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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지형도] 인디음악과 '노이즈 가든', 그리고 신신애
 
기타기순   기사입력  2002/03/05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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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에 부여되는 용어나 장르규정은 거의가 저널리즘의 산물이다. 저널리즘은 다층적이고 훨씬 미분화된 개별 뮤지션들의 음악적 의지와 그 결과물들을 입으로 씹어 뱉을 수 있는 단어 단위로 기호화한다. 그런 단순 도식은 구태의연한 발라드 멜로디에 통속적 가사를 샤우팅 창법으로 소화하는〈김경호〉에게‘록커’라는 삿대질을, 겨우 전주 부분에 스페니쉬모드(Spanish Mode)의 어쿠스틱 기타연주를 배치한 곡을 부르면서 경박한 허리춤을 췄던〈백지영〉에게 ‘삼바와 살사의 여왕’이라는 같잖은 농담을, 80년대 마이너(단조)가요 멜로디에 빠른 템포의 리듬루프를 슬쩍 얹어 놓은 곡을 돼먹지 못한 눈빛으로 노래하는〈이정현〉에게 ‘테크노 여전사’ 라는 반동적인 수사를 게워냈다.

저널리즘 진영이 왜 ‘신신애’에게‘테크노의 대모’라는 용어를 헌납하지 않는지 진정  의문이다. 이미 수년 전 그녀는 초강력(?) 전자리듬을 깔고 있는(그들의 분석 대로라면 테크노가 확실한)「세상은 요지경」으로 엄청난 판매고와 지금의 〈이정현〉을 능가하는 방송활동  횟수를 자랑하지 않았었나.

인디’라는 용어가 음악 장르를 향한 것인지 비슷한 음악적 자의식을 가진 뮤지션 집단의 연대성을 말하는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항상 대안인 것처럼 여겨지는 국내 비주류(소위, 언더그라운드)음악계에서‘인디’담론의 주변을 서성거린 뮤지션들의 텍스트들은 거개가 거품이었던 것 같다. 겉으로는 다양한 색깔들을 가지고 있는 듯 하지만 ‘인디’밴드들의 음악을 전반적으로 관통하는 음악적 코드는 단순함과 시끄러운 사운드, 서정성을 가장한 건조한 멜로디, 대안 없는 반항의식과 철부지 정신이며 이것들은 대체로 음악적 형식에 대한 진지성이 결여된 것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들의 음악은 코드 보이싱(Voicing ; 멜로디에 하모니를 붙이는 작업으로 멜로디 이외의 성부를 만드는 것인데, 간단히 말해 록음악의 리프를 결정짓는 음들의 배치를 말한다.)에 있어 아무런 고민없이 개리배치(Open Voicing)의 타성을 그대로 수용했다(스래쉬메틀을 했던 팀들이 보이싱에 파워 코드를 적극적으로 활용 한 것은 그 반례이다). 사운드의 메이킹 역시 90년대 초 시애틀 사운드의 영향을 큰 여과 없이 그대로 흡수하여 그런지한 톤 일색이다. 리듬은 90년대 초 미국의 얼터너티브 붐이 일었을 때 유행하던 음악가들의 패턴을 아무런 성찰 없이 차용했다.

인디’의 주요 음악가들의 음악적 역량은 이전(인디라는 타이틀에 음악가로서의 정체성을 의탁하지 않은)뮤지션들의 그것을 능가하지도 못했다. 무대에서 연주에는 아예 관심이 없는 듯한 〈크라잉 넛〉의 난장판 퍼포먼스는 〈삐삐밴드〉나 〈삐삐 롱스타킹〉의 유쾌한 풍자나 조소에 못 미치고, 색다른 감수성과 소박한 아름다움을 머금은〈허클베리핀〉의 데뷔 앨범은‘커트코베인’의 망령 앞에 무릎을 꿇었다.〈토이박스〉의 어수선한 크로스 오버는〈제로지〉(현 토이박스의 싱어인 김병삼이 91년부터 활동한 팀으로 2장의 앨범을 내놓았다)의 대륙적인 하드록을 정면으로 배반하고 있고 〈힙포켓〉의 〈RATM〉변주는 음악적 사기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누가 〈비틀즈〉와 〈레드제플린〉을 듣다가 〈신중현〉을 듣겠는가? 나이가 들어서 우리 것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이전, 음악만 좋아하던 시절에 〈지미헨드릭스〉의 「Voodoo Chile」을 좋아하는 사람이 〈신중현〉의 「미인」을 명곡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 윤병주 (노이즈가든 기타리스트)

‘최초’ 라는 역사적(?)의미를 등에 업고 절대적으로 평가되는 시나위의 데뷔 앨범(86)의 음악적 밀도를 훨씬 웃도는〈노이즈가든〉의 데뷔앨범(96)은 국내 대중음악 지형도에서 헤비음악의 꼭지점을 찍었다. 창작과 연주를 넘어 레코딩에 까지 관여한 음악감독 윤병주, 전무한 보컬 톤과 풍부한 성량을 과시한 싱어 박건, 심플한 필인과 섬세한 액센트를 견지하며 록드럼의 헤비 사운드의 전범을 제시한 드럼주자 박경원, 이들은 여러 가지 다양한 경로와 음악적 영감으로 그들의 데뷔앨범을 구성했고 거기서 분출되는 것은 절제와 균형의 양식미가 감도는 극단적 어두움과 아름다움이다.

윤병주는 국내에선 들을 수 없던 독창적이고도 완성도 높은 사운드의 질감을 들려주었다. 그가 뿜어내는 음들의 입자는 80년대 메틀의 정연함과 정제된 가벼움을 부정하고 70년대 사이키델릭 사운드의 파열성과 몽롱함을 자신의 음악적 사고로 재해석한 느낌이다.「기다려」를 포함한 12곡 전반에 나타나는 윤병주의 톤 감각은 〈시나위〉에서 신대철이 들려주었던 연주,〈넥스트〉에서 김세황이 들려주었던 80년대 사운드 메이킹으로부터 독립(인디)적인  것이다. 노이즈가든의 데뷔앨범이 낯선 것은 이들의 텍스트가 헤비 록이지만 너무나 느린 템포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헤비 록의 장르적 문법은 찌그러진(Distortion)사운드와 적당한 템포이다(록 발라드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상기하자). 그러나 노이즈가든은 한없이 느리기만 한 무거움을 제공한다.〈블랙홀〉의 스피드와 〈크래쉬〉의 급박한 스래쉬 리듬을 초월하는 이 느림의 미학은 폭풍전야의 역설적 역동성을 머금고 있는 진정한 헤비함의 정수이다.

이 앨범이 뛰어난 것은 전적으로‘인디(독립)’적이기 때문이다. 이 앨범의‘인디’정신은 미국의 80년대 헤비메탈 담론을 안배하지 않고도 깊이 있는 헤비함을 분출하는 리프들과 소리의 질감을 생산해내었고, 80년대의 지루한 템포와 90년대 록음악계의 장자인 네오펑크 진영의 빠른 곡 난립을 비웃기라도 하듯 느리디 느린 템포의 육중한 사운드를 완전히‘발명’해 내었음이 증거 한다.

국내 대중음악지형도에서‘인디’라는 용어가 저널리즘의 산물이었는지 음악가 자신들의 음악적 의지를 향한 자의적 의미규정이었는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고작 간간이 공중파의 기형적 장르균형에 아부하는 〈크라잉 넛〉이라는 무대해프닝 전문그룹과 〈서태지〉의 사이드 맨들 뿐이다. ‘인디음악’의 카테고리를 배회하던 수많은 뮤지션들을 되돌아보며, 또 진정한 의미의‘인디’걸작인 〈노이즈가든〉의 데뷔앨범을 앞에 두고 갑자기 허옇게 눈을 뒤집고 우스꽝스럽게 춤추던‘신신애’와 그의「세상은 요지경」이 생각나는 건 왜 일까. 비주류음악의‘인디’담론은 저널리즘의 이슈제조 과정에 봉사하는 것으로 끝난 걸까.

* 이 글은 대자보 50호(2000.11.10)에 발표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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