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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차민주주의 완성과 자본주의의 도전
[비나리의 초록공명] 절차는 외형적으로 완성,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석훈   기사입력  2006/02/03 [11:50]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공식적인 정의는 몇 가지가 있는데, 이윤극대화를 위한 동기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회라고 하면 왈라스의 의미에서의 일반균형에서 자본주의를 정의하는 방식이고, 생산과 소비가 무정부적으로 이루어지는 관계라고 한다면 맑스가 정의한 자본주의에 조금 가깝다. 불어판 자본론에만 나온 “위험한 도약”이라는 단 한 번 나온 표현이 가지고 있는 학술적 중요성은 생산과 소비 사이에 아무런 원천적인 조율이 없는 것이 자본주의라고 정의하는 방식일 것이다.
 
한국 사회가 언제부터 자본주의 사회였는지에 대해서는 끝나지 않은 논쟁같다. 전근대라는 표현과 탈현대라는 표현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우리 사회이다. 비슷한 말의 두 표현이지만 의미는 정반대이다.
 
황우석의 난자로 표현해보자. 족히 2,000개는 넘겼다고 사람들이 추정하는 황우석이 구한 난자에 이 질문을 접목해보자. 전근대라고 표현하면 아직 정상적인 선진국들이 생각하는 정도의 여성에 대한 인권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사회라서 그렇다고 하는 말이 된다. 더 높은 국민소득이 생겨나면 전근대적인 이 여성 비하와 여성인권에 대한 몰이해가 사라질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만약 이 사건을 탈현대라고 얘기하면 조금은 다른 식의 얘기가 전개된다.
 
이미 이 사회는 자본주의라는 것을 충분히 겪었고, 국민들이 돈이 뭔지를 잘 알고 있고, 이 시스템에서 어떻게 해야 편해지는지를 알고 있다는 식의 얘기가 전개된다. 국민소득의 문제로 이 문제는 풀리지 않고, 새로운 문제가 확대재생산될 것이라는 방식으로 얘기가 풀려나간다.
 
현재의 모순이 과거가 청산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인지 새롭게 재생산되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 여기에서 기준이 될 것이다.
 
대체적으로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이 절차적인 민주주의가 해결되지 않아서 생겨난 것이라고 대체적으로 87년 체계를 만든 것 같다. 87년 체계에 대한 불만들은 민주주의 절차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것이라고 이해하게 만든다. 주의를 돌아보면 아직 우리는 분단된 국가에서 살고, 미국이 전시군사작전권을 넘겨주지 않은 나라에서 살고, JSA라는 영화가 보여주듯이 택도 없이 황당한 국경을 아직 유지하고 있다.
 
논리적으로만 따져보면 절차 민주주의가 완성되면 한국의 자본주의가 당면하는 문제들을 상당히 풀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절차라도 제대로 해보자고 했던 것과 유사하다. 전두환과 노태우 시절을 살았던 나의 세대에게는 아직도 이 질문은 당면한 질문이다. 검사와 경찰을 믿지 못하고, 변호사에게 혐의를 두고 있는 시대 인식의 근본에는 절차라도 제대로 되면 자본주의 내에서라도 상당히 살만한 사회가 이루어지지 않을까라는 고민이 숨어 있다.
 
열린우리당을 최대한 좋게 이해한다면 이러한 절차적 민주주의를 완성시킨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흠결과 문제점은 있겠지만, 노무현 정부의 가장 큰 의미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형식적으로는 완성된 최초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포함한 내 또래의 사람들에게는 있는 규율이라도 제대로 지키자는 것만이라도 가슴 설래일 정도로 벅찬 도전인 것이 사실일 것이다.
 
문제가 벌어진 것은, 자본주의의 문제를 푸는 것이 절차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사실일 것이다.
 
절차 민주주의의 한 정점에 섰던 노무현 대통령이 “2만불 경제”라는 말을 듣고서 눈이 번쩍 떠졌다는 말은 대단히 상징적인 말이다. 황우석으로 대변되는 “국익”에 이 절차 민주주의가 제대로 항변한 번 못해보고 무너졌다는 것 역시 상징적인 일이다.
 
민주주의가 자본주의를 제어하는가 혹은 완성시키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절차 민주주의의 관점에서는 그만큼이라도 제어하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고, 그런 소망들이 의미가 있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분명히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라크 파병은 절차적으로 문제가 있는가? 별로 없다. 다만 한국 사회의 발전의 목적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 그리고 도대체 이제 무엇을 가지고 논의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준 사건 같아 보인다. “국익”이라는 새로운 질문이 공개적이고 적나라하게 던져진 사건이 내 기억 하에서는 이라크 파병 때의 일이었다.
 
절차 민주주의가 적어도 형식적으로 완성된 상태에서 사람들은 조금 더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민주주의 절차에 대해서 익숙해져 있었고, 파병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역시 국익으로 그것은 아니라고 얘기하던가 아니면 형식이 아니라 “무엇인가” 내용을 가지고 반대해야 하는 상황에 놓은 최초의 사건이라고 나는 기억한다.
 
이걸 예전 같았으면 이데올로기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지금 우리 사회는 그걸 “가치 지향”이라고 부른다. 가치 지향은 절차 민주주의와는 조금은 궤적이 다르다.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라는 새로운 질문에 해당한다.
 
절차는 자본주의와 그리고 현재의 “강화된 신자유주의”와 아주 친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간 지난 3년 간의 시스템이 양극화라고 요즘 사람들이 쉽게 표현하는, 그러나 규정하기 어렵고 메카니즘도 밝히기 어려운 그런 사건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한국 자본주의에 대해서 새로운 질문이 던져진 셈이다. “내용은?” 혹은 “당신이 바라는 것은?” 이건 토론을 한다는 것이나 절차적인 합리성을 만든다는 것과 전혀 새로운 종류의 질문이다. 이 질문 과정을 통해서 한국 자본주의가 그래도 인간적인 모습을 가질 것인가 북유럽식의 사민주의의 길을 걸을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한국식 궤적을 가질 것인가, 이런 한 바퀴 돌지 않는 질문들이 지금 터져나오는 셈이다.
 
절차 민주주의 이후의 시대에 한국 자본주의를 어떻게 운용하거나 수정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 있는 셈이다.
 
절차는 외형적으로 완성되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질문을 인간의 말로 바꾸면 청계천은 어쨌든 도시공학적으로 복원되었다. 어쩔 것인가? 이 질문과 같아 보인다.
* 글쓴이는 경제학 박사,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성공회대 외래교수, 2.1연구소 소장입니다.

* 저서엔 <88만원 세대>,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 <아픈 아이들의 세대-미세먼지 PM10에 덮인 한국의 미래>, <조직의 재발견>, <괴물의 탄생>, <촌놈들의 제국주의>, <생태 요괴전>, <생태 페다고지>,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등이 있습니다.

*블로그 : http://retired.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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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2/03 [11:5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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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학찬 2006/02/03 [12:41] 수정 | 삭제
  • 한겨레 고유한 민족전통의 설 명절 잘 보내셨는지요? 못가는 신세 고향이 어디냐고 물
    으신다면 발길 닫는 곳이라 웃어 보이죠. 누구나처럼 만나는 반가움과 헤어지는 아쉬움
    속에 오늘도 그날처럼 분주한 일상으로 삶과 맞닥뜨려 씨름해야 하는 운명이기에 '범사
    에 감사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18)'의 의미를 통찰할 줄 아는 '인물과 사상'이시길 소
    망합니다.

    저 역시 때가 때인지라 아주 오랜만에 지인을 만났습니다. 보건복지부장관 임용 내정으
    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유시민의원이랑 일면식도 없는 59년생 동갑내기인 목회자입니다.
    마침 설날이 일요일인 주일인지라 우리당도 아니요 한나라당도 아닌 진짜배기 당중의 당,
    '예배당'에서 절대자에게 머리 조아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 왠Girl, 교회소식지인 주보에 글자 하나 틀리지않게 '청와대- 속옷 20벌 보내왔습
    니다'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 오더군요. 코딱지만한 교회에 왠 청와대? 무척 궁
    금했습니다. 예배가 끝나갈 무렵, '몸을 던져 남이 하지 않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의
    미인 '들무새'교회에서 보낸 청원서를 보고 "청와대에서는 내복을 20벌 보내 왔습니다.
    삼성에서는 예산이 소진되어 어떠한 지원도 불가하여 죄송하다는 전화만 왔습니다."는
    목사님의 말을 듣고서야 대략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할 말 못할 말 거침없는 얘기를 주고받는 사이인 목사이지만 저는 더 이상 일체의 내용에
    관하여 묻지 않았습니다. 주보를 읽은 것과 강대상에서의 짧은 소식전달이 전부입니다. 정
    치판의 협심증 심장인 청와대와 경제계의 뜨거운 감자인 삼성과 관련한 일이라면 누구보다
    꼬치꼬치 따져 물었을 저이지만, 단지 그게 인생막판인 노숙자들의 쉼터요 자력갱신의 길
    로 우뚝 서게 하는 공동체와 관련된 일이기에 의도적으로 더 묻지 않았습니다.

    두레공동체 김진홍목사와 다일공동체 밥퍼 최일도목사와는 동일한 장로회 교단으로 살아
    있는 생생한 - 4복음서중 그리스도로 오신 요한복음의 예수가 아닌 종으로 오신 예수의
    기록인 마가복음의 - '말씀의 은사'로 은혜 그 자체인 그 목사님이 내복이나 몇벌 챙길려
    는 동냥질을 위해 청와대와 삼성의 문을 두드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은 안 봐도 비디오
    입니다.

    그래요. 강산도 변한다는 게시판 10년 세월 수많은 글중에 맨 처음으로 쓰보는 '도와 주세
    요' 류의 글입니다. 이처럼 절박한 순간에 참 글재주가 없다는 생각으로 서글프기 짝이 없
    습니다만, 인간으로 오신 예수의 기록인 누가복음 11:9 '찾으라 얻을 것이요. 문을 두드려
    라, 열릴 것이다'는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브리서 11:1)'라고 하죠. 노숙자목회는 사랑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최고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소망과 믿음이 없는 사랑은 그냥 눈물의 씨앗일 따름이겠죠.

    인생 끝간데 없는 나락인 노숙자들의 눈물어린 참상을 아시나요? 삶의 의욕조차 포기한 체
    술에 찌든 사람들, 한술 밥을 얻어먹으려고 엄동설한 달달떨며 눈동자 풀린 모습으로 길게
    줄을 선 사람들,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 누워 아무런 희망도 없이 그냥 죽어가는 사람들, 이
    들을 외면 하시렵니까?

    그들과 함께 울고 함께 웃는 들무새공동체가 바로 여러분 곁에 있습니다. 노숙자 후생복지
    는 보건복지부 관할에서 각 지자체로 이관되어 여기저기 집단 숙식처는 많이 있습니다. 정
    부지원의 손길이 닷는 그 어떤 곳보다 "우리 들무새가 먹는 것만큼은 대한민국 최고"라고
    노숙자들 스스로가 말합니다. 빵집부터 시작해서 구리 농수산물시장 야체장수 아주머니 등
    등의 순수 민간후원으로 노숙자 먹거리 만큼은 풍족하고도 남습니다. 다 신의 은총입니다.

    그러나 '내가 보는 것은 사람이 보는 것과 같지 않다 (삼상 16:7)'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릴길 없기에 '노숙자공동체'를 보다 더 체계적이고 시스템화할 수 있는 전문센타 설립
    을 위한 자금과 물질, 인력의 충원이 숙제로 남았습니다.

    아마 이러한 '노숙자 재활을 위한 프로젝터'적인 관점에서 그 목사님은 청와대와 삼성에 청
    원을 하였으리라 여깁니다. 설마 내복이나 돈 몇푼 던져달라고 그럴리는 만무한 일입니다.
    주보의 '들무새 향기로운 예물' 코너를 보니 재미있습니다. 십일조- 208,000: 감사헌금-
    125,000: 주일헌금- 12,000: 후원- 90,000: 합계- 435,000원 이렇게 해서 20여명의 노숙자
    들과 일반성도들로 구성된 노숙자공동체인 들무새교회는 오늘도 힘차게 살아 움직이고 있
    습니다.

    기적이 따로 있습니까? 이게 바로 기적입니다. 일주일 수입 겨우 435,000원으로 노숙자
    공동체가 죽지않고 살아 있다는 거 이거야 말로 하나님이 대장이 되어 이끌어 가는 기적
    이 아니면 도대체 어떤 것이 기적이란 말입니까?

    무속신앙의 기반에서 받아들여진 한국의 기독교는 가소로울만치 기복적입니다. 이를 악용
    한 사기꾼 목사들이 "돈내라 건물짓자"로 목불인견입니다. 그래야한다면 예수님이 가장
    먼저 큰집을 짓고 허우대를 잡았을텐데 없는자, 천한자, 병든자와 또 노숙자처럼 버려진
    자들과 친구한 것을 보면 오늘날 일부 웅장한 초대형 교회건물은 지옥으로 인도하는 '넓
    은 문'입니다.

    해소를 하자는 건지 고착화를 시키자는 건지 우좌지간 정치권과 언론들은 '양극화'를 떠
    들어대고 있습니다. 노숙자 후생복지와 자력갱생의 내실찬 대책의 시스템화를 위한 청원
    에 거지동냥 던지듯 빤주와 난닝구 몇벌로 때우는 청와대의 안일한 인식과 상투적인 대
    처만으로 '양극화 해소'는 물건너 간 것입니다. X-파일 사건처럼 수백억원씩 정치권과는
    뒷돈 거래를 마다하지 않는 사바사바와 짜웅의 간큰 재벌 삼성이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불우이웃에 한푼지원할 수 없다며 전화로 '그까이꺼 뭐 대~충' 때워버리고 마는 기업
    윤리의 부재는 이 시대의 참람한 비극입니다. 모든 기업이 삼성이라면 기업이윤의 사회
    환원으로 바로 잡는 '양극화 해소'는 요원한 것입니다.

    거시적이고 총체적 차원의 양극화 해소에 대한 소견을 말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없는 글재
    주로 '도와 주세요'가 먹혀 들어갈런지는 아는 바 없습니다. 그러나 이건 압니다. 진인사
    대천명(盡人事待天命)! 이라고...

    TV시사고발 프로그램이나 언론사 사회부기자라면 노숙자문제 해결에 관한 취재원 발굴에
    관심을 가지실 수도 있을 겁니다. 예수라는 존재를 인식하고 교회를 다니긴 하지만 영
    이건 아니다며 '말씀'을 찾아 번민하는 그리스도인들도 많이 계실 줄로 압니다. 신앙과
    는 상관없이 진리가 무엇이며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분들도 많으시리라 여깁니다. 돈
    이 남아도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뜻있는 일에 쓰여지길 원해서 적으나마 흔쾌히 기탁할
    곳을 찾지못하고 후원하고 나면 속았다는 분도 계실겁니다.

    왕으로 오신 예수의 기록인 마태복음 7:14에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
    여 찾는 이가 적다'고 합니다. 또 고린도전서 1:28에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
    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시는 이유는 있는 것들을 하나님 앞에 부끄럽게 하기 위함'
    이라고 합니다. 오늘도 들무새교회에는 노숙자들의 아늑한 휴식이 있고 각자의 가정으로
    환원하는 아름다운 자력갱생의 거듭난 내일이 있습니다. 노숙자들과 일반교인들이 하나
    되어 서로의 삶을 보덤는 휴머니즘과 가식없는 어울렁 더울렁으로 보람과 기쁨이 충만
    합니다.

    삶을 개혁하고 생을 윤택하게 하는 들무새교회는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화번호는 02-933-1007 입니다. 하나 물방울 모여 바다를 이루듯 소액환영 무지감사 후
    원 통장번호는 전국 어디서나 국민은행 849-01-0032464 (들무새공동체 김홍기) 입니다.

    청와대 노무현대통령께서 보내 준 빤쭈와 난닝구, 감사하시렵니까?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들무새공동체의 목사님은 감사로 기도하시더군요. 역지사지로 입장바꿔
    여러분이라면 이 정도에 감사하시렵니까? 노무현 대통령 탄생까지의 주역이자 삼성의 두
    목을 화두로 '이건희 시대'라는 책을 저술한 강준만교수는 모 시상식 수상소감 인사말에
    스스로를 향한 '겸손'을 무척이나 강조하시더군요. 성경의 대표적인 '개혁'장이라는 느
    헤미야 서에 기록된 아주 비슷한 표현으로 끝맺으며 모두의 건강과 평안을 소망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이 일을 인하여 나를 기억하옵소서 내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나의 행한 선한 일을 도말하지 마옵소서 (느 13장 14절)' - A ma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