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개혁보다 언론개혁이 더 절실하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재직한 국민의정부 시절인 지난 99년 말 <중앙일보>에서 근무한 한 기자가 언론개혁과 자기반성을 촉구하는 대자보를, 중앙일보사 현관에 붙이고 사직을 한다. 바로 오동명(63) <중앙일보> 전 사진기자이다. 그런데 그가 친일, 친미 등 부역자들에게 일침을 가한 역사소설 <불멸의 제국>(말글빛냄, 2020년 12월)을 출판했다.
<중앙일보>를 떠난 지 20여년, 서울을 떠난 지 13년, 현재 전북 남원의 지리산 자락에서 살고 있는 오동명 전 사진기자를 지난 5일 오전 서울역 인근 카페에서 만나 대화를 나눴다.
오 전 기자가 언론개혁과 자기반성을 촉구하며 언론계를 떠난 지 20여년이 지났는데, 현재 언론의 상황을 진단해 달라고 했다.
“내가 나올 땐 우리나라 언론을 두고 쓰레기란 말은 듣지 않았던 것 같다. 한두 신문조차도 이젠 볼 게 없고 포탈에 뜨는 건 모두 죄라고 생각한다. 20년 전, 그래도 <한겨레>나 <경향신문> 그리고 <오마이뉴스>며, 월간 <말>지 등이 있었다. 언론다운 언론이랄까. 이젠 조중동 만이 아니다. 물론 조중동이 쓰레기통을 관리하고 주도 하고 있는 건 여전하다. 내가 <중앙일보>를 나올 즈음엔 안티조선운동이 한창이었다. 당시 나는 ‘중앙은 삼성을 업고 있다’ ‘삼성이 우리나라 언론의 돈줄을 잡고 있다’고 했다. <중앙일보>에 있기 전, 제일기획이라는 삼성의 광고회사에서 4년을 근무했다. <중앙일보>를 나올 때 난 다시 <중앙일보>로 돌아갈 줄 알았다.
편집권 독립, 인사권 독립 등을 외치며 편집국 회의를 하면 당시 <중앙일보> 기자들의 열의가 대단했다. 이걸 순진하게 믿었다고나 할까. 왠걸 나오자마자 가장 앞장서 삼성으로부터의 언론독립을 외치던 독립군이, 비대위원장(비상대책위원의 장)을 맡더니, 언론을 개인 사유화하던 사주를 성토하던 그가 그를 오히려 감싸는 모습이 역겨웠다. 당시 비대위원장은 <기자협회보> 등에서 언론개혁의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는 등 꽤 멋져 보인 후배였다. 그러나 지금은 직급이 꽤 올랐으니 이젠 논설을 쓰고 있다. 그런데 그 글이 가관이 아니더라.”
이와 관련해 더 들려줄 얘기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한겨레>신문 광고 관련 얘기를 했다.
“<한겨레> 신문 편집국에서 실제 일어난 일이다. 내가 책 <당신기자 맞아?>를 출판한 후, 2000년 여름이었다. 한겨레 기자가 나를 인터뷰한다고 해 공덕동 한겨레신문사를 찾아갔다. 편집국장석이 시끄럽더라. ‘우리 신문사를 말아먹을 겁니까. 문 닫자는 거냐고요’ 광고국장이 편집국장에게 항의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 광고부장이 삼성 비판기사를 빼달라는 거였다. 딱 20년 전의 얘기이다.”
그는 기자 시절인 20년 전과 비교해 현재 언론이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기자직을 버린 지 20년 전과 변하지 않은 그대로라면 그나마 다행이겠다. <중앙일보>를 나온 뒤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있다. ‘적당히 해’였다. 나와 뜻을 같이 했던 선배며 후배들에게서 들었던 말이다. 서울을 떠난 이유이기도 하다. 만나지 않으니 그런 말을 안 들어도 됐으니까. 20년 전 조중동이나 그런 부류들이 변한 건 없다. 그대로이다. 그 외의 언론들이 조중동에 물들여져버린 것이 더 문제이다.”
검찰개혁도 중요하지만 언론개혁이 더 절박하다는 말이 국민들에게서도 나오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검찰개혁보다 언론개혁이 더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신문사를 나올 즈음인 20년 전, 삼성의 법적 대응은 검찰출입기자 출신 한 명이 중앙일보 고문으로 있으면서 다 해결했다. 그러나 삼성이 비대해지면서 부장급 이상 검·판사 출신들을 삼성에서 끌어들였다. 법조계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이걸 누가 하는지도 잘 알 것이다. 드러난 사건들도 있다. 삼성 X파일 사건이다. 그런데 노무현 정권 때나 문재인 정권 때, 번번이 삼성의 앞잡이 언론인을 끌어들인 것이 문제였다. 오래 전에 ‘노무현 정권 안의 삼성인’이라고 지적한 글을 당시 한 인터넷매체(대자보)에 쓴 적이 있다. 다들 귀담아 듣질 않고 오로지 <조선일보>만 야비하다, 치졸하다, 친일 등으로 지적을 했다. 그런 분야는 <중앙일보>에 비하면 매우 좁은 부분이다.
<조선일보>를 지금 두둔하고 있는 게 아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당시 이건희 회장은 <중앙일보> 측에‘1등을 하려 하지마라. 2등 3등으로 물러나 있어라’ 앞장서 정치몰매를 맞으면 삼성사업에 도움이 절대 안 된다는 거였다. 이런 설명을 당시 제일기획 부장으로부터 직접 들었다. 기자가 아닐 때였다. 제일기획에 근무하고 있을 때 이병철 회장이 돌아가셨다. 삼성본관에 마련된 분향소에 전 직원이 문상을 했는데 그때 들은 말이다. 이병철 회장께서 돌아가시면서‘노태우 후보에게 50%, 김영삼 후보에게 30%, 김대중 후보에게 20%’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때가 87년 대선 때였다. 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화제를 바꿔 본론으로 들어가 1905년 을사늑약이 있을 당시를 무대로 한 역사소설 <불멸의 제국> 출판에 대해 여쭈었다.
“요직을 두루두루 거쳤던 민영환이 부인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여주로 떠났는데 인력거꾼인 하인과 동행을 한다. 하인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운전기사이다. 한성에서 여주까지 인력거로 왕복 보름 정도의 거리이다. 동행이라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다. 동행이라고 말할 수 없다. 누가 자기 운전기사와 다녀온 출장을 동행이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을사늑약도 체결이라고 하면 안 된다. 체결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역사에서 체결이란 단어를 쓰면 안 되는 거다. 소설을 읽어보면 정확히 알 수 있다. 체결은 일본의 주장일 뿐이다. 일본의 주장을 그대로 믿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꽤 역사의식이 있는 기자들도 체결로 알고 있으니 한심하다.”
그에게 ‘하인이 인력거꾼이 민영환이 자결한 같은 날에 자살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인가를 물었다.
“민영환은 자결이고 하인은 자살이라고 하는 것은 듣기가 참 그렇다. 민영환은 동상에 기념비에, 후에 남긴 게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하인은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고, 내가 중학생 때 읽은 역사책에 한 줄, 정확히는 반줄이다. 자살했단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소설을 쓰기 전에도 어렵게 다시 확인했다. 그 하인이 인력거꾼이었단 사실도 어디선가 볼 수 있었다. 인력거꾼은 내가 소설로서 임의 설정한 것이다. 중학생이던 내가 하인의 자살을 읽고 ‘왜’라는 의문을 하게 됐고, 50년이 더 지나 그 의문을 소설형식으로 풀어보려고 했다.”
그는 민영환은 당시 최고의 영화를 누리던 민 씨 집안에서도 가장 잘 나가던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인력거꾼은 동학에서 많은 것을 알게 됐다고도 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탄압한 장본이기도 하다. 그 후 10년이 지나면서 달라져가는 민영환. 이에 초점을 맞춰 역사를 다시 읽어보게 됐다. 분명 변하고 있었고 끝내 자살로써 마지막 저항을 한다. 변하게 한 건 무얼까. 두 번의 외국사찰의 기회가 그 주 원인이 될 것이다. 그 내용이 <불멸의 제국>에 역사적 근거자료로 담겨진다. 그래도 난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하인은 왜? 우선 하인이 바뀌어가는 장면들이 있다. 동학에서 배운다. ‘시천주’, ‘사인여천’으로 깨닫게 된다. 조선 500년 동안 성리학으로 세뇌된, 태어남에서부터 차별이 있다는 것, 누군 양반으로, 누군 상놈으로 태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당연히 알던 시대에 누구나 같은 하늘님을 모실 수 있고 사람을 하늘과 같이 섬기라 하니, 엄두도 못 내던 희망이란 걸 품게 됐다.
너무나도 당연한 것인데도 그 당시엔 이건 혁명이었다. 그러니 최제우나 최시형 모두 지금으로 말하면 보안법, 국기혼란선동죄로 뒤집어 씌워 죽여야 했다. 당시 집권세력에 의해서 말이다. 백성들은 동학으로 알게 된 깨우침을 1894년 동학농민들의 희생 이후 11년 뒤 또 이를 이어간다. 나라가 곧 일본에 넘어가게 될 시국에도 기생이나 꿰차고 일본 술을 마시며, 침묵하거나 일본앞잡이 또는 앞잡이의 그 앞잡이로 ‘우리 일본’하며 보신하려는 세력들이 득세를 한다. 이를 이용하는 자가 바로 이토 히로부미였다.”
100년 전의 지난 역사인데, 요즘 듣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저 되돌아보고 후회나 하는 그런 역사, 아님 웃거나 울거나 옛 이야기의 조롱희롱같은 드라마가 아니다.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린 역사가 돼서는 안 된다. 아무리 픽션인, 꾸민 이야기인 소설이라 해도 말이다. 소설을 통해 현재를 떠올리게 하고 싶었다. 떠올리면 지금을 과거의 역사로 남겨두게 하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2016년 촛불이었다. 그런데 3년이 지나도 또 과거의 그런 유령이 나타나 역사를 과거로 돌려놓으려고 한다. 100여 년 전 순전히 지 몸 하나, 지 집안 하나만을 위해 나라를 다 팔아먹은 자들. 그들이 지금도 남아 있는 정도가 아니라 건재하고 국민 백성을 지 멋대로 휘두르고 있다. 또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서야 하느냐 하는 한탄의 소리가 들린다. 믿었던 자들이 등을 돌리고 칼을 오히려 옛 동지에게 향하고 실제로 찔러대고 죽이고 있다. 전봉준 어른이 하신 말씀, 죽지 않는 백성정신은 늘 정치의 희생일 뿐인 게 너무나 안타까웠다.”
대학에선 경제학을 전공했고 제일기획에서 상업사진가, <국민일보>, <중앙일보>에선 사진기자를 했다. 어쩜 글과는 거리가 먼 듯해 보이는데 어떻게 역사소설을 쓰게 됐는지가 궁금했다. 그리고 그동안 책을 많이 출판했는데 소설은 처음인지 물었다.
“내가 알기론 소설가 황석영이나 돌아가신 최인호 이런 분들은 고등학생 때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이렇게 고등학생도 소설가가 되는데, 과거 <한겨레> 문학전문기자 왈 ‘왜 사진기자가 대자보를 쓰고 <중앙일보>를 나왔느냐. 취재기자도 아닌데’ 다른 신문도 아닌 <한겨레>가 기자가 그랬다. 나는 바로 이를 까대는 글을 썼지만 내가 쓴 신랄한 글을 누가 좋아하고 누가 또 장난치고 갖고 놀았을까. 지금 그런 자들이 많다. 딴 데로 붙어먹고 사는 자들 말이다. 그들에겐 애시당초 변절이란 게 뇌 안에 없었다. 필요만 있었을 뿐이다. 필요에 따라 부침하는 자들,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님이 일갈한 부역자는 친일파들만이 아니다. 지가 갖고 있는 권력이나 지위나 학력, 지력, 권세를 지 뱃속과 지 집안 식구들 잇속에만 자신의 필요에 맞춰 사는 자들, 친일파들, 부역자들이 그랬듯이 그들에게 나라나 민족이 있을 리 없다.
부역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빌어먹고 사는 자들에 의해 나라가 완전 박살나고 있다. 국민의 수준은 절대 그들과 같지 않다. 백성정신은 순수하다. 100여 년 전의 친일·친러 부역자들, 지금의 친일·친미부역자들의 시발이 소설 <불멸의 제국>을 나오게 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가장 존경한다는 그의 스승, 100년이 더 지난 지금 일본의 아베가 역시 가장 존경해마지 않는다는 그 스승. 하기시의 <송하촌숙>의 요시다 쇼인. 야스쿠니 신사에 제1신위로 모신 일, 제자인 이토가 수상이 되자 제일 먼저 한 일이다. 이를 흉내 내는 자들이 일본만이 있는 것 아니다.”
그는 책을 소형 출판사에서 출판하고 난 후, 대형 출판계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대형출판사에서 서평전문가 또는 서평의뢰인 등이 쓴 글들도 문제가 있다. 가짜 뉴스가 정치 분야만이 아니다. 그러니 돈 많이 대주거나 신문사에 광고 내는 출판사의 책들을 좋게 써줄 수밖에 없다. 작은 출판사에서 더 좋은 책이 훨씬 많이 나오는데 다 장악된 돈에 의해 다 가려지는 것이다.”
그는 끝으로 많은 분들이 이 소설을 제대로 읽었으면 한다고 했다. 민영환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최고 세도가 민영환을 바꾸게 한 힘이 누구이며 무엇인가를 읽어달라고 했다.
저자 오동명은 195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제일기획, <국민일보>, <중앙일보> 사진기자로 근무했다. 한국기자상(출판부문, 1998년), 민주언론시민언론상(특별상, 1999년) 충남대와 전북대에서 저널리즘 강의를 했다. 현재 전북 남원에서 전원생활을 하며 소설집필과 언론개혁을 모색하고 있다.
저서로 <사진으로 세상읽기>, <부모로 산다는 것>, <자전거 텐트 싣고 규슈 한바퀴>, <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 사진집 <사랑의 승자>, <오동명의 보도사진 강의>,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