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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일본의 협공, 한국사는 안녕하신가?
역사는 완료아닌 진행, 고조선에서 제국 멸망까지 5천년 역사다뤄
낙관적, 역동적 역사관으로 '살아있는 한국사'로 한국사 재구성해
 
김수영   기사입력  2004/01/28 [09:33]

쉽고 생동감 넘치는 대중 역사 교양서

고구려사를 자국自國의 역사에 포함하려는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와 최근 재차 문제가 되고 있는 독도 영유권 논쟁은, 역사가 완료가 아닌 진행’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진부하지만 역사에 대한 E. H. Car의 정의를 새삼 덧붙이자면, 역사란 결국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 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인 것이다.

▲살아있는 한국사, 이덕일 저     ©휴머니스트
단군조선부터 대한제국 멸망까지의 통사通史를 3권으로 나누어 강좌식으로 기술하고 있는 이덕일의 [살아있는 한국사](휴머니스트, 2003)는 바로 이러한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해방 후 한 갑자甲子가 다 되어가는 이때, 교조화된 정설의 역사학, 죽은 뼈다귀 이름만 외우는 죽은 역사학이 아닌, 식민사학의 진정한 극복과 우리 민족 본연의 대륙성,해양성의 복원을 지향하는 ‘살아있는 역사학’의 출현은 시대적 요구”(8~9쪽), 라고 집필 의도를 밝히고 있다.

사실 이제껏 ‘통사’라고 하면 대개 밑줄 치고 달달달 외워야 하는 국정교과서이거나 수험서, 아니면 그와 유사하게 따분한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살아있는 한국사]는 이렇듯 박제된 기록들만을 나열한 역사서와는 구별된다. 그 동안 대중들을 상대로 여러 권의 역사 교양서를 집필해 온 이력을 증명이라도 하듯 저자는 쉽고 간결한 문체로 역사적 사실을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한문투의 오래된 문헌 및 사료를 한글체로 읽기 쉽게 매만진 것 또한 돋보이는 점이다. 원전原典이라 할 수 있는 1차 사료에 손쉽게 접근함으로써 독자들은 논의의 신뢰성을 점검하고, 더불어 생생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

[살아있는 한국사]는 세 권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 중 첫 번째는 종래의 고대사 기술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저자는 국내외 다양한 사료와 발굴성과를 제시하며 고조선의 성립시기와 영토의 범위에 대해 주류학설과 다른 시각으로 접근했으며, 기존 삼국시대를 부여와 가야를 포함해서 열국列國시대로 다시 정의하고 그 시작을 끌어 올렸다. 또한 임나일본부설과 관련 한반도 내에서 ‘왜倭’의 존재를 탐구했으며, 나아가 이 '왜’가 일본 황실의 선조임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고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저자의 시각 또한 눈 여겨 볼만하다. 결과적으로 고구려의 영토 상실을 초래했다는 이유로 그 동안 신라의 한반도 통일 의의를 애써 축소했던 게 일반적이었다. 벗어나는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신라의 한반도 통일에 대한 평가 절하와 관련해 개인적으로 한 마디 더하자면, 거기에는 일종의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다. 군사독재시절 TK지역 몇몇 인사들이 신라의 삼국통일을 그 지역 출신 집권자의 독재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종종 사용했던 탓에 신라의 통일에 부정적인 색채가 덧씌워지기도 했었던 것이다. 어쨌든 애초에 서로간 ‘민족’이라는 인식이  없었던 시대를, 지금의 ‘단일 민족’ 개념으로 재단한다는 것은 맞지 않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되려 저자는, 당시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신라가 어떻게 백제와 그리고 강대국이었던 고구려를 병합할 수 있었는가를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동력動力의 하나로 신라의 ‘외교력’을 꼽고 있는 것은 여느 견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정작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신라의 한반도 통일의 또 다른 동력으로 신라 지배층의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들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황산벌 전투에서의 관창을 예로 들며, 신라 지도층의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신라의 한반도 통일에 밑거름이 됐다고 말한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신라의 지배층은 죽음을 각오하고 최전선에서 싸움으로써 일반 백성들로부터 지지를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한반도 통일을 이루어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사회지도층 자녀들의 병역비리, 그리고 병역기피가 문제가 되는 요즘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낙관적, 역동적 역사관

<고려의 건국에서 조선의 훈구파의 집권까지>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2권과 <사람의 등장에서 대한제국 멸망까지>를 다룬 3권은 주로 정치사 위주로 서술되어 있다.

2권에서 저자는 고려사회를 각 지방의 다양성이 중앙의 전체성과 조화를 이룬 시기로 인식하고 있는데, 고려초기 정치체제가 지방호족들 간 연합정권을 기반으로 마련됐다 사실을 볼 때 고려사회의 이러한 특질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이러한 지방 호족들의 연합이 후일 권력 쟁투의 불씨가 됐다는 점을 비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지방 문화가 꽃피웠다는 데 후한 점수를 줬다.

‘서울공화국’의 폐해를 생각할 때 앞으로 한국 사회의 바람직한 변화는 지방의 다양성 속에서 국가의 전체적인 조화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고려사회는 현재 우리가 참조할 만한 역할모델이기도 하다는 저자의 말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 최근 경기도에 분당 규모의 신도시를 수 십 개 건설하겠다는 흰소리를 해대는 손학규 경기도지사께 이 책을 일독一讀하시라 권하고 싶다. 환경단체 여러분들께선 환경을 파괴하는 지방의 난개발 반대와 더불어 환경오염의 주범인, 수도권 과밀화를 부추기는 손학규 경기도지사를 호되게 비판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 

마지막 3권에서는 기존의 왕조를 중심으로 한 시대 구분과는 달리 조선 중기 사림의 등장부터 중요 쟁점별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하고 있다. 사림파 등장과 인조반정으로 조선 지배층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했다고 보는 저자는 인조 반정체제에 그 뿌리를 둔 종래 ‘노론’ 위주 조선 중,후기사史 서술 방식을 비판하면서 객관적 입장의 서술을 시도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훈구파에 의해 주도된, 네 차례의 참혹한 사화士禍를 겪고 150년 만에 집권한 사림파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집권 사림파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재야,야당 시절의 사림파는 훈구파와 대립축을 형성했다는 이유만으로 역사적 정당성을 지닐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사림파의 어깨 위에는 정국의 주역으로서 새로운 시대를 선도해 나가야 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사림파는 그러나 반훈구파 정치세력으로서의 기능은 훌륭히 수행했을지 몰라도, 새로운 사회의 비전을 제시하고 그를 운영할 능력은 부족했다. 그들의 집권은 곧 당쟁으로 이어진 것이다.- 3권, 15쪽 중

날카로운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저자의 지적대로, 꼭 당쟁이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념을 달리하는 정당간의 경쟁은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기본원리다. 그러나 그것이 ‘견제와 균형’의 미덕을 잃은 채 서로간 분열과 반목, 그리고 사나운 다툼만을 일삼을 때 사회전체가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는 것 또한 당연하다. 집권 사림파가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노론, 소론으로 서로 분열하고 갈릴 당시는 당쟁보다 급한 일이 많았다. 그 시기 조선은 동아시아 전체가 새로이 재편되는 격변의 한가운데 있었다. 와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중국 땅에서는 한족漢族이 세원 명나라가 만주족의 청나라로 교체되었다. 그리고 병자호란이 일어났고 이후 외세의 침탈이 이어졌다.

재미있는 것은 저자가 이러한 사회적 혼란기를 오히려 사회발전의 기회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저자는 전란 이후 나타난 양민들의 편법적인 신분상승을 국가기강의 해이로 바라보기보다는 사회발전을 가로막는 신분제를 해체하고 보다 개방되고 다양한 사회로 나아가려는 시대적 징후로 보고 있다. 저자는 병자호란 또한 그것이 치욕인 동시에 조선이 처한 현실을 바로 볼 수 있는 기회로도 봤다. 저자는 패전을 변화하는 국제 정세를 파악하고 냉혹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국력을 신장할 계기로  인식했다. 일제의 조선 침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당시 어지럽던 국제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던 조정과 국권침탈에 동조 혹은 방관했던 노론 계열의 지배층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하지만 단순히 분개만 하기보다는, 일제의 폭정에 대해 일반 민중들이 지배층과는 달리 지속적인 저항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됐다는 주장하고 있다. 저자의 낙관적이고 역동적인 역사인식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지난 100년의 한국사를 기다리며

그렇다고 이 책에 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왕조 중심으로 한 서술에서는 탈피했지만 여전히 지배층 위주로 역사를 기술하는 바람에 당시 일반 백성들의 활발한 생활상이 부각되지 못한 점이 안타깝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이 책이 일제의 국권 침탈로 시작된 20세기 한국사를 다루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고대사 못지 않게 지난 100년의 역사 또한 [조선일보]로 대변되는 친일세력과 친군사독재세력에 의해 왜곡되어 왔기 때문이다. 독도 영유권 논쟁이 일어날 때마다 일본에게 적개심을 드러내던 사람도 정작 친일부역 신문인 [조선일보]에는 너그러운 게 현실이다. 정부가 친일인명사전 편찬 정도조차 꺼리는 지금, 눈밝고 올곧은 역사학자들에 의해 일제침략과 군부독재로 점철된 지난 100년의 한국에 대한 올바른 기록과 평가가 절실하다. 저자인 이덕일이 지난 100년을 다룬 대중적인 역사 교양서를 쓰는 데 관심을 갖길 기대한다. 각권 1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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