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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지형도] 마리화나
 
기타기순   기사입력  2002/03/05 [16:22]


J는 엘라(Ella Fitzgerald)가 죽던 날 비로소 그녀의 음악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행사했다. 계곡의 어둡고 차가운 바람을 등진 J의 낡은 집에는 하루 종일 엘라의 1950년대 넘버들이 반복 재생되었고 그는 고인의 죽음을 유예시키고 있었다. 얼마전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J는 이제, 올해로 이미 75세를 맞은 BB King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    

K가 J를 알게된 지는 1년이 조금 넘었다. 둘의 교제는 동성애의 관능을 이탈한 자연스런 교감을 이룬 듯 했고, 음악적으로 서로를 깊이 신뢰하고 있다. 자신 보다 6살이 많은 J를 만난 후 K는 재즈를 쾌락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국악을 듣는 방식을 처음 알았고, 한대수를 음악시인으로 단정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음악은 세상을 보는 창이었고 창 밖의 모든 현상이 음악을 중심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느꼈다.

아이를 안은 J의 아내는 건너 방으로 닫히고 둘은 쳇 베이커(Chet Baker)의 ‘But Not For Me’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콜트레인(John Coltrane)의 마우스피스(Mouth Piece)를 갖고 싶어했다. 홀로 남은 K의 어머니가 닫힌 방에서 그들은 유재하가 조용필에게 남긴 흔적을 꿰뚫고 있었으며, 김덕수의 과장된 향연을 냉소하고 김소희의 신경질적인 필(Feel)을 존중했다. 항상 둘은 천천히 몰두해 가는 편이었다.  

견고한 음악의 창을 소중히 여기는 J와 달리 K는 가끔 창을 열어둔 체 밖을 내다보기도 하고 혹 그것이 양심적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K는 자신의 양심을 불편하게 하는 것일지 모를 J의 통찰들을 낯설게, 또 수줍게 추종했다. J는 기타리스트가 꿈이었던 K에게 말해 주었다.

“단순한 플레이어(Player)와 음악가(Musician)를 분별할 수 있게 해주는 게 뭔지 아니? 그건 ‘실수’야, 실수. 삑사리란 말이야(웃음). 소위 미스톤(Mis-Tone)이라 말하는 의도하지 않은 음이 모든 음악에 섞여 있어.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이지. 이게 그냥 실수, 혹은 잡음으로 남은 연주는 엄밀히 말해 음악이랄 수 없어. 그건 그냥 플레이일 뿐이야. 음악가들의 실수에는 ‘에너지’가 있어. 그건 이미 잡음이니 하는 ‘소리’의 차원을 떠난 음악의 일부가 되고 있는 거야. 에릭클랩튼(Eric Clapton)은 훌륭한 플레이어이지만 음악가는 아니야. 지미(Jimi Hendrix)의 라이브나 앨버트 콜린스(Albert Collins)의 핑거기타를 들어봐. 그들이 얼마나 많은 미스피킹(Mis-Picking, 헛피킹)을 쏟아내는지, 그리고 그 자체가 얼마나 살벌한 에너지를 함축하고 있는지 이미 니가 느끼고 감동하고 있는 것들의 정체가 바로 그 ‘음악적 실수’야. ”

언젠가 K는 자신의 양심이 할애한 한 권의 월간지 속에서 마리화나에 대해 긍정적으로 언급한 기사를 J에게 보여 준 적이 있는데 그는 아이처럼 기뻐했다. 대마관리법위반 혐의로 3년 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는 J가 시골의 하급공무원으로 어떻게 계속 남아 있는지 K는 항상 궁금하다.

초기 랙타임(Ragtime)시대부터 퓨전(Fusion)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를 줄줄이 엮어내는 J는  재즈야말로 모든 음악의 궁극이라 여긴다. 그의 말에 의하면 모던(Modern Jazz)시대의 음악가들이 행했던 즉흥연주의 멜로디들은 유럽의 고전(소위 클래식)음악의 성과물들과 상관없이 단독으로 발명된 진정한 창조물이고 현대음악에까지 수혈되고 있는 영감의 원천이다. 모든 음악은 장르와 국경을 초월하여 재즈의 싱코페이션(Syncopation)과 오프비트(Off-beat)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애드립(Ad lip)이라는 이상적인 창작 형태를 향한다는 지론은 J가 음악이라는 ‘진실’을 해체하고 찾아가는 통로다.

펫 메스니(Pat Metheny)의 디스코그래피 전부를 입으로 줄줄 외는 여전히 기타리스트인 K는 펫 메스니&짐 홀(Jim Hall)의 기타 앨범과 케니 버렐(Kenny Burrell)&조 패스(Joe Pass)의 기타앨범에 경도 되어 J에게 조언을 구했다.

“케니 버렐과 조 패스의 밥(Bop)을 펫과 짐 홀의 애매한 스윙(Swing)이 따라갈 수는 없지. ”. J는 깔끔하게 말했다. K는 자신과 스승사이의 화해할 수 없는 지점을 발견해 가는 것을 느꼈다. 팝 음악의 통속적인 실용을 하나의 미학으로 사고하고, 록의 저항성을 진지한 음악적 실험이라 여기던 K는 그런 수직적 잣대를 인정할 수 없었다. 개별 음악 소품이 배타적으로 상위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은 K가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클래식, 재즈, 록, 팝 순의 기존의 암묵적 우열관계를 허락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K는 그것이 정치적 사고라 생각한다. K는 항의했다. 음악은 ‘권력’이 아니라고. 그러나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1번’과 가야금 산조, 메인스트림 재즈(Mainstream Jazz)와 국내 가요가 서로 아무런 충돌 없이, 여전히 J를 몰두케 하고 있었다.

“난 장영주의 바이올린과 황병기의 가야금, 윈튼 마샬리스(Wynton Marsalis)의 트럼펫과 듀스(Deux)의 그루브가 어떻게 다른지 정말 모르겠어. 진심이야. 이야기 해줄 수 있니? ”

음악이 청각자극에 의한 일종의 인간의 실존에 관계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설명되어져야 하고 정리되어야 하지 않겠냐며,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음악을 느끼는 것이 공허한 관념이나 환각에 다름 아니지 않겠냐고 K가 정색을 하며 물었다. 2년 전부터 기른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오는 J는 유난히 깊은 눈을 가졌지만 쳐진 눈 꼬리를 어쩔 순 없다. J가 조용히 입을 열어 느리게 말할 때면 항상 양 눈 옆의 주름이 밀려 올라가도록 두 손을 뺨에 대고 피로한 기색으로 말하는 버릇이 있다.  

“환각이라구…, 웃기지마. 너희들이 말하는 환각이라는 기호는‘이성’이 고용한 무능한 해결사일 뿐이야. 말 부스러기에 불과해. 항상 이성적인 게 진실에 가까울 거란 막연한 느낌…. 그건 경험적이지도 않고  반성적이지도 않았어. 정말 가소로운 건 음악을 그 ‘이성’이라는 무대포의 대표적 하부구조인 언어체계로 모조리 꿸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이야…. 클래식, 예술성, 순수음악, 대중음악…지루한 말 풍선들. 그게 다 진실을 억압하는 언어 강박이야. 음악은 니들이 합리적이라 교육받은 이성에 훨씬 앞서는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거야. 내가 경험한 건 환각이라는 언어폭력에 모욕당할 만큼 만만하지는 않지만 너무 자연스럽고 익숙했던, 뭐랄까 …‘빼앗긴 기억’이랄 수 있을 꺼야…. 게다가 그 ‘기억’이 비이성적인 것도 아니었어. 단지 이성이 개입하고 있지 않은 상태일 뿐이야. 이성을 부정하고, 배반하는 게 아니라 그것에 무관심함으로써 여백을 유치해 진실이 들어설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선 거야. 기억상실이란 말…별루…, 아냐. 강탈당한 기억이야. 음악이 좋아, 쉽고. 본질적이구…그래서 너무 순수하고.”

K가 항의한 ‘권력’과  숨가쁜 정색에 J는 빨갛게 충혈된 눈을 끔벅이며 타는 듯 바싹 마른 음성으로 뒤이어 이렇게 말했다.

“마리화나를 하면 알게 돼 .”

* 본 글은 대자보 51호(2000.10.21)에 발표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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