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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경제학을 찾아 2: 불교경제학1
[비나리의 초록공명] 좀비모델 벗어나 불교의 눈으로 자본주의 성찰해야
 
우석훈   기사입력  2005/09/29 [11:12]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서양학문이라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고, 또 현재와 같은 형태의 경제이론은 15~16세기 이후 서양에서 경험했던 매우 특별한 경제적 성공과 함께 형성된 특별한 사상을 정리한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제한된 자원에서 최대한의 만족을 만들기 위한 학문”이라는 경제학의 공식적 정의가 형성된 것은 1920년대 루빈스라는 경제학자가 활동하던 시기인데, 사실 철학적으로 지금의 여러 논의의 기반을 형성된 것은 많이 더 위로 올라가서 1776년 아담 스미스라는 사람의 시절까지 올라간다. 이 해는 국부론이 세상에 발간된 시기이고, 이런 의미에서 아담 스미스는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고, 이 점에 대해서만큼은 어떠한 경제학파도 크게 이의를 달지는 않는다.
 
1. 스코틀랜드 철학 전통과 “부지런한 빵장수”
 
우리는 흔히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과연 자신은 이기주의적인가 혹은 이타주의적인가라는 점에 대해서 질문을 하게 된다. 지금은 미국을 중심으로 별로 이상하지 않게 된 이 질문이지만, 자신을 위하는가 혹은 남을 위하는가라고 질문하는 것은 18세기에만 해도 상당히 이상한 질문이었고,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스코틀랜드의 철학전통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혹은 ‘신금욕주의(neo-stoicism)의 영향이라고 부리기도 한다. 사실 영국 철학의 전통은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보다는 경험이 이성보다 더 중요하다는 소위 베이컨 철학의 영향이 더 강하고, 대륙에서는 데카르트 혹은 비코 이후로 도대체 “생각하는 자기”와 사물과의 관계에 대해서 질문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험과 이성 혹은 정신과 물질의 대립축이 아니라 자기와 남이라는 사람에 대한 질문을 중심으로 철학을 만들었던 스코틀랜드의 질문은 좀 이질적인 질문이고,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그야말로 변방의 북소리에 다름없던, 뭔가 철학사와는 맥락이 동떨어진 질문이기는 했다.
 
“꿀벌의 우화”, 즉 꿀벌이 모여사는 것은 꿀벌왕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로 엄청난 충격을 주었던 만데빌이라는 철학자가 바로 철학자 시절의 아담 스미스의 스승에 해당한다. 아담 스미스가 그랬고, 또 “공리주의(utilitarianism)”을 만든 벤담이 이런 전통에 속하고, 고전학파의 맨 마지막 경제학자이며 벤담과는 조금 다른 사회사상으로서의 공리주의를 세운 존 스튜아트 밀이 전부 이 스코틀랜드 철학의 전통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이 최초로 체계화된 경제학이라고 할 수 있는 국부론의 질문을 한 가지로 환원하는 것은 다소 무식한 일이지만, “착한 사람”의 기준으로 바꿔보면 사람들이 착해야 세상이 좋아지는가 혹은 사람들이 착하지 않아도 세상은 좋아질 수 있는가 아니면 극단적으로 사람이 착하지 않아야 세상이 좋아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뀔 수 있다.
 
프랑스의 데카르트에서 시작한 질문이 칸트, 피히테, 쉘링을 거쳐 헤겔에까지 이르러 형성된 질문을 위의 용어대로 좀 무식하게 풀어보면 사람이 착해야 한다는 것이 대륙철학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어떻게 착해질까?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생각을 해야한다는 용어가 바로 성찰 혹은 “사변(speculation)”이라는 말 속에 들어가 있고, 그래서 독일 철학을 사변철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절대이성”이라는 용어를 평범하게 풀어보면, 사람은 착해야 한다는 말이고, 조금 더 깊게 생각해보면 똑똑한 사람이라야 착할 수 있다는 말로 풀어볼 수 있을 것이다. 똑똑하지 않은데도 착할 수 있을까? 

헤겔이라면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성은 지식에 대한 길고 긴 여행을 필요로 하고, 이 때의 지식은 반드시 인문사회에 대한 지식만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지식들을 필요로 하고, 이에 대한 이해가 끝난 다음에 비로서 사회 안에 대한 고찰로 진행된다는 것이 헤겔의 초기저작인 “정신현상학”이 가지고 있는 절대무로부터 이성이 등장하게 되는 과정이다.

철학사에서 가장 사람을 믿지 않았던 사람을 거론하자면 플라톤을 거론할 수 있을텐데, 플라톤의 “공화국”에서 보여지듯이, 플라톤은 일반인이 똑똑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절대 믿지 않았고, 또 똑똑하지 않은 사람이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으며, 그런 면에서 일반 대중의 민주주의를 저주한 사람이 바로 플라톤이다. 일반인이 자신의 상식과 이해심만으로 결정을 하게 되면,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독살한 것과 같이 바보같으면서도 신의 뜻을 거스리게 된다는 뿌리 깊은 불신을 플라톤은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누구나 똑똑해질 수 있다는 것을 대륙철학 특히 독일철학의 전통이라고 한다면, 스코틀랜드 철학은 사실 누구나 똑똑해질 필요가 있지는 않을뿐더러, 더더군다나 누구나 착해질 필요도 없다고 강변한다.
 
아담 스미스의 사회에 대한 생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절은 국부론에 등장하는 “부지런한 빵장수”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침마다 일어나서 가장 신선한 곡물을 최고의 기술로, 그리고 하루도 빠짐없이 사람들이 잠을 자고 있을 때에도 일어나서 빵을 만드는 부지런한 빵장수가 과연 착해서 이 일을 하고, 또 선한 동기만으로 이렇게 희생을 하는가라는 것이 아담 스미스의 질문이다. 물론 그렇지는 않다. 빵장수는 부자가 되고, 잘 살고 싶을 뿐이지만, 정말로 잘 살고 싶다는 빵장수의 욕망이 사람들에게 싼 가격에 좋은 빵을 먹을 수 있게 해주는 결과를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일이 가능한 것은 아담 스미스는 “분업”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때로는 시장이라고 제시하기도 한다. 시장이라는 독특한 현대의 프로그램은 시장이라는 일종의 사회적 규율만을 인정한다면, 사람은 착할 필요도 없고, 현명할 필요도 없고, 다만 부자가 되어서 행복해지고 싶다는 단 하나의 동기를 가지고 살더라도 세상은 아무런 문제없이 부드럽고 아름답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대체적으로 국부론이 가지고 있는 철학적 결론이다. 
 
이러한 시장에 대한 생각은 사람들이 착하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혹은 위선적으로 만들어내는 평화보다는 시장의 규칙만을 지킬 때 사람들이 보다 더 편안하면서도 정의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는 생각으로 전개된다. 스코틀랜드 철학의 특이점은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을 위해서 살 때 오히려 시장이라는 편안한 제도를 통해서 이타주의가 만드는 불안한 평온보다 오히려 더 장기적으로 평온한 세상이 만들어진다는 결론을 도출하게 된다는 점이다.
 
국부론이 개인들에게 요구하는 단 하나의 강령이라면 똑똑해질 필요도, 그리고 자비심을 가진 이타주의가 될 필요도 없고, 오직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한 ‘부지런한 빵장수’가 되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러한 국부론의 세계관 위에서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비로소 하나의 과학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데, 이 순간에 비로서 서양은 신이 통치하던 중세로부터 벗어나 사람들끼리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완벽한 세속화된 세계로 진행하기 위한 이론적 준비를 갖추게 된다.
 
2. 경제학의 표준 모델과 좀비 모델
 
아담 스미스가 설정했던 현대적 인간은 나중에 ‘경제인(homo oeconomicus)’라는 특별한 모델로 불리게 된다. 이 때의 가정은 다음과 같다.
 
   1) 인간은 이기주의적이다.
   2) 인간은 계산을 할 줄 안다.
 
이 두 가지의 간단한 공준(postulate)을 결합시키면, 수학적으로 극대화공리(axiom of maximization)라는 것을 얻게 된다. 물론 이 때의 극대화라는 것은 ‘무조건 많이’라는 일반적인 뜻은 아니고, 수학적으로는 최적(optimum)이라는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최적인 상태가 이익이든 행복이든 어쨌든 가장 높다는 뜻이다.
 
이러한 가정들을 다 모아내면, 세상의 모든 사람과 세상의 모든 재화가 동시에 최적화된 교환조건을 만들어내는 ‘균형가격’이 결정되고, 이걸 특별히 “일반균형”이라고 얘기하는데, 스위스 로잔 대학의 레옹 왈라스(L. Walras)라는 사람이 1880년대에 이 생각을 정리했기 때문에, 이렇게 믿는 사람들을 왈라스주의자라는 뜻의 왈라시안(Wlarasian)이라고 부른다.
 
물론 위의 두 가지 공리만 가지고는 모든 사람은 완전히 똑같은 행위를 하기 때문에 교환이라는 것이 발생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것을 원하고 있는 이상에는 교환이나 어떠한 경제행위도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실은 이 가운데에 선호(preference)라는 개인에게 고유한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대체적으로 이렇게 동일한 행동함수를 가지고 있는 구성원들로 모여진 사회와 가장 비슷한 모델은 ‘좀비 모델’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좀비는 19세기 중남미에 퍼져 있던 부두교(Voodoo, 서인도제도의 아이티에서 널리 믿어지고 있는 애니미즘적 민간신앙-편집자 주)라는 종교에서 생겨난 일종의 주술행위인데,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중남미의 노예들과 토착 인디안들의 신앙이 합쳐서 생겨난 이 부두교는 인간을 죽였다가 다시 부활시켜서 노예로 부리는 특별한 주술을 가지고 있는데, 이 당시에 사람들은 죽는 것보다 좀비가 되는 것을 더 무섭게 생각했다고 한다. 죽어도 죽지 않고, 영혼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시키는 대로 일만해야 하는 힘센 노예로 영원히 살아야 한다는 것은 어떤 문화적인 시각에서 보더라도 무서운 일이기는 하다.
 
부두교의 중심에 해당하는 타이티만이 아니라 이 당시 미국과 스페인 그리고 포르투갈이 나누어서 지배하던 중남미의 노예 역사는 사실 역사상 존재했던 가장 끔찍한 비극적 사건이며, 이 노예들은 대부분 알콜 중독 상태였고, 일부는 마약중독 상태에서 시키는 대로 일만을 해야했던 시기가 펼쳐졌다.
 
아마 이 노예들은 자신이 좀비라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이미 죽은 존재이고, 영혼도 없이 끝없이 노동만 해야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도대체 인간인 자신의 존재가 왜 이렇게 고통스럽고 괴로운 상황인지를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을지도 모른다. 끝없는 노동과 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은 알콜 중독 상태에서 어쩌면 자신이 사람이 아니라 부도교의 사악한 흑마술사의 손에 의해서 좀비로 변해버린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던 노예들을 생각하면 사실 눈물 없이 이 장면을 상상하기가 쉽지는 않다.
 
좀비는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해진 행위함수에서 표현된 행위 양식대로움직인다. 자신이 고유한 ‘선호’를 가지고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표준경제학의 ‘경제인’ 가정은 사실상 좀비 모델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구매력을 가지고 가장 많은 자원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표현할 때 가장 많이 쓰는 표현이 “맨하탄”이다. 전세계의 모든 금융거래의 중심에 해당하는 뉴욕의 심장부에 있는 맨하탄은 사실상 명품시장과 같은 단기 선호의 변화와 함께 뉴에이지 혹은 웰빙에 이르기까지 온갖 문화들을 소비하고, 또 소비패턴 자체를 만들어내는 그야말로 소비의 핵심지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최정점을 차지하고 있는 이 맨하탄의 소비행렬이 바로 좀비와 같은 것이라고 지적하는 스캔들이 벌어진 적이 있다. 좀비를 통해서 서양 사회를 들여다 본 사람 중에 가장 유명해진 조지 로메로 감독의 영화 시체 3부작 중 “시체들의 새벽”이라는 1987년 영화는 TV와 광고에 이끌려 대형 쇼핑몰로 향하는 고급 소비자들의 행렬이 스스로는 아무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좀비와 주입된 선호와 문화패턴에 의해서 이끌려가는 좀비와 마찬가지라는 지적을 하면서 스캔들을 만든 적이 있다.
 
1994년 아일랜드의 팝그룹 크랜배리는 전쟁을 갈망하며, 전쟁을 통해서 번영을 이룰 수 있다는 사람들과 전쟁에 점점 익숙해지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좀비가 살고 있다는 그야말로 좀비의 우화를 노래한 적이 있다.
 
    머리가 또 하나 낮게 걸렸고, 
    아이들도 서서히 끌려가고 있어. 
    폭력이라는 것이 이런 침묵을 만들어낸거지. 
    우리가 누굴 오해하고 있는거지. 
    그런데 말이야, 이것봐, 나도 아니고, 우리 가족도 아냐. 
    네 머리 속에 있는거야. 니 머리 속에서 싸우고 있는거라구. 
    그 탱크하고 폭탄을 가지고, 
    그 폭탄들하고 총을 가지고, 
    네 머리 속에서, 네 머리 속에서 울고 있는거라구. 

 
    네 머리 속에서 말야... 머리 속에서. 
    좀비. 좀비.. 
    네 머리 속엔 뭐가 들어있는거지. 
    네 머리 속에 말야. 
    좀비, 좀비, 좀비. 

 
    또 다른 어머니의 슬픔이 되풀이되고 있어. 
    폭력이 이런 침묵을 만들어 낼 때는, 
    우리가 뭔갈 잘못하고 있다는 말야. 
    1916년부터 계속된 똑같이 오래된 얘기야. 
    네 머리 속에서, 아직도, 네 머리 속에서 싸우고 있는거라구. 
    탱크와 폭탄을 가지고, 
    폭탄과 총을 가지고, 
    네 머리 속에서, 네 머리 속에서 사람들이 죽어간다구. 

 
    네 머리 속에서 말야. 
    좀비, 좀비. 
    네 머리 속엔, 네 머리 속엔 뭐가 들어있지. 
    좀비. 좀비.

 
‘경제인’ 가정에 들어가 있는 ‘합리적 개인’에 대한 생각은 논리적으로 두 가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사람이 착해야 세상이 좋아질 것인가라는 한 가지 질문과 사람의 행동이 단순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두 번째 종류의 질문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인의 가정이 좀비 모델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은 좀비가 나쁜 즉 ‘사악한’ 존재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일 수도 있지만, 수학적으로는 ‘단순성’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에 가깝다.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회와 여러 가지 생각이 다양하게 존재할 때 발생할 수 있는 결과의 차이의 문제와 비슷하다.

사실상 경제인의 가정은 예술가와 종교인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라는 생각만으로는 역시 자신을 위한 무엇인가를 하지만, 이것이 ‘경제적 이해’와 전혀 상관없는 행위인 예술이 가지고 있는 창조와 파괴의 동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구도’나 혹은 ‘신성성’과 관련된 행위들을 역시 포함하지 않는다.
 
결국은 먹고 살기 위한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이 모든 것들은 ‘노동시장’을 통해서 자신의 ‘구매능력’을 확보하기 위한 직업행위로 이해하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은 많은 경우 제한된 재화 혹은 ‘총화폐’를 보다 자신이 많이 확보하기 위한 ‘평화적인 전쟁’ 같은 것으로 이해하도록 만든다.
 
사실상 경제학의 표준 모델에 의해서 표상된 세상은 총을 들거나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평화로운” 전쟁 혹은 “사회에 내부화된 전쟁”이라는 말로 종종 표현되는데, 이러한 개념이 바로 경제인 가정에서 도출되는 그 다음 논리인 “경쟁(competition)”이라는 개념이다.
 
3. 어떻게 경제인의 모델로부터 나올 것인가?
 
흔히 목적과 수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경제학 내에서 ‘목적’은 선험적이며 초월적이고, 다만 수단, 즉 어떻게 개인이 가지고 있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해줄 것인가에 대해서만 질문한다는 점에서 경제학은 흔히 ‘선택의 과학’이라는 용어로 종종 설명된다. 즉 개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 조금 전의 용어로는 ‘선호’ - 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는 것은 경제학에서는 사실상 금기사항 중의 하나이다. 무엇을 원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개인의 고유의 권한에 남아있어야 한다는 매우 강력한 합의가 경제학 내에는 존재한다.
 
이러한 경향은 왈라스의 표준모델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맑스의 자본론 1권 제1장에도 개인의 선호나 취향 혹은 목적 - 이걸 맑스는 ‘사용가치’의 영역이라고 부른다 - 에 관한 질문은 인류학이나 심리학의 영역으로 경제학에서 다룰 문제가 아니라고 비켜 넘어갔다.
 
사실상 “무엇을 원하는가”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은 경제학의 영역이라기 보다는 종교나 혹은 가치관과 같은 다른 영역의 질문이라는 점에 대해서 그야말로 경제학에서는 거의 만장일치에 관한 합의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만약 실제 ‘목적’ 즉 극대화든 최적화든 어떤 행위의 방향에 대해서 질문한다면, 경제학에서는 이를 ‘규범 경제학(normative economics)’이라고 부르고, 이건 과학의 대상이 아니라고 질문할 준비를 가지고 있다. 20세기 과학철학이 경제학에 들어와서 만들어낸 일은 ‘실증경제학(positive economics)’와 ‘규범경제학’을 구분해낸 일인데, 사실상 이러한 구분이 그렇게 현실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개념상 구분만 그렇게 되어있지 이 ‘규범경제학’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학의 응용분야의 일반인 소비자 이론의 하위 분과로 소비자 규범에 관한 것 마찬가지 관점에서 생산자의 규범이라는 것이 존재할 것인가? 물론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상 규범 경제학이라는 이름 속에는 ‘자유로운 시민’으로 구성된 시장 교환 사회에 이와는 상관없는 무엇인가 초월적이며 ‘비이성적 존재’가 행위에 개입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현대경제학은 사실상 이미 왈라스의 세계에서 가졌던 매우 좁은 의미의 경제적 인간의 가정을 많이 열어버린 상태이다. ‘제도’가 이미 소비자와 기업의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 분석대상으로 폭넓게 들어온 상태이고, 정보가 제한된 상태에서의 행위에 관한 정보경제학이 이미 아케로프가 노벨상을 받았고, 게임이론을 통해서 소통과 협력이 균형에 미치는 영향은 이미 분석 범위 한 가운데로 들어온 상태이다.
 
만약 가장 간단한 가정으로 불교를 이론에 도입하는 방법은 행위자의 ‘균질성’ 가정을 약화시키는 방식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쉽게 이해한다면 모든 소비자가 불교신도라는 가정을 하는 방식이 있을 수 있고, 혹은 인구의 10%가 일반 소비자와 다른 방식의 소비행위를 한다는 방식은 가장 쉬운 방법론으로도 왈라스의 일반균형 모델과는 다른 균형을 얻어낼 수 있다. 물론 이런 방법은 세상 사람을 불자와 불자가 아닌 사람으로 구분하는 지나친 도덕적 우월성만을 강조하는 이론으로 쉽게 타락할 위험을 가지고 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불교의 여러 원리들을 소위 거시경제학의 운용 방식에 접목시키는, 개인과는 별로 상관없는 또 다른 방식이 가능할 수 있을 테인데, 이 경우에도 굉장히 강한 규범적 판단을 필요로 한다는 위험을 여전히 가지고 있기는 하다.
 
아직까지는 확실히 이론적으로 불교를 경제학과 접목시키는 체계적인 논의는 전세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지만 결국에는 좀비와 똑같은 상황에서의 사람들의 판단을 전제로 하는 표준경제학의 딱딱한 가정들 그리고 그러한 가정들이 만들어내는 소위 ‘경제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대한민국에서 불교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종교적 속성이나 사유 방식들을 경제현상이나 경제이론들과 대비하고 때로는 접목해보는 시도는 단순한 논리적 연습만은 아닐 수 있으며, 대단히 매력 있는 하나의 시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여섯 개의 기관에 세 가지 상태를 곱하면 18번뇌가 되고, 여기에 더러움과 깨끗함이라는 두 가지를 곱하면 36번뇌가 되고, 여기에 전생, 금생, 내생을 곱하면 108이 된다.
 
표준경제학은 각자 주어진 예산제약 내에서 자신의 효용(效用)을 극대화함에 따라 최적의 경제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모인 행복한 사회를 설정한다. 한 번도 전면적으로 거부되지 않은 국부론의 프로그램대로라면 말이다. 불교의 용어대로라면 각자가 최선을 다해서 최적화시키는 이 효용이라는 목적은 결국은 인간의 6가지 감각기관으로부터 말미암은 번뇌이다.
 
108번뇌를 극복하고 뛰어넘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과 최소한의 사회적 규율을 지키는 범위 내에서 어떻게든 이 108번뇌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두 가지 접근방식은 사실 달라도 너무 많이 다를 것 같다.
 
4. 불교의 눈으로 한국 자본주의를 성찰하자
 
“시장은 혼자 걸을 수 있는가?” (Le marche marche tout seul?)라는 불어식 말장난은 흔히 시장과 제도 혹은 경제와 윤리라는 관계에 대해서 질문할 때 하는 말이다. 시장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규율이나 도덕이 필요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질문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지만, 이 질문은 시장 자체가 하나의 규범이 될 것인가 아니면 시장과 보완하는 또 다른 규범이 필요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지금까지 존재했던 어떠한 유형의 시장사회도 이데올로기 혹은 도덕과 괴리된 시장사회가 존재한 적은 없다. 굳이 유럽의 ‘기사도’의 변형된 형태인 신사도 정신이나 미국의 청교도 정신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현실적으로 시장만이 최고라는 이데올로기로 중무장한 사회는 존재한 적이 없었고, 현대 자본주의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사회라는 유태인의 이스라엘 역시 유태교에 기반한 시오니즘과 복잡한 이념적이며 도덕적인 결합 속에서 작동하는 사회이다.
 
아담 스미스는 개인들이 굳이 ‘이타주의’의 이름으로 착해질 필요는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많은 사회는 “맹렬한 시장주의”에 나름대로의 제약을 가하거나 시민들이 지나치게 돈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종교적이거나 문화적인 장치를 가지게 된다.
 
한국 경제에 대해서 흔히 천민자본주의로 분류하는데, 이 범주에는 약탈형 자본주의나 차가운 자본주의(cold capitalism) 같은 것들이 포함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현재의 한국 사회는 시장사회를 통해서 사람들 사이의 유기적 연대(organic solidarity)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하는 스코틀랜드 철학의 전통과도 상관없고, 그렇다고 정상적인 교환을 통해서 ‘일반 균형’을 만들 수 있다는 현대 경제학의 왈라스주의와도 상관없이, 수탈과 반칙 그리고 기회주의를 조장하는 그야말로 가장 야만적이고 원초적인 경제 약탈주의만이 지배하는 사회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회가 궁극적으로 어떠한 모습으로 진화하게 될 것인가? 사실상 한국 사회는 경제학의 행위모델이 가장 부정적인 모습으로 극으로 치달은 좀비 모델에 더 가깝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종종 한다. 좀비가 좀비인 것은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108번뇌가 과연 ‘행복’일까라는 질문 속에는 불교와 경제가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에서 만나서 어떻게 진화하게 될 것인지라는 소위 공진화(co-evolution)의 첫 번째 발이 열린다고 생각한다.
* 글쓴이는 경제학 박사,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성공회대 외래교수, 2.1연구소 소장입니다.

* 저서엔 <88만원 세대>,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 <아픈 아이들의 세대-미세먼지 PM10에 덮인 한국의 미래>, <조직의 재발견>, <괴물의 탄생>, <촌놈들의 제국주의>, <생태 요괴전>, <생태 페다고지>,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등이 있습니다.

*블로그 : http://retired.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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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09/29 [11:1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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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verick 2005/10/02 [16:04] 수정 | 삭제
  • 현대 경제학은 "희소성"의 개념에 절대 의존한다.
    그러나 그들의 가정은 "자원의 희소성"이 아니라 , "상품의 희소성"이다.
    지구는 유한하고 자원은 "희소"한데 , 이를 완전 무시하고 자원은 풍부하지만 상품은 희소하다는 가정 하에 논리를 전개한다.
    과연 그런가?

    내가 듣기에는 불교 경제학은 "풍부의 경제학"으로 알고 있다.
    사랑 , 지식, 정보, 우정, 신뢰는 주묜 줄수록 더 많아 지는 풍부한 재화이다
    "소비되는 상품" 따라서 없어질 수 박에 없는 상품이 아니라
    쓰면 쓸수록 더 많아지는 그런 "재화들"
    현대 경제학은 이런 재화의 생산과 분배를 다루지 않는다
    불교 경제학에서는?
  • maverick 2005/10/02 [15:54] 수정 | 삭제
  • "물론 위의 두 가지 공리만 가지고는 모든 사람은 완전히 똑같은 행위를 하기 때문에 교환이라는 것이 발생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것을 원하고 있는 이상에는 교환이나 어떠한 경제행위도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실은 이 가운데에 선호(preference)라는 개인에게 고유한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

    이 주장은 문제가 잇는 것 같다.
    직업이 다르면 그의 수입도 다르고 , 다라서 얻어야 될 것도 달라진다.
    고기 장사는 고기를 갖고 있지만 , 그 고기를 자를 칼이 없을 수 있고 , 반대로 칼 장수는 먹을 고기가 없을 수 잇다
    당연히 교환이 발생한다.
    왜 "똑 같은 행위"를 해야 한단 말인가?
  • maverick 2005/10/02 [15:49] 수정 | 삭제
  • 1) 인간은 이기주의적이다.
    2) 인간은 계산을 할 줄 안다.

    이들 2개의 공준은 순전한 동의어 반복처럼 들린다.
    인간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 그것을 할 계획을 짜고 실행한다라는 말에 불과한 것 같다
    그렇다고 "극대화 공리"가 나온다는 가정도 선뜻 수긍하기 힘들다.
    빵을 먹고 싶고 밥도 먹고 싶다.
    그러나 그 둘의 맛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비교불가능incommensurable"하다. 어느 것을 택하는게 "효용"을 극대화 하는 것인가?
    "효용utility"이란 하나의 말 장난 , 모든 것을 수량화 하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효용을 수량화 랗 수 없고 비교 불가능 하다면 , 극대화의 개념도 사라진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경제학은 "사후 논리"를 펴는 것이 아니가?
    미리 어느 것이 극대화인지 말하는 것이 아니라 . 사건이 발생한 후에
    그것은 효용극대화 행위라고 주장하는 논리 말이다.
  • maverick 2005/10/02 [15:39] 수정 | 삭제
  • 전반부는 재미잇게 읽었다.
    자기 이익을 위하는 것이 타인에게 해를 주지 않을 때에 우리는 그를 "이기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자기의 행위에 대한 결과가 가져 올 타인들에 대한 결과가 없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이기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왜 꼭 이기적/이타적 이라는 2분법만 성립하는가?
    남을 위하는 것이 자기에게 유해하지도 유익하지도 않을 수도 잇다.
    즉 타인에게 가는 편익은 크지만 자기가 부담하는 비용은 0에 가가울 수 잇다
    이 경우 그 사람은 이타적인가?
    보통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이기적"이라는 용어의 정확한 정의가 무엇인가?
    빵 장사꾼은 먹고 살기 위해 저기 일을 열심히 한다. 그것이 "이기적" 행위인가?
    개가 웃을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