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대중음악지형도] 외면당한 걸작 "비트겐슈타인"
 
기타기순   기사입력  2002/03/05 [15:03]
{IMAGE1_LEFT}신해철이 빠진 <넥스트>, <노바소닉>의 앨범이 과도한 에너지로 중무장된 화려한 테크닉과 형식에 대한 탐구로 대중들을 주눅들게 한 반면, 김세황(Gt), 이수용(Ds), 김영석(B)이라는 당대 테크니션들의 견제를 벗어난 신해철은 소박하고 간결한 실험과 그 자신만이 제련해 낼 수 있는 회화적이며 서정적인 멜로디를 바탕으로 포스트 <넥스트> 록이라 할 만한 새로운 진지를 가동했다.

세간의 터무니없는 오해와 악평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은, <넥스트>를 통해 헤비 록의 가능성을 점검하던 신해철이 비로소 볼륨(Volume)에 대한 집착을 버린 자신의 성장을 과시하고 있으며, 다채로운 음악 기재들을 지휘하는 그의 재능이 잘 녹아 있는 걸작이다.

[Theatre Wittgenstein Part 1, 2, 3]

‘웃기는 전자가극단’을 소개하는 3 부작 멘트는 희화화된 코러스와 코믹한 나레이션, 간간이 들리는 성기 모독형의 욕설이나 앵벌이 개그가 아니라 모던재즈의 자양분으로, 서구 일렉트릭 음악의 기초로 남은 랙타임(Rag time)의 변주이다. 블루스라 명명된 것들에도 메이저(장음계)곡이 없고 마이너 블루스만 존재하는 곳, 댄스음악에도 비장한 마이너(단음계)선율을 차용하는 멜랑꼬리한 국내 대중음악 지형도에 랙타임의 흥겨움과 발랄함을 단 3개의 코드로 구체화하고 있는 이 ‘웃기는’3부작은 블루노트(Blue-note)를 안배하지 않고도 록큰롤을 조립해 내고 있다.  

[백수의 아침]

간소한 페달 톤(Pedal-tone)의 배치(분수코드)만으로 이러한 동화적인 정서를 표현해내는 재능은 신해철이 가진 여러 미덕 중의 하나이다. 그 옛날, 「인형의 기사 Part 2」에서 목격했던 철없이 순진하기만 했던 선율은 작가의 따스한 시선을 따라 투명한 아르페지오로 아련하게 공명한다.    

미들 템포의 셔플(Shuffle)리듬에 얹힌 두터운 코러스 라인은 <퀸>의「Bohemian Rhapsody」에 대한 기억을 불러오고, 기타리스트는 간주부분의 짧은 솔로에서 브라이언 메이의 귀중한 톤 감각에 경배한다.

[Friends]

신해철에게서 4박 3연음이나, 8/12박자, 또는 3/4 등의 3박자 계열의 리듬을 듣는 건 낯설다. 그는, 예를 들면 게리무어의 「Still Got The Bluse」,「Parisienne Walkways」등에 나타나는 8/12박자의 3박 계열의 지루한 마이너 곡조에 경도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정박으로 요약해 놓았을 때 꼼짝없이 슬로-록(Slow-Rock)이나 3박자 왈츠로 해석될 이 곡의 리듬은 고스트노트(Ghost note)를 이용한 스네어(Snare) 비트의 분절로 3박 계열 발라드의 진부함에서 벗어나고 있다.

전혀 그 답지 않은 평범하고, 건전하기만 한 가사는 정교하게 처리된 코드 보이싱(Voicing)과 순차적인 멜로디 조합(음정간의 낙차가 크지 않은)을 등에 입고 쓸쓸한 뉘앙스를 담는다.

[소년아 기타를 잡아라]

넥스트 당시의 하이테크 록의 기획에 회의를 느낀 신해철의 선택은 70년대 하드 록의 방법론이다. 펜타토닉의 단순함으로 응결된 박진감 넘치는 기타 리프는 분명 기타주자의 것이지만, 신해철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신선한 수사학의 가사가 이토록 추진력 있게 가동하게끔 멤버들의 텍스트를 관장하는 능력은 분명 그의 음악적 의지의 산물일 것이다.

헤비 록의 리프에 감기는 멜로디는 대개 건조해지기 쉽지만, 신해철의 멜로디는 스피디하게 미분되는 템포의 긴박한 연주 위에서도 풍부함을 잃지 않음을 넥스트 시절의「Destruction Of The Cell」, 「우리가 만든 세상을 보라」등의 넘버들을 통해 확인 할 수 있었다. 이 곡에서는 「Lazenca Save us」에서 수용하고 있던 크로매틱 진행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단순한 록 리프들과 뒤섞이는 보컬 선율의 단조로움은 이러한 경과음 채택방식으로 인해 긴장감을 잃지 않고 있으며, 결국 기타리스트가 생산한 간단한 리프들은 곡을 규정하는 카리스마로 작용한다. <오지 오스본>의 양자 잭 와일드(Zakk Wylde)의 프로젝트, <블랙레이블소사이어티-Black Label Society>가 생각나게 하는 전주, 간주, 후주부분의 기타솔로는 절제되지 못한 와와 페달(Wawa Pedal)의 사용으로 다소 산만하지만, 강력한 피킹과 핑거링의 연동에 의한 시퀸싱(sequencing)플레이를 머금고 록 음악의 반복 미학을 입증한다.

[수컷의 몰락 Part 1]

보사노바를 타고 흐르는 신해철의 나레이션은 깊이가 있다. 진지한 통찰과 철학적 문제의식을 머금은 그 특유의 가사의 깊이 보다도, 한없이 낮은 음역대의 나락으로 하강하는 신해철의 저음 보컬은 섬세한 결을 지닌다.  

「아버지와 나 Part2」가 발군의 기량을 지닌 솔로 기타리스트에 대한 배려였다면, 섬세하게 편곡된 어쿠스틱 기타의 리듬 향연이 펼쳐지는 이 넘버는 밴드 지향의 건실한 젊은 기타리스트에 대한 과제이다.

냉소와 야유로 포장된 듯한 이 서글픈 발제문에서 그는, ‘나’에서 한 마리의 ‘수컷’을 경유해 ‘아버지’로 향하는 자신과 우리들을 애도한다. “여행은 끝이 없”지만, 탈선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그늘을 목도한 그와 우리는 피로하지 않아 보인다.

[오버액션 맨]

소위 일렉트로니카, 혹은 전자 주파수의 음악적 활용에 대한 가능성은 신해철이 록으로의 순례를 떠나기 이전까지 몰두하던 주요 텍스트였으며, 윤상과 색다른 조율을 시도했던 <노댄스>에서 일련의 사운드 트랙 앨범까지 그의 주된 관심사가 여전히 유효함은 이 넘버에서 우회적으로 노출된다.

<넥스트> 1기 시절의 「도시인」,「Turn Off The TV」에서 분출되던 열광적인 리듬루핑이나 DJ의 스크레칭이 아닌, 샘플링된 노이즈 성 음원들이 효과적으로 배치된 이 곡은 빠른 템포를 극대화하는 그루브를 구석구석 차용된 전자음들에 빚지고 있다. 드럼의 필인이나 리듬섹션 대신 고용된 인공신호들은 곡의 빠른 템포를 생동감 있게 유지하는 해결사로 등장하고 있으며, 그 자체로 편곡상 곡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기획되어 있다.

「단발머리」의 그것 보다 세련되고 정교하게 편집된 전주의 ‘뿅뿅’거리는 전자음과 중반의 브레이크 된 리듬파트의 간극을 메우는 노이즈의 분사는 박진감 있는 스피드에 화려한 색채를 입히며 곡의 총체적 질감을 화려하게 수놓고 있다.

[Cynical Love Song]

록은 기타(혹은 기타리스트)의 음악이라는 말은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분명 록이라는 장르의 아픈 곳을 찌르는 발언임에는 틀림이 없다. 저널리즘에 의해 급조된 OO록이니, OOO팝이니 하는 용어들은 대부분 기타주자의 어프로치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레드 제플린>의 사령관, 지미 페이지의 영향 아래 있지 않은 록 기타리스트는 없겠지만, 의 리프 메이커 앵거스 영이 지지하던 풀 코드에 의한 리프 조립이라는 방법론이 지금 이 시점에서 재생되고 있음을 지켜보는 건 흥분되는 일이다. 전주에 등장하는 기타리스트의 팝적인 감수성과 맞물린 그런지한 코드 배킹은 직선적이면서도 밝고 경쾌한 리듬감을 표출하고 있다. 또한 의 에지(The edge)가 유통시킨, 딜레이(Delay)타임을 치밀한 수학적 계산에 의해 이용하는 노멀(Normal) 톤의 영롱한 리프는 긴 호흡의 가사가 주는 사운드의 공백을 절묘하게 메꾼다. 후주 부분에 나타나는 굵은 톤의 블루스 솔로는 지미 페이지와 앵거스 영의 간판 프레이즈 중간 지점에서 활력 있게 넘실거리며, 경망스러운 잡기를 늘어놓지 않는 노련한 핑거링을 과시하고 있다.

신해철이라는 예민한 음악감독에 의해 발탁된 이 젊은 기타리스트(데빈 리)는 밴드 지향의 블루지한 성향의 기분파이며, 이 넘버에서 그의 연주는 곡의 정체성을 결정해 놓았다.

[The Pressure]

신해철의 독설이 저자거리의 육두문자를 향해 돌진하는 걸 확인하는 일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스타일리스트인 그의 음악적 자의식과 직선적인 욕설이 어울릴 수는 없는 일이다. <노 브레인>이나 <닥터 코어 911>의 허리 아래 재담은 그들의 음악적 진정성을 지원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의 위악적인 쌍소리와 따위의 곡마단들조차 흉내내는 진부한 라임(각운-rhyme)의 차용은 민망하다.

앨범의 전곡에 걸쳐 가장 헤비한 사운드와 거친 보컬, 견고한 헤비메탈 리프가 공수된 이 곡의 중량감은 성찰 없는 가사 작성의 오류로 인해 예기치 못한 체중감량을 감수해야 했다.  

[수컷의 몰락 Part 2]

<오지 오스본>과 <주다스 프리스트>를 법정에 세우고 <서태지>를 당혹케 했던 대중음악계의 낡은 음모론, 백워드(Backward)가 등장하고 있다. 과연 신해철은 어떤 메시지를 숨겨 놓았을까. 스튜디오 테크닉에 대해 일천한 이들의 가소로운 음모론을 거꾸로 이용한 듯이 보이는 신해철의 풍자적 항의는 이 메시지를 해독하고 난 뒤에야 풀릴 듯하다.  

“수컷의 몰락은 이미 정해 졌다”는 그의 외침은 괜한 엄살이나 다른 수컷들을 배려한 경계경보이기 이전에, 동료들이 기존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자유의 영토로, 또는 일탈과 저항이라는 정서적 구원으로 나아가자는 ‘해방론’의 역설로 보인다. 90년 초기 시애틀 사운드가 ‘얼터너티브’라는 수사를 전면에 내세웠듯, 초기 <펄 잼>이나 <사운드 가든>의 흔적이 여과되지 않은 이 기획은 적어도 신해철에게는 전혀 낯선 단면이면서 낡은 록 담론과 새로운 사운드의 충돌을 제시하며 자의식의 분열을 의도적으로 내비치고 있다.  

[Dear My Girlfriend]

절대적인 선율의 아름다움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신해철은 분명 그런 재료를 발견하고 조합해내는 능력이 탁월한 뮤지션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메리칸 탑40의 감성을 80년대 뽕끼 섞인 마이너(단음계)로 덧씌운 이 땅의 졸렬한 멜로디를 비웃듯 멀찍이 선회하는 그의 감수성은 ‘작가’라는 수사가 서정적인 멜로디메이커에게도 부여 될 수 있음을 변호해 준다. 여전히 낭만적이고 유아적인 ‘신해철’표 선율은 건재하다.

그 스스로의 정치적 안배임이 분명한, 상대적으로 앨범에의 기여도가 약한 건반주자에게 마이크를 넘긴 이 곡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멜로디는 그 자신의 성대를 통과해서야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신해철의 비극은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진가를 몰라주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음악적 정체성을 오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찰나적으로 음악형식만을 탐하는 ‘장르의 순례자’도 아니며, 음악 자체보다 밴드나 음악적 컨텍스트에 대해 더 관심 있어 하는 우스꽝스런 ‘달변가’는 더더욱 아니다.

신해철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만이 생산하고 가공해낼 수 있는 주체적인 텍스트들을 보유한 몇 안되는 독립적인 아티스트들 중의 한사람이다. 무엇보다 그가 연마하는 실험들은 자유로워야 하며 그것은 자신이 지닌 본질적 음악의지의 순수성을 배반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국내 대중음악 지형도에서 ‘서정적인 선율가’의 책무는 온당히 그의 몫이다. 

* 본 글은 대자보 55호(2001.3.12)에 발표된  기사입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2/03/05 [15:03]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