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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기업원은 땅부자들의 복덕방인가?
[논단] 참여정부 부동산정책이 ‘토지국유화’라는 김정호씨의 비판은 억지
 
이태경   기사입력  2005/05/10 [18:52]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흔히 '윗사람을 농락하여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짓' 혹은 '모순된 것을 우겨서 다른 사람을 속이려는 짓'을 이르는 말이다. 이 고사성어는 중국 진(秦)나라 때 조고(趙高)라는 환관이, 황제인 호해(胡亥)에게 사슴을 바치며 말이라고 강변했다는 옛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까마득한 과거의 일, 그것도 다른 나라의 고사를 새삼스럽게 떠올린 이유는, 5월 10일자 〈중앙일보〉에 게재된 김정호 자유기업원 원장의 칼럼 "토지국유제로 가려는가?"를 읽고 든 소회 때문이었다.
 
물론 김정호 원장이 위력이나 강박으로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키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사슴을 말이라고 우긴 조고의 행동과 참여정부의 부동산 대책을 토지국유제와 유사하다고 비판하는 김정호 원장의 주장에는 일말의 근친성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와전을 피하기 위해서 여기서 김정호 원장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김정호 자유기업원 원장의 중앙일보 칼럼 '토지국유제로 가려는가'     © 중앙일보 5월 10일자 PDF

고강도의 투기대책이 또 나왔다. 이번에는 의무적 토지거래허가제, 임야 취득자격 제한이지만 그것 말고도 보유세 및 양도세 강화, 재건축 개발이익 환수 등 다 기억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참여정부 들어 터져 나온 투기억제책은 다양하고 많다.
 
이와 관련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잠시 주춤하겠지만 짧으면 몇 주, 길면 몇 달 뒤 부동산값이 다시 들먹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특히 전반적 경기활성화가 빨리 올수록 그 시기는 앞당겨질 것이다. … 공급 위축이라는 부작용은 미래의 가격 상승효과를 더욱 크게 한다. 본래 시장은 그런 것이다.
 
우리보다 보유세 부담이 큰 미국에서도 최근 1~2년 사이 집값이 30%나 올랐다는 사실은 필자의 예측을 뒷받침해준다. … 사유재산제가 남아 있는 한, 인간은 집과 땅을 가지고 돈을 벌려 애쓸 것이고 투기 문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부동산 투기 문제를 없애려면 부동산 거래를 금지해 시장을 없애야 한다. 그러면 시장가격도 사라질 테니 개발이익도, 투기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다. 요즘 유행하는 주장대로 토지가치의 100%를 환수하는 제도 역시 동일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실질적인 사유재산제 폐지를 뜻한다. 한 평의 땅을 구하려 해도, 집 한 채를 처분하려 해도 국가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상황은 국유재산제에 가깝다. 어쩌면 참여정부의 토지철학은 그쪽을 향하고 있는지 모른다. … 주택에서 나오는 이익은 모든 국민이 공유해야 한다는 대통령의 발언도 그런 맥락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사유재산이라면 거기서 나오는 이익도 소유자의 것이 됨이 원칙이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제한은 타인에게 손해를 끼칠 때 비로소 정당화된다. 그런데 토지.주택의 소유와 거래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아니다. 거래 당사자 모두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거래가 성립한다. 사기나 강탈을 통해 취득한 게 아닌 데도 주택.토지 소유를 범죄시하는 것은 자유에 대한 부당한 제한이다.
 
물론 거품이 발생할 때는 개별적 거래가 사회적으로 해로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지만, 현재의 가격이 거품이라는 증거는 없다. … 주택정책의 목표는 국민의 주거를 편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새로운 주택이 많이 지어져야 한다. 투기 억제로는 한 평의 주택도 늘릴 수 없다. 오히려 줄일 뿐이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국가의 토지 소유는 늘 폭정의 기반이 되었다. … 튼튼한 사유재산제 없이는 자유민주주의도 어렵다.
 
물론 우리나라가 당장 토지국유제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토지의 취득과 판매에 국가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면 국유제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거기에 상당히 가까이 와 있다. 새삼스럽긴 하지만 토지가 사유재산임을 다짐해야 할 때가 왔다.
 
최근에 발표된 5.4 부동산대책 등을 포함한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대한 김정호 원장의 비판은 위에서 보는 것처럼 매우 신랄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김 원장의 비판은 잘못된 전제와 사실관계에 대한 몰이해, 논리적 비약으로 가득하여 건강한 비판으로서의 생명력을 잃고 있다. 
 
이제 김 원장의 주장을 따라가면서 그의 주장이 어째서 잘못되었는지 조목조목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김 원장은 5.4 부동산 대책 등 참여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일련의 투기억제책은 필연적으로 공급위축을 수반하므로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갈파한다. 그는 우리 보다 보유세 부담이 높은 미국의 경우를 들면서 자신의 예측이 맞을 것이라고 기염을 토하고 있다.
 
김 원장의 주장은 일면 타당하다. 5.4 부동산 대책은 '보유세 강화'와 '거래세 인하'라는 방향설정에서는 나름대로 성공하였지만, 토지와 건물을 분리해서 사고하지 못한 약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이는 향후 건물 공급의 위축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우리 보다 보유세 부담이 높은 미국의 예를 들면서 보유세 강화가 오히려 공급위축을 불러올 것이고, 이는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연결될 것이라는 김 원장의 주장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근래 미국의 집 값이 가파르게 상승한 이유는 투기적 가수요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고, 이는 미국의 부동산 보유세율이 투기적 가수요를 잠재우는 데 충분할 만큼 현실화되어 있지 않다는 반증에 불과하다.

따라서 미국의 예를 들면서, 보유세 강화 등을 통해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키려는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김 원장의 주장은 그리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또한 김 원장은 사유재산제가 존속하는 한 부동산 투기는 없어질 수 없고 이를 없애려면 부동산 시장을 없애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하면서, 요즘 운위되는 토지가치의 전액환수도 이와 동일한 효과를 발휘할 것이고 이는 곧 실질적인 사유재산제의 부정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그는 이에 덧붙여 주택의 소유 등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이익은 개인에게 귀속되는 것이 사유재산제에 부합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 원장이 이해하고 수호하려고 하는 사유재산제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유주의의 이론적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로크와 노직의 주장을 따르더라도 부동산 소유 등을 통한 불로소득의 발생은 자유주의 혹은 시장경제의 원칙에 정면으로 반한다.
 
그러나 김 원장은 주택의 소유 등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이익은 개인에게 귀속되는 것이 사유재산제에 부합한다고 전제한 뒤, 사유재산제가 존속하는 한 부동산 투기는 사라질 수 없고 부동산 투기를 없애려면 부동산 시장을 없애야 한다는 다소 과격한(?) 논리적 비약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주택의 소유 등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이익은 거의 전적으로 사회 혹은 공동체의 기여이므로 이를 조세로 환수하는 것이 시장경제에 부합한다.
 
또한 부동산 소유 등으로 인해서 불로소득을 수취할 수 없다면 투기가 발생할 까닭이 없어 부동산 시장은 실수요자 위주로 거래가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김 원장의 글은 잘못된 전제가 얼마나 잘못된 결론을 이끌어 내는가 하는 사실을 실증하고 있을 따름이다.
 
한편 김 원장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제한은 타인에게 손해를 끼칠 데 정당화되는데 토지 소유와 거래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주택문제를 해결하려면 투기억제가 아니라 공급에 눈을 돌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위의 주장을 보고 있노라면 김 원장의 현실인식이 얼마나 균형을 잃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토지 소유와 거래가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김 원장은 주장하고 있는데 현실은 어떠한가?
 
기실 합법의 외피를 두르고는 있지만 토지 소유와 거래로 인해서 환호작약하는 사람은 불로소득을 얻는 극소수일 뿐이며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고통에 신음하고 있음을 김 원장은 정녕 모르는가? 진실은 건조한 경제학 교과서가 아니라 피와 땀이 배어있는 현실에 있음을 김 원장이 알았으면 좋겠다.
 
주택문제를 해결하려면 투기억제가 아니라 공급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김 원장의 주장은 분명 일리가 있다. 아직도 열악한 환경에서 거주하고 있는 구성원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이 현실이고 보면 양질의 주택을 저렴한 가격에 대량으로 공급해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공급위주의 정책만을 가지고는 부동산 가격 안정과 서민들의 주거안정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이다. 건국 이후 정부는 줄기차게 주택공급정책을 펴 왔지만, 작금의 상황이 지시하는 바와 같이 그 결과는 대체로 참혹하다.
 
따라서 주택 공급정책은, 보유세 현실화 등을 통해 투기적 가수요를 잠재우면서 병행되어야 그 효과를 담보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 원장은 현재의 (부동산)가격이 거품이라는 증거는 없다면서, 역사를 돌이켜 보면 국가의 토지 소유는 늘 폭정의 기반이 되었다는 전대미문의 가설(假說)을 설파한다. 물론 튼튼한 사유재산제 없이는 자유민주주의도 어렵다는 부연설명도 따른다.
 
강남은 말할 것도 없고 수도권에 소재한 어지간한 아파트의 가격이 평당 천만원에 육박하는 점, 통상의 월급쟁이가 받는 1년 급여가 2천만원에서 3천만원 사이라는 점 등을 감안할 때, 김 원장의 선언은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대부분 토지의 판매와 취득에도 국가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이는 토지국유제와 크게 다를 것이 없으며 국가의 토지 소유는 늘 폭정의 기반이 되었다는 김 원장의 주장은 차라리 무슨 격문(檄文)을 보는 듯 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비장함 보다는 웃음이 앞서니 어쩌랴! 김 원장은 너무 걱정 마시라! 토지 보유세율을 현실화하면 각종 규제도 필요없고, 김 원장이 오매불망하는 사유재산제도 훨씬 건강해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앙일보에 한 마디 하고 싶다. 이미 홍석현 회장의 탈법, 편법 부동산 취득 사실이 홍 회장의 고백을 통해서 드러난 마당이다. 오너의 잘못에는 한없이 관대한 중앙일보가 최근에 부동산 투기를 옹호하는 듯한 인상마저 주는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모쪼록 자신의 발언을 자신의 발 밑에 조회해 보는 정도의 양식은 갖추기를 바란다. / 편집위원
 
* 필자는 토지정의시민연대(www.landjustice.or.kr)에서 정책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 글쓴이는 <대자보> 편집위원, 토지정의시민연대(www.landjustice.or.kr) 사무처장, 토지+자유 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블로그는 http://blog.daum.net/changethecorea 입니다.
대자보 등에 기고한 칼럼을 모은 [한국사회의 속살] [투기공화국의 풍경]의 저자이고, 공저로는 [이명박 시대의 대한민국], [부동산 신화는 없다], [위기의 부동산]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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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05/10 [18:5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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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인맨 2005/05/11 [19:23] 수정 | 삭제
  • 몇주전 노무현 대통령의 죠지스트적인 발언에 조중동이 아우성 이었지요.그리고 오늘 대자보에 자본의 따까리 자유기업원 지식 매춘부 김정호를 씹고 있군요 ㅎ. 조중동에서 씹어댄 노대통령의 발언이 사회주의 혹은 포퓰리즘에 빠져 죠지스트적인 발언을 했을까요? 저는 조중동 이들의 주장을 존중하지만 동의하지 못하기에 객관적인 평가를 해볼필요가 있어 평소 공감하고 지지하는 아래의 글을 옮깁니다..

    우리는 우파 보수의 시장 자유주의자들과 평등주의 좌파들의 시각과 주장을 유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것, 하지만 어떠한 사상철학이든 한쪽에 치우치면 사상의 불구가 된다는것, 또한 이념 철학 사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빠져들면 사상의 노예로 전락 결국은 배신을 당했다는것을 우리는 지난 반세기 한국역사를 통해서 알수 있었습니다. 작금 한국의 여러 각종 보수와 진보 세력들이 주장하는 구호들이 일정정도 진실은 있지만 이들의 문제는 자기들만 절대선이라 주장 상대는 전면악으로 부정 이념의 도그마에 빠져 한국민중을 힘들게 하고 사회 혼란을 가중시키는것 같습니다.

    아래의 글은 옮긴이가 공감하는지라 옮기만 아쉽게도 옮긴이는 기독교인이 아닐뿐만 아니라 열린당의 노빠두 아니고 민노당의 찌질이두 아니요 한나라당류의 수구꼴통등 어떤 정파도 지지하지 않는 단지 한국 노동자 일뿐입니다! 옮긴이는 우리는 오직 우리의 상상력으로 우리실정에 맞는 우리식 이념철학을 론칭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과거/현재/미래 우주의 대파노라마를 담고 있는 성서는 대단한것 같습니다...그리고 성서는 지난 수천년간 인류가 검증했다는것. 단지 성서와 예수를 팔아먹는 매불천자들이 사악할뿐! 다소 길지만 서서히 시간내서 읽기를 권합니다..감사합니다/

    -아 래-

    하나님의 땅과 사람의 자유

    헨리죠지의 [진보와 빈곤]

    사람들은 대개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삽니다. 고정 관념의 노예가 되지 않고 살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그래서 고르디우스가 묶은 매듭은 알렉산더 대왕이 칼로 쳐서 풀 때까지 아무도 풀지 못했습니다. 콜럼버스가 껍질을 깨뜨려 달걀을 세울 때까지 아무도 달걀은 세울 수 없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링컨 대통령이 남북 전쟁에서 이겨 흑인 노예들을 해방할 때까지 수많은 백인들은 돈을 주고 사람의 몸을 사서 멋대로 부리는 짓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깨뜨려진 고정 관념을 보면서 고정 관념을 깨뜨리기가 쉬운 줄로 알기 쉽습니다. 칼로 치면, 껍질을 깨뜨리면, 전쟁을 하면, 누군들 매듭을 풀지 못하겠으며, 달걀을 세우지 못하겠으며, 노예 제도를 폐지하지 못하겠느냐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고정 관념을 깨뜨리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이 일을 해 내려면 굳센 믿음과 큰 용기를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땅을, 그 어떤 사람도 만들 수 없는 땅을, 생존하려면 그 누구나 써야 하는 땅을 사람들이 돈을 주고 받으면서 사고 파는 것이 당연하며, 어떤 사람이든 자기 이름으로 등기된 땅에서 생기는 이익을 혼자 차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고정 관념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 위에 태어났다가 땅 속으로 되돌아간 사람들이 모두 이 고정 관념을 갖고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인디언들은 이런 고정 관념을 갖고 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부족의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위대하고 훌륭한 백인 추장"으로부터 받은 시애틀 추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나의 부족은 물을 것이다. 백인 추장이 사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로서는 무척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우리는 대지의 일부분이며, 대지는 우리의 일부분이다.··· 따라서 워싱턴의 대추장이 우리의 땅을 사겠다고 한 제의는 우리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우리의 누이와 형제와 우리 자신을 팔아 넘기는 일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돈을 받고 땅을 판다는 것은 뉴 질랜드의 마오리족 사람들에게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원주민들에게 돈을 주고 그들의 땅을 영영히 산 줄 알았던 백인들은 원주민들의 자녀들이 태어날 때마다 찾아와서 태어난 자녀들이 앞으로 쓸 땅을 계속 사서 쓰겠다면 또 대가를 지불하라고 요구하는 원주민들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인디언이나 마오리족이 야만 상태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백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관념을 토지에 대하여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백인들의 땅인 유럽에서도 제 정신을 좀 차리고 살았던 사람들은 토지가 함부로 사유 재산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똑바로 알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하나님의 말씀을 내세우지 못하고 자연법을 내세운 록크는 "토지는 인간 노동의 산물이 아닌만큼, 다른 사람들이 함께 쓸 수 있는 땅이 충분히 있어야만, 합당하게 사유 재산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록크와 같은 사상가보다 훨씬 더 맑은 마음의 눈을 갖고 있었던 인디언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쓰기에 충분한 땅 위에서 살면서도 땅을 사유 재산으로 삼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구르는 천둥'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디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우리 인디언은 대지를 지키는 자이다. 우리는 우리가 대지를 소유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인간은 대지를 소유할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이 대지의 소유이다. 어떤 사람은 문서를 작성해 자신이 그 땅의 소유자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다. 우리는 대지의 소유자가 아니며, 누구도 그렇게 될 수 없다."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고 산 사람들조차 땅이란 사고 팔지 말아야 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는데도,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자기 명의로 등기된 토지를 빌려 주고 지대를 받아 일하지 않고서도 편안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인 줄로 오해하는 사람들과, 토지 투기로 땀 흘리지 않고 떼돈을 만지며 땅땅거리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인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한심스럽게도 참으로 많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참다운 제자가 되고자 한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골고루 읽고 그 뜻을 밤낮으로 묵상해야 하므로, 토지 보유나 토지 투기를 통하여 불로 소득을 향수하는 것이 죄악이라는 것을 몰랐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 25:23)고 하나님께서 모세의 입술을 통하여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고 결단한 사람들은 토지를 영영히 팔고 사는 것을 허용하는 자본주의 제도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제도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서 사는 동안에 청지기 사명을 수행해야 할 우리 사람들에게 토지 사용권과 토지 수익권의 한시적 거래만을 허락하셨습니다. "희년 후의 년수를 따라서 너는 이웃에게 살 것이요 그도 그 열매를 얻을 년수를 따라서 네게 팔 것"(레 25:15)이라고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한시적 거래를 허락하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토지 사용권과 토지 수익권이 부여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가 많은 자에게는 기업을 많이 줄 것이요 수가 적은 자에게는 기업을 적게 줄 것이니"(민 26:54)라고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너희의 타작은 포도 딸 때까지 미치며 너희의 포도 따는 것은 파종할 때까지 미치리니 너희가 음식을 배불리 먹고 너희 땅에 안전히 거하리라"(레 26:5)고 말씀하셨고,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신 15:4∼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한 토지 사용권과 토지 수익권을 부여하는 공의로운 토지 제도가 수립되어 있더라도, 자연 재해나 질병이나 게으름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땅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여 가난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15:11)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곤란하고 궁핍한 이웃에게 손을 펴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가지 방법은 땅을 유업으로 배분받았는데도 가난하게 된 사람에게 부유한 사람이 생계 유지에 쓰일 물자나 자금을 주는 대신에 그에게 배분된 땅을 다음 희년이 올 때까지 사용해서 그만큼의 수익을 올려 대가로 받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약점을 노려 생계 유지에 한동안 쓰일 물자나 돈을 주고 땅을 영영히 빼앗아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쩌다가 가난하게 되어 토지 사용권과 수익권을 한시적으로 판 사람이나 그의 근족이 땅에 대한 권리를 넘기고 나서 지난 햇수를 계산하여 남은 값을 치르고 희년이 돌아오기 전에 유업으로 배분받은 땅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라고 명령하셨으며(레 25:25∼27), 미리 되찾을 힘이 없는 매우 가난한 사람이라도 희년이 돌아오면 자기 유업인 땅을 되찾아 가지도록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레 25:28).

    땅을 사용하여 땅의 이익을 누리는 권리를 일시적으로 잃었던 그 어떤 사람이라도 희년이 돌아오면 토지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되찾게 되는 공동체 속에서는 가난을 자손에게 대물리는 가정이 생길 수 없습니다. 희년의 법도와 규례가 지켜지는 공동체 속에서는 겨우 먹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 제 발로 찾아가 제 몸을 사서 써 달라고 애걸해야 하는, 영원히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톨스토이가 말하는 '우리 시대의 노예'들이 생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유업으로 평등하게 나누어주신 까닭이 땅 위에서 땀을 흘리며 일해야 생존에 필요한 재화를 얻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시려 함에 있음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고 나서 오는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가라고(레 25:10)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자유와 평등은,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 세력인 지주들이 말이나 글로 주장하는 것처럼, 또는 사회주의 사회의 지배 세력이었던 공산당 간부들이 실패를 통하여 보여 주었던 것처럼, 어느 하나를 더 얻으면 다른 하나를 그만큼 잃어야 하는 관계에만 놓여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수 23:6)는 하나님의 명령이 준수되는 공동체 속에서는 자유와 평등이 손바닥과 손등처럼, 또는 동전의 양면처럼 늘 함께 따라다닙니다.

    그 어떤 사람도 토지를 평등하게 사용하여 땅의 이익을 향수하는 권리를 박탈당하면 자유마저 박탈당하여 짐승보다 못한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 27:17)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입을 통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치 아니하며, 규례를 멸시하며, 법도를 싫어하여 계명을 준행치 아니하면 어김없이 징치하실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26장 20절에서 "땅은 그 산물을 내지 아니하고 땅의 나무는 그 열매를 맺지 아니하리라"고 경고하셨고, 29절에서 "너희가 아들의 고기를 먹을 것이요 딸의 고기를 먹을 것"이라고 끔찍한 경고를 하셨으며, 33절에서 "내가 너희를 열방 중에 흩을 것"이라고 두려운 경고를 하셨습니다.

    토지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경고하신 그대로 징벌하셨습니다. 예컨대, "내 열조의 유업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왕상 21:3)라고 말한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은 아합 왕에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보내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왕상 21:19)고 말씀하셨고, 말씀하신 대로 아합은 끔찍한 징벌을 받았습니다(왕상 22:38).

    땅을 평등하게 나누어 쓰며 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러 선지자들로부터 계속해서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사야로부터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사 5:8)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박국으로부터 그들은 "화 있을진저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 언제까지 이르겠느냐 볼모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 진 자여 너를 물 자들이 홀연히 일어나지 않겠느냐"(합 2:6∼7)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들면서 부자가 된 무리들에게 예수께서도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 6:24∼25)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구약 시대보다 더 엄격한 의미의 희년을 선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마 5:17)고 말씀하신 예수께서 선포하신 "주의 은혜의 해"는 그의 제자라면 누구나 이 땅 위에서 경제 정의를 세우기 위해 언제 어디에서나 선포할 수 있고 선포해야 옳은 '자원적 희년'입니다. 불로 소득을 본 사람들이 그 때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발적으로 움킨 손을 펴는 형태를 띠는 이 '자원적 희년'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 안에서 먼저 시행되어야 하며, '자원적 희년'이 시행되는 정도는 우리 기독교 신자들이 갖고 있는 믿음의 정도를 가리킴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셔 승천하신 다음에도 한동안 초대 교회 지도자들은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처럼 소수 지주들의 토지 독점이 커다란 죄악임을 담대하게 지적하였습니다. 예컨대, 안티옥에서 활동한 크리소스톰은 하나님께서 땅을 모든 사람들에게 거저 맡겨 주셨음을 강조한 다음에 부자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땅이 함께 나누어 써야 하는 것일진대, 너희 이웃들은 땅을 조금도 갖고 있지 않은데, 어째서 너희들은 그렇게 넓은 땅을 갖고 있는가? …함께 나누어 써야 할 것을 너희들만 향유한다는 것은 죄악이 아닌가?"

    밀라노의 주교였던 암브로즈는 땅을 강탈한 사람들은 매일 도적질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지주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 "땅은 모든 사람들이 나누어 쓰라고 창조된 것이다. …너희 부자들아, 어째서 너희들은 땅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부당하게 갖고 있는가?"

    암브로즈에게서 세례를 받고 나서 히포의 주교가 된 어거스틴은 온 세계를 하나님께서 부유한 사람들에게나 가난한 사람들에게나 다 주시는 것임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 "부자는 부유하다는 까닭에 채워야 할 위장을 두 개 갖고 있는가?"

    부귀를 우상으로 숭배하는 소수의 지주들이 "도적질하지 말지니라"(출 20:15)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면서 하나님의 소유인 토지를 자기들 것이라고 우기는 죄악을 허용하는 로마 토지 제도에 대한 교부들의 신랄한 비난과 저주는, 어둠침침한 카타콤에서 휘황찬란한 바티칸으로 교회 지도자들의 거처가 옮아가는 동안에 전혀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제 것이라고 우기는 토지가 늘어나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사야와 하박국과 미가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초대 교회 지도자들을 통하여 땅에 관해 가르쳐 주시고 경고하여 주신 것은 기독교 신자들에게 어느덧 비밀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척하면서 재물을 섬기는, 양 가죽을 뒤집어 쓴 이리와 같은 거짓 목자들이 교회에 침투하여 지배 세력을 형성하고 난 다음부터,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폭군 아합의 처 이세벨의 족속들이 페니키아에서 카르타고로 가져간 바알 토지 제도가 포에니 전쟁에서 이긴 로마의 토지 제도로 둔갑하였다는 사실을, 타락한 교회에 다니는 신자들은 알 길이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토지의 절대적·배타적 소유를 인정하는 바알 토지 제도는 로마 제국의 멸망과 더불어 유럽 여러 나라들로 번졌고, 아메리카·아프리카·호주·아시아에 이들의 식민지가 생기면서 기독교와 더불어 세계 곳곳에 퍼졌습니다. 이리하여 돈을 주고 받으면서 땅을 사고 파는 것이 당연하다는 고정 관념과, 기독교는 토지가 절대적·배타적 사유 재산이 되는 것을 용납한다는 오해가 온 세계에 번졌습니다.

    타락한 교회의 침묵 때문에만 이러한 비극이 초래된 것이 아닙니다. '음울한 과학'이라고 불리는 경제학의 과오 때문에도 이러한 비극이 초래되었습니다.

    '경제학의 시조'라는 명예를 누려 온 애덤 스미스는 광대한 토지를 독점하는 소수의 지주들이 막대한 불로 소득을 향수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국부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사회 환경이 개선되는 일은 그 어느 것이나 모두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실질 지대를 올리고, 지주의 부를 실질적으로 증대시키며, 노동을 사거나 다른 사람들의 노동으로 만들어진 물건을 사는 지주의 힘을 크게 하는 경향이 있다."

    스미스의 [국부론]을 인용하니까, "아이구, 나는 그런 어려운 소리는 알아듣지 못해" 하고 지레 겁을 내실 필요는 없습니다. "엄마, 땅 사면 쉽게 돈 번대" 하고 지껄이는 아이들이건, 경제학을 배우지 않았는데도 토지 투기를 잘해서 '복부인'이라는 칭호를 받은 주부들이건, 바보가 아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스미스가 한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자기가 미리 사 둔 땅 부근에 국민이 내는 세금으로 건설할 도로, 교량, 지하철, 공항, 항만 따위가 자리를 잡도록 계획을 수립하는 공무원들이건,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나니까 장사가 잘 되지 않아서 죽겠으니 하루 빨리 복구 공사를 세금으로 해 달라고 졸랐던 압구정동 일대의 사업자들이건, 스미스가 남긴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주들의 권세가 무서웠든지, 스미스는 명예스럽지 못하게 이런 유명한 거짓말을 남겼습니다 : "그들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땅이 모든 주민들에게 균등하게 분배되었을 경우에 이루어질 상태와 거의 똑같게 생활 필수품의 분배가 이루어지게 할 것이며, 따라서 의도적으로 하는 일도 아니고 알고 하는 일도 아니지만,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고 인류의 증식에 필요한 수단을 공급한다."

    "보이지 않는 손"을 말할 만큼 이신론에 젖어 있었던 스미스는 이런 거짓말도 남겼습니다 : "하나님은 땅을 소수의 높은 영주들 사이에서 분배하시면서 분배 과정에서 제외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잊으셨거나 버리시지 않았다. 이 사람들도 하나님이 만드시는 모든 것 가운데서 제 몫을 찾아 향유한다."

    불로 소득 지대에 대한 과세가 가장 올바른 과세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스미스는 지주원(House of Landlords)이라고 불러야 좋을 상원(House of Lords)을 장악한 지주들과 한편이 되어 토지의 가치 곧 지대에 과세하자는 올바른 의견에 반대하였습니다. 이 결정적인 과오 때문에 스미스가 꿈꾼 '자유 시장 경제 체제'는 소수 지주들의 토지 독점과 지대 전유라는 암세포를 품은, 언제 쓰러질지 모를 위태로운 시장 경제 체제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른바 '과학적 사회주의'의 시조라고 자처한 마르크스도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지대가 불로 소득의 원천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리카도의 후예답게 '지대의 법칙'을 잘 알고 있었던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자본주의적 생산과 더불어 상품 생산이 발전하는 한, 따라서 가치의 생산이 발전하는 한, 잉여 가치와 잉여 생산물의 생산도 발전한다. 그러나 후자의 발전에 비례하여, 땅을 독점함으로써, 그리하여 지대와 토지 가격 자체를 올림으로써 이 잉여 가치로부터 점점 더 많은 몫을 빼앗아 갈 수 있는 능력이 토지에 생긴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의 빈곤을 야기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기업 경영에 관여하는 진짜 자본가들의 착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주들의 불로 소득 수취에 있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대를 공동체로 귀속시켜 토지를 독점한 지주들의 힘을 꺾는 것이 자본가의 지배를 훨씬 더 광범한 토대 위에서 강화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공박하였습니다.

    무산 계급의 독재로 지상 낙원을 만들어 보겠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마르크스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토지와 사람들이 만든 자본재를 한 데 섞어 '생산 수단'이라는 엉터리 개념을 만들고, 지주와 진짜 자본가를 한 데 묶어 '유산 계급'이라고 부른 다음에, '생산 수단'의 공유와 '유산 계급'의 타도를 주창하였습니다. 이렇게 헛된 꿈을 꾼 마르크스는 자본재 시장의 소멸, 이윤 동기의 결여, 관료주의의 병폐로 시달려 붕괴되고 말 운명을, 그가 죽은 다음에 구축된 볼셰비키 체제에 안겨 주었습니다.

    예언자 미가는 일찍이 "그 부자들은 강포가 가득하였고 그 거민들은 거짓을 말하니 그 혀가 입에서 궤사하도다"(미 6:12)라고 말했습니다. 시장 경제 체제를 내세운 스미스는 지주들의 권세를 두려워하여, 그리고 사회주의 체제를 내세운 마르크스는 지주들의 권세보다 더 큰 권세를 무산 계급 영도 세력에게 안겨 주려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거짓말을 믿어 왔습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 체제나 사회주의 계획 경제 체제나 모두 기생 계급인 지주 세력 때문에 병들어 '진보 속의 빈곤'이라는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여 왔습니다.

    '음울한 과학'이 온갖 거짓말로 토지의 독점과 지대의 전유를 정당화하여 오는 동안에, 기독교의 타락한 지도자들은, 이사야가 말한 것처럼(사 56:10), "벙어리 개" 노릇을 하여 왔을 뿐만 아니라, 미가가 말한 것처럼(미 3:11),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고 거짓말을 하여 왔습니다. 대천덕 신부가 말했듯이, "수세기에 걸친 교회 역사에서 가장 큰 비극은 20세기의 전환점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온전한 권고를 선포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음울한 과학'과 타락한 교회의 거짓말이나 침묵에도 불구하고, 지주들이 가장 점잖게 보이는 방식으로 가장 큰 도적질을 한다는 사실은 토지의 절대적·배타적 소유권을 헌법으로 보장하는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와서도 완전히 숨겨지지 못했습니다.

    걸핏하면 자본주의 체제의 헌법을 들먹이는 지주들의 변명을 물리치기 위하여, 영국의 경제학자 프레드 해리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자본주의는 소비자에게 재화와 용역을 공급하는 일로써 부를 축적하는 것을 요건으로 삼는다. 이 일은 상호 교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소비자는 소비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과 교환 할 목적으로 부를 생산한다. 토지 독점은 일방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이 창조적 과정을 손상시킨다. 독점자는 자연이 품고 있는 자원에 대한 법률적 소유권을 확보하고 나서는 토지를 사용해도 좋다는 허가 이외에 아무런 대가도 내놓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낸 부의 일부를 요구한다. 이는 법률이 정당화한 강도 화적의 경제 논리이다."

    "강도 화적의 경제 논리"를 정당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주는 '법률'이라는 것은, 톨스토이가 말했듯이, "힘을 가진 사람들의 의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샌 프란시스코의 선지자'라고 불렸던, 19세기의 미국이 낳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경세 사상가였던 헨리 죠지는 이 힘이 토지 소유에서 나옴을 불후의 명저 [진보와 빈곤]에 잘 밝혀 놓았습니다. 헨리 죠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토지의 경우는 노동처럼 굶는 일도 없고 자본처럼 가치가 줄어드는 일도 없다. 토지 소유자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 물론 토지 소유자도 불편을 겪기는 하겠지만 그들이 불편할 정도이면 자본은 소멸되는 정도이고 노동자는 굶는 정도에 이른다."

    그래서 헨리 죠지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토지 소유는 귀족층의 근거이자 거대한 재산의 기초이며 권력의 원천"이라고 말했습니다. 대통령의 솔선 수범에 밀려 마지못해 재산 공개를 하면서 온갖 재주를 다 부려 차지한 땅을 가지지 않은 것처럼, 비싼 땅을 싸구려 땅처럼 보이게 하려고 온갖 기교를 다 부린 정치인들과 고위 공직자들이 너무나 많은 우리나라에서 헨리 죠지가 남긴 이 말이 틀렸다고 우기고 나설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진보 속의 빈곤'이라는 수수께끼를 풀려고 했던 헨리 죠지는 자기 시대의 경제학이 부의 증대 과정에서 불황, 실업, 빈곤과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까닭을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함을 알게 되었고, 그 까닭이 한 가지 단순한 진리가 간과된 데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 진리는 경제학도라면 누구나 알아야 하는 '지대의 법칙'입니다.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도 '지대의 법칙'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제가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에서 쫓겨난다면, 저는 붕어빵 장사를 해서라도 제 가족을 부양해야 합니다. 제가 똑같은 수레에 똑같은 기구를 실어서 똑같은 밀가루와 설탕과 팥을 써서 붕어빵을 만들어 팔더라도, 주머니 사정이 괜찮은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새길 교회 부근에서 장사를 하면 제법 짭짤한 수입을 올리 수 있는데,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사람들조차 많이 지나다니지 않는 예수원 부근에서 장사를 하면 제 식구들이 소나 개처럼 먹고 겨우 살아남기에나 충분한 수입을 올릴 수 있다고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안동 교회 부근에서 올리는 수입과 예수원 부근에서 올리는 수입의 차이는 제 노동의 질이나 양이 달라서 생기는 것도 아니고, 제가 쓰는 자본재의 질과 양이 달라서 생기는 것도 아니며, 오직 제가 장사하는 땅의 위치가 달라서, 붕어빵을 사 먹는 사람들의 수가 땅마다 달라서 생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제가 노력해서 만들어낸 것도 아니고, 땅의 임자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도 아니고, 민족 공동체가 만들어 낸 것입니다.

    만약 누구나 땅을 거저 쓸 수 있다면, 바보가 아닌 저는 당연히 붕어빵 장사를 예수원 부근에서 하지 않고, 큰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새길 교회 부근에서 할지 모릅니다. 안동 교회 부근보다 장사가 더 잘되는 곳이 있다면, 저는 당연히 그 곳에 가서 붕어빵 장사를 해야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장사가 잘 되는 땅에는 꼭 그 땅이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지주가 있습니다. 지주는 '자기 땅'에서 일하는 사람이 다른 나쁜 땅으로 가서 뜯기지 않고 일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기 직전에 이를 정도로 지대를 받아 냅니다.

    이제 여러분은 똑같은 노동과 자본이 투입되고 있는 여러 토지 가운데 생산성이 가장 낮은 토지에서 생산할 수 있는 것을 초과하는 생산물이 지대가 된다는 점을 분명히 확인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지대의 법칙'입니다.

    헨리 죠지는 다른 경제학자들처럼 인구의 증가, 분업의 확대, 노동 절약적 기술의 발달로 생산력이 높아지는 측면만을 주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러한 요인들이 한정된 토지에 대한 수요를 증대시킴으로써 지대가 생산물 가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높이는 측면도 주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헨리 죠지는 "생산력의 증대에도 불구하고 임금이 겨우 생존할 수 있을 정도의 최저선에 머무는 것은, 생산력이 증대함에 따라 지대가 더 큰 비율로 상승함으로써 임금이 낮게 유지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는 결론을 도출하였습니다. 그는 이 결론으로 인류가 물질적 진보를 거듭하여 왔는데도 가난한 사람들이 그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헨리 죠지는 사탄의 노예인 지주들과 이들의 부당한 이익을 옹호하는 학자들이나 교역자들이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신 15:11)라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막 14:7)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제 멋대로 인용하여, 지주들의 도적질 때문에 생기는 가난을 마치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생기는 현상인 것처럼 떠드는 짓거리에 의분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헨리 죠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인간의 비행으로 돌려야 할 악덕과 불의와 고통과 타락을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는 사이비 기독교야말로 무신론자보다도 더욱 나쁜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 교부 암브로즈와 마찬가지로, 헨리 죠지도 지주들이 끊임없이 도적질을 함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는 지주들의 도적질에 관하여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출옥한 지 사흘도 지나지 못해서 배가 고파 남의 집을 기웃거리다가 또 잡힌 '한국판 쟝 발장'의 이야기를 기억하시는 분들에게 먼저 들려 드리고 싶은 헨리 죠지의 명언은 이렇습니다 : "토지의 절도는 말이나 돈의 절도와는 달리 행위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매일 매시 계속되는 반복적인 절도에 해당한다."

    자기가 사는 집은 그 밑의 땅과 함께 간신히 자기 소유로 만들어 놓았으나 곧 결혼하게 될 아들이나 딸이 어느 세월에 무슨 수로 제 집을 장만할까 걱정하면서 입으로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는 말씀을 되뇌여 온 분들에게 들려 드리고 싶은 헨리 죠지의 명언은 이렇습니다 : "지대는 노동에 대한 지속적인 부담이다. 인간이 노동을 하는 모든 순간마다 지대가 빠져 나간다.···지대의 사유화는 과거의 절도일 뿐 아니라 현재의 절도이며 이 세상에서 태어나는 어린이에게서 천부적인 권리를 뺏는 행위이다."

    헨리 죠지는 이처럼 지독한 도적질을 하는 지주 계급의 거대한 힘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이렇게 담대하게 선언하였습니다 : "빈곤을 타도하고 정당한 임금을 보장하기 위해 토지의 사적 소유를 공동 소유로 대치하여야 한다. 그 밖의 어떠한 방법도 악의 원인에 도움을 줄 뿐 희망이 없다."

    그런데 헨리 죠지는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사유 토지의 몰수와 형식적인 공유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토지 가치세'의 부과를 통하여 모든 지대를 공동체에 귀속시킴으로써 법률적으로 사유화되어 있는 토지를 실질적으로 공유 재산이 되도록 하자고 제창하였습니다.

    정부가 공공 활동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경비를 노동 소득이나 자본 소득에서 전혀 조달하지 않고 토지 소득만으로 조달할 수 있는 길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열려 있다는 것을 헨리 죠지는 통찰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문명이 발달하고 분업이 고도로 세밀해지며 인구가 도시로 점점 더 집중함에 따라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활동이 증대하고 이에 지출되어야 할 공공 경비가 증대함과 아울러, 공공 경비에 충당될 토지 소득 곧 지대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증대한다는 것을 헨리 죠지는 통찰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경제학 부문에서 노벨상을 받은 밀튼 프리드먼, 허버트 사이몬, 폴 새뮤엘슨, 제임즈 토빈, 제임즈 뷰캐넌, 프랑코 모딜리아니, 로버트 솔로우를 비롯하여 수많은 경제학자들로부터, 헨리 죠지가 제창한 토지 가치세는 훌륭한 정책 수단이라고 격찬을 받았습니다.

    헨리 죠지보다 먼저 태어나 활동했던 중농학파의 거두 케네도 토지 가치세를 부과하여 지대를 국고로 거두어들이고 모든 세금을 철폐하자는 제안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제안을 가리켜, 미라보는 문자의 발명이나 화폐의 사용에 비견할 만한 것이라고 격찬하였습니다.

    헨리 죠지는 케네가 이렇게 놀라운 제안을 한 줄 모르고, '진보 속의 빈곤'이라는 문제의 해결책으로서 토지 가치세를 제창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스스로 터득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프레더릭 버린더가 성경 말씀을 열심히 읽고 알아내었듯이, 헨리 죠지나 케네와 같은 지혜로운 사람들이 제창한 토지 가치세는, 전혀 다른 이름으로 모세의 입술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알려 주신 정의로운 제도입니다.

    "땅의 이익은 뭇 사람을 위하여"(전 5:9) 있다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들이 땅을 배분받아 쓰도록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이스라엘 공동체의 결속을 위한 공무에 전념하라는 명령을 받은 대제사장 아론과 레위 사람들에게도 "땅의 이익"이 필요함을 아시면서도 그들에게 생계 유지에 충분한 땅을 맡기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대제사장 아론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의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이 후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회막에 가까이 말 것이라"(민 18:20∼22)

    하나님께서는 이어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너는 레위인에게 고하여 그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취하여 너희에게 기업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취할 때에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민 18:26)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이 십일조의 십일조를 쓰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일러 주신 '십일조'는 민족 공동체 구성원들의 신앙 생활과 세속 생활을 돕는 일을 해야 되기 때문에 토지를 배분받지 못한 성직자들과 공직자들을 위하여, 일반 경제 활동에 종사해야 되기 때문에 토지를 배분받은 사람들이 마련해야 하는, 그것도 토지를 배분받는다 하더라도 사용할 겨를이 없는 성직자들과 공직자들이 토지 배분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덤으로 더 토지를 배분받은 사람들이 의무적으로 조성해야 하는 공공 경비 재원입니다.

    '현대판 십일조'라고 할 수 있는 토지 가치세가 불로 소득에 기생하여 온 지주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 지대의 '몰수'임을 헨리 죠지는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토지 가치세가 부과되면 토지 가격이 떨어져서 투기 이득을 노렸던 사람들이 본전도 건지지 못하게 되는 일이 생길 것인데, 이렇게 되면 지주들이 '보상'을 요구하며 아우성 칠 것을 헨리 죠지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토지 사유제가 오래 존속해 왔기 때문에 이를 철폐하면 이 제도가 계속될 것이라고 믿고 경제 활동을 해 온 사람들에게 손실을 준다는 생각"과 "토지를 정당한 재산으로 인정해 왔기 때문에 토지에 대한 공동의 권리를 회복시키면 정당성에 의문이 없는 다른 재산을 지불하고 토지를 구입한 사람에게 정의롭지 못한 결과가 생긴다는 생각"은 헨리 죠지가 살던 시대에나 오늘날에나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습니다.

    이 그럴 듯하지만 부당한 생각에서 나온 보상 옹호론을 물리치면서 헨리 죠지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 "내가 어제도 강탈당하였고 그제도 강탈당하였고 그 전날에도 강탈당하였기 때문에 오늘도 강탈당하고 내일도 강탈당하게 되는 고통을 꼭 감수해야 하는가? 강도에게 나를 강탈하는 기득권이 있다고 인정해야 하는가?"

    버린더가 말했듯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보상'은 땅을 차지한 사람들이 땅을 차지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는 보상이지, 땅을 독점하고 있다가 공동체를 위해서 어떤 형태로든 토지 독점에 따르는 이득의 전부 또는 일부를 포기하는 지주들이 요구하는 보상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보상은 강탈과 착취를 당하여 온 사람들에게 하는 보상이지, 앞으로 뉘우치고 강탈과 착취를 하지 않을 것이니 그 대신에 강탈과 착취를 편하게 하기 위해서 과거에 들인 돈을 갚아 달라고 뻔뻔스럽게 요구하는 무리들에게 하는 보상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눅 19:8)라고 말한 삭개오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삭개오가 토색질을 중단하는 대가로 보상을 요구했다면, 예수께서는 그를 "독사의 새-끼"라고 부르셨을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그의 동족을 수탈하던 귀족들에게 그들이 빼앗아 간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을 되돌려 주고 현물 지대의 형태로 받은 곡식이나 새 포도주나 기름을 돌려 보내라고 하였을 적에, 그들은 "우리가 당신의 말씀대로 행하여 돌려 보내고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아니하리이다"(느 5:12)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막 10:25)고 말씀하신 예수께서는 부자들이 회개하고 그들의 수탈 때문에 가난해진 사람들에게 수탈한 것을 되돌려 줄 경우에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들이 하나님보다 더 섬겨 오던 재물을 포기하려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막 10:27)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직접 이루시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이루기도 합니다. 지주 세력이 공의롭지 못한 기득권을 기꺼이 포기하도록 만드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지만, 토지를 독점하여 지대를 홀로 쓰는 것이 죄악이라는 점을 지주 세력에게 알리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이, 특히 목회 사역을 담당하는 분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모여 이루는 교회 공동체 속에는 불로 소득의 원천인 토지를 소유하면서 물질적으로 편안한 생활을 하는 지주 계층 신자들도 적지 않게 섞여 있습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들을 깨우쳐야 합니다. 교회가 이들을 깨우치기는 고사하고, 이들과 마찬가지로 땅을 되도록 많이 차지하려는 욕심을 부려 신자들의 귀한 헌금을 헛되이 쓰고 있는 한, '우리 시대의 노예'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하나님 나라는 이 땅 위에 세워지지 못할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사탄의 종 노릇을 하는 지주들의 거대한 힘이 수많은 교회 속에까지 뻗쳐 있습니다. 소수 지주들의 토지 독점을 허용하는 제도가 바로 '우리 시대의 노예 제도'임을 밝혀 주는, 레위기 25장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는 흔히 이 말씀의 뜻을 왜곡하여 알리려고 드는 거짓말장이들이 나타납니다. 이들은 쉽사리 천막을 쳤다가 거두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던 시대에는 땅을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는 것이 가능했지만, 오늘날 거대한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로 가득 찬 대도시들의 땅을 어떻게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줄 수 있느냐고 제법 그럴 듯한 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다운 백성은,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참다운 목회자들은 그와 같은 반문에 부딪쳐 할 말을 모르는 채 벙어리 개처럼 침묵을 지키고 있으면 안됩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이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소를 번제로 드려 그 타는 냄새로 교회를 가득 채우지 않고서도 새로이 창안된 형식에다가 똑같이 진정한 경배의 마음을 담아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듯이,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이 모세와 여호수아가 지도자로 활동했던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토지 그 자체를 평등하게 나누어 쓰지 않고서도 누구나 '땅의 이익'을 평등하게 향유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제각기 어느 거대한 회사의 시설이나 기계를 물리적으로 나누어 갖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 회사를 소유하며 그 회사의 이익을 나누어 갖는 방법이 있음을, 곧 주식 회사 제도가 창안되어 잘 활용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헨리 죠지가 주창한 토지 가치세 제도는, 민족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을 주주로 삼는 거대한 '토지 임대 주식회사'를 만들어 임대 이익을 나누어 갖게 하는 '현대판 십일조'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이 점을 먼저 깨달아 널리 알려야 하고, 교회 안팎에서 궤변을 늘어 놓는 지주들의 회개를 촉구해야 하며, 쌓아 올리는 교회에서 나누어 주는 교회로 발돋움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앞장서서 주창하는 토지 가치세 제도의 시행을 세상 사람들도 점점 더 많이 소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섬기는 사람들이 날로 날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야만 욕심의 노예인 부자들도 진리의 말씀으로 자유롭게 될 것이고, 부자들의 노예인 가난한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맡기신 유업을 되찾아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고 나서야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고, 분단된 이 나라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통일될 것입니다. /write/이 풍
  • 미친이반 2005/05/10 [20:55] 수정 | 삭제
  • 김정호 색깔론하냐?
    투기를 없앨려면 시장을 없애라고?
    그러니까 사회주의 하지 않으면 투기는 없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내가 내돈 갖고 투기를 하건 말건 상관하지 말라!! 시바 내가 내돈 갖고 돈 벌었는데 왜 세금 매기냐? 이렇게 말하고 싶은거냐?
    시바쉐이!! 너 같은 놈이 국보법 적용대상이다!!
    법적 처벌 대상이다.
    재산권행사라는게 아무렇게나 막 이루어지는건 줄 아냐? 그러면 너같은 놈은 뼈도 못추린다. 나 같은 쉐이가 니 뒷통수치고 니 재산 뺏을 테니.
    글고 민법에도 나와 있다. 사적 자치도 지나치면 안된다. 그래서 권리는 남용하지 못한다라고 못박는거다. 그러니까 니 말은 대한민국 법체제를 부정한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