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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 사태', 도구적 이성을 넘어서
[논단] 군부개발독재의 잔재, 지금 한국사회에 필요한 건 ‘반성적 이성’
 
이태경   기사입력  2005/12/17 [13:05]
‘도구적 이성’, 근대를 만들다

흔히 중세 유럽을 종교적 광신과 열정이 지배했던 시기로 기억하는데 반해 근대 이후 유럽은 과학과 이성이 시대정신으로 군림하는 시대로 표현되곤 한다.

물론 중세라고 해서 뛰어난 발명이나 고안들 혹은 빛나는 지적 성취나 의식의 진보가 없었을 리 없지만, 확실히 중세 유럽은 이성 보다는 신앙이 우위에 있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일쑤 ‘암흑의 시대’라고 불리는 중세가 끝나고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가 시작되었을 때 유럽의 지성들이 특히 주목했던 것은 자연과학의 눈부신 발전과 그에 기초한 생산력의 비약적 향상이었다.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근대 유럽에서 자연과학이 만개한 데에는 ‘도구적 이성’이라고 불리는 사유방식 혹은 능력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흔히 “도구적 이성이란 목적의 타당성, 가치를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목표를 가장 효과적,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방도를 모색하는 능력"이라고 정의되곤 한다.

수학이나 자연과학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도구적 이성’이 어떻게 작동하는 지 쉽게 이해할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과학기술의 반전이나 생산성 증진에 혁혁한 기여를 했던 ‘도구적 이성’이 ‘자연’이 아닌 인간마저 그 대상으로 삼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기실 근대 이후 유럽이 쌓아올린 수다한 성취의 반대편에 있는 실패의 기록들-예컨대 파시즘의 형성과 그에 따른 세계대전 등-의 배후에는 어김없이 ‘도구적 이성’이 자리하고 있다고 해도 그리 무리한 말은 아닐 것이다.

분명 역사의 특정시기에 해방의 기능을 했던 ‘도구적 이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과 인간에게 유해한 존재로 변화되어 간 것이다.

황우석 사태와 ‘도구적 이성’의 상관관계

추악한 실체를 드러내고 있는 황우석 사태의 원인 중 하나도 ‘도구적 이성’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다.

연구윤리 위반-매매난자 및 연구원 난자의 사용-에 대해서 ‘헬싱키 선언’ 등의 서구(?)윤리는 한국적 상황과 맞지 않고 따라서 이를 따를 이유가 없다는 대다수 네티즌들의 반응이나 황 교수팀의 사소한(?) 잘못을 파헤쳐 국익을 해치는 MBC 〈PD수첩〉을 매국노로 정의하고 뭇매를 가했던 행태들에서 목적의 타당성은 불문한 채 효율성과 결과만을 추구하는 ‘도구적 이성’의 존재를 감지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이언스〉에 기고한 2005년 논문이 위조(falsification)로 판명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 아니 더 나아가서 2004년 논문마저 의심받고 있는 지금에도 "저희가 이미 2004년 논문이 있는데, 2005년 논문에 11개가 아니고 1개면 어떻습니까? 3개면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1년 뒤에 논문이 나오면 또 어떻습니까?"라고 기염을 토하는 황우석 교수의 내면을 점령하고 있는 것은 오직 결과만이-지금으로서는 그조차 지극히 회의적이다-중요하다는 ‘도구적 이성’의 섬뜩한 외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황 교수와 측근들이 숱하게 거듭하고 있는 식언들에 대해서는 더 말할 가치도 없다. 아마도 이들이 이러한 행태를 지속하고 있는 배경에는 나중에 연구결과만 좋으면 과정상의 오류나 절차상의 하자, 하찮은(?)거짓말 따위는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작동하고 있음에 틀림없어 보인다.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것은 아직도 한국사회 안에 황 교수 등에 대한 우호적 혹은 관용적 시선이 강하게 남아있다는 점이다. 사실관계가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는 지금에도 “원천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줄기세포는 분명히 존재했다”는 등의 황 교수측 발언에 여론이 흔들리는 것은 많은 한국사회 구성원들이 여전히 목적이나 과정 보다는 결과에 기울어 있음을 방증한다.

숱한 거짓말과 위조 논문의 제출 가능성 등으로만 따져도 이미 황우석 교수와 그 핵심 측근들의 과학자로서의 생명은 치명적인 위협 앞에 노출되어 있다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사실 이조차 매우 온건한 표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상황반전을 시도하는 황 교수팀과 이를 암묵적으로 지지하는 일부 여론의 존재는 한국사회가 얼마만큼 ‘도구적 이성’에 부식되어 있는지를 온몸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도구적 이성’에서 ‘반성적 이성’으로

혹독한 식민통치를 경험했고 한국전쟁과 군부독재를 겪어낸 한국사회가 지금과 같은 수준의 경제 발전을 이룩한 데에는 분명 ‘도구적 이성’이 기여한 바가 크다.

자연을 인간이 지배하기 쉽도록 양화(量化)시키고 계산 가능하며 측정가능 하도록 만드는 ‘도구적 이성’의 존재가 없었다면 과학이나 기술의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며, 효율성이나 효과성에 대한 집착이 없었다면 급속한 경제 발전도 요원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사회는 ‘도구적 이성’ 의 독재(?)로 인해 여기저기서 심각한 폐해를 드러내고 있다. 이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며 올 한해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른바 ‘황우석 사태’도 그 범주 안에 위치한다.

목적이나 가치의 타당성을 묻지 않고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사고방식이 얼마나 가공할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이번 황우석 사태는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결과와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도구적 이성’의 무한질주를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를 때다. 황우석 사태로 말미암아 ‘도구적 이성’이 지닌 독성이 얼마나 강한지가 밝혀진 지금이야 말로 성찰과 비판을 덕목으로 하는 ‘반성적 이성’의 복원에 나설 시기이다.

‘반성적 이성’에 의해서 제어되지 못하는 ‘도구적 이성’의 존재는 일쑤 재앙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황우석 사태는 유의미하다. 

* 글쓴이는 <대자보> 편집위원, 토지정의시민연대(www.landjustice.or.kr) 사무처장, 토지+자유 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블로그는 http://blog.daum.net/changethecorea 입니다.
대자보 등에 기고한 칼럼을 모은 [한국사회의 속살] [투기공화국의 풍경]의 저자이고, 공저로는 [이명박 시대의 대한민국], [부동산 신화는 없다], [위기의 부동산]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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