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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절에 사회주의 조선과 쿠바를 가다
북한의 독도영화 '피묻은 약패', 올리버 스톤의 '피델 카스트로를 찾아서'
 
숨인씨   기사입력  2005/05/03 [00:55]
5월 1일은 노동절이다. 집회 시위의 날이기도 하다. 그런데 필자는 광장 대신 영화관을 택했다. 제6회 전주국제영화제가 나흘째 열리던 날이었다.

노동절은 시카고의 ‘헤이마키트’ 사건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비극은 1889년 제2인터내셔널에서의 창립대회를 거쳐 이듬해의 메이데이 대회를 낳았고, 아무래도 붉은 빛을 띨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노동절의 함성으로부터 자본주의의 천국이자 수도인 미국을 금세 떠올리는 이는 별로 없을 것 같다. 노동절의 상징적 인물로는 헤이마키트의 운동지도자 파슨즈는 거의 회자되지 않으며, 유수의 사회주의 사상가나 국내의 전태일 등이 거론된다.

그렇다면 동구 국가사회주의가 건재했을 때의 노동절은 어땠을까. 20대의 필자로서는 알 수 없다. 한때 한국사회에서 공산권에 대한 관심과 동경이 실재했고, 이것이 운동권의 편향성을 강화시켰다는 것만 알 뿐이다. 이제 소련은 무너졌고 중국 공산당은 유사 극우파로 전락했다. 쿠바와 조선(북한)이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맞서는, 그러나 진보진영에게 더는 대안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체제로 남아 있다. 필자는 객석에 앉아 여행을 떠났다.

피묻은 약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2002년/126분/35mm/천연색/장편/표광 감독)  
▲ 상영관의 공고문     ©김수민


<피묻은 약패>를 상영한 ‘전주시네마’의 입구에는 주목할 만한 안내문이 나붙었다. 북한영화를 관람할 관객에게는 소지품 검사를 실시할 예정이니 원치 않는 사람은 ‘지프광’이라 불리는 보관소에 짐을 맡기라는 것이었다. 38선은 38선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평소에 한반도의 냉전을 해소하는 방법은 통일 하나 뿐이라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쩌면 남북이 따로 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남북의 분단, 민족의 분단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가방 주인이 가방을 가지고 극장에 들어갈 수 없는 것처럼, 개인의 부자유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하여간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소지품 검사가 찜찜한 탓인지 가방을 보관소에 맡겼다.

지정좌석에 앉아 불이 꺼지기 전 객석을 두루 훑어 보았다. 오전이라 꽉 차지는 않았다. 군데군데 벽안의 관객들이 보였다(영화제의 출품작들은 대개 ‘영어자막’이 깔려 있다). 암전이 되고 영화가 시작했다. 흑백영화일 것이라는 근거도 없는 필자의 편견이 무너졌다. 거칠게 휘갈겨 쓴 듯한 타이틀이 인상적이었고 몇몇 이들은 탄식을 흘렸다. 미디어에 널리 알려진 대로 영화는 ‘독도’를 소재로 하고 있었고, 목적에 꽤나 부합하는 선동적인 해설이 흘렀다.

만일 누군가가 사회주의의 레닌주의적 전통을 중시하고 그와 결합한 예술양식을 선호한다면, 이 영화가 시원찮게 보였을 법도 했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고려였다. 독도를 지키자는 근현대의 외침을 옛 왕조로 가져간 원동력은 민족주의였을 것이다. 민중사관 같이 특별히 다른 이념적 징표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장변도와 그 딸의 대화에서, 그러니까 딸의 반항에서 반봉건적인 의식이 엿보였다.

영화는 초반에 우산도(독도)에서 행복하게 사는 천무봉의 가족을 비춘다. 하지만 이들의 행복은 왜구의 침략과 현령 장변도의 변절로 일그러지고, 천무봉은 아들 삼형제에게 독도의 유물을 가리키는 약패(지도가 그려진 거북 등껍질이었다)를 나누어준 다음 저항하다가 절벽에서 떨어진다. 이후 줄거리는 삼남인 천석파를 중심으로 진행되는데, 구성은 단순하기는커녕 얕잡을 수 없을 만큼 탄탄하고 나름의 반전이 뒤따른다. 선악구도는 뚜렷하지만 모두모두 잘 살았다는 헤피앤딩으로 끝나리라는 추측도 다소 빗나간다. 주요인물 중에 최후의 생존자가 천석파 하나이기 때문이다.

배우들의 얼굴은 한국 배우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석파 역의 리영호는 통일이 되었다면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었을 법한 배우였다. 어투나 어휘가 낯설기야 했으나 7, 80년대의 한국영화 이상으로 이물스러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왜구의 침략 장면에서, 실사도 아니고 그럴싸한 미니어쳐도 아닌, 작은 돛단배 모형을 얕은 바닷물에 띄웠다는 것이 관객들에게 실소와 아쉬움을 낳게 했다. 반면, 화면에 등장하는 경이로운 풍경이나 진지하고 숙연한 사운드트랙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영화가 끝나고 필자의 뒤에 앉아 있던 한국 어르신과 백인 청년은 영어로 무언가를 얘기했다. 어르신은 남북의 분단이나 차이를 설명하는 듯했다. 그 청년은 ‘원더풀’을 연발했는데, 무슨 뜻이었을까.

피델 카스트로를 찾아서Looking For Fidel
(스페인&프랑스/2004년/63분/35mm/천연색/다큐멘터리/올리버 스톤 감독)

 
▲  피델 카스트로와 올리버 스톤의 인터뷰(사진:씨네21)     ©  김수민


감독이 올리버 스톤? 그렇다. <플래툰>, <도어즈>, <7월 4일생>의 그 올리버 스톤이다. 올리버 스톤의 영화에 오리엔탈리즘이나 미국적 이상 등 여러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가 리버럴하고 진보적인 영화인으로서 표출한 메시지들이나, 선택한 소재, 기법 등은 필자에게 큰 감동을 주었었다.

2003년에 이미 그는 쿠바로 날아가 카스트로를 조명한 <지휘관>을 찍었다. 그럼 다시 쿠바 로 간 까닭은? 여객선과 비행기를 납치하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미국으로의 이민을 기도한 피고인들에게 쿠바가 혹독한 벌을 가한 것이 발단이었다. 이로써 국제사회의 비난 여론이 가해지자, 올리버 스톤을 비롯한 스탭들이 저널리스트로서 카메라를 메고 쿠바로 건너간 것이다.

갑갑하고 고루한 다큐멘터리를 상상했다면 오산이다. 카메라는 불안하게 흔들리고 인터뷰이인 카스트로의 얼굴을 클로즈업해 입이나 눈만 비추기도 한다. 이런 파격은 다큐멘터리의 흥미를 높이기도 하지만, 석연찮은 프로파갠더의 혐의를 받기도 한다. 아마 올리버 스톤이 카스트로의 인간적 측면에 초점을 모아 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는 의심과, 반대로 굳건한 영도자의 위상을 해체시키기 위해 카메라로 장난을 쳤다는 평가가 공존하지는 않았을까?

카스트로는 고집스러웠으나 괄괄하거나 우악스럽지는 않았다. 그는 뜻밖에도 조금 유약한 면모를 지녔다. 독재자라는 지적에 “대통령도 아니고 의장일 뿐”이라며 “장관이나 대사도 임명할 수 없는 정신적 수장”이라고 대답한다. 스톤이 언론 보도를 예로 들며 쿠바의 인권상황 등을 캐물을 때는 서방언론이 자기를 괴롭힌다는 투로 드러나지 않았던 사실, 특히 미국의 횡포를 비난한다. 영화는 카스트로의 연설 동영상을 가져와 쿠바가 혁명 이후 무상의료를 실현하고 거의 4할에 가깝던 문맹률은 0.2%로 떨어 뜨렸음을 언급하기도 한다. 또 카스트로는 납치범과 함께한 자리에서 온유한 화법과 말씨로 변호인들이 최선을 다할 것이며, 국가도 최대한 선처를 베풀 것(그리고 이 문제는 자기가 아니라 판사들이 민주적으로 결정한다는 암시까지 덧붙였다)이라 한다.
 
허나 피고인들은 무기징역이나 징역 30년을 받고, 마침내 필자는 카메라 앞에서 카스트로가 연기를 하는 게 아닌가, 하며 신경이 곤두섰다. 바로 그게 스톤의 의도였을 것이다. 카스트로는 “후계자에게 넘기지 않느냐”는 질문에 시종 “미국이 좋아하는 짓을 할 수 없다”는 옹색한 답변으로 일관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어느덧 핍박받는 반체제인사들을 조명한다. 한편 카스트로는 양심수는 없으며 고문도 없다며 강변한다. 인터뷰 장소를 옮길 때 길거리의 군중들은 카스트로를 연호하며 미 제국주의와의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절규한다. 쿠바 대중 그리고 카스트로의 고통과 오류가 동시에 읽혔다.

한시간이 흐르고 필자가 자리를 떠나며 내린 결론:“박정희에게 선사하는 '독재자였지만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했다'는 평가는 카스트로에게 더 적합하다. 조선체제에 ‘내재적으로 접근’한다는 논리도 차라리 쿠바에게 더 어울린다.“ 관객들 틈에서는 “어쨌든 미국이 나쁘다”는 소리가 적잖게 흘러 나왔다.

‘악마 상상하기’를 벗어나

조선이나 쿠바가 이상적인 체제가 아니라는, 아니 욕을 먹어 마땅한 나라라는 필자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들을 비판하는 지평과 근거는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 더 확고해졌다.

조선과 쿠바에 악마가 살고 있는 게 아니었다. 거기에는 사람이 있었다. 유신체제와 마찬가지로 갇혀서 핍박받는 이는 소수일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전제에서 새로 출발해야 한다. 우리가 조선과 쿠바를 비판해야 할 이유는 그 사회가 생지옥이라서가 아니다. 다시 말해 그 사회밖에서 우리가 그들을 악마로 상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건 약자과 소수자의 처지에서 먼저 서봐야 한다. 그때 우리는 쿠바와 조선의 오류를, 나아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폐해를 훤히 궤뚫게 되고, 비로소 ‘다른 세계’는 가능해질 것이다. 
 
* 이 기사는 유뉴스(http://unews.co.kr)에도 송고하였음을 밝힙니다.
* 글쓴이는 경북 구미시 시의회 의원(무소속)입니다.
2010년 6.2지방선거에서 영남지역 최연소(27세) 기초의원에 당선돼 현재 시의원으로 활동 중입니다.
2002년 <대자보> 필진으로 참여한 이래 다년간 정치칼럼 등을 연재해 왔으며,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대자보> 독자들과 만납니다.
기초의원으로서 풀뿌리 정치 현장에서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블로그 : http://kimsoomin.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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