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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우다 만 ‘꽃’, 계간 ‘당대비평’의 슬픔
[비나리의 초록공명] 창비와 당비, 조선일보, 매체는 무엇으로 존재하나
 
우석훈   기사입력  2005/07/27 [14:51]
당대비평이라는 계간지는 1997년에 창간되었고, 문부식이라는, "꽃"이라는 시를 낸 시인, 혹은 그보다는 부산 미문화원 점거사건 때의 당사자, 그리고 지금은 조선일보에 적극적으로 전향한 문예인으로 더 유명한 시인 문부식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적어도 문부식의 '꽃'이라는 시만큼은, 나도 열심히 노래했던 시절이 있지만, 오래 전부터 나는 문부식에게는 관심이 없다. 전향이 사실이든 혹은 사실이 아니든 그게 무슨 상관이랴..
 
조선일보에 글을 쓰느냐 아니냐 혹은 전통적인 저항매체에 대해서 얼마나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느냐 그렇지 않으냐가 무슨 상관이랴...
 
10년 전에 나한테 생태계의 이론화에 대해서 알려달라고 거의 간청하다시피 한 어느 사회학 교수는 요즘 그냥 조선일보에 칼럼 쓰는 것을 세상의 유일한 낙으로 알고 살아가는 유명인이 되었지만, 그가 유명하든 아니든 그렇게 하고 싶은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그가 아니라도 누가 했을 거고, 어차피 별 얘기는 나오지 않기 때문에 약간의 마음의 불편만이 있지 크게 흐름이 바뀌지는 않는다.
 
창비를 생각해보자. 창비가 조선일보보다 나을까? 지금 2005년이라는 공간에서 거만한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별 도움이 안된다는 것, 그리고 뻔뻔한 입을 놀린다는 데에는 별 차이가 없어보인다. 창비에 글을 쓴다고 해서 세상은 조금도 바뀌지 않고, 조선일보에 글을 쓴다고 해서 역시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당대비평에 문부식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는가 혹은 참여하지 않았는가는 무엇인가 판단할 때 아무런 걸림돌이 아니다. 
 
▲계간 당대비평이 2005년 신년특별호로 펴낸 '불안의 시대 고통의 한복판에서' 표지     © 생각의나무, 2005

당대비평이라는 잡지를 정의하기가 쉽지 않은데, 하여간 1997년에 창간한 중도 성향의 계간지인데, 나름대로는 정론지로서의 작은 명성은 올린 잡지이고, 그렇게 생긴 '물건'들이 그렇듯이 돈이 없어서 버걱거린다. 돈이 없어서 버걱거리는 것은 월간 말지와 같다.
 
말지의 내부 상황은 내가 보기에는 돈이 없어서 생겨난 일에 불과하다. 사장의 여기자 폭행 사건을 비롯한 풍문으로만 - 그걸 누가 확인하거나 확인해줄 수 있겠는가? - 듣는 일련의 사건은 결국 돈이 없어서 생겨난 일이고, 도니가 없다보니 쉽게 변질될 수 있는 좌파의 약한고리 - 이건 약한 고리라고 하기에도 너무 허접한 사건이지만 - 와 닫혀있음이 밖으로 드러난 사건에 불과하다.
 
다만 당대비평이 더 점잖았을 뿐이다. 억지로 출간을 하려고 했으면 당비 내에도 결국은 재정적 책임을 떠맡아야 할 사람과 그렇지 않을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겨날 것이고, 조금 더 점잖은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냐 그렇지 않을 것이냐는 차이만 있지, 그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내가 당비에 처음 글을 쓴 건 2년이 좀 넘는 것 같다. 하여간 그 때 ‘87년 체계’라는 생뚱한 주제로 특집호를 만들면서 다소간 막무가내로 무조건 써달라고 했던 것이 나와 당비 사이의 첫번째 인연이다. 한 번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매 출간 때마다 나는 당비에 글을 기고를 했다.
 
내가 당비에 기고하는 이유는 김보경 선생이라는 편집인을 믿기 때문이다. 다소 당차고 다소 능력있는, 이제 아이를 낳아 6개월된 아이의 어머니인 김보경씨는 드물게 보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굳이 인연을 들이밀자면 김보경 선생은 나의 좀 먼 후배뻘 되겠지만, 그런 이유라서가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급진적인 사람은 될지언정 지혜로운 사람은 되지 못한다. 만약에 주위에 사람이 모일 수 없도록 그리고 어느 조직과도 깊이 관여하지 않는 것이 "지혜"라면 나도 지혜로운 사람일 수 있겠지만, 내가 그러는 건 지혜로와서가 아니라 나의 대인기피증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오히려 나는 신경증이 나를 지켜주는 것이라는 사후적 해석을 할 수가 있지만, 김보경씨는 대체적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전형적으로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자질들을 가지고 있다.
 
일단은 온유하고 겸손하다. 그래서 같이 있으면 편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김보경 선생은 조용히 일을 할 줄 안다는 점이다. 미신 같은 얘기지만 나는 사람의 눈빛을 열심히 보는 편이다. 눈빛만 본다고 뭘 알 수는 없지만, 수다스러운 말을 던져놓고 사람들이 1초 미만에 갖게 되는 눈빛의 변화를 읽는 편이다. 약간 미신스럽다. 때때로 어떤 사람은 자신은 지나치게 게을러졌고, 이제는 자신의 탐욕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눈빛을 보인다. 물론 짜증이 나지만, 대개의 경우 나는 그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서 무엇을 하기 보다는 현장으로부터 도망간다.
 
"좀비가 있다."
 
사람은 대개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좀비형과 흡혈귀 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흡혈귀형은 고상하다. 그리고 머리가 좋다. 그렇지만 결국은 빨아먹기만 하고 자신의 피는 조금도 내어놓지 않을 사람이 있다. 그가 전하는 것은 자신의 피 - 노력 - 이 아니라 흡혈귀로 바뀌게 되는 바이러스에 불과하다. 물론 흡혈귀는 창이적이다. 루마니아에 있는 트랜실베니아의 외딴 성에서 자본주의의 심장 런던으로 이주하겠다는 드라큐라 백작의 결정은 얼마나 창의적인가? 그리고 도대체 뭘 안다고 그 상황에서 변호사를 불러서 이주에 필요한 온갖 일들을 대리해서 처리하도록 만들 정도의 지혜를 가지고 있단 말인가?

분명히 변호사 도나판이 해결한 여러 서류에는 루마니아에서 영국으로 이주하기 위한 패스포트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주민증이 있어야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을텐데, 도대체 1000년도 더되었을 트랜실배니아의 영주에게 주민증이 있기나 했을까? 출생과 신분을 증명할 아무런 서류도 없었을텐데, 통관절차와 선대 업무를 어떻게 했을까? 그걸 처리하기 위해서는 인간으로서 돈만 준다면 불법을 충분히 - 혹은 위협이라도 - 할 수 있을 정도로 능력있는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고, 런던의 변호사가 그럴 할 수 있다는 걸 알 정도로 그리고 아무런 조언자 없이 그걸 알 정도로 드라큘라 백작은 똑똑하다. 그러나 흡혈귀는 결국 흡혈귀일 뿐이다.
 
좀비는 좀 다르다. 부두교의 영혼은 아프리카에서 카리브해 연안으로 강제로 끌려온 흑인들의 슬픔을 은유한다. 좀비는, 영혼없는 삶을 의미한다.
 
김보경씨는 온유하고 겸손하지만, 문제를 확실히 틀어쥐고 조금씩 문제를 풀어나가는, 보기 드문 지도자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있다면 쓸데없는 조직에 대한 고민이나 경영에 대한 참견 같은 건 접고 지지를 해주면 된다. 그게 내가 당대비평에 글을 기고하던 이유이다. 나는 문부식도 만난 적이 없고, 그 외의 편집위원들은, 물론 소설가 중 한 명은 선거 때 자신을 지지해달라고 새벽에 해장국으로 밥을 먹으면서 악수하고 잠깐 얘기한 적이 있기는 하다.
 
김보경 씨가 실제적인 편집을 맞고 있는 한 나는 약간은 등을 대고 있어도 좋다. 교정을 보는 것은 물론 약간의 "처리"를 하겠지만, 그게 설령 아무리 잔인한 얘기와 세간의 이해와 다른 말이 들어가 있더라도 본질을 흔들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곳은 대개는 본질을 흔들고, 그리고 길게 보면 논의를 이끌어나가기 위해서 집어넣은 장치들이 자신들의 아픈 곳을 조금이라도 건드린다면 가차 없이 칼질이 들어온다.
 
물론 나는 지금 편집을 감수한다. 작은 교정과 몇 단락의 재배치 정도에 대해서는 실제로 나는 감사를 한다. 내가 했었어야 하는 일인데, 게으름으로 하지 못한 일들을 편집자가 원래 그런거 하라고 있는 사람이 아닌데 대신해서 해준 일에 대해서는 고마움을 느낀다.
 
그러나 올해 경험한 두 개의 잡지처럼 통으로 틀을 바꿔 달라고 할 때가 제일 불편하다. 이 경우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제일 정확한 건 "됐습니다"라고 얘기하고 원고를 받아오는 경우이다. 실제로 나는 10년 동안 누가 한 마디라도 하면, 300페이지가 넘는 원고를 그냥 접었다. 그건 내 글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본질에 해당하는 부분을 건드린다고 하면 출판이나 출간 후에라도 여러가지 문제가 생긴다는 점을 의미하고, 본질적으로는 내가 출판 매체를 잘못 선택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내가 등을 대고 있는 중요한 매체 중의 하나가 당대비평이다. 그리고 고백하자면 여기에는 김보경이라는 편집자가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믿고 그렇게 거래할 수가 있느냐고 누군가 질문한 적이 있는데, 그렇다면 한 명이라도 믿을만한 데가 있는데가 도대체 그렇게 자주 있느냐고 질문을 바꿀 수밖에 없다. 만약 그 한 사람이라도 믿지 못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그 당대비평이 올 여름호를 발간하지 못할 것이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여름호를 쉬고 가을호를 "재창간호"를 발간할 것이라고 알고 있고, 그래도 한 뻑이 들어간 원고를 준비하기 위해서 나는 세달 정도는 여러가지로 모색을 하고 있었고, 대체적으로 결론의 방향을 잡아가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러나 당대비평의 재창간호는 발간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폐간사 같은 게 있던 것도 아니다. 객관적으로는 당비라는 계간호가 지난 여름호부터 발간되고 있지 않았다는 사건 밖에 없다. 경제적으로 무능하고 철학적으로 날카롭지 못하지만 전반적으로 선량한 편집위원회는 휴간을 결정했다.
 
그래서 언젠가 돈을 모아서 다시 발간하면 그게 복간호가 되는 셈이다.
 
그리고 결정하지 않은 것은 "언제"라는 점이다. 영원히 복간호가 나오지 않는다면 당대비평은 이미 폐간된 셈이다. 그렇지만 폐간사가 없었다는 점에서 아직은 "기다림"의 긴 잠으로 들어간 셈이다.
 
문제를 이렇게 복잡하게 만든 돈이 1억원이라는 점도 알고 있다. <길>지도 월간 <말>지도, 그리고 기타 계간지들이 없어지는 건 시장에서는 이 오래된 매체들이 1억원이라는 돈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크다면 크지만 사실 아무 것도 아닌 돈이다.
 
길고 길어질 동면 동안에 그렇다면 당비가 무엇을 준비하고 모색하면서 시간을 보낼까? 물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아무도 이 당비라는 이름으로 내용이나 방향을 고민할 사람이 - 거의 -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억원을 만들기 위해서 고군분투하고 무슨 후원자나 후원모임 같은 거 아니면 후원행사를 만들기 위해서 시간을 보내고 최소한 1억원은 넘는 돈을 만드는 데까지는 끝없는 그리고 정처없는 소모전을 벌이게 된다.
 
그래서 약간은 슬프다. 좋은 사람들은 더 쓸데없는 일들에 시간을 보내야 하고, 별로 좋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을 더욱 더 공고하게 하는 데 많은 시간과 돈을 쓸 수 있게 된다. 이 싸움에서는 당비가 졌다. 혹은 당비와 비슷해 보이는 매체들이 졌다.
 
그러나 역사라는 것은 가끔 이 전대의 일들과는 상관없는 젊은 사람들이 혹은 그보다 어린 세대들이 갑자기 튀어나와서 이 문제들을 해결하고 전혀 새로운 궤적으로 흐름을 바꾼다는 것을 기다리게 된다는 재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슬프지만 기다려보는 작은 설레임이 그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왜 내가 나서지 않는가? 물론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나서겠지만, 내가 전력을 들이는 곳은 당비는 아니다.   / 논설위원
 
* 필자는 경제학박사로 초록정치연대(www.greens.or.kr) 정책실장입니다. 최근 <아픈 아이들의 세대 - 미세먼지 PM10에 덮인 한국의 미래>(뿌리와이파리, 2005)를 출간했습니다.      
* 필자의 블로그안내 http://blog.naver.com/wasang2/
* 글쓴이는 경제학 박사,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성공회대 외래교수, 2.1연구소 소장입니다.

* 저서엔 <88만원 세대>,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 <아픈 아이들의 세대-미세먼지 PM10에 덮인 한국의 미래>, <조직의 재발견>, <괴물의 탄생>, <촌놈들의 제국주의>, <생태 요괴전>, <생태 페다고지>,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등이 있습니다.

*블로그 : http://retired.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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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07/27 [14:5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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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명 2005/11/02 [16:15] 수정 | 삭제
  • 글쓴이가 문부식씨에게 관심이 없다고 하는데,

    누가 물어봤나? 문부식도 글쓴이한테 관심 없을거다.

    글 중간중간 '내가 ~ ' '나는 ~'

    전형적인, 자기중심적인 사람의 글이다. 자기가 무슨생각하는지, 자기가 뭘느끼는지 자기가 뭘하고 싶은지, 주저리주저리...
  • ehszlghxo 2005/08/01 [14:41] 수정 | 삭제
  • 언제부턴가 창비는 그저 친정부 성향의 (좀 심하게 표현하면 정권의 나팔수) 담론만을 생산하는 담론 생산지가 된 것 같습니다.
    걱정스럽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악역이 악한 행위를 하는 것은 당연하기에, 조선일보의 행태는 장기적으로 그리 우려할 만한 상황은 아니지만, 멀쩡하게 생긴 놈(창비)의 뻘짓은
    많은 이들에게 혼란과 착시 허탈, 실망감을 주고 현실변화(혹은 변혁)의 물줄기를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돌려 놓을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심각한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창비가 조선일보보다도 더 나쁘다고 봅니다.
  • 눈팅 2005/07/28 [10:26] 수정 | 삭제
  • 당대비평, 초기에 조세희 선생, 윤정모 선생 등등 글로 만나는 반가운 인물들이 있었지요. 그러다 어느 때부터 잡지가 읽는 자를 위한 글이 실리는 게 아니라 글을 쓰는 자들의 잠꼬대 같은 글이 실리기 시작하면서 관심이 식어졌지요.

    그게 아마 '임지현'이 가세한 후부터가 아닐까 하네요. 자신들은 뭐 대단하고 심각한 듯 이야기하지만 읽는 자의 입장에서는 '이게 뭔 잠꼬대', 뭐 이런 생각이 들었지요.

    당대비평, 아마 현장과 유리된 이론이 어떤 결말을 초래하는 지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책장에 꽂혀 있는 당대비평을 보며 한 때 저 잡지를 보는 재미를 느꼈던 시절이 있었지......하네요.

    자본에 졌다는 건 단지 자기 확신을 뿐이지요. 그냥 현실을 읽어내는 실력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게 정직하겠지요.

  • 푸후 2005/07/27 [20:46] 수정 | 삭제
  • 대한민국 최고 가문
    백씨의 일원이 내는 잡지인데
    망할리가 있습니까
    백병원-인제대가 백씨일가인데요
    창작과 비평과 당대비평을 비교하는 건 삼성과 구멍가게를 비교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