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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13살 생일에는 무엇을 선물할까
[비나리의 초록공명] LP 빽판으로 듣는 핑크플로이드, 대물림 가치있어
 
우석훈   기사입력  2005/09/24 [02:21]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벌어졌다.
 
집에 있던 턴테이블 바늘이 부러졌다. 옛날 같으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이지만, 요즘은 이건 큰 사건이다. 바늘을 구할 수가 없다. 몇 달을 미적미적 거리다가 드디어 용산에 턴테이블을 들고가 카트리지를 갈았다.
 
바로 밑의 동생이 건설회사를 다니다가 어느날 갑자기 다시 대학에 다니고 싶다고 하면서 공부를 시작했다. 덕분에 나의 옛날 방에 있던 나와 막내동생이 예전에 듣던 LP판들이 마당으로 밀려났다. 비가 오던 어느 날 아버지가 이 오래된 LP판 한 박스를 차에 실어 나의 집으로 가지고 오셨다.
 
나는 아직도 음악을 LP로 듣는 편이다. 일단 LP가 CD보다 훨씬 많기도 하지만, 소리만으로 비교하면 LP가 훨씬 좋다. 물론 스크래칭이라고 하는 잡음은 훨씬 많지만, 그래도 소리가 좋기는 LP가 좋다.
 
우리나라에서는 LP라고 하지만 요즘은 Vinyl이라고 부른다. '비니루'라고 하는 하는 바로 그 바이닐이 LP의 원래 이름이다. 쮜리히에 가면 버스로 평균 3 정거장마다 하나씩 Vinyl이라고 하는 가게들이 나온다. 유럽에 가서 사람들이 살아있는 동네라고 보는 척도 중에 하나가 Vinyl 가게이다. 이게 있는 동네는 아직 지역공동체가 살아있다고 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유럽에서 조금 더 심하게 들어가면 '릴 테이프'라고 하는 것들을 파는 곳도 있다. 나중에 FM 라디오 실황음악을 맡은 어느 양반과 친하게 지냈던 적이 있었는데, 그 집에 가면 릴 테이프로 음악을 틀어주고는 했다. 그게 부럽기도 했는데, 릴 테이프는 그 뛰어난 음질에도 불구하고 대중화되지는 못했다. 스튜디오에서 녹음할 때 마스터 테이프를 만드는 용도로나 사용되지 대중에게 내려오지는 못했다. 
 
▲핑크 플로이드의 'The wall' 타이틀     © 핑크 플로이드
나는 소위 빽판을 많이 산 편은 아니다. 세운상가의 어느 침침한 방에서 딱 세 번을 산 적이 있었다. 핑크 플로이드의 Wall은 가사 때문에 금지곡이었다.
 
사실 고등학생 중에 Another brick in the wall을 듣고 거기에서 반항을 생각할 정도의 아이들이 몇 명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런 이유로 금지곡이었다. 그 다음에 산 건 Deep Purple의 소위 Live in Japan인데, 이건 일본 공연이라서 금지곡이었다. 세 번 째 산건 에릭 클랩턴의 더블 앨범인데, 이건 별 이유는 없이 그냥 괜히 구할 수 없는 판이라서 샀다.
 
내가 빽판을 사던 시절은 전두환 정권 초기였다. 내 기억으로는 빽판이라고 해서 정식 앨범에 비해서 많이 싸지는 않았는데, 주로 금지곡들을 듣기 위해서 샀다.
 
물론 그 때도 원판이라는 것이 있었다. 라이센스를 받아서 국내에서 제작한 것이 아니라 수입한 앨범을 원판이라고 했는데, 너무 비싸서 난 한 장도 못 사봤다.
 
원판이라는 것을 처음 사본 것은 2년 전의 일이다. Duke Elington의 파리 실황이 내가 제일 처음 사 본 원판이다. 네덜란드에서 비닐을 만들고, 영국에서 제작한 것을 최고로 쳐준다고 하는데, LP의 두께와 균일성 같은 것들이 가격에 약간 영향을 미친다고 알고 있다.
 
복각판이라는 것은 예전에 음질이 좋기로 유명한 명반들을 새로 찍어내는 것들을 얘기한다. 이 넘은 값이 많이 비싸다. 한 장에 5만원 정도 하는데, 강남 무역전시관에 가면 구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약간 재수없어서 안 산다.
 
LP 시장은 세계 시장인데, 요즘도 새 앨범을 내면 LP를 몇 장 찍어낸다. 전세계적으로 LP를 듣는 사람들이 우리나라 인구보다는 많기 때문에 충분히 시장이 형성되어 있고, 우리나라에서나 전부 CD로 넘어갔지, 유럽에서는 아직도 LP 시장은 중요한 음악 시장 중의 하나이다. 힙합은 CD 이후에 생겨난 음악이지만, DJ 리듬믹스 용으로 힙합가수들도 만 장 이상은 LP를 아직도 발간한다. 압구정동에 가면 DJ용 LP만을 파는 곳이 있는데, 사실 몇 장 없다.
 
정말 오랫만에 핑크 플로이드의 Wall을 빽판으로 들어봤다. 83년인가가 이 판으로 음악을 들었던 마지막인데, 20년도 더 지나서 들어보니까 생각보다는 음질이 좋다. 영화로는 3번 정도 봤는데, 생각만큼 그렇게 혁명적이거나 폭력적인 영화는 아니지만, 하여간 전두환 시절에는 이걸 금지곡으로 만들었다. 옛날에는 음질이 별로라고 싫어했던 판인데, 그래도 간만에 들어보니까 나름대로 맛이 있기는 하다.
 
한 번도 뜯지 않은 LP들을 100장 정도 가지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안 뜯은 LP가 있다고 하면 무조건 샀다. 비싸지는 않았고 보통 1장에 만 원 정도 했다. 언젠가 딸을 낳게 되면 13살 생일 주기 위해서 모아둔 LP들이다. 대개는 클래식 앨범들인데 아마 앞으로 10년이 지나도 충분히 들을만한 곡들이라고 생각한다.
 
딸한테 많은 돈과 충분한 재산과 권력을 물려주기는 어렵다. 그런게 나한테 있기도 어렵지만, 있다 해도 딸한테 물려줄 마음은 전혀 없다. 그렇지만 시간과 정성은 물려주고 싶다.
 
딸한테 이 LP들을 물려주는 건 2010년대가 될 것 같다. 어떤 건 40년 된 것이고, 어떤 것 50년 된 것일 것이다. 그 때 공장에서 나온 그대로 한 번도 뜯지 않은 새 LP를 자기 손으로 뜯어서 들을 수 있게 해준다면 아마 내가 해줄 수 있는 최대의 정성일 것 같다.
 
그런 생각하면서 LP를 들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 글쓴이는 경제학 박사,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성공회대 외래교수, 2.1연구소 소장입니다.

* 저서엔 <88만원 세대>,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 <아픈 아이들의 세대-미세먼지 PM10에 덮인 한국의 미래>, <조직의 재발견>, <괴물의 탄생>, <촌놈들의 제국주의>, <생태 요괴전>, <생태 페다고지>,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등이 있습니다.

*블로그 : http://retired.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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