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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kDoo의 소름돋기]억압된 자들의 귀환
영상으로 표출되는 기득권들의 인종차별, 파시즘의 광기들
 
김정곤   기사입력  2004/01/16 [09:10]

호러물들에서의 계급관은 이미 많은 글들에서 다루어진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숨어있는 계급관들이 미치는 파급효과에 대해서는 그리 많이 다루어 지지 않은 듯합니다. 호러물들에서 작동하는 최초 코드가 인종간의 불협화음을 유도 한다면 그 다음 숨어있는 코드들은 그들에게 해가 될듯한 존재의 말살에 관해서이지요.

80년대 후반까지 일반적 할리우드 호러물들에서 백인 이외의 인종들은 극도의 공격적인 형태로 표현되었습니다. 이후 인종간의 갈등을 조장하던 이들은 좀더 은밀하게 이를 진행하는데 우선은 기존의 영화들로부터 만들어 놓은 인종 편견은 이미 이 사회 내부에 깊숙이 잠재 되어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들이 미국으로 또는 해외로 나가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끼칠만한 인물들을... 당장에 떠오르는 건 흑인과 히스패닉계일 것입니다.(물론 다른 유색인종 또한 마찬가지 일겁니다) 지난 백 여년간 만들어져 온 정치적 코드들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지요. 이렇게 만들어진 정치적 코드들은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궁극적으로는 그 불필요하고 위험한 생명체의 말살에 이릅니다. 

호러물들 특히 슬래셔 영화들을 보면서 당연하게도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을 하게 되는데 서서히 이루어지는 학살자에 대한 마지막의 끔찍한 응징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일말의 동정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때문에 기존에 만들어져 있던 흑인 또는 히스페닉=위험 분자의 말살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어 그들이 우리에게 해가 되는 존재들이며, 그 해가 되는 존재들이 우리에게 위해를 가할 경우(그렇게 보일 경우)우리는 당연히 응징을, 그것도 존재를 말살 해버리는 응징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당연히 죄의식은 존재하지 않지요. 당연히 말살 되어야 할 존재를 처단 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영화들의 정치적 공식은 계속해서 진행 중이며, 지난 백 여년간 흑인과 히스페닉계는 이미 위험분자로 결정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들에게 별 도움이 되지않는 백인 저소득층에게 까지 서서히 영역을 넓혀 가고있는 중입니다.

▲영화 13일의 금요일포스터  
영화 '13일의 금요일'의 살인마 제이슨은 비록 백인이긴 하지만, 그가 등장하지 않는 1편의 회고를 통해 그가 정상인과 어울릴 수 없는 사회부적응자 임이 들어 납니다. 이후 그가 등장하기 시작하는 2편에서부터는 종이 봉투를 쓰고 살인을 해나가기 시작하는데, 이는 그의 기형적인 외모를 감추기 위함이며 주류 백인들과는 전혀 틀린 존재임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저 유명한 제이슨의 트레이드 마크인 하키마스크가 등장하게 되는 3편부터는 이미 인간을 초월한 하나의 체화된 악령으로 기능하게 되는데 이는 그나마 인간적 범주에 속했던 전편의 '괴물'을 하키마스크라는 상징화된 장치를 통해 그가 이미 인간이 아닌것으로 만들어 냅니다. 바로 마스크 자체가 그의 얼굴을 대체함으로 인해 이제는 '신적괴물'과 같은 존재로 격상됨으로 인해서 이제 누구도 그의 불사를 의심치 않게 됩니다. 더불어 크리스탈 호수에 빠져 죽었다는 그가 처음으로 등장한 이후 최근의 '제이슨 X'까지 그는 줄곧 한가지의 복장 즉 '작업복'을 착용하고 있는데 최초의 등장에서의 그의 모습은 사회 부적응자이며, 인간의 가치를 배우지 못하고 오직 모성의 복수에만 집착하는 오이디프스 컴플레스 환자이며, 사회의 비주류 노동자 출신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후 3편에 들어서 ‘신’의 위치로 격상된 그에게는 이전의 그러한 콤플렉스 따위는 찾아볼 수 없으며, 단지 사회를 공격하는 위험한 노동자의 이미지만이 각인되게 됩니다.

때문에 이러한 이미지는 생존을 위해서 또한 삶의 질을 위해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과격단체로 보는 시선과도 관통하고 있는데 이러한 시선들은 사회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기득권자들을 옹호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하며, 수구적 방어가 보수적 시선으로 둔갑해 버리는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또한 영화 '죠니 라이더'의 경우 이미 그들에게 위협을 가하는 실제 위험 분자를 그들 주변의 유색인을 포함한 저소득층 백인에게까지 확장시키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 듯이 보입니다.

죠니 라이더는 대표적인 인종 차별 주의자인 스필버그의 '듀얼'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데, 스필버그가 트럭 운전자라는 저소득층이자 흑인의 위협성을(영화의 마지막, 감독은 운전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신 죽은 운전자인 흑인의 손만을 보여 주는데 이는 흑인 전체를 위협의 대상으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확산시켰다면 죠니 라이더의 경우는 트럭 운전사 자체의 공포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트럭이 가진 공포성(고속도로를 질주하는 트럭을 떠올려보시길)이 바로 운전자에 대한 공포감으로 전이되는 지점을 이용한 영화가 바로 이들 영화이며, 이들 트럭 운전자들은 거의 모든 영화에서 저소득층에 포악한 성격으로 그려지고 있지요.

이는 정말이지 파시즘의 광기에 다름 아닙니다.

이들은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파시즘적 경향인 '나와 다름' 그리고 '자본 계급'적인 차별의 시선과는 그 급을 틀리게 하고 있습니다. 한국인의 시각이 기본적인 인관 관계에서의 계급적 시선의 반영인 반면에(그렇다고 한국적 시선이 옳다는 건 아닐 뿐더러 이 역시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들의 시선은 지배계층(인간)과 피지배계층(야만)의 차이를 기본으로 자신들에게 부합하지 않는 유색인의 경우에는 야만으로 저소득 백인계층은 그들의 안정과 발전을 위한 노동자로 보고있으며, 장애인의 경우에는 그 시선조차도 거두어 버림으로써 그 존재 자체를 감추어 버리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영화 '플래툰'에서의 지식인은 베트남전에 참전함으로 인해 전쟁의 광기와 고통을 머리로 생각하고 고뇌하지만, 노동자가 참전하는 영화인 '디어 헌터'의 주인공들은 그 끔찍한 광기와 절망을 직접 몸으로 겪으며 절망 속에서 허우적대다 파멸에 이르고 말지요.

(또 하나 집고 넘어가야 할 점은 백인 지식인 또는 기득권의 살인에 관해서는 아주 관대하며 오히려 살인마에게 감정 이입을 유발 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영화 '프라이멀 피어'나 '한니발'이 유색인 이거나 혹은 피지배 계층 이었다면 그들을 다루는 방식 역시도 상당 부분 틀려지거나 아니면 영화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유주얼 서스펙트'의 놀라운 반전 역시 단 하나의 시선인 장애인에서 정상인으로의 전환으로 인해서 극적 반전을 완성합니다)

이처럼 사회 깊숙이 은근하며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유색인에 대한 억압과는 달리 사회의 소수자들인 장애인, 동성/양성애자, 부랑자 등에 대한 억압은 광기의 수준을 넘어서 이제는 그들을 사회적 조롱거리로써 보여주며 그들의 생존자체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영화 '울프 걸'에서처럼 그들 소수자들의 서글픔을 표현한 영화들이 가끔씩 나오는 반면 지난 80년까지 사악하고 교활하게 나오곤 했던 이들 소수자들에 관한 표현들이 각종 사회단체 들에게 비판 받게 되자 이제 주류 헐리우드 영화에서의 그들의 등장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형편이며 그나마 그 동안의 노력으로 동성애자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많이 무뎌지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그들이 영화에 등장할 수 있는 표현 수위들은 상당히 제한적이며 그나마도 영화의 자본논리에 밀려서 제대로 된 표현기회조차 가지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지요.

▲영화 엑스맨포스터    
영화 '엑스맨'의 오프닝에서 어린 마그니토를 바라보는 공포에 찬 시선은 단지 경멸에 가득찬 시선으로 바뀌었을 뿐 아직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현재 헐리우드에서 제작되는 영화들의 대부분은 그들의 주고객 층인 중산층과 10대들을 대상으로 하며,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제작이 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영화의 주요등장 인물들은 중산층이거나 중산층의 자녀들이며 그들의 주변인으로써 저소득층 백인들과 중산층 흑인들을 주요 인물들로 배치하며 몇몇 영화들에서는 현재 헐리우드의 한 경향을 보여주듯이 흑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기도 합니다.

물론 헐리우드의 기본 방침은 당연히 자본의 획득이며, 흑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는 건 인종평등을 전제로 내세운 얄팍한 장사 속에 불과할 뿐입니다. 언뜻 생각해 보아도 정말 달러를 벌어들일 흑인이 몇 명이나 되며, 그나마 그들이 주인공으로 출연한 영화에 다른 흑인들의 활약이 얼마나 되는가를, 때문에 진지한 흑인 영화는 몇몇 영향력 있는 흑인 감독의 영화에서나 찾아볼 수 있으며 동성/양성애자를 다룬 진지한 영화들은 헐리우드를 떠나 저예산 독립 영화들에서 그리고 부랑자들에 관한 영화들 역시도 마찬가지로 독립진영과 그곳에서도 소수인 독립 호러 영화들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형편입니다.

부랑자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저예산 호러영화 '스트리트 트래쉬' 같은 영화는 이제 헐리우드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장애인에 대한 진지한 영화를 본적이 있는지? '아이엠 샘' 같은 헐리우드 가족주의 영화들 말고 진정으로 진지하게 장애인들을 다룬 영화들을 본적이 있는지, 토드 브라우닝이 '프릭스'에서 다룬 그런 서글픔과 애틋함이 묻어나오는 그런 영화들이 과연 지금까지 얼마나 만들어 졌을까요, 물론 나름대로 만들어 지긴 했겠지만 그게 대중에게 정식으로 공개되기에는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바로 미국식 자본논리 때문이지요.

때문에 프릭스 이후에 본 장애인에 관해 발언하는 가장 진지한 영화는 티비 영화였던 피츠제랄드 감독의 '울프 걸' 뿐이었습니다. 영화 울프 걸에 나오는 대사 "기형인들은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다. 그들은 평생 그들의 방에서 지내야 한다"는 일반인들의 가장 일그러진 사고를 자본논리에 그대로 적용해서 영화를 만들어 나가는 곳이 헐리우드 입니다.

장 뤽 고다르는 '영화는 현실을 반영한다, 만약 현실이 아름답다면 영화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또 '영화는 현실에 도전할 수는 있지만 현실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라는 말을 했었지요.

그런데 그런 아름답지 않은 현실을 반영하는 영화들은 왜 그렇게도 찾아보기가 힘이든 걸까요. 당장 고다르의 재미로 넘쳐 나는 영화인 '네 멋대로 해라' 마저도 이제는 예술영화 전용관이 아니면 찾아보기도 힘들 뿐더러 근래에 만들어진 죠 단테의 영화들(그램린 2, 마티니) 같은 영화들 조차도 찾아보기 힘든 형편이 돼버렸지요. 이 외에도 전복적인 상상력을 발휘하는 영화들은 많이 있지만 헐리우드의 재롱둥이들이 만든 영화들 외에는 거의 눈에 띄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미국의 건국신화를 조롱하던 '아담스 페밀리'의 속편은 평단의 외면을 받았으며 힘겹게 평단의 지지를 어느 정도 이끌어낸 짐 자무쉬의 '데드맨'은 이제 잊혀져가는 영화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 예로든 영화들은 상당한 재미와 나름대로의 시선을 담은 영화들이지만 헐리우드는 이들을 외면하고 말았지요. 왜 일까요? 그건 이들 영화들이 가지고 있는 재미와는 별개로 이들 영화들이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데 유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영화는 현실에 도전할 수는 있지만 그 영화들이 아무리 상업성과 재미로 무장한다고 하더라도 주류들에게 어떠한 이익도 기대하지 못하게 만드는 영화들은 이내 자본 시장에서 퇴출되고 말며 최근 영화판매의 한 축을 움켜쥔 DVD에서 보듯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온갖 자본의 세례를 받은 나머지 아주 호화롭게 나오는 반면, 팀 버튼의 비주류적인 영화였던 '화성 침공'은 영화의 재미와는 별개로 아주 초라하게 등장했었지요.

하지만 이는 자본의 획득과도 관계가 있는데 지금까지 주류 영화들에 익숙해져 있던 관객의 시선에 비주류의 애정을 담은 영화들은 생소하고 낮설 게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게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면 현재 자본사회 내에서의 보수적 흐름들로써 설명 가능 할겁니다.

사회의 불평등은 그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에 의해서만 구축되는 건 아닙니다. 물론 그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적 장치들이 일정 부분 기여하는 건 분명하지만 그보다는 그 사회의 기득권에 기대려는 사람들, 그러한 사람들이 전달하고 확산시키는 논리들은 좀더 쉽고 빠르게 사회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어 갑니다.

중산층임을 자처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자신이 보수 층임을 공공연히 들어내며 또 한편으로는 이를 확인 받고자 하는 경향을 보이고는 하지요. 이는 자신의 보수적 의식과는 별관계가 없습니다. 최근에 공개된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 보이'에서 사람들은 이 영화의 재미나 성과와는 관계없이 영화 내에 단적으로 드러난 반 규범적인 상황설정에만 집착해서 활자 신문과 인터넷 게시판 곳곳에서 이 영화를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올드 보이에서의 그러한 상황설정은 영화를 좀더 극적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한 장치였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사람들의 공격은 아직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지요. 또한 이 영화에 대해 공격을 가하는 몇몇 글들을 보면 그 자신의 사상을 드러내기 보다는 다른 이들에게 호응을 구하려는 모습들 마저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 올드 보이가 정치적으로 그리 편향된 영화가 아님에도 이렇듯 공격 당하는 배경에는 분명 또 다른 요소가 존재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들이 속해 있거나 동경하는 그룹들을 옹호하려는 모습을 보이고는 합니다. 특히나 한국처럼 '성공신화'라는 환상을 사회 깊숙이 심어놓은 곳에서는 좀더 극단적인 경향을 보이고는 합니다. 때문에 자신이 속해있는 그룹이나 욕망하는 위치의 사람들이 사고하는 방식을 닮아 가고자 애쓰는 사람들이 존재하게 되는데 거짓된 성공신화를 기록한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는 하는 이유중의 하나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자신을 중산층으로 상정하며 그들이 바라보고 올라서고자 하는 목표가 실은 거짓보수라는 데 중요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바라보고 올라서고자 하는 목표는 사회의 중심을 구축하고 있는 기득권 세력에 다름 아니며 이들이 은연중에 조장하는 계획된 사고들, 예컨대 경제 논리를 중심으로 장애인들을 배척한다든지 '학벌'이라는 사회적 무기로 인해 소외된 계층을 한 순간에 위험한 노동자로 만들어 가는 것 따위들 말이지요.

이러한 은밀한 계획들은 중산층을 꿈꾸고 그 이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동일화 심리에 그만큼 깊숙이 파고 들어 갑니다. 비록 이들이 드러내 놓고 억압 계층에 대한 공격을 자제하기는 하지만 그들이 얼굴을 감출 수 있는 곳이라면 이내 그들의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는 합니다.

사회의 불평등은 분명 사회 지배 세력들에 의해 만들어 지지만 그게 완성되는 지점은 사회 구성원들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특히나 지금과 같은 극단적인 자본 사회에서는 자신의 성공을 위하여 남을 밟고 올라서야 한다는 반 인권적 경쟁논리가 설득력을 얻게 마련이지요. 이건 한국 내에 그 수많은 입시 학원들이 번성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제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헐리우드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들이 그토록 사회의 소수층을 배척하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닙니다. 바로 관객에게 잘 팔리는 영화이기 때문이지요. 자신의 위치와 이해에 부합하는 영화들을 찾아가는 건 당연한 일이며 그런 영화들을 제작해가는 헐리우드 역시 이 자본사회에서는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러한 시선과 철학이 결국에는 사회 기득권 세력'만'을 배불리는 일이라는 거죠. 반면에 우리가 얻어가는 것은 점점 병들어 가는 사회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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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01/16 [09:1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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