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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에 감전된 노무현의 신국가주의
[비나리의 초록공명] 정책과 철학과 꿈,프로메테우스인가 스팔타쿠스인가
 
우석훈   기사입력  2006/02/06 [11:17]
“정책대안”이라는 용어를 처음 들은 것은 현대에 있던 시절이었다. 민간기업에서 무슨 정책대안을 그렇게 필요로 할까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어쨌든 정책적인 뭔가에 대해서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 잘 대해주는 분위기였다. 정책이라는 용어는 policy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신비주의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는 용어인 것 같다.
 
어쩌면 운동의 역사적 맥락이 조금은 있을 것 같다. 80년대는 혁명의 꿈을 꾸던 시절이었다. 민민투와 자민투라는 복잡한 이름으로 무엇이 옳은 것이냐는 논쟁들이 있었지만 크게 보면 혁명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또 다른 논쟁과 아주 달라보이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 시절에는 모두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속으로는 전사가 되기를 바라면서 밖으로는 민주주의나 자유라는 이름으로 이것을 외화하는, 두 개의 언어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던 시절이 80년대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한 번쯤 혁명의 꿈을 꾸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을까?
 
어쨌든 혁명이 꿈이었던 시기에는 정부에게 무엇을 하라고 한다거나 혹은 특별한 방향을 만든다는 것은 그야말로 “계량주의”와 비슷할 수 있다. 어쩌면 할 수도 있는 어떤 대안을 찾기보다는 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찾아서 결국에는 혁명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찾아내는 것이 “더 잘 하는 일” 같아 보였던 시기를 다들 살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자본이라는 용어나 요즘은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매판이라는 용어 같은 것들이 그렇다. 그리고 그 80년대의 시기에 집단적인 폭력의 기억 같이 떠다니던 것들이 바로 광주였다.
 
외국에서는 policy라는 용어가 2000년대의 한국 사회만큼 매력적인 용어로 이해되지는 않는다. 물론 하버드의 케네디 스쿨처럼 공무원들이 조금 더 대우받는 그런 기관이나 프랑스의 에나처럼 정책을 집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교육기관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지금 우리나라의 모든 대학의 심지어 대부분의 공대에서도 그렇게 강조하는 것처럼 정책이라는 용어가 맨 앞에 서 있는 것은 아니다.
 
좌파들이 정책이라는 말을 앞에 내세우는 것은 조금은 이해가 갈 수는 있다. 혁명이라는 아름답고도 고혹적인 용어를 꿈으로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 있는 무엇이라도 좀 고쳐서 사용해보자고 생각했을 때에 내세울 수 있는 말이 바로 정책이라는 용어 아니겠는가? 역사의 법칙을 생각하는 사람이 정책이라는 말을 내세운다면 웃기기는 웃기다. 역사가 스스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 움직인다면 정책을 만들거나 움직이게 한다는 것이 별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에 난다”는 아름다운 헤겔의 표현이 사라지고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냉소만이 남아있다면, 잠시 머물다가는 거처라도 단장하고 꾸며서 며칠이라도 잘 살아보자는 소망을 냉소적으로 비웃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인생은 잠시 머물다 가는 소풍과 같은 것이라고 얘기한 천상병 시인이 사라진 다음 이미 사람들은 “피안”이라는 용어나 “역사의 운동”과 같은 것 대신에 “지금 여기”와 “인테리어”라는 용어를 더욱 아름답게 느낀다.
 
우리 사회에 “혁명에 대한 꿈”과 함께 어쩌면 우리 시대의 마지막 로망은 사라져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체 게바라가 타고 쿠바로 떠났던 보트에 대한 로망은 이제 기획사의 광고물로 대체된지 오래이고, 잠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는 “유”가 떼어져버린 “토피아”가 되어버린 셈이다.
 
80년대의 철학은 꿈에 관한 이야기이고, 로망에 관한 이야기이다. 올 것이라고 얘기하면 과학이 되고, 오지 않아도 좋다고 얘기하면 철학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전 세계 어느 나라에도 무슨무슨 전우회들이 우리나라처럼 일종의 “시민단체”로 작동하는 나라는 없다. 지구상에 가장 강력한 군사주의인 시오니즘으로 무장한 이스라엘에서 그러겠는가 아니면 가장 자유가 없다고 미국이 강조하는 북한에서 그러겠는가?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의 극우파는 80년대가 가지고 있던 혁명의 꿈이 잉태시킨 배다른 자식인지도 모른다.
 
박정희 시절에 무슨무슨 전우회가 아니라 “새마을 지도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386세대라는 사람들이 자라나던 그 시대에 우리나라의 극우파들도 같이 자라난 셈이다. 혁명의 꿈이 없다면 우리나라의 극우파는 조금 더 전투적이고 직접적인 인종주의자 혹은 민족주의자가 되었을 것이지만, 사회 한 구석에서 혁명의 꿈이 존재하던 시기에 오히려 무슨무슨 전우회 같은 곳들이 “정책적 대안”이 될 수 있던 사회적 조건 같은 것들이 형성된 셈이다.
 
우리나라는 극좌에서 극우까지 “국가”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과정에 있는 것 같다. 홉스가 “레비아탄(Leviathan)”이라는 상징으로 지칭한 바로 그 존재를 중심으로 우리나라에 만약 철학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면 그 철학적 존재들이 모두 재편되는 과정에 있다. 그리고 온 국민들이 “국가에 대한 사랑”으로 서로의 정체성을 가지고 존재의 이유를 찾기 위한 과정 안에 들어가 있다.
 
국가를 사랑하는가? 국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떠나라... 이게 한국 극우파의 핵심요지인 것 같다. 유럽의 극우파는 조금 다르다. 고전적인 극우파는 유럽 사이에서도 골족이니 게르만이니 혹은 조금 더 들어가면 켈트족이니 하는 각종 신화들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었고, 근대국가의 형성 과정에서 “보편적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민족을 중심으로 경계를 만들고자 하는 극우적 흐름에 반대되는 역사적 힘을 배치하려고 했던 노력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의 공산주의는 그런 면에서는 유럽사회의 극우적 흐름에 대해 반대하던 보편주의의 또 다른 편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차세계대전을 눈 앞에 두고 독일 노동자들은 “국가가 살아야 노동자도 잘 산다”라는 구호로 노동자들이 어떻게 “국제 노동자연대”를 등지고 극우 흐름에 몸을 싣게 되는지를 보여준 첫 번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스팔타쿠스‘라는 용어는 아직도 신성성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
 
프로메테우스인가 스팔타쿠스인가?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의 상징은 과학주의와 생산력주의로 대변되는 공산주의의 꿈이다. 자본주의보다 더 높은 생산능력에서 공산주의가 꽃 핀다는 공산주의의 꿈이 집결된 상징이 바로 프로메테우스이다. 소련보다 늦게 달에 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미국의 발버둥을 조롱하는 용어가 역시 프로메테우스이다. 20세기의 냉전을 관통하는 용어 중의 하나이다.

스팔타쿠스는 노동자들이 어떻게 국가와 손을 잡고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노동자 연대를 무너뜨리게 되는가 그리고 현실세계에서 혁명의 꿈이 어떻게 국가와 손을 잡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로마제국에서 최초로 벌어진 노예들의 반란...
 
그리고 한 여인의 죽음이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 그리고 세계 1차 세계대전
 
한국에서 국가는 무엇인가는 프로메테우스와 스팔타쿠스라는 두 가지 상징 사이에 있다.
 
황우석에게 극우파들이 감동한 것은 전혀 놀랍지 않고, 우파들이 신났던 것도 놀랍지 않다. 이지스함이 동해에 배치된다고 박수치던 사건의 연장선에 있을 뿐이고, 광주에 패트리어트가 배치된다고 감동하던 사건들과 같고, 한국형 탱크와 장보고형 잠수함 아니면 개량행 M16에 대한 박수와 마찬가지이고, 견마형 전투로봇이 곧 현장에 배치된다고 우리의 기술력에 감격스러워하는 것과 마찬가지 사건이다.
 
미국에 DoE라는 기관이 있다. 에너지부 혹은 에너지성이라고 번역되는데, 환경청은 EPA이고 “청”이지만, 에너지는 “부”로 승격되어 있고, 예산과 무게가 비교도 되지 않는다.
 
“전략”이라고 별칭을 하지 않고 60년대 이후 사용되는 용어는 “핵폭탄”을 의미한다. 이 핵폭탄을 관리하는 미국의 부서가 바로 DoE이다. 우리나라도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원자력발전소를 늘리는 것은 핵잠재력을 높이는 것이라는 전략적 판단을 종종 내린다. 물론 원자력을 담당하는 실무부처의 담당관들은 전혀 이런 생각이 없지만, “머리”는 종종 방폐장 마저도 궁극적으로는 힘을 상징하고, 프로메테우스의 상징을 가지게 된다.
 
황우석과 같은 맥락의 사건들이다.
 
자칭 좌파들이 황우석에게 감동하고 드디어 우리도 “새로운 동력”을 찾았다고 하는 사건은 그래서 프로메테우스의 연장선에서 이해할다. 핵폭탄을 지지하는 것과 줄기세포를 지지하는 것은 전체적인 과학사적 맥락과 정치적 맥락에서 같은 사건이다. 미국의 좌파들은 핵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의 많은 좌파들은 황우석을 지지한다.
 
정책적 대안은 “황우석” 같은 것이다. 똑같은 연장선 위에 스마트 원자로가 서 있고, 견마형 전투로봇이 서 있고, 한국형 미사일이 서 있고, 그 에너지를 먹고 “국가에 대한 사랑”이 21세기에 비로서 한국에서 하나의 실체가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거대한 열차의 정면에 서 있던 것이 천성산이고, 그 앞에서 영문도 모르고 부딪힌 것이 바로 지율스님이다.
 
철학, 과연 21세기 대한민국에 “국가에 대한 사랑”으로 애국심에 감동해서 쓰러지는 않을 수 있는 철학이 있는가?
 
노무현 대통령은 가끔 깜짝놀랄 정도로 시적 표현을 정말로 과학적으로 사용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황우석에게 감전되었다...”
 
혁명에 대한 꿈으로 젊은 시절을 보냈던 나와 같은 또래들에게 보내는 프로메테우스적인 생산력주의가 “국가에 대한 사랑”과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를 가장 시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다.
 
“감전되다...”
 
심장이 마비된 사람에게 전기충격으로 끊겨진 숨을 불어오기도 하지만, 좌파들이 감전된 국가에 대한 사랑은 “뇌”를 마비시킨다. 항거할 수 없는 국가주의는 박정희가 만든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정책적 대안”을 내어놓으라는 말 속에는 너와 나의 충성심이라는 공통분모가 그 어느 때보다도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작게는 국가를 운영하는 정부를 무섭게 보는 사람은 없지만, 정부가 아닌 “국가를 운영”한다는 감격에 감전되어 버린 셈이다.
 
너의 꿈이 있다면 국가를 통해서 그 꿈을 실현해...
 
극우파는 국가를 감격스럽게 부여잡고, 부패한 우파들은 그 국가에 붙어서 이리저리 살점을 빼어내면서 자신의 배를 불린다.
 
열린우리당의 자칭 좌파들은 혁명없이 “국가”를 손에 쥐고 있다는 감격에 감전되어 어쩔 줄을 모르고, 행복에 겨워하는 것이 지금 바로 이 순간의 자화상이 아닐까한다.
 
분단된 조국에서 잉태된 80년대 혁명의 꿈이 결국 국가에 대한 사랑으로 끝이 나버렸는가라고 질문하면 “2만불 국가”에 박수치고 감동하던 순간 우리나라에서는 철학이 사라져버렸고 남은 것은 정책 밖에 없게 되었다. 뒤돌아서서 맥락을 살펴보자. 황우석에게 지원되던 돈에 동그라미 2개가 더 붙은 시점이 바로 “2만불 국가”라는 국정목표를 자칭 좌파정부가 제시하던 순간이다.
 
“폭주”라는 개념을 쓴다면 21세기 대한민국은 극우파와 좌파까지 “국가에 대한 사랑”으로 폭주하고 있는 셈이다.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 된 대한민국이 “배고파”라고 외치면서 폭주하고 있는 것이 현재 우리의 자화상인 셈이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여성주의가 필요하고, 더 많은 소수자에 대한 대변이 필요하고, 그리고 더 많은 “전쟁하지 않을 이유”가 필요하다. 그리고 패권주의로 치닫지 않을 또 다른 철학이 진정으로 갈망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지금은 정책이 정말 필요한 시점이 아니라 정책으로 구현될 “철학”이 진정으로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
 
“잘 사는 국가의 꿈” 외에는 이 땅에는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는가? 진정으로 없는가?
 
나는 생명과 평화가 꿈이다. 그래서 “전쟁 없는 사회” 혹은 “전쟁 없는 국가”를 구현하고 싶다. 그러나 이런 꿈을 꾸는 사람은 우리나라에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의 머리에는 이제 “일전 불사”가 들어가 있는 것 같다. 잘 살기 위해 필요하다면 언젠든지 한 판 붙겠다. 이 폭주를 제어할 안전장치가 필요한 것 같은데, 1년 전에 만약 황우석을 막아섰다면 1차세계대전의 참전 열풍 앞에 노동자들을 막아섰던 로자 룩셈부르크와 같은 운명이 되었을 것 같다.
 
앞으로 5년 뒤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혹은 10년 뒤에는? 문제가 해소된 것이 아니라 더 큰 에너지로 달려나가고 있다. 과연 이 시대의 철학은 무엇인가?
* 글쓴이는 경제학 박사,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성공회대 외래교수, 2.1연구소 소장입니다.

* 저서엔 <88만원 세대>,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 <아픈 아이들의 세대-미세먼지 PM10에 덮인 한국의 미래>, <조직의 재발견>, <괴물의 탄생>, <촌놈들의 제국주의>, <생태 요괴전>, <생태 페다고지>,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등이 있습니다.

*블로그 : http://retired.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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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2/06 [11:1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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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정모라 2006/02/06 [14:50] 수정 | 삭제
  • 노무현을 어떻게 보느냐는 여러 관점이 있을 수 있지요. 큰 틀과 자세한 미시적인 분야에서 조명하는 시각들이 다를 겁니다. 노무현 정권도 끊임없이 변질되어 왔으니... 어쨌든 이런 글들이 많이 쏟아져 나와 다양한 담론이 진행되길 희망해 봅니다.

  • 배고픈넘 2006/02/06 [14:00] 수정 | 삭제
  • 87년 소설가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김용옥교수의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제시한 `열린 민족주의`를 실천한 결과가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럼 노무현 이후의 우리나라를 끌어갈만한 담론은 무엇일까?

    2004년 말 신영복교수는 `강의`에서 서구문명의 근본 사상인 존재론에서 이제는 벗어나 동양 사상인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자는 관계론을 제시했는데 요즘 최고의 가치로 평가되는 개인의 권리인 `인권`을 넘어서는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미국의 진보학자 촘스키외가 주장하는 최고의 가치인 `연대`와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다.

    그라구 좌파 진보에게 한 마디하고 싶다. 보수 우익인 노무현을 좌파라고 하는 사람들 보면 참 웃긴다. 백범 선생을 제일 존경한다는 사람이 좌파가 될 수 있나? 백범 선생이 좌파인가?

    노무현은 우파 민족주의이고 이 나라에 여짓껏 제대로된 보수 우익이 없었던 시대 상황 때문에 기회주의 수구보수가 붙여준 딱지로 좌파 진보로 분류되어 쟤는 내 편인데 왜 내말 잘 안들어 주냐고 비판이 아니라 비난을 하는게 요즘 진보 좌파의 놀이이고 시각이다.

    어이 없지만 노정권은 소득 2만불을 달성할 것같다. 달러의 가치가 자꾸 떨어져서 노무현이 퇴임할 때 쯤 되면 국민 소득을 2만불 만든 대통령이 될 것같다. ㅅㅂㄹ ㅇㅂ 재미있는 세상이다.

    우석훈씨가 걱정하는 10년 후의 세상은 나 역시도 걱정이다.

    10년 후의 중국은 박정희가 죽을 당시의 우리나라 국민소득을 갖게 되어 중국 사회는 내부의 갈등으로 상당히 혼란스러울 것이고 미국은 아마도 이란을 이라크처럼 먹어 치우고 다음 대상을 고르고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앞으로 10년에서 30년 사이에 어떤 형태로든지 미국과 중국이 낀 대규모 전쟁이 일어나리라고 생각되는데 이걸 막을 방법이 없다.

    수 천년의 역사에서 보면 전쟁으로 모든게 피폐해지고 남은게 별로 없을 때 인간의 관계는 좋아지고 또 금방 잊어 버리고 열심히 싸운다.

    인간의 관계를 사랑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지랄 같지만 어쩌겠나.

    역사에서 지식민 배웠지 지혜를 배우지 못하는 인간들이 힘 있고 다수인 인간 사회의 숙명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