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완서가 만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40세 이전에 박완서는 6.25 전쟁 시기 가족을 잃은 고통과 궁핍을 제외하면 유복한 환경에서 평범한 생활인으로 살았다. 풍족한 중산층의 삶을 누리던 장년의 주부를 글쓰기로 끌어낸 건 기억에 아로새겨진 전쟁의 체험이었다. 혼자만 삭이자고 가슴에 묻어두기에는 말이 넘쳐흘렀다. 그의 등단 시기인 1970년은 고속 경제개발이 전쟁의 상흔을 말끔히 지워내고 있던 시대였다. 모두가 전쟁을 잊어갈수록 박완서는 속에서 치받쳐 오르는 말을 토해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고 했다. 표현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음이 박완서 문학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 때문에 박완서 문학을 두루 꿰는 것은 남들이 말하기 주저하는 것을 말하는 과감함과 통찰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박완서 문학의 양대 줄기에 해당하는, 전쟁이 빚은 자신의 비극적 가족사에 대한 반추와 중산층 계급의 허위의식에 대한 폭로에서 잘 드러난다. 아픈 가족사를 드러내놓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나 반쪽짜리 이념이 전부였던 시대에, 비록 사망했지만 전쟁 시기 의용군에 입대한 전력이 있는 육친(오빠)의 존재를 꺼집어내어 말한다는 것은 모험일 수 있다. 그러나 근동에서 수재 소문이 날 정도로 똑똑했고 집안의 희망이던 오빠를 전쟁의 미친 바람에 제물로 내놓아야 했던 것은, 어린 박완서가 장년이 되어도 아물어지지 않는 상처였다. 박완서는 상처를 자기 안에 고이 모셔두지 않고 낱낱이 들추어내어 당시의 고통을 되살림으로써 숨통을 옥죄던 것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 자신이 포함된 계층이라 스스로 잘 알고 있을 중산층의 속물의식을 다룰 때도 박완서는 거침이 없었다. 박완서는, 70-80년대 경제 규모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던 시대에 성장의 열매를 독점하던 중산층을 경제 성장의 주역으로만 떠받들지 않았다. 박완서에게 난타당한 수많은 속물등 중 가장 빈번히 다루어진 것은 <엄마의 말뚝> 연작 등 자전소설에 등장하는 그의 어머니였다. 박완서는 육친이라고 해서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박완서의 활달한 표현력 또한 말하는 데 머뭇거림이 없는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박완서는 어설프게 감추어졌거나 사람들이 외면하고 눈 감고 넘어가는 점을 밑바닥까지 긁어내어 우리네 삶의 비겁함을 폭로하려고 했다. 수다스럽고 달변이 쏟아지는 문체는 박완서 문학의 열렬한 팬들을 양산했다.
그러나 박완서 문학은 시대와 그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면서까지 과감하지는 못했다. 박완서는 스스로 터져나오는 자신의 말문을 남김없이 터뜨리지는 않았다.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진실을 말하려고는 했으나 절반만 성취했을 뿐이다. 어떤 부분은 끝내 말하지 못하거나 오히려 진실을 구부리기도 했다. 오빠의 죽음은 초기작 <엄마의 말뚝 2>에서 북한군의 소행으로 지목된다. 냉전이 끝나던 1995년에 발표한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는, 오빠를 죽음에 이르게 한 총상이 누구의 소행인지 적시하기보다 의용군을 뛰쳐나오는 험난한 역정 중에 입은 것으로 ‘나’가 어렴풋이 짐작하는 것으로 바뀐다.
그러나 실제로 오빠에게 총상을 입힌 장본인은 냉전 시대에 감히 지목할 수 없는 쪽에 있었다. 박완서는 이념이 가한 자기검열 때문에 오빠의 죽음을 사실 그대로 말할 수 없었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소설에서 오빠의 죽음을 처리한 부분은, 참견하기 좋아하는 수다스러운 중년 여자처럼 사소한 데까지 묘사하는 그의 글쓰기 습관에 비하면 지나치게 소략하고 평범하다.
"오빠의 총상은 치명상이 다 아니었는데도 며칠 만에 운명했다. 출혈이 심한 데다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며칠 동안에도 오빠의 실어증은 회복되지 않았다. 그 며칠 동안의 유혈과 하늘에 맺힌 원한을 어찌 잊으랴." -<엄마의 말뚝2>
오빠의 죽음를 묘사한 부분은 이 몇 줄이 전부이다. 평소의 박완서라면 “그 며칠 동안의 유혈과 하늘에 맺힌 원한”이 얼마나 비통했는지 유려한 문체로 세세하게 풀어 헤쳐 내며 독자를 자신의 심정에 동참시키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 대목만큼은 당시로 돌아가 날 것 그대로 표현하는 자가 아닌 자신의 감정을 먼저 정리하고 독자에게 건조하게 보고하는 전달자이기를 택했다. 육친의 사무친 죽음은 박완서에게 “하늘에 맺힌 원한”이라는 평범한 진술로 마무리하게 할 만큼 말로 제대로 표현하기 힘든 고통일 수도 있지만, 아군의 손에 가족을 잃은 심정을 있는 그대로 뱉어내기에는 이념의 억압이 훨씬 앞섰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박완서는 자신을 일컬어 "반체제 기질"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작가로서 자신에게 강요된 이념의 질곡을 극복해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런 자평은 생뚱맞게만 보인다. '반체제'라는 말은 그렇게 쉽게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박완서는 시간이 흘러도 아물지 않는 전쟁의 고통을 드러내고 중산층의 속물성을 혐오했지만 어디까지나 지배적인 체제가 허용하는 공간 안에서만 머물렀다. 박완서는 체제에 결코 위험하지 않은 유순한 소설가였을 뿐 아니라 때로는 부당한 지배체제의 수혜를 누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박완서 자신은 기득권 의식을 갖고 있었지만 평소에 자신의 색깔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은 편이었다. 정치적 태도를 드러냄으로써 입게 될 손익을 치밀하게 재보았기 때문인데, 이는 문단을 장악한 기득권 질서 속에서 스스로 무력하다고 자위하는 대부분의 문인들이 견지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주류 질서에 부응함으로써 이득이 생긴다고 판단하거나, 자신이 탄 기득권의 배가 험난한 항로를 만날 때는 태도를 바꾸었다.
광주에서 피를 묻힌 정치군인들이 문인들을 포섭할 요량으로 구미 여행을 시켜주었을 때 일원으로 선발되는 것을 거부하지 않은 건 해외 여행이 드문 시절 공짜로 잘 사는 나라에 놀러가고 싶은 유혹이 정의감을 이겼을지 모른다. 또 2000년~2007년까지 조선일보의 동인문학상 종신심사위원으로 활동한 것, 언론사 세무조사 당시 조선일보의 홍위병으로 나서던 소설가 이문열의 행적을 보다 못한 이들이 ‘책 장례식’ 운동을 펼칠 때 ‘문학 모독’이라고 발끈하고 나선 것, 촛불집회의 열기가 전국을 휩쓸 때 선거로 뽑힌 대통령을 몰아내서는 안된다고 한 일, 지난 총선 당시 나경원 의원과 이계경 의원이 공천을 신청한 지역이 겹치자 승산 있는 나 의원을 전략공천하라고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에 편지를 보냈던 일 등에서 보듯, 박완서는 기득권 질서가 흔들리거나 도전 받는 시점에서는 침묵을 벗고 자신의 본색을 드러냈다.
불이익과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싸워야 할 것들에 대해서 박완서는 자기 성찰을 허용할 생각이 없었다. 한국문학이 떠나보낸 것은 한 사람의 '작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소설가'였다. 전쟁의 고통과 중산층에 대한 풍자는 발표 당시에는 충격을 던졌을지라도 세월이 흐른 지금에는 빛을 잃은 것으로 느껴지며, 그의 독보적인 개성은 오히려 노년에 발표한 <너무도 쓸쓸한 당신> 같은 삶의 통찰력을 다룬 작품에서 더 빛을 발하고 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연작처럼 고향 박적골의 유년시절과 상경 후 어머니와의 갈등 등 풍부한 에피소드들과 화려한 필치는 언제라도 책장에서 책을 꺼내 아무 대목이라도 읽고 싶게 만들 정도로 흡인력이 있지만, ‘작가’에게 기대하고 싶은 것은 사랑스러움을 뛰어넘는 위대함이어야 할 것이다.
박완서가 ‘반체제’가 무엇인지 성찰할 줄 아는 작가였다면 그의 작품세계도 세상에 남겨진 것과는 다른 궤도를 그렸을지 모른다. 전쟁의 고통을 더 절실하게 표현하고 중산층에 대한 애증의 태도에서 벗어나 주어진 경계를 넘어선 큰 차원의 글쓰기를 기대해도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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