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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의 탄생과 근대 아동노동의 문학적 형상화
[진단] 어린이운동의 혁신, 문학적 대응은 여전한 시대적 과제
 
정문순   기사입력  2019/06/26 [14:10]

한국은 세계 최초로 어린이날을 만든 나라라고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지만 그 어린이날이 태생에서부터 사회주의 운동과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린이날이 처음부터 지금의 55일인 것은 아니었다. 처음 어린이날이 선포된 1923년은 51일을 어린이날로 삼았다. 세계노동절인 메이데이와 포개지는 날이었다. 어린이날은 곧 아동의 메이데이였다. 어린이날을 제정한 방정환, 김기전 선생 등은 천도교도였지만 어린이날은 사회주의의 위력이 세계를 휩쓸던 1920년대 세계사적 영향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어린이날이 아동의 메이데이인 것은 당시 어린이들의 상당수가 피압박 근로계급 중 최말단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아동노동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고 보수는커녕 숙식도 제대로 공급하지 않고 부려도 되던 시대였다. 사용자가 양육의 이름으로 무상의 착취를 가해도 제재를 받지 않는 시대였다. 192351, 경성(서울) 시내에는 어린이날 선언을 알리는 유인물이 뿌려졌다. 이 글에는 어린이를 독립적인 인격체로 보지 않는 재래의 윤리적 규범과 노동착취에 대한 성토가 담겨졌다.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들에 대한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하게 하라.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14세 이하의 그들에 대한 무상 또는 유상 노동을 폐하게 하라.

어린이 그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한 각양의 가정 또는 사회적 시설을 허하게 하라.”

 

어린이날을 제정한 선각자들에게는 아동에 대한 경제적, 윤리적 압박이 근대 이후에 새로 나타나거나 증폭한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끈질기게 이어온 고유의 악습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이런 시각은 아동에 대한 착취가 아동을 독립적 인격체로 인정하지 않는 재래의 윤리적, 경제적 압박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근대 세계에서 창출되거나 증폭되었으며 근대는 아동노동을 필수적으로 요구할 만큼 착취적이었다는 인식과는 거리를 둔다. 근대 이전에 아동이 인격적으로 존중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근대가 아동의 노동력을 조직적으로 요구함으로써 비참한 현실이 더욱 부각되었다는 점은 이 선언문에 담겨있지 않다.

  

그럼에도 이 선언문에는 어린이라는 한국어의 탄생과 더불어 시대를 훌쩍 앞서가는 혁신성이 담겨있다. 아동에 대해 무상은 물론이고 유상 노동도 폐하게 하라는 요구는 지금이야 당연할지라도 당대 사회의 아동 인권이나 빈곤 수준을 생각하면 가히 혁명적인 요구였다. 어린이날이 제정되던 즈음 조선의 어린이들이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 놓여있었는지는 이태준, 현덕, 백석 등의 소설과 시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모더니스트 이태준은 어릴 때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서 천덕꾸러기 대우를 받으며 고학으로 학업을 마친 성장기를 반영하여 여러 편의 어린이소설을 썼다. 1930년대 앞뒤로 발표된 이태준의 어린이소설들은 부모를 모두 잃고 사고무친의 천애고아가 되어 어른들에게 노동을 착취당하고 인간성을 유린당하는 아이들이 다수 등장한다. 그런 아이들은 자신을 고용한 어른들로부터 눈치 한 번만 잘못 채어도 피가 나도록 두들기고 저녁을 굶겨 재우는학대를 예사로 겪는다. 친척 집에서 핍박받다 쫓겨난 후 산에서 늑대에게 물려 죽는 정손·을손 남매. 부모를 잃고 자기 집을 차지한 사람들의 일꾼으로 전락한 채 매 맞고 욕먹는 것이 일상이 된 영남이. 학교도 못가고 객줏집에서 새벽까지 호객과 손님 뒤치다꺼리에 시달리는 열네 살 귀남이. 알몸뚱이나 다름없는 몰골로 뙤약볕 아래에서 호떡 한 조각으로 버티며 그림을 그리는 어린 미술가. 이런 이야기들은 당대 1930년대 초반 빈곤한 아동들이 놓였던 현실을 정확히 반영한 것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들을 바라보는 이태준의 시선은 아동 노동을 비참하게 바라보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필시 양육자도 없이 한여름날 옷도 제대로 꿰입지 못하고 땡볕 아래 앉아 그림 그리는 데 몰두하는 소년 화가는 그림을 팔아 호구지책을 마련해야 하는 존재로 그려지지 않는다.

 

이마와 목에 맺힌 구슬땀은 할딱할딱 숨을 쉴 때마다 한 방울씩 두 방울씩 흘러내리고, 쥐가 잔채 채려 먹은 자리처럼 아롱아롱한 콧잔등도 숨쉴 때마다 발룩발룩거리고 있었습니다.”

  

의성어, 의태어의 연이은 등장으로 경쾌한 리듬감마저 느껴지는 이 문장은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소년 화가의 외양을 신나듯묘사하고 있다. 이 문장이 강조하는 것은 노동하는 아이의 비참함이 아니라 어려운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그림 그리는 일에 전념하는 화가로서 아이의 열성이다. 아이의 그림은 노동으로서 최소한의 대가성조차 갖지 못했다. 지나가는 어른인 가 아이로부터 그림 한 장을 구입하였지만 그 어린 화가는 연필을 깎을 수 있게 칼을 빌려달라고 한 게 원하는 대가의 전부였다. 어린 화가에게 자신의 작품은 대가가 주어지거나 거래될 수 없을 정도로 숭고하고 고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게 아이는 때묻은 몸뚱어리와 어룽진 얼굴에서도 그의 눈망울만은 하늘에 샛별처럼 고왔더랬. ‘는 아이가 엄마 그리워 흘린 눈물이 아이 얼굴을 저녁마다 씻겨 주었기 때문이라고 마음대로 단정한다. 이처럼 는 부모가 없을 아이에 대해 생계수단이 무언지는 전혀 없고 슬픔마저 미적으로 승화한 존재로 그린다.

  

어린 화가처럼 현실의 고통에 초연하거나 어려움을 당당히 헤쳐 나가는 아동들은 <쓸쓸한 밤길>에서 고아가 된 후 자기 집을 빼앗은 어른들에게 머슴으로 시달린 영남이가 아무것도 없는 빈손으로 당당히 집을 나서는 데서도 드러난다. 적수공권의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가는 일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이 소설의 관심사가 아니다. 남의집살이 하다 추석에 쫓겨난 오누이가 산속 늑대들에게 희생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슬픈 명일 추석>은 비현실적인 결말 때문에 아동노동의 처참함이 아니라 삶 자체의 허무와 비애를 느끼게 한다.

  

아동노동에 대한 인식조차 옅은 이태준에 비해 근대 아동소설의 대표작가 현덕은 아동노동의 참상을 여러 작품에서 다루었다. 그의 아동소설에서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취업하거나 학교에서 사환으로 일하며 월사금을 해결하는 아이가 등장한다. <잃었던 우정>, <군밤장수>에서 고등여학교 학생과 보통학교 졸업하고 백화점 점원으로 일하는 동무의 화해를 위해 친척 의사가 돕고, 상급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군밤장수를 하는 동무를 자신의 회사에 입사시켜주는 등 어른의 도움으로 아동노동의 비참함은 극복된다.

  

고구마에서 교장선생님 댁 일을 도와줌으로써 받는 보수로 월사금을 내는 수만이가 남의 눈을 피해 먹는 밥을 농업실습용으로 심은 고구마를 훔친 것으로 오해하는 동무들의 행동은 노동하는 또래 동무에 대한 멸시에서 비롯된다. 수만이가 호주머니에 넣고 다닌 것이 훔친 고구마가 아니라 어머니가 남의 집 일을 해주고 얻어온 딱딱하게 눌은 밥 한 덩이인 것이 밝혀지자, 수만을 핍박한 아이들이 부끄러워하고 수만에게 사과하는 것으로 작가는 갈등 구도를 마무리 짓는다. 수만이 호주머니에 감춘 것이 훔친 고구마일 수도 있다는 짐작을 불러일으키며 처음에 수만이를 옹호하던 기수도 아이들 편에 기울어지면서 서사적 긴장을 높이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이야기 구성이 훌륭하다. 그러나 아이들이 수만을 오해한 것이 밝혀지자 어른스러운 기수가 나서서 용서해라라는 말로 점잖게 사죄하는 것으로 소설이 마무리됨으로써 가난, 멸시, 모멸, 아동노동 등의 문제 해결은 매우 쉬운 것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아이들이 수만을 오해하는 근본적 원인은 집안이 궁핍하여 노동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는 측면에서 수만의 상처는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또래 동무들 사이에서는 얼마든지 오해가 풀릴 수 있다는 시각을 드러내는 것은 문제에 대한 접근이 빈약할 뿐이다.

 

 

▲ 방정환이태준송영 외, [한국근대동화선집1 야구빵 장수]와 현덕 [나비를 잡는 아버지] 등 아동문학 표지     © 창비

 

 

한편 <하늘은 맑건만>에서는 뜻하지 않게 어른의 돈을 훔친 자신 때문에 심부름하는 여자 아이가 엉뚱하게 도둑으로 몰려 쫓겨나 우는 것을 목격하자 양심선언을 하게 된 문기라는 아이의 이야기에서, 누명을 쓰고 매 맞고 쫓겨난 어린 노동자는 문기의 양심을 일깨우는 구실에 그칠 뿐이다. 이와 같이, 노동하는 아동에 대한 이태준과 현덕의 접근은 대체로 피상성을 면치 못한다. 어린이날이 제정된 동시대를 호흡했으면서도 아동노동에 대한 인식조차 희박한 이태준에 비하면 현덕의 시각은 아동노동의 비참함을 그나마 인지하고는 있지만 표피적인 접근에 그치고 있다.

  

이태준과 현덕의 접근에 비하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린다는송도의 백삼을 깎는 어린 품팔이가 병들어 죽어가는 현동염의 <백삼포 여공>, 채석장에서 돌 깨는 작업에 투입된 아이들이 재해로 죽어가는 어른 노동자들을 보며 사회 모순을 타파할 결의를 다지는 홍구의 <채석장> <신소년> 잡지에 실린 사회주의 계열의 소설들은, 아동노동의 비참함을 전면에서 서사의 중심으로 다루고 있는 점에서 돋보인다. 그러나 이 소설들이 다루는 아동들은 나이만 어릴 뿐 어른을 축소해놓은 듯한 양상을 보임으로써 사회고발적 성격이 짙은 소설들이 흔히 갖기 쉬운 조급한 관념성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비하면 백석의 시 <팔원(八院) -서행 시초(西行詩抄) 3>은 아동노동의 처참함을 매우 차분하고 격조 높게 다루고 있는 작품으로 꼽을 만하다.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 승합자동차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 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자성(慈城)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은 예서 삼백오십리 묘향산 백오십리

묘향산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쌔하얗게 얼은 자동차 유리창 밖에

내지인(內地人) 주재소장(駐在所長)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임을 낸다

계집 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 아이는 몇해고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나이어린 여자아이가 고급 옷을 입고 승합자동차에 오르는 사연을 담담히 풀어내는 이야기 흐름은 여자아이의 슬픔과 고통이 짙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일본인 경찰서장이 몇 해 동안 고아 출신 여자아이를 아이보개로 부리다가 승합택시에 태워 멀리 사는 삼촌 집에 돌려보낸다는 서사를 배경으로 한 이 시에서, 어른인 화자는 아이의 고통을 대신 말해주겠다고 나서지 않는다. 아이의 슬픔은 텅 빈 승합차를 가득 메우는 아이 자신의 울음으로 부각된다. 화자는 멀찍이 물러나 아이의 몸을 통해 아이가 감당했을 노동을 유추하거나 텅 비인 차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이 되어 눈물로서 아이의 울음에 응대하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제한할 뿐이다. 어른 화자는 아이의 참담했던 노동을 함부로짐작하며 안타까워하지만, 정작 아이의 고통은 그런 노동조차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어 멀리 사는 친척 집에 보내지는 기약 없는 운명을 마주한 데 있다. 삼촌이 산다는 묘향산 어디메” “삼백오십 리거리는 자신의 앞길이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아이의 까마득한 절망을 수치화한 것이다. 화자와 아이의 상반된 태도가 빚어내는 불협화음은 아동노동의 비극을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데 기여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이에 비하면, 이 시와 배경이 매우 비슷한 <촌에서 온 아이>에서 머슴살이하러 온 남자아이가 사용자의 갑질을 겪다가 우는 것에서 비참함이나 슬픔이 아니라 하눌이 사랑하는 시인(詩人)이나 농사꾼이 될자질을 읽어내는 것은 그 초월적인 발상에서도 무리가 있거니와 성차별적인 접근이 시도되는 점에서도 실망스럽다. <팔원>에서 비참한 아동노동조차 중단하게 된 여자아이의 절망이라는 중층적 접근과 비교해도 무척 단순한 접근인 것이다.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누명을 쓰고 쫓겨나거나 쓸모가 없어져서 내보내짐으로써 노동을 중단해야 하는 상황만큼 노동의 비참함을 입증하는 것도 없다. 아동노동자는 이 부분에서 가장 취약한 존재일 것이다. 백석은 이 점을 문학적으로 구현한 점에서 우뚝하고, 현덕의 <하늘을 맑건만>은 억울하게 쫓겨난 심부름꾼 여자 아이의 비극을 적은 비중으로 처리하긴 했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작가의 무심한 태도를 통해 아동노동이 인격적으로 처참하게 무시되는 상황을 역설적으로 그렸다는 생각도 갖게 만든다.  

 

그러나 이를 제외한 현덕과 백석의 다른 작품들, 이태준, 사회주의 계열의 몇몇 아동소설들의 경우 당대 아동노동의 비참함을 극명히 유추해낼 수 있는 사정과는 별개로 문학적 성취나 아동노동에 대한 인식적 측면에서는 불철저하고 미흡한 점이 많다. 1920년대 어린이 운동의 선구적인 성과를 당대 문학이 수용했다고 보기에는 미흡한 측면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근대의 어린이운동 선구자들이 제기한 시대적 과제에 대한 문학적 응답은, 강제노동의 처지는 면했을지라도 강압적인 입시에 찌드는 강제학습을 강요당하거나 학생인권조례 제정이 난항을 겪을 정도로 학생인권이 열악한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할지 모른다.

  

<참고> 

이태준, 몰라쟁이 엄마, 사계절

방정환이태준송영 외, 한국근대동화선집1 야구빵 장수, 창비

나비를 잡는 아버지, 현덕, 창비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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