시된 사회주의 사상은 논의 자체가 금기시되고 거세된 세상을 우리는 살아왔다.

이는 곧 공산정권(북의 노동당)을 편드는 간첩활동으로 조작 되어왔다. 그 강고한 수구의 벽을 깨부수기 위하여 우리는 많은 대중의 에너지가 필요하고 응집되고 팽창된 의지의 폭발력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처럼 피식피식 터지는 녹슨 진보의 뇌관으로는 저들의 방어벽에 흠집내기도 버겁다. 그렇다고 전혀 의식화될 마음이 없는 대중의 무지와 무관심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누군가는 대중의 잠재력을 일시에 폭발 직전의 팽창력으로 압축하여야 한다.

아직 수구의 사력댐(소양감 댐같은)에 구멍을 낼 대중의 핵에너지는 팽창되어 있지 못하다. 잔혹하고 치밀한 수구의 횡포를 끝장내야할 우리들이 연일 싸우고 있는 꼴이 나는 안타깝다. 권영길과 민노당에게 대선에서 자신의 길을 버리라 말하지 않겠다. 다만 한나라당 민주당을 욕할 지언정 이회창 노무현을 기계적 양비론으로 까뭉개면 그것은 각개전투를 기반으로한 분,소대 전술임을 명심하기를 바란다.

‘돌격 앞으로’ 하며 각개약진으로 깨부술 수 있는 수구의 진지가 아니다. 그들의 가공할 화력은 세상의 구석구석에 교묘하게 위장되어 숨겨져 있다.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모의하기도 전에 그들의 밀정들에게 체포되어 구금되고 고문 당하며 비명횡사하였다. 그 잔혹한 보복은 조중동을 비롯한 선전지의 농간으로 늘 정당화 되었고 일반 대중은 지금까지 그렇게 믿고 있다.

노무현 지지자들과 지지논객을 참칭하는 자들에게도 말한다. 속 보이는 감언이설과 상황의 논리는 정치인의 것이다. 정치인은 정권을 잡고 자신의 정치적 야욕 혹은 신념의 실천을 위해 늘 현실이란 것에 기대고 상황이란 것과 타협한다. 때문에 인간이 철새의 알을 빌어 태어나고 잘난 주둥아리로 짹짹 거린다. 그것은 정치인의 것이지 진실을 말해야하는 글쓴이의 것이 아니다.

차라리 선동하라. 진실이라 우기며 조악한 논리로 부끄러움을 정의롭다 말하지 마라. 나는 노하우에 기명 칼럼을 쓰고 있고 대선까지 그 이후에도 쓸 것이다. 그것은 선동이다. 왜냐하면 노무현 지지자로서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를 득하기 위한 가치에 충실하게 복무하기 위하여 그 곳에 어울리는 글을 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 진실한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다. 그것이 무엇이 나쁜가? 부정하지 않다하여 그것이 진실한 것인가? 아니다. 단일화에 대하여 말하면서 보충하기로 하고 노무현 지지자들에게 간절히 바란다. 민노당과 권영길과 왜 싸우는 것인가? 노무현은 민주당의 대통령후보가 됨으로써 집권을 위해 대선후보로서의 승리를 위해 그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성정과 색깔을 훼손 당하였고 또는 스스로 탈색하여 왔다. 이것이 정치인 노무현의 딜레마다.

그의 변신과 색바랜 원칙은 선거를 치러야하는 정치인 노무현으로서는 무죄다. 그러나 내가 사랑한 대상으로서는 유죄다. 나는 그 때문에 상처 받고 아파한다. 훼손당한 원칙과 상식을 그래도 지켜줄 수 있는 이들은 바로 우리들이다. 그의 정치적 행보를 지지할 지언정 무조건 올바르다 말하는 것은 그에게 닥쳐올 수많은 요구(가령 국민통합 21측의 이런저런 요구들)들에 대하여 그의 개혁성을 견지하지 못하도록 그를 나약하게 만드는 입에 단 사탕에 지나지 않는다.

끊임없이 그를 비판하며 그의 정치가 오염되지 않도록 눈을 부라리며 그를 쏘아보는 것이 수구에 물든 민주당의 노무현을 지켜내고 집권에 상관없이 그의 지난한 도전을 우리가 원호하는 길이다.

단일화 - ‘판도라의 상자’

노후보와 정대표는 여론조사라는 이상한(결코 정상적이라 말할 수는 없다) 방법으로 단일화를 성취했고 노무현후보가 민주당과 국민통합21 연대의 단일후보가 되었다. 아전인수격의 사설을 덧붙이자면 여론조사를 들고나온 것은 정몽준대표였다. 이상한 요구에 굴복한 노무현의 선택은 차라리 민주당의 선택이라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동안 보여준 민주당의 행태를 보면 나의 판단은 설득력은 얻는다.

단일화는 왜 했어야만 했을까? 이런 저런 낮 간지러운 변명은 그만 두자. 정권을 획득하기 위하여, 즉 이회창에게 붙어보기도 전에 나가 떨어지는 불행한 유산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나라당에서는 야합이란다. 정책과 이념이 맞지 않는 당과 사람이 만났으니 야합이라는 것이다. 이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상무식한 소리다.

왜냐하면 선거란 것이 정권을 획득하기 위한 절차이고 정당이란 것이 정권획득을 위한 정치적 결사체라는 점을 인정하면 선거에 이기기 위해 둘이 손잡았다면 이는 연대라는 것이다. 아니라도 상관없다. 분명한 것은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단일화를 했고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선거에 질 것 같은 한나라당괴 이회창에게 문제가 될 뿐이다.

색깔이 닮지 않은 유럽의 정당들이 정권획득을 위해 선거공조 혹은 연대를 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가깝게는 일본에서도 그 연대의 결과로 1994년인가에는 야당으로 전락한 보수정당 (전후 55년을 일당지배했던)자민당이 일본사회당, 신당 사키카케 등을 끌어들여 연립정권을 세운 적이 있다. 이것이 선거를 통한 정치의 가변성 또는 역동성이다.

함께 손잡으면 야합이라는 논리는 야합의 원조(삼당합당 등) 한나라당이 ‘누워서 침뱉기’하며 떠들 성질의 것이 아니다. 국민 대다수가 이를 지지하고 그 결과로 단일후보 노무현의 지지도가 욱일승천하는 것을 보면 국민의 위임한 권력으로서의 통치를 행해야할 대선후보로서는 다른 어떤 논리보다 깊이 명심해야할 부분이다.

단일화를 애써 미화하고픈 생각은 없다. 까놓고 말해 민주당이나 노무현이나 홀로서기를 할 수 있었다면, 마찬가지로 정몽준이나 국민통합21이 능히 과반수의 지지를 확보할 자신이 있었다면 단일화를 했겠는가? 안했을 것이다. DJ정권의 무능과 부정부패,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젼과 학습이 덜 된 정상배들로 우글거리던 민주당의 힘으로는, 특히나 제 집 주인도 몰라보고 물어 뜯는 정견(政犬)들이 짖어대는 그 집에 국민들의 발길이 뜸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그러니 노무현인들 백성들이 부르는 난전으로 나서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노무현답지 않음과 개혁성이 부족한 의심을 받으며 단일화를 수용하였을 때, 나의 이성은 멱살 잡혀 헉헉 대면서도 감성의 메아리는 ‘받아 들여야지 수긍해야지’하며 한 쪽 가슴에서 울리고 있었다. 이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넘어야할 수구의 산맥과 깨부셔야할 냉전의 이데올로기가 그리 험하고 힘에 겨운 거악이라면 ‘그렇게 해서라도 맞붙어 마침내 승리해야지’하였다. 그러면서 나는 곰곰이 생각하였다. 왜 내가 이토록 노무현을 벗어나지 못하며 그런 감성과는 상관없이 이성적으로는 민노당을 또한 그리워하는지 그리고 왜 이회창의 한나라당을 용인할 수 없는 것인지를 오래도록 고민해보았다.

‘모든 선물을 받은 여인’이란 뜻의 판도라(Pandora)는 제우스신으로부터 상자 하나를 선물 받는다. 제우스는 판도라에게 상자를 선물하면서 절대 열어보지 말라는 경고를 한다. 에테메테우스(나중에 생각하는 사람)의 아내가 된 판도라는 불현듯 그 상자가 궁금해지고 호기심을 참지 못한 판도라는 그 상자를 열어본다. 익히 알고 있듯이 열어본 그 상자 속에서는 슬픔과 질병, 가난과 전쟁, 증오와 시기 등 온갖 악이 쏟아져 나오고 이에 놀란 판도라가 황급히 뚜겅을 닫음으로해서 ‘희망’은 빠져나오지를 못하였다.  이로부터 인간은 이전에는 겪지 않았던 고통을 영원히 떨쳐 버릴 수 없게 되었으나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간직하며 살게 되었다는 것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판도라의 상자’에 얽힌 이야기다.

인류의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상징하는 ‘판도라의 상자’를 꺼내놓는 것은 단일화가, 또는 노무현식 정치실험의 장이기도한 이번의 대선이 갖는 상징성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단일화를 97년의 DJP연합을 빗대어 성토하는 것은 일견 타당성이 있다. 당시 DJ 또는 그를 지지한 많은 이들이 주창한 명분은 수평적 정권교체, 즉 최초의 권력의 이동이었다.

그 시도는 정권교체라는 옥동자를 분만했는지는 모르나 국민의 정부는 실패하였다. 외환위기의 극복, 6.15 남북정상회담으로 대변되는 햇볕정책과 긴장의 완화 등 국민의 정부는 치적을 내세우고 게이트와 홍삼탕으로 드러난 부정부패를 감추기 바쁜 현정권의 지지자들은 그것을 보약이라도 되는양 내내 달여먹고 있는 형편이다.

역사가 인정해줄 것이란 대목에서는 차라리 눈물겹다. YS의 시계를 들먹이던 노무현이 미웠던 까닭은 바로 이런 태생적 한계를 지닌 정권의 몰락을 태어나 지금까지 숱하게 보아왔기 때문이다. DJP연합이 바로 이런 태생적 한계 때문에 실패하였고 단일화가 자칫 그 ‘한계의 정치’를 답습할 위험에 노출 되었다면 그래서 단일화가 불건전한 것이라면 한나라당은 더욱 입을 닫고 정권의 획득은커녕 지금 이순간 이회창은 사퇴하여야 한다.

반세기 내내 독재와 인권탄압과 고문과 살인을 저지른 자들로 가득차 있는 곳이 바로 한나라당이 아닌가? 한 때는 민주계요 개혁적이라던 인사들까지 이제는 한나라당의 매파들에 휘둘리며 꼭두각시춤을 추고 있다. 손 발이 쇠줄로 연결되어 조종되는 인형으로 전락한 그들을 보면서 내가 이회창의 한나라당에 대하여 우호적일 수 없는 이유를 알았다. 또한 대선이 노무현과 이회창의 대결이 아니라 땅을 두 동강내고 민족을 두 쪽으로 갈라놓고 우리들 마음까지 적과 아로 갈라놓은 이데올로기 망령과의 건곤일척의 승부라는 생각을 굳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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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묘지에 파묻어야할 이념의 잔해들에 대한 논의는 잠시 뒤로 미루어두면서 일단은 단일화의 의미와 과제에 대하여 간략히 서술하지 않을 수 없다. 단일화의 모양새가 어찌 되었든 그것은 변화와 개혁을 바라는 국민들의 요구였다. 노풍 정풍의 실체는 누가 뭐래도 낡은 정치와 그 유산의 정리를 바라는 국민들의 욕구였고 변화와 혁신을 향한 갈망이었다.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아니 설명할 필요가 없는 정치를 업으로 삼지 않는 가장 일반적인 대중의 열망의 발현태가 단일화였다.

단일화하여 경쟁력을 갖추고 국민이 준 그 경쟁력으로 반세기내내 이 땅을 지역갈등과 부정부패로 골병들인 수구혈통의 권력세습을 끝장내라는 국민들의 소박한 염원이였다. 국민의 요구가 이리 단순할진대 달리 어떤 이론의 치장과 논리의 뒷받침이 필요할 것인가?

그러나 단일화 이후 보여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우리는 국민들의 소박한 변혁의지가 정치인들의 욕심과 아집으로 변질될 위험한 징후를 포착한다. 대승적 결단으로 추앙받던 정대표의 승복이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구차한 선행조건으로 훼손되는 것을 본다. 정치인이기에 그가 거느린 자당의 식구들의 장래에 대한 보장의 측면에서 어쩔 수 없는 정치인으로서의 한계임을 나는 인정한다.

그럼에도 합당이니 개헌이니 하는 성급한 ‘잇속 챙기기’를 보면서 내가 우려한대로 단일화를 통해 얻은 것 못지 않게 앞으로 노무현 정치를 단번에 시궁창으로 빠트릴 위험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음을 나는 확인힌다.

단일화가 많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 설득력을 얻는 것은 마치 판도라의 상자 같기 때문이다. 새로운 가치와 전망에 대한 진정한 기대를 훼손하며 이루어진 단일화를 우리가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은 튀어나온 악한 것들과 함께 거기에 남아 있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 열지 못하고 닫아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희망을 끄집어내야 한다. 그것을 열 수 있는 열쇠는 우리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

단일화가 이미 이루어진 시점에서 그 불건전함과 비상식적임을 이제 논하는 것이 중요한가? 또는 그것의 의미를 과대포장하고 불필요하게 치장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강건너 불구경이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수구의 방화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완벽한 진보의 방재시스템이다. 이를 담보하는 것은 반복적 학습과 예방을 위한 철저한 감시다.

반복적 학습이란 내가 각성하고 내 곁이 각성하도록 돕고 내 주변이 이윽고 스스로 진보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며 철저한 감시란 수구당의 한계를 노정한 민주당과 단일화를 수용함으로써 발목잡힌 노무현의 개혁이 뒷걸음치지 않도록 질타하고 채찍질하는 것이다.

2002년 대선 - 수구의 과녁을 겨냥하여 내일을 향해 쏴라!

앞에서 간단히 언급한 것처럼 이번의 대선은 한 인물의 지도자를 선택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를 윽박지르고 강박하며 자신들의 노예로 부린 수구들의 지배를 끝장내야 하는 절체절명의 승부다. 수구와의 싸움이라기 보다는 그들이 우리를 기망하고 혹세하며 압제하는데 사용하였던 반공 이데올로기로 대변되는 수구냉전의 귀신을 영원한 망각의 강 레테에 수장하는 성스러운 장례의식이 되어야 한다.

이인제가 탈당하며 내뱉은 “급진세력의 집권을 막고 그들로부터 국민을 구해내기 위한 성스런 결단”이라는 망언을 들으며 나는 우리 사회의 귀신놀음이 얼마나 지독한 뿌리와 질긴 악연을 이어가고 있는지 실감하였다.

남북이 경협을 하고 아무나 금강산을 오갈 수 있는 지금 이 시점에서도 이인제 같은 이에게는 반공은 정치적 자산이며 무기다. 물론 김정일의 북한 정권이 호전적이지 않다거나 우리의 의도대로 호락호락 협조할 우호적인 정권이란 것은 절대 아니다. 분단 상황의 고착화를 지향하던 정치배와 미쏘의 정략적 이해는 우리의 역사를 분단의 질곡으로 몰아 넣었고 그 분단상황은 남이나 북이나 기형적인 지배구조가 지금까지 견고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가장 강력한 이념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남침의 위협과 불온한 사상의 감염을 공갈치는 것만으로 민중의 분노를 가강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도록 모든 교육은 행해졌다.

이처럼 분단을 명분으로 반공논리에 종속된 한국사회에서 사회주의의 이념이나 사상은, 더욱 평등한 국가체제 형성을 위한 사상적 기원으로서가 아니라, 체제 전복세력 혹은 급진 용공세력의 불순한 이념으로 매도 되거나 오해를 받고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탄압을 받았다기 보다는 군벌독재세력과 수구친일세력 냉전기득권세력들은 구실을 만들어 박해하였고 족벌신문들은 이념의 광기라 매도하며 국민대중을 우매화 정신적인 화석화를 위하여 활자를 생산하기에 바빴다.

사회주의에 대한 이러한 왜곡된 인식은 냉전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반공을 전면에 내세운 미군정의 통치와 정통성 없는 역대 쿠테타 정권의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반공 혹은 멸공의 이념으로 변질되어 확대 재생산 되었다. 이 형체없는 괴물의 마수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고 면역력이 생겼다고 생각하게된 21세기에, 러시아에서 공산당이 몰락하고 중국이 개혁과 개방의 물결로 세계시장을 위협하고 있는 탈냉전 경제전쟁의 시대에 그래도 한 때는 대통령을 꿈꾸던 인사의 입에서 아직도 반공냉전의 정치적 수사가 뱉어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이번의 대선에서는 반드시 냉전의 이데올로기를 깨부수어야 한다고 다짐한다.

더 이상 민족의 운명과 국가의 장래를 위한 것이 아닌, 수구의 집권과 권력의 세습,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독약으로서의 반공이데올로기를 가지고 국민을 세뇌하며 정치적으로 농단하는 인간말종들의 번식을 영원히 끝장내기 위해서라도 우리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건강한 시민들은 힘을 아끼고 연대하여 저들 수구의 책동을 한 방에 날려버릴 거대한 팽창력, 무시무시한 대중의 핵에너지를 모아야 할 것이다.

반공 이데올로기의 한복판을 겨냥하여, 수구의 심장을 가늠하여, 12월 19일, ‘내일을 향해 쏴라’

* 이 기사는 하니리포터에도 게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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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12/03 [05:4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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