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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정책은 '여성 억압', 출산않을 권리도 없어
[정문순 칼럼] 여성의 몸은 통제대상이라는 관념이 정책 희생양 이끌어
 
정문순   기사입력  2006/08/11 [17:40]
갓난아기의 첫울음을 세상은 환호와 축복으로 맞지만 조금 전까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든 산모의 고통에는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이 사회는 여성이 겪는 출산의 고통을 당연한 것이라 믿고 있다. 산고가 두려워서 애 낳기를 망설이는 여자는 어김없이 놀림감이다.)

출산 당시를 떠올리면 내게는 기분 좋은 기억이 거의 없다. 나는 애 낳다 죽는다는 말을 더없이 실감나게 하는 경험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세상은 모든 산모들이 방긋거리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출산의 고통을 까먹는다고 쉽게 생각한다. (갓난아이는 웃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태어난 직후는 사람의 형상을 닮은 조막만한 핏덩어리에 가깝다. 더욱이 산통은 애를 낳았다고 금방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아니면 새 생명 탄생에 대한 신비감이 모든 고통을 눈 녹듯 사라지게 할 것이라는 말 역시 쉽게 한다. (아이 키우는 일이 그리 만만한가.) 산모들이 출산의 힘겨움을 금세 잊어버리고 새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으로 살아가는 게 가능하다면 산후 우울증이라는 병은 존재할 리 없을 것이다.

몸을 풀기만 하면 한시름 놓을 줄 알았지만 내 몸은 산모의 처지를 쉽게 용납하지 못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병사만 심각한 후유증을 앓는 것은 아니다. 사신이 눈앞에 어른대는 공포감과 수술 후의 격심한 통증을 치러낸 몸은 전쟁을 겪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내 몸을 위로해주는 데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이 낳지 않을 권리도 없는 나라

그만한 고초를 아무렇지도 않게 수용하기를 강요하는 현실을 왜 고분고분히 받아들여야 하는지 내 몸은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감당하기 힘든 고강도의 스트레스를 강요당한 데 따른 내 몸의 반발과 저항이, 출산 후 우울증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출산과 관련한 질병을 포함하여 여성들의 질환은 대부분 비정상과 억압을 강요받는 데 따른 몸의 사회적 저항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다이어트로 인한 거식증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여성 고유의 질환으로 알려진 히스테리도 부당한 사회적 억압이 여성의 몸에 가해진 데 따른 저항과 거부의 표현이다. 특히 다이어트 열풍은 여성적 질병이 일상으로 뿌리 내리는 계기가 되고 있다.

세상이 여성의 마른 몸에 미쳐 있는 이유는 여성이 자신들과 대등한 지위를 차지하는 것을 경계하는 남자들의 심리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몸이 차지하는 면적을 최소화하는 극도로 마른 여성의 몸은 병약하고 무력하게 보일 뿐 아니라 여성의 존재감을 있으나 마나한 미미한 것으로 보이게 함으로써 남자들의 불안감을 누그러뜨리는 효과를 낳는다는 것을 몸은 알고 있다. 다이어트에 빠진 여성들이 걸리기 쉬운 갖가지 질병은 몸에 가해지는 부당한 사회적 억압에 대한 여성 몸의 저항인 셈이다.
여성의 몸, 정책의 희생양 아니다

출산은 여성한테 생래적으로 주어진 몸의 기능 같지만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져도 좋은 건 결코 아니다. 정부의 저출산 대책에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정부가 출산을 여성에게 권유해도 되는 것인지 한번이라도 고민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출산에 관여할 수 있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몸의 결정권자인 여성 자신에게 달려 있을 뿐이다.

아이 낳는 것을 여자의 당연한 역할로만 생각하고 있을 뿐 그것이 여성 몸을 통과해야 하고 여성의 삶을 굴곡지게 하는 예민한 문제라는 점에는 철저히 무지한 것이 정부다. 여성 몸이 국가에 의해 길들여지고 통제됨을 강요당하는 건 그다지 낯선 일이 아니다.

베이비붐으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한 60년대 이후 정부의 산아 제한 정책은 여성의 자궁까지 통제하려 들었다. 출산을 조절하지 않는 건 국가 정책에 역행하는 일이었다.

여성의 몸을 새끼 낳는 암소쯤으로 아는 참여정부의 태도는 여성 몸을 정책의 도구로밖에 삼지 못했던 군사정권식 사고의 연장선에 있다. '출산파업'이라고도 불리는 저출산 현상은 사회 활동과 육아의 짐을 한 몸에 모두 짊어지게 하는 등 여성 몸을 마소처럼 아무렇게나 부리는 사회에 대한 몸의 강력한 저항이라고 볼 수 있다.

여자가 아이 낳기를 포기하는 일이 예전에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으나 감당할 수 없는 억압에 대해 몸은 더 이상 침묵으로 응하지 않는다. 이 점을 알지 못하고 정부가 또다시 여성 몸을 정책의 희생양으로 써먹으려고 하다간 몸의 더 준열한 경고와 저항에 부딪치는 일밖에 얻을 게 없다.
 
* 본문은 '언론개혁을 바라는 시민들이 힘을 모아 만든 신문 경남도민일보' (http://www.dominilbo.co.kr) 8월 11일자에도 실렸습니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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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8/11 [17:4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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